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탄고도
‘이른 아침 밖으로 나다니지 마세유!
광부가 출근길에 처자를 보게 되면 재수 없다고 침을 뱉는데요!’
지난주 이른 아침 강원도 태백시 운탄고도 길을 걸기 시작했다. 마침 탄광 3교대 근무 갑반 출근 시간이었다. 새내기 교사 시절 자취방 주인에게 들었던 동네에서 지켜야 할 금기 사항이 떠올랐다. 광부들은 사라지고 석탄 나르던 길만 남았다. 운탄고도 5길 만행 재를 오르며 태백에서 보낸 이십 대 시절 추억이 송골송골 돋아났다.
1983년 3월 강원도 태백으로 첫 발령을 받았다. 밤 열차로 낯선 황지 역에 내렸을 때 맞은편 높은 건물 꼭대기에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다. 그 시절 서울역 앞에 있던 대우빌딩처럼 거대해 보였다. 다음 날 아침에 다시 보니 그건 빌딩이 아니라 높은 산만큼 쌓인 석탄 가루였다. 가림막 없는 저탄장의 석탄 가루는 바람이 불면 들고일어나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검은 먼지는 도시를 배회하다 눈처럼 내려앉았다. 미세한 틈도 구석구석 파고들어 자리 잡았다. 시냇물은 검다 못해 먹물을 풀어놓은 듯했다.
어느 날 학부모의 초대를 받고 사택을 방문했다. 밥상에는 석유곤로가 있고, 그 위에 슬레이트 조각이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삼겹살 구이에는 슬레이트가 최고라며 고기를 굽던 삼척탄좌에 다니던 동석이 아버지가 떠오른다. 광부들은 삼겹살을 자주 먹어야 진폐증을 피할 수 있다고 했다. 선생님도 분필 가루를 많이 마시니 삼겹살이 좋다며 슬레이트 골 사이로 기름이 쫙 빠져 노릇하게 구워진 삼겹살을 권했다. 한 가장의 단단한 위엄이 좁은 방 안을 꽉 채웠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함백산 정상에 오르니 저 멀리 풍력발전기가 산 능선을 따라 나란히 서 있는 게 보였다. 백두대간의 검은 골수를 대신하는 하얀 바람개비가 이제는 사람의 목숨을 담보하지 않아도 될 고마운 존재인가?
선생님! 전화받으세요. 경찰서라는데요. 늦은 밤 주인집 전화로 나를 찾는다. 여보세요! 여기는 서울 청량리 파출소입니다. 어린 학생을 보호하고 있는데, 부모님 하고 연락이 안 돼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홀로 기차 타고 무작정 상경한 12살 제자 덕분에 처음으로 파출소를 가게 되었다.
오랜만에 찾은 태백에는, 예전의 도시를 감싸던 회색빛이 사라졌다. 길가의 꽃들은 자기만의 색깔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전설을 뒤로하고 태백시는 산소 도시로 거듭나고 있었다. 태백산 입구에 들어서니 대형 냉장고 문을 활짝 열어놓은 듯 서늘함이 온몸을 감쌌다. 문득 몇 년 전에 갔던, 스위스 생모리츠가 떠오른다. 세계적인 셀럽들의 휴양지로 유명한 동 알프스산맥의 피츠베르니나 산과 접한 고원의 도시이다. 여름철 태백의 서늘함이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2024년 6월 말이면 대한석탄공사 태백지사가 마침내 폐광한단다. 한때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던 탄광 산업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니 나도 모르게 애잔한 마음이 이는 것은 왜일까? 해수면보다 깊은 갱도를 내려가 석탄을 캐던 광부들을 기억한다. 누구의 안전도 보장되지 않는 곳에서, 피와 땀을 흘린 사람들 덕분에 추운 겨운 몸을 녹일 수 있었던 지난날이 떠오른다.
은대봉을 지나 두문동재를 내려오며 두 가지 상념이 일렁인다.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운 마음과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기대감으로 점점 발걸음이 가벼웠다.
운탄고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해 주는 길! 그 길 위에서 행복한 여정이었다.
사람 사는 곳
임길택
오늘도
우리 마을 개울엔
까만 물이 흘러갑니다
우리 마을 한가운데를
우리 마을 이야기처럼
흘러갑니다
지나가는 사람들
사람 못 살 데라
함부로 말을 하지만
우리 이웃들
조그맣게 조그맣게
어깨 맞대며 살아갑니다
오늘도 검게 물 흐르는 것은
우리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이야기
내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
그런 노랫소리 들려주며
오늘도 우리 마을 개울엔
까만 물이 흘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