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비극들이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겪어본 비극만큼 아픈 타인의 비극도 없다. 얼마 전 한 초등학생 교사가 쓴 책을 보다 어떤 문단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건 초등학생 어린이가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운 일들이었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이 바꿀 수 없는 환경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 인용구는 다음과 같다.
"너한테 냄새 나."
친구 말에 머쓱하게 제 몸을 킁킁거릴 때 느낄 콤콤한 냄새, 3월 첫날에 보낸 가정통신문을 10월까지 가방에 넣고 다니며 느낄 무게,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등교할 때 발을 타고 오르는 늦가을 아침의 냉기, 의자를 집어 던지기 직전 부모의 눈에서 번뜩이는 안광, 너무 먹고 싶었을 그 지구젤리를 먹을 길이 없어서 선생님 서랍을 뒤지면서 느꼈을 심장 박동.
이세이 / 어린이라는 사회 / 포레스트북스 / 2024 / 143p
이 문단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하지만 아이가 잘 견뎌내고 단단한 어른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저자의 마음을 보며 다음 글자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 순간 그 마음이 내게도 위로가 되어주었다. 그건 아마 내가 잠시 그 아이에게 몰입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나는 어린 시절의 나를 겹쳐 보고 있었다.
마음의 응어리가 그 한 문단만큼 벗겨지며 그 자리에 아주 조금 어른의 마음이 들어선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던 때 조용히 내밀어주던 그 손길들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늦은 밤 내게 저녁을 차려주던 옆집 할머니, 방학 때 점심 도시락 지원처를 찾아다니던 담임 선생님, 제철 과일을 내어주던 친구네 어머니…….
’보고 계신가요? 여전히 삶은 녹록지 않지만, 그 손길들만큼 따뜻한 어른이 되어가고 있어요. 그 온기가 제 안에 단단히 자리 잡아준 덕분에요.’
그리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게 되었다. 민건이도 가는 걸음마다 다정한 어른들이 손길을 보내주기를. 오늘 나는 도저히 보내줄 수 없었던 지난날의 아픔들을 한 문단만큼 보내주고, 그 자리에 새로운 마음이 피어나는 걸 느꼈다.
누군가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건 이토록 감사한 일이구나. 글을 읽고 쓴다는 의미에 희망이라는 한 단어가 더 새겨졌다. 무의식 중에도 써야만 할 것 같았고, 때론 쏟아낼수록 아팠지만 멈출 수 없었다. 왜 그랬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마음을 도려내며 글을 썼던 자리에 내일이라는 새살이 돋아나고 있었다. 계속해서 써야겠다는 결심이 선다. 나를 위해, 그리고 나와 같은 아픔을 겪는 이들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