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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연 Sep 19. 2024

그렇구나 매직

명절 시댁 방문을 현명하게 이겨내는 주문

제주도에서 숙소를 운영하는 나에게 연휴는 돈을 벌어야 하는 날이다. 그럼에도 이번 추석연휴 4일을 모두 닫고 육지에 있는 시댁에서 명절을 보내고자 결심한 이유 또한 시댁에 가기 위함이었다.


결혼 후 10년이 넘는 시간을 시댁에서 명절을 보냈다.신혼 초에는 그 지역에 고속열차가 들어오지 않아 버스를 타고 8시간이 넘는 귀경 체험을 해야 했고 아이를 낳고도  유아용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귀경행렬에 몸을 실어 버스와 열차를 이용해 성실히도 가곤 했다. 이동수단이 버스가 열차로 열차가 비행기로  바뀌는 15년이란 시간 동안 변하지 않는 건 단 하나, 명절 시어머니의 이야기 레퍼토리이다.


“야야, 물가가 얼마나 비싼지 말도 못 한다. 이 포도 한 봉지에 13000원이나 준거 아나”

“이 문어 있지, 이게 20만 원이 넘는 기다.”

“송편 10개에 5000원이나 주고 샀는데,내가 방앗간 가서 찹쌀가루 빠와 맹글면 70개는 넘게 만들지 싶다”

“니 이 음식 싸가 내버리지 말그래이”


그녀가 말하는 모든 말들 안엔 물건의 개수와 가격이 나열된다. 올해도 어김없이 명절 식재료 값은 비쌌고 값에 비해 형편없는 물건들 안에 가장 고운 물건을 골라온 영웅담을 풀어내는 시어머니의 말들을 나는 가만히 듣고 있는다. 신혼 시절엔 어머니의 이런 말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자꾸 가격을 말하시는 거지? 지금 나에게 그 물건 값을 달라는 건가?’


그런 불편한 생각들이 쌓이고 쌓여 수많은 추측을 만들어내고 마음에 반감을 이끌어 냈다. 나를 마음에 안 들어해서 저러시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어머니와 마주하는 시간이 불편하기만 했다. 명절이면 어김없이 몸이 아파왔다. 시댁에 있는 시간이 숨이 막혀 싫은 내색을 온 얼굴에 들어내곤 했다. 그렇게 1년 2년 10년.. 15년. 어머니의 변함없는 이야기 주제에 이제는 적당히 맞장구도 치고 무응답으로 못 들은 척도 하는 노련함도  자연스레 늘게 됐다.


이따금 숙소운영을 핑계로 명절에 시댁을 안 가는 날이면 일상과 다를 거 없는 날도 허전함이 몰려왔다. 웬일인지 어머니의 이런 잔소리 같은 이야기들 마저 그립기만 했다. 명절이 명절다운건 어쩌면 온 집안에 풍기는 음식냄새와 더불어 시어머니와 며느리 간의 미묘한 눈치 싸움이 빚어내는 아슬아슬함이 있어야만 명절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번 명절은 자발적으로 시댁의 문을 열고 3일간 고립을 택한 걸 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바뀌지 않는 시어머니의 돌림노래들을 듣고 있자니 ‘그렇구나 ‘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둥실 떠올랐다. 다른 오역을 하지 않고 순수하게 그녀의 말에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니 그저 그런 일상의 말들이 되는 마법이 일어났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그럴 수도 있겠구나.


1940년대에 태어난 시어머니의 세상은 지금 세상의 것들을 이해하기엔 너무도 변해 버렸다. 아끼고 모으고 절제하는 삶을 살아온 그녀에게 1980년에 태어난 나의 세상을 이해받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앞으로 30년 뒤 2010년에 태어난 나의 며느리들을 나는 얼마나 알고 이해할 수 있을까?


그저 철없는 어린아이 같은, 물가에 내놓은 아이들이 소꿉장난치듯 살림을 꾸려가는 모습이 늘 염려되어하는 말들이란 걸  알고 있다. 무료한 일상에 명절이라는 이벤트를 준비하는 시간이 그녀에겐 고되지만 즐거움이란 것도, 그간 말하지 못한 자신의 이야기들을 선선히 들어줄 누군가가 있는 시간이 좋아 끊임없이 말들을 이어 붙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물론 그중 안 해도 되는 말들이 더 많은 것이 문제이긴 하다.) 역시나 시간이 많은 것들을 순화시킨다는 걸 느끼고야 만다.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무심하게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던 건 아닌가 반문해 본다.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건 어쩌면 나의 이야기도 듣고 싶어서였을 텐데.. 그렇구나만 생각하다 결국 내 이야기는 많이 들려주지 못하고 온 것에 조금의 후회가 든다. 어찌 됐던 이렇게 올해의 큰 행사는 끝이 났다. 앞으로 다가올 새해의 명절에도 피곤하고 소란스럽지만 그럼에도 시부모님이 오래 함께해 주시길 바람해 본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내년 추석 포도값은 얼마일까 하는  생각을 하니 입가에 웃음이 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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