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581]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순수하지 않은 헌신이라도

by 가랑비가람

학기 말은 정말 끝내주게 바쁘구나.

이걸 학교 다 졸업한 이 나이에 알게 될 줄 몰랐지.


사람 체력이란게 무한하지 않고, 무리해서 끌어다 쓰면 딱 그만큼 총량이 줄어드는 것 같다. 일이 많고 문제가 끊이질 않던 이사 초반에는 어쩔 수 없이 주말 내내 일거리를 싸 들고 와 컴퓨터 앞에서 벗어나질 못했는데. 한 학기 끝날 때가 오니 더 이상 일주일 내내 일을 벌일 기력이 없어지더라. 괜히 미뤄두던 장바구니 책도 구매해 보고… 다사다난한 첫 학기를 그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돌아봐 아쉬운 점이 있다면 생생한 기억을 남기지 못한 것.

기록이란 낯선 이의 시선으로 봤을 때에만 느낄 수 있는 그 특유의 날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난 글렀다. 골든 타임을 놓쳤다.

한참 모든 게 새롭고 신비할 때 매일매일 짧은 글이라도 남겨야 했는데. 일을 벌이고 수습하길 반복하며 하루하루를 놓아주다 벌써 3달이 흘렀다. 웬만한 것들엔 눈이 익숙해졌다. 도파민이 빠릿하게 돌법한 새로움은 일상에서 찾기 어렵게 됐다. 아쉽게도.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다.

이곳에 와 새로운 일, 새로운 나라, 새로운 환경에 처음 발 디뎠을 적. 선임분께서 내게 해 주신 말이 있다. “일단 3년 차까지는 할 수 있는 모든 걸 시도해 보라.”,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나 스스로 알아야 한다.” 이 두 조언을 이정표로 첫 학기를 버텼다.


박사 학위를 취득할 정도로 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사람도 ‘정석’을 따라할 순 없었다. 왁자지껄하고 활기 넘치는 교실. 모두가 의욕 넘치는 환경. 만들면 좋지.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스타일에 맞지 않는다 확신한다면 과감히 모범을 포기하는 것 또한 하나의 성장이라고. 까마득한 선배님께서 허심탄회하게 해 주신 말에는 울림이 있었다. 그리고 새삼 깨달았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햇병아리고. 모든 것이 처음인 사회 초년생이고. 모르는 게 당연하니까. 그만큼 시도해 보아야 할 것이 많고, 시도에서 끝나지 않고 명확히 결과로 피드백하며 내가 가진 강점을 갈고닦아야 한다고.


내게 이 일을 함에 있어 강점이 있다면 영어가 된다는 것. 100%정확한 영어에 매달리지 않아 소통하는 수단으로서 영어를 쓸 수 있다는 것. 소통이 아주 불가능한 상황에 있는 분들과 달리 선택지가 있다는 것. 오해의 소지가 있을지언정 대화가 아주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 다양한 언어를 배운 경험이 있어 비교적 빠르게 그들의 모국어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 평등한 관계를 중요하게 여겨, 그들이 내 언어를 배우는 만큼 나도 마땅히 그들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부채감을 갖고 있다는 것.


대학에 다닐 적, 모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어떤 집단과 관계를 만들고 싶다면 네가 그들에게 이득이 될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한국으로 유학 온 한 중국인 학생이 한국어 말하기 연습을 하고 싶은데 한국 학생들과 섞이기 어렵다 고민을 토로했을 때, 교수님은 이렇게 답하셨다. ‘네 능력을 필요로 하는 곳에 가라.’ 한국어 말하기를 위해 네가 한국 학생들을 필요로 한다면 그건 오직 너에게만 이득이다. 그들은 너에게 얻어낼 것이 없다. 그러니 목표를 명확히 해라. 네가 가진 능력을 필요로 하는 곳에 가라. 그리하여 그 중국인 유학생은 학교의 중국어 전공 학생들을 찾아갔고, 상대와 중국어-한국어를 상호 교류하며 말하기를 연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돈이 많다면 돈으로 사람을 모으고, 재능이 있다면 재능으로 사람을 모아라. 관계는 냉정하다. 상대에게 얻어낼 게 있어야 한다. 그러니 상대의 ‘이득이 되어라’.


냉정하다고 생각하나?

적어도 나는 그 말을 굉장히 좋아한다.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새로운 집단,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면 그분의 말씀을 되새긴다. 다정한 불이익보다 냉정한 이득이 낫다. 그렇게 최저선을 잡고, 기왕이면 다정한 이득이 될 수 있게 노력하자.


그리고 또 한 가지.

순수한 헌신을 잊지 말자.


열정페이를 하자는 건 아니다. 내게 이득이 되지 않는다면 굳이 열심히 하지 않고 중간만 가자는 게 현명한 자세라고 하지만. 모르겠다. 순수하게 ‘남을 위해서’ 나의 다정을 끌어다 쓸 수 있는 사람은 그 자체로 빛나는 무언가가 있다. 상대로 하여금 그 사람에게 이끌리게 만든다. 그리하여 결국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환경을 스스로 개척한다.


인간은 생각보다 예민하고 민감한 촉이 있어서, 진심으로 나를 위하는 타인을 기민하게 눈치챈다. 어린 학생일수록 노골적으로 이끌린다.


그러니 나를 위해, 그를 위해

온전히 상대를 위해 보는 것이 좋다.


굳이 주말까지 그렇게 일을 해야 하냐며. 맡긴 일 외에는 굳이 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며 보다 못해 한마디 하신 선임분께.

그분의 생에서 내린 결론이 그러하다는 걸 이해한다. 내 시간만큼은 온전히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라면 그리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분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려 깊은 그대가 얼마나 속으로 생각하고 헤아리다 말을 꺼내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그대의 한마디가 감사하다.

하지만 그게 나는 아니라서.

사서 고생하고, 주말을 반납하고,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고. 맡은 바 없지만 네게 도움이 될까 고민하며 하나를 더 준비하는 것. 나는 그게 제법 즐겁다. 물론 체력과 시간이 허하는 한도 내에서.


다음 주면 성적 산출이 끝난다.

나의 첫 학생이 되어준 여러분. 모두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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