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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인

by 김추억

어느 유명한 시인이 나의 시를 보더니 '詩는 고통의 순례와도 같은 성격'이어서 일반인이 그 속에 빠지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했다.


나는 일반인이고 시인님은 시인이구나, 그런데 일반인이 일반인이라는 소리를 듣는 게 일반적인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詩를 못쓴다고 돌려 말하신 건지 아니면 나를 진정 생각하셔서 하신 말씀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여쭐 용기가 안 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詩전공자에게 나의 詩를 몇 번 보여주었는데 그때마다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詩의 성격과 형태를 가르쳐 주었다. 고마운 일이었지만 고마움이 마냥 고마우면 좋겠는데 그러질 못하고 마음이 심란했다.

밥상머리에서 밥맛이 떨어졌다. 나는 슬픈 표정과 애처로운 몸짓을 곁들인 목소리로 딸아이에게 푸념했다.

"엄마가 시인이 될 수 있을까."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딸아이가 대답했다.

"엄마가 시인이 되는 것보다 원시인이 되는 게 더 빠르겠어."

9년이나 먹여주고 재워주고 했건만 너마저도... 꼭 그렇게 말해야만 속이 후련했냐!

"그치? 때구시인님도 엄마가 시를 쓰는 걸 원치 않으신대..."

엄마의 슬픈 음성이 마음에 쓰였는지 또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딸아이가 눈치를 챙긴다. 그러나 영혼까지는 미처 챙기지 못한 위로였다.

"엄마, 때구시인이 경쟁자가 생길까 봐 그런 거야. 그냥 그렇게 생각해."

촌철살인, 아홉 살 인생이 뼈까지 때렸던 날이었다. 아홉 살 인생을 재우고 그날 밤 나는 원시인과 대화를 나눴다.

"원시인님, 시인이 되지 못하고 원시인이 되려고 왔습니다."

그는 번개로 지펴진 불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을 쬐고 있었다. 그의 손에 돌도끼 같은 게 보였다. 그걸로 나를 찍을까 봐 겁이 났다. 나는 찍히기 전에 나와 그의 관계를 어필했다. 어쨌든 나의 조상님이시다고. 어쨌든 나는 당신의 머나먼 후손이라고. 그러자 그는 나를 찍지 않고 그의 불을 쬐게끔 허락해 줬다.

"원시인님, 제가 원시인이 될 수 있을까요?"

"원시인은 아무나 되는 줄 아니?
목숨 걸고 사냥해 봤니
끊임없이 이동해 봤니
끊임없이 소식해 봤니
날마다 노숙해 봤니
하루도 빠짐없이 날이 밝으면 퍼뜩 일어나 봤니
날이 저물면 퍼뜩 자봤니
나는 아무런 도구가 없어도 무엇이든 도구로 삼아 동굴벽에 온 힘을 실어 나의 그림을 그었다고
너는 아무것도 없이 너의 그림을 새기기 위해 온 힘을 써 본 적 있니
뭔가에 기대는 건 금지야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해
나와 같은 근육과 힘줄을 한 번이라도 가져 본 적은 있니
자신 있다면 원시인으로 사는 것도 나쁘진 않지"

"원시인님! 저는 원시인이 아니라서 한 번도 그렇게 살아본 적은 없지만 저는 어쨌든 시인 말고 원시인이 되어야겠어요. 그런데 지금 너무 추운 계절이라 짐승 가죽으로 만든 두툼한 털옷 한 벌만 주시면 안 될까요. 아, 그리고 원시인의 언어는 우가우가 밖에 모르는데 그냥 지금부터 저를 자식처럼 키워주시면 안 될까요."

"하... 기대려는 근성이 뼛속까지 쩔은 인간이로구만
지금까지 생존을 위한 내 이야기를 어디로 들은거야
조상의 DNA 따위는 완전 무시하고 살았군
아무래도 너같이 약해빠진 후손은 원시인이 되는 것보다 시인이 되는 게 훨씬 더 빠르겠어!
그냥 시인이나 해!"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낼 아침에 딸아이가 깨어나면 이야기해 줄게요. 직접 원시인에게 확답을 들었다고요! 원시인보다 시인이 되는 게 훨씬 더 빠를 거라는 확답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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