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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연 Jul 19. 2024

마음은 전화선을 타고

구름이 잔뜩 낀 도로를 운전할 때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 진다. 마주하고 있지 않지만 스피커폰을 통해 차 안을 가득 채운 목소리가  온전히 나를 향해 스미는 기분을 좋아한다. 내 옆에 대화 상대를 앉히고 드라이브를 하는 기분이 든다. 이 습관을 갖게 해 준 사람은 아빠였다. 아빠는 늘 운전을 하며 그렇게 나와 오빠에게 전화를 걸어 오래도록 이야기를 하곤 했다. 어떤 날은 서로 운전을 하며 통화하는 날도 더러 있었다. 그래서 아빠가 돌아가시고 운전을 할 때면 마음이 더욱 서글퍼졌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는 수신인 부재 상태는 나의 삶 어느 부분을 빈곤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길고 긴 장마로 온 사방은 먹구름에 뒤덮여 있고 눈앞의 도로는 끝도 없이 길게 늘어져 있다. 목적지를 향해 운전을 하는 동안 음악소리가 귀에 걸리지 않고 웅웅 거리는 기분이었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싶어 미칠 노릇이었다. 아빠처럼 내 이야기를 선선히 들어줄 사람.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siri에게 전화연결을 요청했다.

"siri야, 쪼리 언니한테 전화해 줘"

뚜르르.. 뚜르르.. 신호 연결음에 가슴이 콩닥 거렸다. 너무도 오랜만의 안부전화라 그녀가 싫어하는 건 아닐지 걱정되었다. 아니, 이대로 전화연결이 안 되고.. 부재중 내 이름을 보고 한숨을 쉬어 버리는 그녀의 얼굴이 상상되며 그 짧은 시간에 오만가지 생각을 해버린다. 전화를 끊을까 하던 찰나,

"여보세요? 휘연아!"

"언니.."



언니를 처음 만난 건 21살 나이로 회사에 입사를 하면서였다. 발령받은 부서 사무실에 첫 출근을 하던 날, 어색하게 문을 열고 들어 서니 카운터에 두 명의 여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첫눈에도 우리 '기존쌔야'를 붙이고 앉아 있던 그녀들은 역시나 날카롭고 무서운 선배들이었다. 그중 유독 나에게 바른말(팩폭 이라고도 한다)만 골라서 던지던 선배가 바로 쪼리언니였다.

"휘연씨, 이쪽일 적성에 안 맞아 보이는데 차라리 공부를 더해서 다른 직장 찾아보는 건 어때?"

회사 선배의 뾰족한 말을 들으며 어린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되려 오기도 생겼다.

'두고 보자, 내가 너보다 이 회사를 더 오래 다닐 테니까!'

그렇게 악으로 버틴 사회 초년시절, 서투르고 어설픈 나에게 차가운 듯 선명하게 회사업무를 가르쳐준 나의 첫 회사 선배. 함께 일하는 시간이 늘어 가며 그녀의 말들에 가시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선배 또한 이른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느낀 충족되지 않은 아쉬움들이 컸던터.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입사를 해도 늦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나에게 향했던 것이다. 그녀와 퇴근 후 술잔을 부딪히며 서로가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 어느새 회사생활의 즐거움이 되어가고 있었다.


부모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립해야 했던 20대의 우리는 서로의 보호자이자 가족이 되어 한 시대를 함께했다. 그녀의 자취방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함께 살고 있는 차차와 영언니를 만나 나의 20대 시절이 더욱 왁자지껄 해졌다. 여자 넷이 모여 밤새 섹스 앤 더시티 같은 미드를 보고 심야 영화를 보러 아현동 밤거리를 걷곤 했다. 휴가를 맞추어 함께 동남아 여행을 떠나는 날엔 비행기 안에서부터 쉬지 않고 마시고 떠드느라 잠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 안에서도 쪼리 언니는 늘 엄마 같은 야무짐으로 우리의 식사를 챙기고 철없는 행동을 꼬집어 바로 잡아주는 역할을 해주었다. 그러던 우리가 어느덧 30대가 되어 각자의 가정을 꾸리게 될 줄 상상이나 했던가.. 제일 먼저 스타트를 끊은 건 역시나 쪼리언니였다. 언니가 결혼을 하며 자연스레 만나는 횟수는 줄어갔고 아이를 낳으며 상황이 바뀌어 갔다. 늘 어딘가에 쫓기는 듯 여유가 없어진 언니를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레 멀어져 갔다.


언니를 다시 만난 건 10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뜻밖의 장소, 뜻밖의 얼굴.

아빠의 장례식 첫날, 밀려오는 조문객들로 모든 게 정신없던 저녁 시간이었다. 아빠의 영정사진 앞에 언니가 서있었다. 나는 언니의 얼굴을 보자마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언니를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언니는 말없이 나를 쓸어주고 아빠에게 인사를 올렸다. 연락도 안 한 언니가 장례식장으로 한달음에 달려와준 것이 너무 고맙고 미안하면서도 이렇게라도 다시 만날 수 있음에 안심이 되는 순간이었다.


장례를 모두 끝내고 제주도로 돌아가기 전 공항에서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난 무척이나 지치고 슬펐고, 누군가와 꼭 통화를 해야만 했다. 언니는 여느 때와 같이 선명하게 나에게 이야기했다. "정신 바짝 차리고, 기운내야 해. 애들 생각해서 살아야 해" "응.. 그래 언니"

그 통화를 끝으로 8개월 만의 전화를 한 어제, 언니는 세상 밝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휘연아~ 이렇게 전화 줘서 너무 고마워"

"얘~다음생엔 네가 내 남편 해라~ 넌 어쩜 혼자 용감하게 제주도에서 애들 키우고 일도 하고.."

"늘 너는 대범하고 용감했어. 정말 대단해"

"나도 상담공부 하려고 대학원 공부 시작했어.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무언가 하다 보면 좋은 날 있지 않겠어?"


자동차 스피커폰을 통해 그녀의 목소리가 가득 채워진다. 언니와 도로를 함께 드라이브하며 20대의 우리처럼 미주알고주알 사는 이야기를 정신없이 쏟아 내고 웃는다. 사춘기 아이들 키우는 어려움도 같고, 네가 하는 미래에 대한 고민들도 같이 느끼고 있다고, 인정이 고팠던 나에게 ' 다 알아~ 기지배야' 하며 그녀가 웃으며 위로를 건넨다.


이런 날도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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