[D-609] 해외살이 행동강령

외딴섬으로 살아남기

by 가랑비가람


일이 많다.

어느 정도로 많냐 하면요. 지금은 현지 시각 일요일 오후 10시 45분. 2시부터 붙잡고 있던 일들이 겨우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다. 다 끝난 게 아니고 당장 위급한 상태에서 벗어날 만큼만. 하지만, 그렇다. 일요일이다. 주말이다. 무급으로 매주 주말마다 컴퓨터 붙잡고 노동한지도 어언 한 달이 다 되어 간다는 뜻이란 말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적응력이 좋다. 해외살이 경험도 있고, 무인도에 던져놔도 알아서 잘 살 놈이라는 말을 내내 듣고 살았다. 도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기에 일단 던지고 본다. 성공하면 좋고, 실패하면 더 좋다. ‘실패’했기 때문에 더 기억에 뚜렷하게 남는 배움을 얻을 수 있다. 그리하여 동년배에 비해 특이한 경험이 많고, 모든 경험이 가치있다 여기기에 소소한 에피소드를 큰 깨달음으로 포장해 입을 털 수 있다. 무경력에 변변찮은 학위 증서로 이 먼 타국에 올 수 있었던 이유이다.


그러니까, 면접 볼 당시 면접관 여러분이 가장 우려하던 부분은 내게 뭣도 아니었던 거다. 일이… 일이 이렇게 많은 게 문제였던 거지. 주말이면 온 데 사방을 돌아다니며 지역 방방곡곡을 현지인처럼 쑤시고 돌아다닐 체력과 모험심이 있는 내가,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야지 이히히~! 하면서 현지인들에게 맛집이며 관광지 리스트를 싹 뽑은 내가, ‘여기 근처에 오면 알려줘 기깔나게 관광시켜 줄게.’ 하며 현지인 분들이 교류의 문을 활짝 열고 있는 지금, 토요일 일요일 내내 일을 껴안고 모니터만 타닥거리고 있다는 게 가장 기운 빠지는 부분인 것이지…


말이 안 통하는 거? 상관없다. 일단 영어로 고! 안 되면 번역기 토독토독 후 화면을 샥! 대답할 때 다시 번역기를 쓱! 그러면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세 가지 행동강령.


첫 번째. ‘뇌가 해맑은 외국인’ 컨셉으로 살기
-> 해외살이는 '해맑고 긍정적인 태도'가 상호작용에서 크게 작용한다. 일상에서 좋은 점, 신나는 점, 긍정적인 이야기를 자주 말해라. 그리고 '이국적인 문화/새로운 환경을 접해 신난 외국인' 컨셉을 밀고 나가라. '내 나라 좋아하는 외국인'을 싫어하는 내국인은 별로 없다. 물론, 상대에 대한 예의와 선을 지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두 번째. 인사할 때는 무조건 눈을 맞추고 웃으며 “땡큐!” 혹은 “스파시바/라크멧!”.
-> 나만 긴장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아니다. 상대도 내가 외국인인 걸 알아 긴장하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손짓발짓답답한짓 다 했어도 마지막에 눈 맞추고 웃으며 고맙다고 하면 상대도 웃으면서 잘 가라고 해준다. 명심해라. ‘뇌가 해맑은 외국인’ 컨셉을 밀고 나가야 한다.
세 번째. 모르면 어물쩍 대답하지 말고 번역기를 치든 영어를 하든 해서 정확히 하기.
->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회피하고 넘어가려다 대화가 꼬이는 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문제를 심각하게 만들고 서로 기분만 상한다. 외노자인 그대여,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해결하는 것도 온전히 당신 몫이다. 스스로에게 깐깐하고 그만큼 당당하라.






내가 거주 중인 도시는 주변 국가들 혹은 유학차 온 인도인이 많고 한중일 사람들은 굉장히 드물다. 그리고 이 도시 특징인지 이 나라 특징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한중일을 좋아하는 것 같다.


애니나 드라마 등 매체를 통해 호감을 쌓은 경우도 있고, 근처에 있으면서 역사적으로 원한을 가질 일이 없는 선진국(이런 표현을 쓰는 걸 지양하는 편이지만 어떤 우상화된 이미지가 있는 걸 느낀다..) 사람이 큰 도시도 아닌 이곳에 관광을 와 있다- 하는 부분에서 신기한 듯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도 한다. 쓰고 보니 이건 약간 동물원 원숭이가 신기해서 구경하는 느낌에 가까울지도. 직장 동료분과 한국어로 대화하며 길거리를 걷다 보면 가끔 ‘한국 친구를 사귀고 싶다’며 치대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오하요고자이마스”하며 말을 거는 남학생들을 보기도 한다.

하지만 위해를 가하려 말을 거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끼리 외국인을 비웃고 낄낄거리기 위해 말을 붙이는 것도 아니다. 그냥 진짜, 뭐랄까. ‘내게 너무 익숙하고 좋아하지만 내 주변에서 볼 일 없던 것이 눈앞에 있어 신기하다’라는 느낌이랄까? 그러다 보니 철없는 어린 학생들이 툭툭 말을 붙이는 것이지. 몇몇 선임분들은 이에 굉장히 분노하셨지만, 뭐 나는 악의가 없으니 그러려니 한다.



여기서 중국은 뭔가 ‘신비’라는 느낌. 이 나라 사람들은 기본 카자흐어와 러시아어 두 언어를 학교에서 배워야 하기에 한자를 읽거나 쓸 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쉬운 한자라도 휘리릭 쓰면 눈을 빛내며 무슨 뜻이냐 물을 정도. 하지만 중국 소설이며 물건이 쉽게 들어오다 보니 친숙함이 공존한다. 한국에서는 구매대행을 통해 어렵게 사야 하는 선협 소설이 서고 중앙에 아무렇지 않게 진열된 걸 보았을 때의 기분이란. 새삼 한국이 대륙이되 대륙과 끊어진 섬이구나 느꼈더랬지.


일본은 ‘애니메이션’. 나루토, 귀멸의 칼날, 주술회전, 진격의 거인 등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대문짝만하게 그려진 노트며 가방, 학용품이 굉장히 흔하고 일상적이며 특히 학생들이 이에 환호하는 듯 보인다. 그만큼 일본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학생들의 열망이 크지만 수요가 있어도 공급은 없는 게 현 상황인 것 같다. "일본어를 배우고 싶어도 학원이 없어요." 내게 추가 개인 과외를 요청하며 한자를 알려달라 말한 몇 학생들이 한 말이다. 책을 찾아보려 해도 영어-한자 번역밖에 없고, 인강 같은 건 아예 생각을 못 해본 것 같다. 사교육 시장이 거대한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상황이려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배우려 하면 유튜브며 ai어플 따위로 충분히 배울 수 있을텐데 굳이 대면교육만을 답이라 생각하는 게 좀 특이하다면 특이했달까. 러-일어 강의라... 생각해보니 극악과 극악의 조합이긴 하다. 없을만도 하군.


한국은. 음. ‘화장품과 전자제품(?)’. 현대의 자동차, 삼성의 갤럭시나 가전제품 등 ‘비싸고 품질이 보증된 물건을 만드는 나라’라는 이미지가 있는 것 같다. 여기에 더해 인구절벽으로 대학들이 외국인 유학생을 받으며 상대적으로 문이 열리다 보니 ‘교육’을 열망하는 고등학생들이 한국 대학을 마냥 꿈꾼다.


기회의 땅? 과연 그럴까. 대학을 노린다는 학생치고 한국 대학이 장학금을 쥐여주며 데려올 만큼 뛰어나거나 한국 고삼들처럼 공부와 시험에 미친 듯이 집중하는 학생은 본 적이 없다.


한국 대학은 돈장사야. 하하하. 네가 천재거나 미친 듯이 성실하지 않은 이상 네 집안에 돈을 요구하겠지. 돈이 있어 간다 해도 ‘기본’으로 생각하는 학습량이나 태도가 너무 다른데. 과연 적응할 수 있을까. 하하.


여러모로 할 말은 많지만 어쩌면 너무나도 쉬이 적응할 수 있을지 모를 누군가의 미래를 내가 판단하는 것도 만용인지라.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저 입 다물고, 필요한 정보가 있다면 함께 모으고 제공하며 묵묵히 내 할 일을 할 따름이다. 알아보니 최근 옆 나라에 한국과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주요 사업으로 내건 대학도 등장했고, 회식 자리에서 카자흐 내 대학에서 교환 프로그램으로 몇 년 전 한국에 가 대학을 졸업한 현 직장인을 만나기도 했고, 근 한 달간 근처 큰 대학에 한국 대학교 여럿이 국제 교류 일환으로 방문하는 등 뭔가 한국과 이 도시 간 연결이 점점 긴밀해지고 있는 건 정세요 흐름인 것 같다.





사실 쓸 주제는 많다.

예를 들면 이곳의 음식. 난 이곳에 온 첫 주부터 한식을 떠나보냈다. 주거 환경 정리와 생필품 구매, 직장 적응을 겸하여 이삼일 한국에서 챙겨 온 비상식량을 꺼내 먹다 완전히 이곳 음식으로 갈아탔다. 이곳의 빵과 디저트는 정말이지 기가 막히게 맛있다. 오늘만 해도 거주지에 정전이 나 와이파이가 끊긴 걸 빌미로 십여 분 거리에 있는 뷔페에서 빵 몇 점을 샀는데, 이게 정말 맛있어서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졌다. 다시 일을 할 힘을 얻을 수 있었달까. 기분 전환이 되었달까… 아무튼 한국에서 먹는 밀과 뭔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밀 품질 자체가 좋은 것 같다. 가장 기본적인 빵인데도 쫄깃하고 실한 맛이 난다. 내일도 먹어야지.


또 예를 들면 일상적인 부분에서 느껴지는 차이.

위에서 잠깐 언급한 정전에 대해 풀어보자면, 카자흐스탄은 구소련 공산주의 영향인지 기본적으로 도로가 직선으로 쫙쫙 나뉘어 있다. 도시 아래 전선이나 난방선도 그 지구별로 나뉘어 있는지, 집이나 직장에 정전이 나도 한두 블록 걸어가면 다른 곳들은 멀쩡히 돌아가는 편이다. 물론 정전이 되더라도 대학 기관 등 주요 시설은 더 빨리 복구가 되는 것 같더라. 이래저래 달에 두세 번 정전은 일상적인 것 같다. 놀랄 것도 없다. 이 밖에도 중앙정부 지시로 지역마다 작동을 시작하는 라디에이터(여기서는 배터리라고 부르더라.)라거나, 라디에이터 작동 전 대대적으로 시행하는 지역 배수관 공사 현장이라거나(온수로 돌아가기 때문에 공사가 길어져 난방 시작 후 배수관을 열면 땅에서 연기가 펄펄 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재 살고 있는 노후한 집 관련 이슈들이라거나(1960년대에 지었다고 한다. 집주인 말하길, “대략 한국전쟁 즈음이지?”. 이래저래 계속 문제가 생겨 집주인이 자주 들락날락하는 중이다.)


또 예를 들자면 문화에 대한 것.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까. 내가 하고 있는 일은 기본적으로 카자흐스탄에서 곧 한국으로 가게 될 사람들 혹은 한국인 대상 업무를 진행할 예정인 사람들을 위한 언어교육, 문화 교육 및 한국 관련 행사 준비와 실행. 여기에 내년부터는 역사 교육이 추가될 예정이다. 아무튼, 교육을 진행하다 보면 정말 고객들의 배경 다양성에 놀라게 된다. 한국 대학에 가고 싶다는 학생들의 삐악거림에는 조용히 웃으며 뒤로 할 말을 삼켰다. 몇몇 직장인분들이 ‘직장에 취미로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 요청하고 이를 허락받아’ 평일 오전반에서 수강 중이란 걸 알았을 때는 잠시 내 상식으로 이해가 가질 않아 버퍼링이 걸렸다. 70~80대 고려인 분들이 아래 세대들과 완전히 동떨어진 그들만의 ‘언어’를 갖고 있으며, 자신은 그게 한국어인 줄 알았다는 손녀(30대)의 말을 들었을 땐 ‘이들의 말과 역사를 더 늦기 전에 모아 사료로 기록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듣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진심으로 상대에 흥미를 갖고 이야기를 들으며, 관계를 깊고 넓게 하는 것은 내 특성이요 강점이다.

이에 따른 부작용으로… 남들보다 하는 일도 많고, 같은 일을 해도 개인 한 명 한 명을 기록하고 신경 쓰다 보니 시간이 배로 걸려 ‘노세 노세 주말에 노세’ 본투비 한량 정신을 십분지 일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지만. 뭐 어쩌겠는가. 내가 자처한 일이고. 나름 의미를 느끼고 있으니. 매일 노트북을 부여잡고 허허로이 웃을 밖에.


글을 쓰다 보니 벌써 1시다. 발 닦고 자련다.

이번 주는 정말 시간이 없어 퇴고도 못 하겠다. 나중에 수정하든가 해야지.


내일도 맛있는 빵을 먹을 것이다.

부럽죠?



끗.




<후기>


이번주 사진.

주차금지 칸막이에 쓰인 낙서를 보고 피식 웃었다.

이런 장난은 만국 공통이구나.




"낙서금지"

"담배피지 마시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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