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동안 보육원에서 살던 ‘도윤’이 시설 밖으로 내보내 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어느 겨울날, 전혀 예상치 못하던 아버지 ‘승원’이 찾아온다. 이제라도, 이제 와서 가족이 되자는 말에 강한 반감을 드러내지만, 하필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를 다치면서 어쩔 수 없이 함께 지내기를 택한다. 하루아침에 나타나서 갑자기 가족이 되기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다. 존재조차 몰랐던 동생 ‘재민’까지 세 사람이 어색하고 불편한 생활에 적응해 갈 무렵, 갑작스럽게 ‘승원’이 세상을 떠난다. 이제 겨우 중학교 3학년인 동생의 곁에 남느라 그토록 꿈꾸던 호주행까지 포기했건만, 처음부터 친자식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라 어린 ‘재민’을 대신 맡아줄 사람이 필요해 운 좋게 입양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내 자리’라서가 아니라 ‘빈자리’라서 들어갈 수 있었던 집.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과 분노에 ‘도윤’은 다시 혼자가 되어 방황한다.
“전 왜 버렸어요?” _ 홀로 선 아이들
흔히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를 가족이라고 말한다. 인적·물적 자원을 관리하는 경제 단위에서 출발하여 공적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정치 단위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여기는 문화 단위까지. 인류의 오랜 학제로서 가족은 점차 다양한 관계성을 포괄하는 개념이 되고자 한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정상 가족’에 속하지 않는 한부모 가정, 조손 가정, 입양 가정, 동성 부부 등에게 꾸준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반면 가족이 없는 사람들은 쉽게 사각지대로 내몰린다. 보호 종료를 앞두고 일찌감치 생계에 뛰어든 ‘도윤’과 ‘창림’같은 아이들은 여전히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학교가 끝나면 공부 대신에 배달 대행 아르바이트를 다니며 어른 앞에서도 욕설을 서슴지 않는 근본 없는 새끼, 고아 새끼, 가정교육 못 받은 것들. 영화 곳곳에서 빈번하게 부여되는 꼬리표들이 미디어의 뻔한 묘사인지 현실의 적나라한 투영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시설 청소년들이 표현되는 방식은 대체로 이와 비슷한데, 일례로 <거인(김태용, 2014)> 속 ‘영재’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은 처지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룹홈에서 물건을 훔치고 거짓말로 악착같이 버티는 하루하루.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자신을 너무 이르게 떠안고 사는 도중에 “너같이 부모 없는 애들 손버릇은 타고난 거고” 따위의 모욕을 당하기도 한다. 이처럼 날카롭고 잔인한 말과 태도는 무의식중에 품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편견 어린 시선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특히, ‘도윤’이 피자를 배달하러 간 학원에서 우연히 ‘재민’을 마주쳐 복도에서 짧은 대화를 나누는데, 이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도윤’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재민’에게 괜찮냐고 묻는 강사의 모습은 상당히 불편하면서도 사실적인 장면이라고 느껴진다. 두 작품과 마찬가지로 자립 준비 청년들의 모습을 그린 <아이(김현탁, 2021)>와 <열여덟, 어른이 되는 나이(주영, 2023)> 또한 이들을 향한 무관심 내지는 폭력을 지적하면서 인식의 변화를 촉구한다.
자립에 대한 두려움, 불안, 우울만큼이나 높다란 장벽이 바로 세상의 눈초리다. TV 속에서 단지 ‘고아’라서 놀림당하는 학생이나 보육원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결핍이 설명되는 악인이 등장할 때면 자립 준비 청년들은 위축되고 환영받지 못하는 기분을 느낀다. 이들은 실제로도 도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의심을 받거나 오래 사귄 연인의 부모님께 헤어지라는 말을 듣는 등 고정관념에 맞서 싸워야 한다.
“밖에서는 센 척해야 무시 안 당하고 안에선 오히려 약한 척해야 살아남으니까” _ 집과 돌봄
보육원 아이들은 자신을 향한 손가락질에 반항이라도 하듯이 괜히 더 버릇없고 불량하게 굴다가도, 원장님께 잘 보이면 떡 하나라도 더 떨어질까 열심히 공부하는 척 연기한다. 그런 ‘도윤’에게 ‘승원’은 여기(집)에서는 약한 척 좀 해도 괜찮다고 말한다. 이들의 일상에서 집은 외부와 분리되어 안정성과 친밀성의 장소로 기능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썩 내키지 않는 상태로 셋이 함께 밥을 먹고, 여행을 가서 아들 노릇을 하고, 혼자만 몰랐던 이별을 하고, 남겨진 두 사람이 다시 함께 밥을 먹고. 그렇게 이 가족은 장소와 유대를 나누면서 조금 더 단단해진다.
그러나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형이 떠나고, 처음으로 혼자가 된 ‘재민’은 새로운 돌봄 공백이 된다. 끝내 집과 가족을 지키지 못하고 보육원에 입소하는 동생이 걱정스러운 마음에 ‘도윤’은 다시 돌아온다. 2년만 지나면 데리러 오겠다는 덤덤하지만 다정한 말과 함께, 이들은 적어도 가족으로 남기를 택한 것이다. 가족이 부재하여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국가가 필요하지만, 결국에는 가족을 지키면서 완전해진다. 즉, 가족 중심적 돌봄 모델과 국가 중심적 돌봄 모델이 서로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대립 쌍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으로 기능할 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해 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어느새 나는, 우리가 되어버렸다.” _ 가족 되기
엄마가 죽었을 때 목숨값을 챙겨갔던 표독스러운 어른들은 아빠가 죽자 또다시 나타난다. 조카 걱정을 핑계로 찾아왔지만 실은 반띵이 본심인 이모는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도 모를 새끼를 어떻게 진짜 피붙이하고 비교를 하냐!”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피가 섞인 그들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판 남이었던 형이 진정한 가족에 훨씬 더 가까운 것은 분명하다. 위 대사에서 전통적 혈연주의를 엿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가족이 타고난 운명 공동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태도는 정상성 담론을 만들어내는 주요한 소재로, 입양 가정이나 위탁 가정을 배제하는 근거가 된다. 오늘날 가족 개념은 보다 확장되어 인식되기는 하지만, 아직 제도적 차원에까지 반영되어 있지는 않다. 법에서는 가족을 ‘혼인을 통해 맺어진 한 쌍의 남녀와 혈연 또는 입양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로 정의한다. 그렇다보니 학대 피해 아동이 폭력 부모에게 다시 돌아가야 한다거나 1인 가구, 동거 가족에 대한 실제적 이해가 부족하다는 한계가 생겨나기도 한다. 다양성의 시대에 발맞추어 더 많은 사회적 관계를 포괄할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한다.
'도윤'은 새로운 가족에 편입된 후에도 마치 이방인처럼 부유하는 시기를 가졌다. 원래는 집에 일시적으로 거주하다가 기회가 되면 당장이라도 떠날 작정이었지만 곧 동생과 둘이 남아있는 집을 묵묵히 청소하고 밥을 차리며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겪는다. 이제 가족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집단이라기보다는 구성원들이 노력을 통해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집단으로 받아들여진다. ‘도윤’이 '나'에서 '가족'으로 연결되는 흐름 속에서 가족이 사회의 구성물임을 다시금 부각한다.
“나는 새로운 우리가 된 줄 알았지만, 여전히 또 다른 우리 안에 갇혀 있었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동생의 학부모 상담을 다녀온 날, “똑똑한 애니까 알아서 하겠죠”라며 심드렁하게 답하자 “아버님이었으면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을 것 같네요”라는 비난 섞인 충고를 듣는다. 아직 교복을 입는 나이에 술과 담배를 하는 ‘도윤’에게 그 흔한 걱정 어린 잔소리 한번 없이 “너도 성인인데 알아서 하겠지”라고 반응했던 ‘승원’의 목소리와 겹쳐서 들리는 대사이다.
'우리'는 나와 상대가 친밀한 관계임을 나타내는 말이 되기도(we), 짐승을 가둬놓고 기르는 곳을 지칭하기도 한다(cage). 답답한 보육원을 벗어나 새로운 집과 가족을 마주한 줄 알았지만, 여전히 누군가 만들어놓은 자리에 끼워 맞춰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다. 가족이라는 관습은, 특히 공동체주의 정신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개인을 정서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묶을 수 있는 강력한 도구이다. 그러나 달라진 점이 있다면 통금과 눈칫밥으로 키워지는 철조망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울타리라는 차이가 있다. 이 성장통을 앓고 나면 두 ‘아이(child)’는 제 자리를 찾은 ‘아이(I)’가 되어서 다시 만나리라고 기대한다.
미디어는 주류 사회에 드러나지 않는 영역을 쉽게 가시화할 수 있는 장치이다. 그러나 깊은 성찰 없이는 혐오를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용할 수 있으므로 검토와 반성이 필수적이다. <아이를 위한 아이>는 자립 준비 청년의 불안정한 현실, 안전망 바깥의 삶을 돌보는 국가의 역할,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가족 되기를 보여주는 영화이다.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평등한 다음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도윤'과 '재민'을 비롯한 모든 아이의 선택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