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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를그리다 Sep 29. 2024

엄마처럼 살지 않기를...

엄마 어렸을 적엔 -15, 마지막 회-

 "엄마, 다시 새 아파트 이사 가자."

 "나는 단독주택, 엄마~내 친구 oo 이처럼 나도 주택에 살고 싶어. 계단 있는 2층주택."

 구도시로 이사 온 후 잊을만하면 이사이야기를 꺼내는 아이들에게 나는 지금 환경도 아주 좋노라고, 집은 좀 낡았지만 구도심이라 교통이 아주 편리하고 걸어서 어디든 갈 수 있으니 좋지 않냐며 달래어보지만 별 효과가 없다. 어른에게 이사란 집을 구하고, 짐을 싸고, 이삿짐센터를 예약하고 등등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건만 철없는 아이들은 한 곳에 있는 것보다 새로운 곳, 이왕이면 새집에 가는 것이 무척 신나고 즐거운 모양이다. 아무튼 그렇게 이사를 열망하는 아이들에게 당장 이사 계획은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아이들 마음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나도 새 아파트가 좋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어릴 적 나는 이사 가는 것이 무척 싫었었다. 특히 완전히 다른 지방으로 떠나야 했던 날, 그날은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더랬다.


 "다음 주에 방학하면 우리는 경북에 있는 도시로 이사 간다. 그러니까 종업식날 친구들하고 인사 잘하고 온나."

 "이사? 왜? 왜 멀리 이사 가는데 아빠? 나 이사 가기 싫어."

철없는 막내딸인 나는 이사 가기 싫다고 이유를 모르는 척 떼를 써봤지만 사실 우리가 이사를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가장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기에 만난 골목길 집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이 너무 아쉬웠고, 무엇보다 이곳을 떠나면 다시는 엄마를 볼 수 없을 거란 두려움이 걸음을 떨어지지 않게 했다.

 아빠와 엄마가 몸싸움까지 하며 심하게 싸몇 달이 지났다. 그리고 엄마는 우리를 떠났다. 어디로 간다, 언제 온다 한마디 말없이 다신 안 올 것처럼 옷가지를 모두 챙겨 나갔지만 엄마가 우리를 완전히 떠났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어떻게 부모가 자식을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우리 집에서 키웠던 개 메리조차도 자기 새끼 떼내니 애처롭게 울지 않았던가... 나는 엄마가 그럴 리 없다 확신하며 엄마 기분이 나아지고 아빠랑 화해하면 곧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었다. 그리고 곧 그 바람이 이루어질 듯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을, 새 학기가 시작되는 무렵 아빠를 따라나선 외출길에서 엄마를 만났다.

 "엄마~ 이제 집에 오는 거야? 언제 와?"

 달려가 엄마에게 안기며 언제 오냐 물었지만 아빠에게 아직 화가 덜 풀린 모양인지 엄마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엄마, 아빠의 손을 양쪽에 하나씩 잡고 걸어가는 나는 무척 행복으니까...

 그땐 미처 몰랐다. 그때 따라나선 길이 아빠엄마의 마지막을 장식하러 는 길이다는 것을...

 양손에 부모님 손을 맞잡으며 행복한 미소 가득 품고 갔던 그곳은 가정법원이었다. 판사님 앞에서 엄마아빠는 질문에 간단하게 "네. 아니요"등의 대답을 하거나 뭔가 길게 설명하기도 다. 

 오고 가는 말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근엄한 표정의 판사아저씨가 입고 있는 넓은 소매 끝자락바라보다가 울먹이는 엄마의 얼굴과 기분을 없는 아빠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주 길지 않은 약간의 지루한 시간이 지나자 다시 왔던 길로 부모님의 손을 잡고 나왔다. 그리고 법원 앞에서 엄마는 나를 꼭 안아주었다.

 "아빠 말씀 잘 듣고, 언니, 오빠야 말도 잘 듣고, 자기 전에 화장실 꼭 가는 거 잊지 말고 알았제?"

 9살이 되도록 꿈에서 화장실을 가면 꼭 바지에 실를 하던 내가 걱정이었던지 엄마 마지막 당부는 자기 전에 화장실에 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마지막 남은 사랑을 꼭 담은 듯 품에 꼭 안아주었을 때 나는 왠지 모를 마지막을 직감했다. 그리고 몇 달이 흘러 아빠가 이사 이야기를 꺼내신 것이다. 아마 엄마는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린 적 없다는 듯 우리의 이사는 척척 진행되었고, 종업식날 학교친구들과 덤덤하게 인사를 나눈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전학절차를 새 학기 시작 전에 밟아야 했기에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 1월에, 아빠가 운전하시는 흰색 1톤 포터트럭에 몸을 싣고 낯선 경북의 작은 도시로 떠났다. 트럭 뒤 작은 창문으로 영아언니, 쩡이언니, 은이언니와 공주까지 모두 나와 트럭이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안녕, 골목길 친구들아. 안녕, 나의 추억아.'

 이전에는 몰랐던 '이별'이란 단어그날 처음으로   '슬픔'이란 감정으로 마주했다. 슬픔은 곧 눈물이 되어 뺨을 타고 흘렀다. 흐르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구미로 가는 차 안에서 한참을 울다 어느 순간 잠이 들었고,

 "와! 눈이다~!"

라고 외치는 언니의 목소리에 잠에서 깨었더니 아빠의 트럭은 어느새  정착지에 도착해 있었다. 내 평생 진눈깨비 외 눈이란 것 본 적 없었기에 울다가 잠들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차에서 뛰어내려 눈을 만졌다. 발목까지 쌓여있는 눈에 발자국을 남기며 강아지마냥 왔다 갔다 뛰어다니며 즐거워했다. 역시 아이는 아이다. 낯선 도시로 이사 온 우리를 반겨준 함박눈 덕에 엄마를 못 본다는 슬픔도, 나를 위해 눈물 흘려준 골목길 친구들 얼굴도 그렇게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이사 후 문득문득 떠오르는 추억과 기억이 때론 나를 슬픔에 잠기게 지만 나는 차곡차곡 내 마음을 시로 담아내며 외로움을 이기는 법을 터득해 갔다. 이제 누구도 10살 아이의 어리광 따위 받아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천방지축 선머슴으로 소문났던 왈가닥 소녀는 얼마 살지도 않은 인생 10년 만에 그렇게 일찍 철이 들어버렸다.


 "엄마는 어릴 적에 주택에서만 살았는데 아파트 사는 친구가 그렇게 부럽더라.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말도 있잖아? 지금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며 살자."

 당분간 이사 갈 마음이 없다고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 한 뒤 아이들이 현재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가짐을 가지길 바랐다. 이번엔 평소처럼 "엄마 어릴 적 엔 말이야..."라는 말로 라떼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가슴 아팠던 내 어릴 적 이야기를 듣고 아이들이 지난번처럼 슬퍼하지 않길 바랐다. 상처없는 사랑없다지만 세상 모든 아이들이 부모와의 사랑에서만은 부디 상처없이 자라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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