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례] 겨울마다 치뤄지는 우리만의 작은 의식
겨울의 리추얼
우리 가족에겐 겨울마다 되풀이되는 작은 의식이 있다. 12월이 되면 어김없이 강원도 속초로 향한다. 성탄절을 지나면 곧 첫째의 생일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12월 26일, 그날은 언제부턴가 우리 가족에게 특별한 날짜가 되었다. 첫째가 태어나 첫 번째 생일을 맞이한 곳이 바로 속초였고, 그때의 기억이 쌓이고 쌓여 이제는 자연스러운 연례행사가 되었다. 2박도 아닌 1박 2일의 짧은 여정이지만, 12월이 다가오면 나도 모르게 기다려지는 시간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이 일정만큼은 우리 가족의 ‘겨울 약속’이다.
속초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들르는 곳이 있다. 중앙시장 근처의 ‘라이픈커피’. 우리는 그곳에서 체스를 두거나, 책을 읽거나, 우노카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카페 사장님 두분은 섬세하고 따뜻한 분들이셨다. 1년에 한두 번 들르는 우리를 기억해 주셨고, “오늘도 체스 두실 건가요?”라며 웃음으로 맞이하셨다. 그 한마디에 라이픈카페는 단숨에 ‘우리의 장소’가 되었다. 지금은 사장님 부부가 호주로 유학을 떠나 카페 문을 닫았지만, 인스타그램 피드 속에서 여전히 그들의 소식을 보고 마음속으로 응원한다. 이상하게도, 낯선 이의 안부를 이렇게 오래 기억하게 될 줄은 몰랐다.
카페를 나와 중앙시장에 들러 저녁거리를 사고, 숙소로 향한다. 따뜻한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저녁을 차린다. 식탁 위에는 늘 비슷한 메뉴들이 올라오고, 조명 아래에서 케이크의 초를 밝힌다. 초를 끄는 순간, 우리의 겨울 리추얼이 시작된다. 저녁이 깊어가면 우리는 숙소 거실에 둘러앉아 한 해를 돌아본다. 기뻤던 일, 아쉬웠던 일, 그리고 서로에게 바라는 점. 누군가는 웃으며, 누군가는 조금 울먹이며, 조용히 지난 시간을 이야기한다. 작년 겨울, 둘째가 말했다. “잘못한 줄 알면 ‘잘못했습니다’라고 해야 하는데, 그냥 울어버린 게 아쉬웠어요.” 첫째는 “하고 싶은 걸 절제하지 못한 게 아쉬워요.”라며 고백했다. 그 솔직한 말들 사이에서 나는 아이들이 얼마나 자랐는지를 느꼈다. 그리고 부모로서 우리도 부족했던 점을 나누며, 서로의 성장과 미숙함을 인정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매년 새삼 깨닫는다.
누군가에겐 평범한 여행일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속초는 한 해를 닫고 새로운 해를 여는 문과 같다. 이곳에서 우리는 서로의 온기를 다시 확인하고, 가족이라는 이름의 중심을 되새긴다. 세월이 흘러도 이 작은 의식만큼은 계속될 것이다.
이상하게도, 속초를 찾는 이유가 바다를 보기 위함이면서도, 나는 바다 앞 대형 카페들에는 잘 가지 않는다. 인위적으로 꾸며진 공간들이 내 마음속의 속초와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내게 속초의 바다는, 화려한 조명이나 인테리어로 감상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저 곁에 두고 바라보면 되는 존재다. 그래서 나는 ‘커피고’라는 조용한 카페를 더 좋아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공간, 진심이 느껴지는 커피와 베이커리,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 그 안에서 시간을 잃어버리듯 앉아 있으면, 세상의 소음이 모두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커피고의 사진을 보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누군가 올해는 일본이나 제주도로 여행을 가보지 않겠냐고, 비용을 다 대주겠다고 해도 나는 아마 여전히 속초를 택할 것이다. 그곳에는 우리 가족의 시간과 기억, 웃음과 고백이 층층이 쌓여 있다. 세상 그 어떤 여행지보다 의미 있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만의 장소. 그곳이 바로, 우리의 겨울 리추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