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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 숙영 Oct 07. 2024

버퍼링 걸리다

조급해하지는 말고

'특발성 망막하 신생혈관' 

-병명이기보다 발병 원인을 설명한 의학용어(자칭)


6~70대로 보이는 환자로 가득 찬 대학병원 진료실 앞 대기석. 그들 틈에 끼여 초조한 모습으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젊은 내가 보인다.  


의사는 원인불명이라 했고 병이 진행되어 서른을 바라보던 난 황반변성 환자가 되었다. 

황반변성은 노인성 질환인데 요즘은 젊은 층에서도 드물게 발생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병이 25년 전 나를 찾아왔다. '특발성'으로. 치료시기를 놓치면 실명하는 무서운 병이었다.

한창 일하고 아이들 키우기 바쁜 시기에 그런 병에 걸리다니.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그 시절, 실명이라는 절망 속에서 쓴 시의 일부분

엄밀히 말하자면 현재는 병이 진행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황반변성 환자는 아니다. 

하지만 화상이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기듯 손상된 시신경은 중심시력 장애라는 후유증을 남겼다. 적절한 시기에 치료해서 실명은 막았다. 


활자는 덜 지워진 글자처럼 형태를 알아볼 수 없었고 전봇대는 일그러진 채 서 있었으며 길바닥은 어지러이 일렁거렸다. 왼쪽 시야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경험해 보지 못한 공포였으며 대상을 확정하지 못한 분노는 슬픔이 되어 화살은 나를 향했다.  


난 활자로 된 모든 사물을 기피했다. 아픈 눈과 나머지 눈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배우며 알아가고 깨닫는 재미를 잃어버렸다. 대인기피증으로 나는 작아졌고 무기력에 익숙한 채 1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시각정보는 망막에서 인식된 정보가 시신경을 통과해 뇌로 전달된다고 한다. 눈을 통해 들어온 정보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시야를 통해 들어온 정보를 인식하고 해석하는데 버퍼링이 걸렸기 때문이다. 텍스트를 읽을 때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눈은 활자를 따라가는데 머릿속에 들어가는 건 미미했다. 작은 소리로 밑줄을 쳐가며 천천히 읽고 돌아가서 다시 읽었다. 도돌이표처럼. 

삶의 질은 떨어졌고 난 달팽이가 되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느릿느릿 기어가는.    


황반변성인 눈으로는 독서를 할 수 없다. 주변시력과 다른 쪽 눈을 쓰면 15분 정도 책을 읽을 수 있다. 두세 번 쉬어주고 수시로 눈을 깜빡여야 한다. 그래서 15분 독서도 나에겐 어렵고 힘든 노동이다. 하지만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다. 책을 읽는 건 비록 버퍼링이 걸리지만 눈이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황반변성을 받아들이니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노안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내겐 때가 일렀다. '때 이른 노안'이 불청객처럼 불편했다. 손님은 방문 후 돌아가지만 '노안'은 가지도, 돌려보낼 수도 없어 원망스러웠다. 


한 달에 한 번씩 진료받는 안과 주치의가 말했다.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다른 쪽 눈도 필연처럼 황반변성이 온다고. 한쪽눈마저 중심시력을 잃으면 난 어떻게 살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불안과 공포가 엄습한다. 나에게 남아있는 '눈의 시간'은 얼마나 될까. '눈 더 나빠지기 전에 책 읽고 글 쓰고 다양한 취미생활도 즐겨야 할 텐데'라는 욕구가 조급함을 부르고 격정에 사로잡힌다.   

마음을 다독이며 붓펜으로 쏜 글귀

하지만 멘털을 붙잡고 마음을 다스린다. 느리지만 활발하게, 내 속도와 가치관에 맞게 살면 된다고.   



시절마다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다. 40대 초반엔 시간이 순삭 되길 바랐다. 어느 날 눈을 뜨면 아이들이 성인이길 바랐고 새로 시작한 일은 자리 잡길 기대했다. 50대 중반이 되니 시간이 빠르게 가는 것 같아 흐르는 세월이 야속하다. 할 수만 있다면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질 만큼 남은 시간이 보배롭다. 어느새 아이들은 독립해서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에 부합되는 삶을 개척하고 있다. 나도 어제의 나보다 성장하고 있다. 조금씩 더디게. 


달팽이가 되고부터 도서관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과거의 나는 책을 진지하고 예의 바르게 대했다면 오늘의 나는 책을 즐기고 편하게 대한다. 호기심 가는 책을 기웃거리며 잠깐 의자에 앉아 책장을 넘긴다. 책 보는 사람을 구경하고 하릴없이 물도 한잔 마시고 갤러리에 들러 어슬렁거린다. 로비에 앉아 다양하게 진열된 책을 바라보며 도서관 속 풍경을 만끽한다. 도서관을 산책한다. 


사물과 세상을 보는 관점도 바뀌었다. 어쩔 수 없다면 인정하고 수용하게 되었다. 그러니 그걸 즐길 여유가 생겼다.  


버퍼링이 삶의 방향을 잡아주었고 속도를 늦춰주었다. 강제였지만. 이제는 그것에 만족한다. 

지금부터는 내가 주연인 동시에 감독인 인생을 살고 싶다. 그래야만 하지 않을까. 지난 시간이 아쉽고 남은 시간이 소중하다면. 

우울의 강을 건너 느리지만 활기찬 달팽이가 되었다. 

죽음을 기억하며 현재를 즐기는. 

지금 /    여기 /    다시 오진 않을 이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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