肖像. 사진이나 그림 따위에 나타낸 사람의 얼굴이나 모습¹, 또는 비추어지거나 생각되는 모습². 인물의 얼굴과 표정에 집중하여 생김새와 분위기를 표현하는 작품을 초상화라고 부른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모나리자(1503년 경)>이다. 신비로운 미소를 띤 눈썹 없는 여인은 르네상스 회화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주로 교황이나 왕족의 전유물이었던 초상화의 주인공은 피렌체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Francesco del GiocondO)’의 아내 ‘리자 델 조콘도(Lisa del GiocondO)’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대에 정면을 바라보는 여성 모델은 이브와 성모 마리아뿐이었다는 점과 화가 자신이 평생 소장했다는 점에서 의문이 생겨난다.
내가 이렇게 독수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운명이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인 것 같은데, 아직 요람에 누워 있을 때 독수리 한 마리가 내게로 내려와 꽁지로 내 입을 열고는 여러 번에 걸쳐 그 꽁지로 내 입술을 쳤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1910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년의 기억』을 발표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담긴 욕망을 해석함으로써 인간의 정서와 행동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는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독수리 꿈에 연관 지어 설명했는데,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독수리는 고대 이집트에서 어머니를 상징하며, 모성의 여신 ‘Mout’는 영어식 표현 ‘mother’와 유사하다. 프로이트는 다빈치가 활동하던 당시에 성모 마리아를 설명하는 교부敎父들의 전통에 친숙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혼외자로 태어나 다섯 살까지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지냈던 가정 환경이 수컷 없는 독수리와 어머니를 동일시한 배경이 된다고 해석한다. 둘째, 프로이트는 꽁지가 페니스를 지칭한다고 단언한다. 어머니를 의미하는 독수리가 페니스를 은유하는 꽁지를 갖춘 까닭에 대해서는 남자 아이가 자신의 페니스를 남녀불문 모두가 똑같이 가진 소중한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앞서 언급한 이집트 여신 역시 유방과 페니스를 동시에 가진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셋째, <두 명의 성녀와 아기 예수(1510년)>에서 모녀 관계인 마리아와 안나가 비슷한 연령대의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표현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멀찍이 지켜보는 생모 카타리나와 손을 뻗은 계모 도나 알비에라를 연상할 수 있다. 이때, 안나/카타리나의 미소는 아들을 떠나보내는 슬픔과 아들의 행복을 비는 이중적 미소이다.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모나리자>는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투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김진엽, 2010)
<모나리자>는 오늘날 세계적인 걸작으로 극찬받고 있지만,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11년 도난 사건에서 출발한다. 연이은 후속 뉴스와 루브르 박물관의 공간 개방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1914년 전시에서는 이틀 동안 1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몰려들 정도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치밀하게 계산된 황금비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모나리자> 또한 얼굴과 상반신, 이마와 눈, 눈과 코, 코와 턱, 그리고 인중과 입술 사이 거리가 모두 1:1.618로 그려져 있는 대표적인 예시로 소개된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신화적 믿음으로, 실제로는 오래 세월 회화에 사용되어 온 8:5 단비를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어쩌면 우리는 세간의 평가와 그럴듯한 의미 부여에 현혹되어 지나친 신비주의를 탄생시킨 것이 아닐까. 알다시피 완벽하게 이상적인 것이 존재하기란 불가능하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에 따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결핍된 존재로서 기본 욕구 너머의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을 가진다. 이처럼 닿을 수 없는 무언가에 갈증을 느끼는 과정에서 모순적인 쾌락이 수반된다. 즉, 끊임없이 타자를 욕망하면서 주체는 지속되는 것이다. 개인의 무의식적 욕망은 환상을 통해 표현되며 예술은 주체와 대상이 동일해지는 ‘타자성의 장’으로 기능한다. (권희원, 2021) 아직도 <모나리자>의 모델을 두고 어머니, 자신, 동성 연인 등 여러 추측이 난무한다. 그러나 개인의, 그리고 인류 집단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사실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심지어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기까지 하며. 예술은 크고 작은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이다. 창작하는 주체는 욕망을 눈앞으로 옮기고, 해석하는 주체는 욕망을 투영한다. 주관적 체험이 축적된 캔버스는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끝까지 욕망하고, 끝까지 저항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