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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젠가의 하루 Aug 12. 2024

너와 나의 세계를 횡단하며

[My Word in Your World(뉴스프링프로젝트)]

숏츠와 릴스의 성행, 그것은 시각 정보 과잉의 시대를 일축하는 키워드이다. 어쩌면 전시회가 이른바 ‘힙한’ 문화로 자리 잡은 것 역시 같은 맥락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메시지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대부분은 거기에서 끝, 입력만 있고 출력은 없다. sns와 미술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여백의 존재 여부이다. 어느덧 미술은 주관적이고 해방적인 장르가 되었다. 추상 작업은 눈에 보이는 대로 담아낸 결과물이지만 그럼에도 창작자와 수용자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다.

예술의 영역은 입체적이고 다차원적이다. 사건, 사물, 사회, 사람, 사연, 사고, 사심. 주제부가 동일하더라도 구성이 잡히기까지는 지극히 사적인 과정을 거치게 된다. 사유는 어떻게 완성될까? 시간과 공간의 결합, 그리고 무수한 관계들의 연합. 뒤섞이고 얽매이고 상관하며 비로소 하나가 된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세계를 가진다. 그리고 각자의 언어로 대화한다. 세계와 언어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관계가 성립한다. 엇갈림에 실패하면 어긋나는 법이고. 사람들 사이에는 언제나 경계가 존재한다. 나와 너, 자기와 타자, 우리. 같은 것을 지칭하지만 어떻게 이름을 붙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저마다의 입장과 해석은 다른 법이므로. 그리하여 경계는 때때로 균열의 모양새를 띠기도 한다. 나의 언어로는 이해할 수 없는 너의 세계, 또 너의 언어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나의 세계. 철회하는 나와 다가서는 너, 단정 짓는 나와 질문하는 너, 피로에 젖은 나와 열의에 찬 너. 그러나 이토록 넓은 우주에서 우리가 만났다는 것은 적어도 어느 궤도에서만큼은 우리가 맞닿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함께 감당해야 할 번역비이자 함께 향해야 할 정거장인 셈.


김찬송
주로 두터운 마티에르로 촉각적으로 그려내는 김찬송의 작품은 멀리서 거리를 두고 보면 경계가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경계가 허물어지며 모호해진다. 이는 삶과 문화, 역사의 길고 긴 유무형의 연대기가 우리에게 증명하듯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의 만남은 언제나 둘 사이의 긴장과 경계, 수용, 소외와 사라짐 등의 과정을 거치며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내는 것과 닮아 있다.

_ 김현경, 오태인, 최지예

낯설고 새로운 대상과 마주할 때면 경계선을 실감하곤 한다. 그리고 서로의 영역이 구분될 때 우리는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 내 정체성의 축은 결코 내가 될 수 없다니. 쏟아지는 빗줄기와 흐르는 강물을 가름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무성한 잎사귀와 만발한 꽃잎을 가름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눅눅한 공기와 찬란한 공기를 가름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세계는 온통 가설로 둘러싸여 있다. 명제를 판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몫.


김겨울
일상에서 익숙하지 않는 형태, 혹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감각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가령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사람이기에 보이지 않을 그의 움직임이나, 특정 서체의 기울기와 곡선에 대한 몰입된 생각으로부터 비롯된 조형요소들은 낯선 감각으로 전환되어, 새로운 화면 속에서 어떠한 형식과 틀에 얽매이지 않은 시적 운율과 정서를 만들어낸다.

_ 김현경, 오태인, 최지예

모호함, 애매함, 불분명함. 자유가 방황으로 느껴진다거나 여유로움이 불안정으로 느껴지는 순간마다 불쾌감을 경험한다. 확실함을 지나치게 추구하다 보면 어딘가에 홀로 가두어지는 일이 잦다. 그러나, 그런데, 그렇지만, 그래도, 변수를 차단하고 생경함을 틀어막는 처절한 몸부림. 이것은 나의 세계를 지켜내는 방식이다. 나 자신을 가장 먼저 버려두고서.


조재
삶 가운데 맞닥뜨린 정치·사회·문화의 여러 사건들과 주변에서 수집한 여러 재료들을 콜라주한 드로잉, 회화, 설치작업 등을 통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탐구한다. 작가는 일러스트 프로그램의 '벡터' 효과에 주목하는데, 이는 본래 전염병학에서 한 숙주에서 다른 숙주로 병을 옮기는 매개체를 의미한다. 작가는 '벡터'의 개념을 메르스, 사스, 코로나 바이러스 등 다양한 재난의 이미지를 번역하는 툴로 사용하면서, 정보값의 과잉 속에 노출된 시대의 새로운 추상적 풍경을 모색한다.

_ 김현경, 오태인, 최지예

각자의 세계는 아름답다. 동떨어진 공간일수록 한층 신비로운 빛깔을 지니고 있다. 또다른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필요하다. 온전한 형태로 전달이 될지는 미지수지만. 당면한 사건 속에서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일, 얽히고설킨 사회에서 한낱 사연을 파헤치는 일, 무응답의 생각과 마음을 읽어내는 일. 나의 사유가 완성되는 원리는 그러하다. 마침내 나는 울타리를 짓고는 제 손으로 허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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