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시인의 <가을무덤>

-제망매가

by 시숨

가을 무덤-祭亡妹歌


기형도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철철 술을 부어주랴


시리도록 허연

이 零下(영하)의 가을에

망초꽃 이불 곱게 덮고

웬 잠이 그리도 길더냐.


풀씨마저 피해 나는

푸석이는 이 자리에

빛 바랜 단발머리로 누워 있느냐.


헝클어진 가슴 몇 조각을 꺼내어

껄끄러운 네 뼈다귀와 악수를 하면

딱딱 부딪는 이빨 새로

어머님이 물려주신 푸른 피가 배어나온다.


물구덩이 요란한 빗줄기 속

구정물 개울을 뛰어 건널 때

왜라서 그리도 숟가락 움켜쥐고

눈물보다 찝찔한 설움을 빨았더냐.


아침은 항상 우리 뒷켠에서 솟아났고

맨발로도 아프지 않던 산길에는

버려진 개암, 도토리, 반쯤 씹힌 칡.

질척이는 뜨물 속의 밥덩이처럼

부딪히며 하구(河口)로 떠내려갔음에랴.


우리는

신경(神經)을 앓는 중풍환자(中風病者)로 태어나

전신(全身)에 땀방울을 비늘로 달고

쉰 목소리로 어둠과 싸웠음에랴.


편안히 누운

내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술을 부으면

눈물처럼 튀어오르는 술방울이

이 못난 영혼을 휘감고

온몸을 뒤흔드는 것이 어인 까닭이냐.




기형도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나 역시 그의 어둠에 바닥없이 스며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어둠은 마냥 칠흑이 아니다. 어두운 바탕이 되어 시의 구절들이 마음을 끌고 흰 빛으로 떠올라 다가온다.


그의 어둠 한 자락에는 어린 누이와의 이별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 기억을 시로 남겼다. 스무 살 무렵에 쓴 것으로 알려진 이 시를 읽다 보면, 시의 깊이가 반드시 연륜을 따르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슬픔의 깊이와 그것을 응시하는 시인의 깊이가, 나이와 무관하게 한 편의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시를 읽으며 나는 다시 어둠 속에 잠긴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흰 빛의 활자들을 마음에 담아 다시 읽어 본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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