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하다
대한민국 프로스포츠 중에서 압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한국프로야구는 1982년 출범시 143만명이고, 프로축구는 출범시 40만명이었다. 2024년에 한국프로야구는 1088만명으로 최초로 천만명을 돌파했고, 수익도 역대 최고액을 달성하였다. 축구(300만), 농구(83만), 배구(9만) 등은 감히 비교할 수가 없다.
프로야구의 모태가 된 고교야구는 1960년대 후반부터 전국적으로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1970년대 당시 고교야구는 준준결승부터 이미 매진이 되는 등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그러다보니 12.12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1981년 5월,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국민들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의도로 프로 스포츠 창설의 논의가 이루어졌고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명분은 국민정서와 여가선용을 위한 것이지만 사실상 3S정책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여가선용이란 말이 꼭 명분용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별 다른 여가가 없던 당시 국민들의 가장 큰 여흥거리가 바로 정치 이야기였기 때문에 정권 차원에서도 건전한 여가거리를 제공할 필요성은 있었다.
** 3S 정책
신군부가 국민들을 정치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돌리기 위해 펼친 정책으로
Sports - 프로야구, 프로축구, 민속씨름, 88 올림픽 유치
Screen - 영화 규제 완화, 이는 Sex와 합해져 에로영화의 범람으로 이어진다.
에로 영화, 도색 영화의 전설이라 할 수 있는 애마부인이 이때 탄생했다
Sex -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하면서 유흥업(술집, 모텔, 성매매, 조직폭력)이 급속도로 성장한다
그리하여 이상주 교육문화비서관이 대한야구협회와 대한축구협회에 프로화 검토를 의뢰하게 되었다. 이 당시에 축구협회에서는 139억의 막대한 정부 도움이 필요하다고 정부에게 보고를 올린 반면 야구협회는 정부의 지원금 한푼 없이도 프로화가 가능하다고 보고하여 우선 프로야구부터 출범시키기로 낙착을 지었다.
정부 보조가 없는 방법 이라는 것은 바로 대기업 들이 야구단을 하나씩 맡도록 한 것이다. 지금 KBO 팬들 입장에서는 기업이 구단 맡는 게 당연한 소리 아니냐고 하겠지만 당시 구기종목 최초의 프로구단인 할렐루야 독수리만 해도 기업구단이 아니었다. 스스로 프로에 참여한 기업도 있었고 반 강제적으로 시작한 기업도 있었다. 물론 정착을 위해 야구단을 만든 기업들에게 운영 및 세무 면에서 혜택을 주기는 했다.
정치권에서 정한 초창기 기업별 연고지 분배는 다음과 같았다. (이하 1980년 당시 재계서열도 표기함)
롯데(10) : 서울 / 실업야구 최강팀인 롯데가 서울로 오는 것이 흥행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럭키금성(4) : 부산 / 창업주 고향이 경남 진주여서 부산과 경남 일대를 맡도록 하였다.
삼성(3) : 대구 / 창업주와 이건희의 고향이 경남 의령인데다가 제일제당이 부산에 있어서 부산으로 배정되었으나 이미 대신할 그룹이 있었기에 삼성상회가 설립되었던 대구로 연고지를 배정하였다.
현대(1) : 인천,경기,강원 / 정주영 고향이 강원도 통천이라 연고지 배정을 주었다.
삼양사(-) : 전라도 / 삼양사는 삼양라면을 만드는 그룹이 아니다. 인촌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가 만든 회사로 우리가 그나마 들어본 듯한 제품으로는 설탕 큐원이 있다. 호남은 개발 정책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어서 대기업이 없었다.
동아건설(11) : 충청도 / 창업주의 고향이 대전이어서 연고지를 배정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기업은 롯데와 삼성이고 그나마 연고지가 일치하는 곳은 삼성뿐이다.
어떻게 바뀐 것일까?
일단 현대(1)가 올림픽 전념을 위해서 야구단 창단을 포기한다. 이때 현대 사장이 이명박이었다. 현대가 포기를 하자 현대의 연고지를 받겠다고 나선 기업이 OB(14)다. 그런데 이때 충청권을 배정받은 동아건설(11)이 야구창단을 포기하는 일이 발생을 했고, 당시 2순위 충청권 기업이었던 한국화약(8)에게 제안을 했으나 창업주가 사망하고 후계자 분쟁으로 야구단 창단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또 포기, 그렇게 충청권 연고지 기업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에 정부는 OB(14)에게 경기도 말고 충청권을 배정하면서, 3년 후 연고지를 수도권으로 이전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게 된다. 그렇게 OB베어스가 충청권을 연고지로 하여 탄생하게 된 것이다.
충청권이 배정되고 나자 인천,경기권이 비어버렸는데 이때 참여하겠다고 직접 나선 기업이 바로 삼미(18)다.
충청권과 함께 골치 아픈 곳이 전라권이었다. 일단 대기업이 아니었던 삼양사(-)는 프로야구단을 운영할 재정적 어려움이 컸기에 배정권을 2순위 금호그룹(22)에 넘기는데 당시 금호는 노조분쟁으로 정신이 없어 창단 여력이 없어 포기. 이에 다시 3순위 대한교육보험(-)에 제안을 하는데 교보 역시 이를 거절한다. 전라권의 모든 기업들이 다 거절을 하자 이 소식을 들은 해태(26) 박건배 회장이 직접 창단하겠다고 제안을 하여 참여가 결정되었다.
이처럼 삼미(18)와 해태(26)는 정치권의 압박이 아닌 자발적 참여였다는 점에서 타 구단과는 성격이 다르다. 물론 정치권에서는 이 두 기업을 초반에 참여시킬 의도가 없었지만...
그런데, 이렇게 되면서 몇 가지가 꼬여버린다. 프로야구는 기업홍보효과를 위해서 동종업계의 중복참여를 지양하였는데 해태(26)의 참여는 같은 동종 제과업계인 롯데(10)와 중복되었다. 그렇게되면서 롯데(10)가 강력하게 해태(26)의 참여를 거부하였고, 동시에 OB(14)가 이면계약으로 서울로 오게되는 것을 알면서 서울을 연고지로 배정받은 롯데(10)가 또다시 거절하였다.
이때 롯데(10)가 강짜를 부렸는데 해태 참여 불가와 서울 연고지 확정을 해주지 않으면 참여를 안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앞서 기획안을 보면 알겠지만 부산을 연고지로 배정받은 그룹은 럭키금성(4)이었다. 럭키금성은 현 LG이며, 당시 LG(4)는 지금처럼 GS, LG, LIG, LS로 그룹 분산되기 전이라 재계서열 4위였다. 반면 롯데(10)는 10위권을 들락거리던 수준이었다. 그런 롯데가 아니면 말고로 나오자 정치계는 럭키금성(4)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이다. 여기에 롯데는 찌그러졌고 그러면서 감히 신군부와 힘겨루기를 하려던 롯데가 밉보였기에 롯데(10)와 럭키금성(4)의 연고지를 맞바꾸어 버린다. 그렇게 본래 서울 연고지였던 롯데(10)가 부산으로 내려가버린 것이다.
당시 럭키금성(4)은 회장이 외유중이었기에 서울연고지 확정이 급했던 청와대는 국가홍보를 목적으로 언론사로서 MBC(-)를 배정해두었는데 MBC 이진희 사장은 구단보다는 KBO총재를 원하고 있었다. 이에 청와대, 비서실, 비서관, 민정수석등이 MBC(-)를 강제 압박하여 구단 참여를 하게 한 것이다. 그것도 3년 후 OB와 공동연고지라는 안까지 강제했으니... 참 MBC로서는 억울할 밖에...
** 여기까지가 프로야구창단에 관한 전통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2021년 이용일 KBO 초대 사무총장의 이야기는 달랐다
롯데는 이미 일본에서 지바 롯데 마린스(전신 롯데 오리온즈)를 운영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무조건 롯데가 프로야구에 창단은 필수적이었고, 그런 롯데에게 서울 연고지라는 특혜를 준 것
그런데, 전두환을 등에 업고 등장한 기업이 MBC 였다라는 것이다
기존의 MBC 사장 이진희가 원한 것은 KBO 총재였다는 설을 뒤집은 것
이에 롯데가 프로야구 참여 안한다고 했는데 신군부가 압박하여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산, 경남에 연고지를 주었던 럭키금성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
반면, 롯데 신격호 회고록에 따르면 서울 연고지를 두고 OB, MBC와 경쟁을 하게 되었는데
프로야구 출범을 강하게 원했던 신격호 회장이 통큰 결단을 하여 연고지를 포기하고 부산으로 갔다고 했는데
이 또한 부산, 경남을 연고지로 둔 럭키금성에 대한 이야기가 사라져 있는 데다가
이용일 사무총장에 따르면 일본 지바에서 프로야구단을 운영해 본 결과 도쿄를 연고지로 한 것과는
흥행에서 비교가 안 되었기에 기업 흥행을 위해서라도 서울 연고지를 고집했다는 이야기와도 상충된다
여튼 어떤 것이 사실이건 상기의 여러가지 이유로 프로야구구단 창단이 확정되고 1982년 3월 27일 최초로 프로야구가 전두환의 시구로 출발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