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정의를 찾는 시간

[D-231] 단어를 모으는 사람

by Mooon

D-231. Sentence

단어를 모으는 사람


IMG_9007.PNG @유퀴즈_나민애 교수편



느낌의 시작


나태주 시인과 그의 딸 나민애 교수가 주고받은 편지를 읽었다. 딸이 서울대 교수라서 놀라운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든든한 ‘내 편’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마음에 남았다. 책과 글의 중요성을 삶으로 가르쳐 준 아버지가 있다는 것. 자신을 ‘최소한’의 아버지라 부르며 가난하게 살게 해서 미안하다는 편지와, 가난이 좋진 않았지만 당신이 모든 불행을 막아 주었다는 딸의 대답이 오갔다. 딸은 여전히 책을 생명체처럼 여기고, 인형 대신 책과 대화하며, 책 속에서 자신의 삶을 찾았다. 그 모습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문득 내가 떠올랐다. 나는 학부 때까지 여느 디자인 전공생처럼 이미지를 그리며 공부했다. 텍스트보다 이미지로 세상과 대화했다. 그러다 가구 회사에 입사해 하루 종일 CAD 프로그램으로 가구의 Top view, Side view, Front view만 그리며 몇 달을 보냈다. 어느새 CAD의 달인이 되어버린 나를 보고, 스스로 묻게 됐다. “나는 누군가의 손과 발이 되어 살고 싶었던 걸까?” 그 질문 끝에 2년 반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책을 읽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마음의 흐름


대학원 지도 교수님은 번역본 책을 절대 보지 말라 하셨다. 원서를 봐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봐야 할 책은 너무 많고, 원서로 다 읽어낼 자신은 없던 나는 번역본을 숨겨가며 복도를 지나가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교수님이 추천해 주신 책들을 읽기 시작하며, 브랜딩과 마케팅 수업을 들으며 처음으로 텍스트의 매력을 알았다. 어떤 프로젝트든, 어떤 수업이든 교수님이 가장 강조하신 건 ‘단어의 정의(Definition)’였다.

“같은 단어라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시선과 생각이 달라진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그때부터였다. 단어 하나의 의미를 곱씹고, 그 정의가 결과를 바꾼다는 걸 알게 된 건. 그래서 지금 내가 학생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도 단어와 정의다. 같은 문제여도,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논문을 쓸 때도 그런 생각을 한다. 논문이라는 게 참 지난하고, 형식을 맞추느라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도대체 뭘 하고 있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논문 작성에서 가장 매력적인 건 ‘조작적 정의(Operational Definition)’를 만드는 과정이다. 추상적인 개념을 나만의 시선으로 구체화시키고, 측정 가능하게 정의하는 것. 같은 단어이지만 나만의 정의를 만들어낸다는 것 자체가 단어의 매력이고 텍스트의 힘이다.

요즘 매일 글을 쓰면서도 답답할 때가 있다. 왜 나는 매번 같은 단어만을 쓰고, 같은 방식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지. 내가 나를 지겹게 느낄 때도 있다. 나민애 교수의 말처럼 나도 나만의 단어들이 풍성해져서 말의 부자가 되고 싶다. 그래서 나태주 시인 같은 엄마가 되고 싶다. 두 아들에게. 오늘부터 첫째의 방학이 시작됐다. 중학교 1학년이 되면서 책을 멀리하기 시작한 아이가 이번 방학엔 책을 다시 잡게 되길 바란다. 나민애 교수가 추천했던 방법을 써보려 한다. 좋아하는 책을 읽고, 마음에 남는 문장과 단락을 적어보는 것. 언젠가 그 문장들이 쌓여 첫째의 자산이 되기를 바라며 상상해 본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뿌듯하다. 엄마니까. 나도 더 풍성한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 할 수 있는 것들을 매일 시도하면서. 7번째 ‘오늘 마주친 문장 하나’ 시리즈를 연재하며 새삼 주제를 잘 정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둘째 아들의 하교 시간이 20분 남았다. 엄마 모드로 전환할 시간이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 단어를 곱씹는다. 단어는 오늘도 나를 바꾸고 있다.



내 안의 한 줄

단어 하나가 마음을 바꾸고, 마음이 삶을 바꾼다.


** 매일의 감정이, 나를 설명할 언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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