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과 회피가 만나는 지점
최근 우연한 기회로 TCI 검사를 다시 했다.
개인적으로 이전 한참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을 적에 검사를 했다 이모저모 도움을 받았던지라. '연말연초 사람들이 모이는 만남 자리에 이런 건 어떠실까요~' 하는 글을 보고 고향 친구들 생각도 나고 추억도 있고 해서 간만에 시도했다.
TCI 검사 자체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요즘 유명하잖아요. MBTI 후임자처럼. 심리검사에 관심 있는 분들은 다 한 번쯤 해보신다나.
사실 내 결과가 궁금했다기보다는. 직장 분위기에 영 적응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친구가 생각나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덥석 고르기엔 워낙 상품 종류가 많아, 남들이 좋다 하는 걸 홀라당 쥐어주기보다 내가 해보고 결과 레포트를 받아보고서 음 믿을만하군 싶으면 선물하는 게 나을듯해 일단 가장 기본에 충실해 보이는 걸 골랐다. 가격 지나치게 높은 걸 쳐내고 상술이 가득하거나 개인 얼굴이 덕지덕지 붙은 허영심 배출구들을 빼고서 그나마 구매율 높고 구성 괜찮은 걸 추라다 보니 이틀이 지났다.
검사는 10분 만에 끝났다.
그런데 결괏값이 영 이상했다. 명색이 tci 하면 선천적인 기질과 후천적인 성격이 있고, 기질은 그 경향이 변치 않는다 들었는데. 이번 결과는 놀랍게도 이전 검사와 기질 4가지 중 두 곳이 반대로 꺾여 있었다.
그렇다면 추측할 수 있는 것 하나. 절대 변치 않는 저 두 개는 앞으로도 변치 않을 본성이겠군.
추측 둘. 변화한 값은 '본디 그랬던 것' 인가 아니면 현재 환경에 따른 '일시적 변화'인가.
뭐. 여러모로 이전 검사와 이번 검사 간 환경 차이가 극심했던 건 짚고 넘어갈 부분이다.
집에서 나와 연 없는 외딴 도시에 혼자 나와 학위 공부와 알바, 자격증 준비를 병행하며 취준을 하던 때. 그리고 이래저래 운 좋게 취직하고 해외에 나와 일은 많지만 돈 걱정 없이 살고 있는 때. 걱정거리도 주변 환경도 천지 차이다.
변화 양상을 보면 나름 의문이 풀린다. 불안이 줄고 지속성이 늘었다. 냅다 대학을 자퇴하고 나와 학위 공부를 하며 취업 준비를 하던 시절엔 모든 게 모호했지. 그 대학은 일단 졸업만 하면 취직은 거진 확정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 2년 경험을 통해 확신한 바, 나는 그 직종과 가장 상극인 인간임을 알았고 그 길로 도망쳤다. 괜히 부모님께 부채를 더하고 싶지 않아 아득바득 상활비를 벌고 조기졸업을 위해 학점을 땄다. 신세 지는 게 싫어서 안정적인 서류 합격을 위해 온갖 자격증을 땄다. 노력했지만, 운이 따라주었다. 정말로.
그리하여 도달한 지금 이곳. 백수 기간이 길어지는 게 싫어 악착같이 달리다 목표에 다다랐으니. 나도 한 명 인간인지라 행운에 감사한 만큼 내가 한 노력에 의미를 더하고 나 스스로를 더 좋게 포장하려 하나 보다.
기실 이런 포장 경험이 하나 둘 쌓여 근거 있는 자신감이 된다지만. 세상 어떤 일을 홀로 온전히 이루어 낼 수 있겠어. 행여 만용을 부리지 않도록 꾸준히 성실하고, 노력을 놓지 않으려 급급해도 시간이 모자라다.
이 브런치북 시리즈의 큰 맥과 다소 동떨어진 이야기지만. 이런 글을 적는 이유는, 음. 글쎄. 결국 이곳은 해외살이 일상 모음이니까. 나를 먼 나라에 데려와 적응하고 살게 하는 요인이란 뭘까 되짚어 보기 위함이다.
나는 해외살이라는 것이 절대 로망이 될 수 없다 생각하는 편이다. 여행과 살이는 구분되어야 한다.
여행은 정해진 구역에서 예측 가능한 것들, 준비된 것들을 누리는 행위에 가깝다. 본인이 '자유 여행'이라 하여 모두의 행선지를 벗어나 내 발길 닿는 곳을 향한다 해도. 이는 결국 여행이라는 틀 안이다.
하지만 살이는 다르다. 산다는 건 더럽고 치사하고 답답하고 막막한 것들 사이 꾸준한 시도. 도전. 도전. 실패. 그리고 다시 시도. 외국인번호와 전화번호 등록하는 걸 시작으로 집, 월세, 가스, 전기, 수도, 은행 등 서류 늪에 흠뻑 빠져 '나라는 사람 이곳에 살러 왔소' 하는 신고를 겨우 끝냈다 싶으면 언어 문제, 주변 상권 파악, 식품 적응, 문화 적응, 업무 적응, 일 일 일 일 일 일. 그리고 이 사이사이 터지는 소소한 문제들과 한국 공무원들을 찬양하게 만드는 행정 이슈들. 그게 살이다.
까놓고 말해, 주변에 외국으로 살러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어디가 됐든 제발 혼자는 가지 말라 빌고 싶다. 외로움은 차치하고, 이사 초반 문제가 산발할 때 혼자 모든 걸 껴안고 있자면 사람이 정말 미쳐버린다. 답도 없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를 것들이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여기서 뭘 할까'는 부수적 문제고 일단 이 나라에 나라는 존재가 노동하러 왔소이다 하고 시작점을 찍는 자체가 힘들다. 노비를 해도 대감집 노비를 하라고, 국제 교류가 활발한 대학이나 해외 지부가 많은 다국적 기업은 이런 지원이 착착 되어있겠으나. 일단 내가 다니는 이 회사는 아니다. 초반에 생존기 찍다 죽어나가는 줄 알았다. 사실 아직도. 여전히. 문제는 계속 터지고 내 몸은 하나고 회사는 도움 없이 업무 요구만 주야장천 있어 과부하 상태다. 회피하자니 이걸 책임질 사람이 나 하나뿐이니 원흉도 나고 피해 볼 유일한 사람도 나라서 꾸역꾸역 맡은 바 일을 한다.
해외살이 시리즈 치고 관광 사진이 하나도 없는 이유? 왜겠습니까.... 여기 오고 한 번도 놀러 가질 못 했습니다....... 한 번도 주말 이틀 온전히 쉰 적이 없답니다......... 아 눈물 난다..
아무튼.
이래저래 몸도 머리도 고생 중인 나날입니다만. 후회하지 않는다. 적응에 시간이 걸릴 뿐 이 직업이 가진 특수성 자체는 나에게 굉장히 잘 맞는다 생각하기에.
뭐 이런저런 이유가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tci 검사와 연관 지어 설명해 보자면. 유전 기반으로 타고난다 보는 4가지 기질 중 내가 변하지 않은 두 가지. '자극 추구'와 '사회적 민감성' 때문이다.
나는 이제까지 tci 검사를 3차례 했는데, 세 번 모두 꾸준히 자극 추구가 높고 사회적 민감성이 낮았다. 반복적인 작업에 쉽게 질리고 꾸준히 새로운 자극을 필요로 하며, 살아가는 데 사람에게 크게 기대지 않는다는 뜻이다. 좀 더 자세히 풀어보자면. 상대에게 그닥 영향받지 않는다. 긍정적인 부분이든, 부정적인 부분이든.
이 일을 하며 만난 선임분들은 정말 다양한 방위로 존재감이 뚜렷했다. 세계 지부를 돌며 일하시는 만큼 각자 주관이 확고하고 개성이 명확했는데, 많은 그들을 묶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으니 바로 '탈 한국'이다.
배우자가 그 나라에 있어서. 여러 나라를 돌며 살아 보고 싶어서. 아름다운 자연을 누리고 싶어서. 월세가 싸서. 나를 아는 사람들 틈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나를 못 찾는 곳에 숨고 싶어서. 재고 평가하는 시선이 싫어서. 혹은 단순히 말하길, 그저 한국이 싫어서. 일은 수단이고 목적은 한국 탈출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개인적으로 놀랐던 부분은 그들의 성향이었는데, 놀랍게도 이들 다수가 지독한 회피형이었다.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 전엔 막연히 여러 지부를 돌아다니는 고연차 분들이라 함은 모험을 즐기신다거나, 안정된 삶에 싫증이 나셨다거나 그런 이유로 세상을 도시는 줄 알았다. 물론 그런 경우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전체로 따지자면 15% 정도? 혹은 그 미만? 의외로 지켜본 바 고연차와 저연차를 가르는 많은 요인은 '수용(회피)'이었다. 갈등이 싫으니 일단 수용하는 자세로 임하고, 갈등이 싫으니 서로 영역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한다. 시도한 바 잡음이 없었으니 회사는 그들을 꾸준히 해외로 돌린다. 그런 굴레로 연차가 쌓인 사람들이 대략.... 60~70% 정도다. 전반적으로 개인주의 문화가 팽배하고 같은 기수여도 각자 생존이다.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조각배들이 줄 하나로 겨우겨우 이어진 형상이랄까. 그마저도 줄을 끌어 상대에게 다가갈 것을 조심스러워하고 애초에 그럴 필요를 못 느끼는 상태에 가까워 보인다.
흠. 아니. 모르겠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 그렇게 느꼈을지도.
이 회사 분위기는 뭐랄까...... '괜한 짓 시도 말고 시키는 것만 따르면 중간은 간다.'는 느낌이다. 그러면서 매년 있는 우수직원 표창식 사례를 보면 발로 뛰고 나서는 이들을 본받으라 은근 떠미는 듯도 하지만. 절대다수는 현상 유지만 되면 오케이라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이도 개인 개인에 접촉해 사연을 들어 보니 "과연 그럴만하군!" 싶었지만.... 내부 사정이므로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아무튼. 요즘 그런 생각을 한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천변 풍경에 적응하는 기재는 지극히 무던하거나 지극히 예민하거나.
장점은 단점이요 단점도 장점이니
결국 중요한 것은
어찌 해석하여 어떻게 포장해 보일까.
정해진 답을 두고 그것이 바로 나일세 하는.
음
어라
딴 길로 샜는데
아무튼.
일이 지치고 힘들지만
새로운 것이 많고 다양한 사람들이 있어
나는 이 직업이 꽤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