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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의 머리카락처럼

아무튼, 머리카락

by 김진오 Mar 17. 2025

책상 위에는 무심히 굴러다니는 빗이 몇 개 있다. 출근 전에 머리를 감고 빗으로 머리를 빗다가 갑자기 삼손이 생각났다. 갑자기 삼손이 왜 생각났을까. 성경 속 삼손은 길게 기른 머리카락에서 힘이 솟아났고, 그 머리카락을 잃는 순간 모든 힘을 빼앗겼다고 했다. 

어렸을 때 '어린이 성서'에서 이 에피소드를 읽었을 때, “내 머리에도 대단한 힘이 깃들어 있는 걸까?” 하는 상상을 했다. 막상 나중에 성형외과 전문의가 되어 ‘탈모’와 ‘모발’만 줄곧 파고드는 사람으로 살게 되리라고는, 그때는 전혀 몰랐지만 말이다.


그 시절, 머리카락이란 건 왜 있는지도 모를 귀찮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내가 삼손 이야기에 흠뻑 빠졌던 날, 아버지가 웃으며 “삼손처럼 머리카락 길러볼래? 진짜 힘이 세지는지 한번 볼까?”라고 농담했던 것이 아직도 생각난다.
고등학생이 되고 삼손은커녕 보통의 헤어스타일도 하지 못했다. 교칙 때문에 머리를 짧게 잘라야 했고, 더 못생겨진 얼굴을 보면서 자존심이 상했다. 



삼손과 데릴라삼손과 데릴라


시간이 흘러 의학을 전공하면서, 모발에 대한 특별한 호기심은 꾸준히 이어졌다. 인체에서 가장 자주 ‘손상’되는 부분인 머리카락—빗질할 때마다, 드라이할 때마다 빠지는 존재. 그런데도 사람들은 머리카락 자체가 생명과 관계없는 별거 아닌 것에 불과하다고 여기면서도, 동시에 ‘자신감’이라고 말하지 않나. 누군가는 너무 곱슬거려서, 또 다른 누군가는 너무 힘이 없어서, 다른 이는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아 매일 염색약과 사투를 벌인다.
 결국 머리카락은 ‘대수롭지 않으면서도 절대적으로 중요한’ 아주 묘한 존재인 것 같다. 환자들 중에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제게는 전부예요’라고 말하며 눈물짓는 분도 있다. 이들은 대개 머리카락이 빠져나간 만큼 사라져 버린 자신감을 다시 찾고 싶어 한다. 


삼손의 잘린 머리카락은 말하자면 ‘맹목적 믿음에 대한 경고’ 같기도 하다. 길다고 해서 모든 힘이 깃드는 것은 아니며, 누가 몰래 잘라 간다고 해서 진짜 내가 가진 능력까지 빼앗길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것을 인지하고, 여전히 앞으로 걸어갈 수 있는 용기일 것이다.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다양한 환자들의 머리를 살피며, ‘이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자존감이다'라고 되뇐다. 삼손이 필요한 게 머리카락이 아니라 힘이었던 것처럼. 내게 있어 삼손과 머리카락 이야기가 계속 새롭게 다가오는 이유다.


오늘도 빗 하나를 손에 들고 머리를 빗는다. 삼손이 잃어버린 힘을 그리워하다 끝내 깨달음을 얻고 다시 일어섰듯, 누구나 잠시 넘어져도 다시 뿌리부터 자라나는 희망을 찾게 되길 바란다. 머리카락은 때론 잘리고 빠지고 얇아지기도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 자라나는 ‘나를 믿는 힘’은 결코 그렇게 쉽게 깎이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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