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기술은 지극히 인간적인 기준으로 세계를 나눈다.
자동차.
이곳에 온 초반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보기 힘든 5층 높이 나무도, 소비에트의 유산으로 남은 쭉 뻗은 직선도로도, 도로를 뚫고 나온 가스관(온수관일까? 천연가스가 워낙 많은 나라이니. 아마 소비에트 시절 러시아로 자원을 옮기던 잔재가 아닐까 싶다)도. 모두 이국적이고 흥미롭지만 그중 이 나라의 개성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나는 자동차를 고르겠다.
이곳에는 정말 온갖 자동차가 모여 있다.
한국에서 한 시대를 점령하고 사라진 포니를 닮은 모델도, 한국에서 아이를 가진 부모가 한 번쯤 구매를 고민한다는 산타페도. 번쩍번쩍 새 차와. 당장 정비소에 맡겨야 할 듯 범퍼가 고장나고 유리가 깨진 자동차가 모두 한데 모여 도로 위를 달린다. 주차장에 줄지어 정차된 모습을 보고 있으면 다른 곳에 갈 필요가 있으랴, 이곳이 곧 자동차 박물관이다. 앱으로 택시를 부를 때 신식/구식 기종을 나누어 가격을 달리 지정해 두고 있으니 그 다양성이 짐작될까.
버스를 탈 때면 외부에서, 내부에서 차의 지난 역사를 볼 수 있다.
함께 일하는 현지 직원분이 말하길, 카자흐스탄에서는 기본 모든 역에 버스가 정차하기 때문에 ‘스톱’ 버튼이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그럼 이 미묘하게 익숙하고 온갖 곳에 빨간 버튼이 달린 버스는? 그렇다. 한국에서 왔다. 차 이곳저곳 지워지지 않은 간체자가 적혀 있다면? 중국에서 왔다. 이 두 나라뿐만 아니라 다양한 곳을 통해 버스는 지금 이 도시에 모여 오랜 차 특유의 검은 매연을 뿜으며 사람을 운반한다.
이곳에 오고 약 한 달이 지났다.
여전히 끝없는 업무 늪에 허덕이고 평일 주말 구분 없이 일한다지만. 이곳 사람들이 일상으로 여길 풍경이 무엇인지, 일상적이지 않은 이벤트는 무엇인지. 이를 돌아봐 알 수 있을 시간이 지났다.
이곳에 살며 더 자세히 알게 된 것은, 오히려 한국이었다. 타국에서 일상을 보내고 생활을 구축하다 보면 오히려 내가 살던 환경을 새로운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대한민국. 내가 태어나 자란 나의 모국. 막강한 비자 권력을 가진 나라.
한국은 이상할 정도로 많은 부분이 보이는 데 치중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서울.
그곳은... 불야성으로 번쩍거리며 한 시대의 젊음과 열정과... 인간이라는 종이 일생을 거쳐 한순간 가질 수 있는 가장 반짝이는 무언가를 빨아들이고 흡수하여 도시의 빛을 연장하는 것만 같다. 거대한 전시장처럼. 몸이 불편한 이들을 치우고, 거동이 불편한 이들을 치우고. ‘젊음’을 지표로 환호하고 성과로 치환하는 이들을 흔히 본다.
수도를 도는 버스는 반짝이는 새것. 이들은 사람이 덜한 시골로 갈수록 점차 나이를 먹고 낡아간다. 아마 그렇게 한국에서 오랜 시간을 돌다 온 버스의 다음 정차역이 이곳이겠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언제나 번쩍거리고 새로운 버스. 지방에서 처음 수도로 상경했을 적 막연히 기묘하다 생각했던 순간을 이렇게 다시 떠올린다. 버스라는 것이, 자동차라는 것이. 기술의 집합체이자 정수인 물건이 좀 오래되고 덜컹거리기로서니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 리 없다. 하지만 한국은 더 이상 그들을 사용하지 않고,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오래된 것들은 이곳에 와 다시 사람을 옮기며 제 일을 한다.
그렇게 시대가 만든 기술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 논리로 나뉜 국경을 따라 보이는 것과 세계를 나눈다.
한국 살 적엔 콘텐츠를 찍겠다며 일회용품을 미친 듯이 낭비하는 영상을 볼 때 저들과 한 지구를 공유하는 게 억울하단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에 오고 보니. 나 또한 착취하는 이 시대 제1세계 안락함에 젖은 편협한 인간이었음을 일상 많은 곳에서 알게 된다. 일상이라 부르고 누리는 것에 어느 하나 착취 없이 얻어진 것이 없다. 나는,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주변을 갉아먹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린다. 죄악감? 그렇다면 오히려 희망이 있겠지. 내가 생각하기엔, 글쎄. 그곳에 주목할 가치가 없는 거다. 시장은 언제나 새로운 제품을 내고 새로운 경쟁자를 들이며, 줄어드는 소비층을 향해 돈을 쓰라 말한다. 그를 위해 재화는 돌고 물건은 희소성에 가치를 얻는다. 전략이라는 이름 아래 ‘나를 표현하는’, ‘나만을 위한’ 표제를 둘러 온갖 상품이 쏟아진다. 그렇게 100년을 버틸 것들이 일 년, 하루, 일 분 간격으로 버려진다. 버려진 것들이 모여 강과 바다를, 간 적 없는 먼 나라 어느 산맥을 쓰레기로 메웠다지만. 그게 당장 내가 사는 이 물건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 땅은 먼 나라 이야기이고, 이것은 당장 나에게 보장된 행복을 주는걸.
지금보다 더한 것을 얻으려 함은 인간의 본성이요, 욕망이라지만.
내가 무엇 위에 서 있는지도 모르는 채 주어진 안락함 위 이루어낸 것들을 ‘내가 해냈다’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옳은가. 귀에 들어오는 것 눈에 담기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라 보고 있지는 않은가.
나보다 운이 좋은 삶. 나보다 축복받은 삶. 꾸며낸 삶이 쉬이 눈에 들어오는 세상을 따라, 막연히 지향점을 그곳에 두고 있지는 않은가. 그들과 비교해 나는 얼마나 처절하게 살고 있는지, 내가 얼마나 운이 없는지 분노하고 탓하고만 있지는 않은가.
생각을 멈추지 않기를. 반성하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존재가 되기를. 내가 가진 것들에 감사하는 것과 별개로, 축복이라 부를 것에 누군가 대가를 치르고 있음을 잊지 않기를. 외면하고 싶고 잊히기 쉬운 것이기에 더욱 꾸준히, 계속해서 되뇌어 바라야 하겠지.
한국에 환상을 품은 사람을 여럿 만났다.
그들은 문화 컨텐츠로, 혹은 자기 조모와 조부의 핏줄을 따라 한국을 알고 나름의 이유로 자기만의 한국을 상상한다. 내겐 타인의 젊음과 생을 불태워 자신을 밝히는 기괴한 착취의 도시가. 미관과 규범을 이유로 이곳에 부산물을 처분한 우리가. 낭만으로 포장되어 사고에 침투한 것을 보고 있자면 참 마음이 복잡하다. 떼어낼 수 없는 나의 국적. 오직 그것만을 이유로 많은 이들이 내게 호감을 보인다. 이에 감사하는 한편 이들 환상 속 그 세계는 어디에도 없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들은 한국에서 행복할까? 한국에 산다면 품고 있던 환상이 충족될까? 그 환경에 누구보다 만족할 몇 이름이 떠오른다. 그런 한편 기대만큼 상처받을 몇 얼굴이 떠오른다. 한국은 모두를 환영하고 누구나 적응할 수 있는 파라다이스는 아니니까. 결국 개인의 성향이요, 기질에 따른 성적표를 받겠지. 나라 이름을 떠나서 말이야.
입이 쓰다.
적어도 이곳에 사는 동안, 낙원을 팔지는 말아야지. 내 일과 의무 영역을 떠나서 말이야.
<후기>
보통 해외 체류기니 에세이니 하는 글을 접할 때 그에 따라 기대하는 내용이 있기 마련이죠.
장르에 부합하는 형식이란 중요하니까요.
저도 다른 분들의 여행기를 읽을 때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엄숙함 인간사 소소한 갈등과 감사함으로 버무린 일상적인 이야기를 기대합니다.
이 시리즈를 연재하며 그런 글을 쓸 때도 있겠죠. 실제로,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들려준 이야기와 소소한 일상 속 잡담을 적어 내리자면 이는 행복하고 말랑하고 풋풋한 감촉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요. 결국 첫 이야기를 이런 글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당장 이번 주에 겪었던 일. 이전에 겪었던 어떤 특정 사건을 기록하는 게 이 시리즈의 테마라 한다면, 이번 주는 동료 직원분과 버스를 타고 이동할 적 있던 짤막한 에피소드가 그 주인공입니다.
“이거, 한국에서 온 버스예요”
의미 없는 ‘스톱’ 버튼을 딸깍딸깍 누르며 웃는 동료분의 얼굴을 보며 저도 모르게 속이 불편했습니다.
이분은 한국에 긴 시간 머문 경험이 있어 이 버튼과 버스를 알아본다지만. 다른 사람들은? 평일 점심나절 버스 비수기에도 많은 이들이 타고 내리는 도심가 버스 내 작동 않는 빨간 버튼을 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니 한국에서 살아온 제 삶이 조금 부끄러워지더군요.
내가 새것을 쓸 수 있는 이유는
누군가 내가 버린 것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은 아닐까.
사람이란. 세상이란.
모든 것이 빈틈없이 짜인 수식처럼 돌아가는데,
우리는 눈밖에 난 것을 그저 '없다' 말하고 있지 않은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