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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倫理

by 김추억

건강보험공단에서 얼마 전에는 내게 우편으로 편지가 오더니 같은 내용으로 오늘은 문자가 왔다. 아마도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 같다.

나와 같은 희귀 난치성 환자들은 5년마다 산정특례를 연장하기 위해 재등록을 해야 한다.

일부러 재등록을 안 하려 진료도 안 가고 버티고 있었는데 이 나라의 의사양반들 때문에 자꾸만 나의 산정특례가 연장되고 있다. 또 연장에 연장을 거듭하게 생겼다.

2024년 4월 23일


2025년 4월 24일

나는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순천에서 광주 모 대학병원 응급실로 실려간 적이 있었는데 나도 응급했지만 나보다 더 심각한 응급환자가 바글바글 넘쳐 났기 때문이다. 베드도 다 차서 수시간을 앉아서 기다려야 했는데 제발 의식을 잃고 싶었다. 그러면 그제야 의료진들이 나를 돌봐줄 것 같아서였다.

내 바로 앞에 어떤 결석환자 아저씨는 응급실 바닥에 쓰러져 긴 시간 동안 해산의 고통을 겪듯 몸을 파르르 떨었지만 그래도 응급환자가 되지 못했다. 아침 10시쯤 들어간 응급실이었는데 나는 아무런 응급했던 원인도 찾지 못하고 급한 불만 간신히 꺼트리고 밤 9시가 다 되어 응급실에서 나왔다.

응급실의 기능을 잃어버린 응급실, 환자수에 비해 현저히 적은 의료진들은 일당백으로 날아다녔다. 의사 1명당 할당된 환자들이 너무 가혹스럽다. 서로에게 가혹하다. 그날, 내 눈에 비친 대학병원 응급실에는 응급하게 진료받는 응급환자는 거의 없었다.

우리나라 의사 수는 인구 1 천명당 2.6명이다. 최근 정부는 의과대학 정원을 겨우 2000명을 증원하기로 발표했는데 의료단체를 비롯한 각개 의사들은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의사들이 반대하는 이유를 밥그릇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의사가 국민들과 싸워 이기면 역사에 기록될 일이다.

물론 자기들은 정부와 싸우고 있다고 하겠지만...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진료도 안 하고 싸우는 엘리트 의사들에게 "나를 진료해 달라, 나를 좀 살려달라."라고 목숨을 구걸하느니 나는 그냥 아프고 죽고 만다. 파업한 의사 양반들을 내가 욕하는 이유는 직업의 특수성 때문이다. 소방관이 목숨을 걸고 불속에 뛰어드는 일처럼.

나는 국가에서 진료비와 약값을 90% 보조해 주고 있다. 10%만 부담하면 된다. 몇백만 원의 진료비가 계산되어도 나는 몇십만 원만 내면 된다. 나는 그게 항상 불편했다. 그게 나랏돈이라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액의 치료비를 보조받는 것이 정부의 의료 혜택 제도로 인한 것일 뿐, 누군가의 월급, 누군가의 세금이 맞다. 조선시대에 비유하면 백성들의 고혈 같은 느낌이 들었다. 국민들에게 미안했다.

산정특례대상자의 혜택은 내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어차피 내겐 사보험이 있고 그런 혜택과 상관없이 나는 아프기 때문이다. 나는 솔직히 견딜만하다. 겉도 멀쩡해서 아프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아픈 사람으로 안 보인다.

더 절박하고 절실한 누군가에게 이런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 한 사람에게라도 더 말이다.

물론 나 하나쯤 특례를 거부한다고 크게 달라지는 게 없음을 안다. 또 그게 누군가의 혜택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미지수이다.

하지만 나는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을 지양한다.

그리고 나는 나 하나라도, 나부터라도...라는 생각을 지향한다.

전부는 아주 작은 하나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믿는다.​


거룩하게 아름다운 서약이 있다기에 옮겨 적어본다. 의사들은 한 번쯤 다 엄숙한 오른손을 펼쳐 보이며 이 선서를 했다고.

〈제네바 선언의 히포크라테스 선서〉
의업에 종사하는 일원으로서 인정받는 이 순간에,
나의 일생을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한다.
나의 스승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다.
나의 의술을 양심과 품위를 유지하면서 베풀겠다.
나는 환자의 건강을 가장 우선적으로 배려하겠다.
나는 환자에 관한 모든 비밀을 절대로 지키겠다.
나는 의업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유지하겠다.
나는 동료를 형제처럼 여기겠다.
나는 종교나 국적이나 인종이나 정치적 입장이나 사회적 신분을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다하겠다.
나는 생명이 수태된 순간부터 인간의 생명을 최대한 존중하겠다.
어떤 위협이 닥칠지라도 나의 의학 지식을 인륜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다.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나의 명예를 걸고 위와 같이 서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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