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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를그리다 Sep 22. 2024

엄마가 떠났다

엄마 어렸을 적엔 -14-

 "엄마, 왜 외할아버지랑 할머니랑 따로 살아?

 "두 분이 헤어지셨거든."

 "왜, 헤어져?"

 "서로 성격이 맞지 않아서 따로 살게 된 거야. 그걸 이혼이라고 해."

 아이들이 커감에 따라 아는 것도 많지고 궁금한 것도 많아졌다. 외할아버지댁에 갔다가 외할머니 댁에 따로 가는 것이 언젠가부터 이상하게 느껴진 모양이다. '언젠가는 설명해야겠지...' 했던 일이고 아이들의 물음에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생각했다. 다른 집 친구들과 뭔가 다른 우리 집의 가족사가 궁금할 수밖에...

 큰 아이가 8살이 되어 다시 물었을 때, 이제는 아이들에게도 솔직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어 비교적 담담하게 부모님의 이혼에 대해서 말해 주었었다. 나의 솔직한 대답에 완벽히 이해했는지 알 순 없었지만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이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리고 초등 고학년이 된 지금은 명절에 외할아버지댁에 갈 때면, 외할머니댁도 갈 것인지 우리끼리만 있을 때 조심스럽게 물을 줄 아는 눈치 생겼다.


 추운 겨울을 몰아내고 새싹을 깨우는 듯 조심조심 슬며시 불어오는 봄바람이 기분을 간지럽히는 계절. 바람은 새싹만 일깨운 게 아닌가 보다. 푸릇한 이팔청춘 이십 대를 자식 셋을 키우느라 정신없이 보낸 엄마에게도 봄바람이 찾아왔다.

 희고 고운 피부에 왕방울만 한 큰 눈을 껌벅이며 내내 소녀 같은 함박웃음을 고 있는 엄마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엄마에게도 봄바람이 다녀간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100원짜리 동전을 쥐어주며 나가서 놀다 오라는 말에 신이 나서 나간 뒤 구멍가게에서 쫄쫄이를 샀다. 연탄불 구멍 속에 쏘옥 넣었다가 빼내어 노릇노릇 해진 쫄쫄이는 그 맛이 일품이다. 또 남은 50원으로는 쪽자(달고나를 이르는 부산사투리)를 하나 사서 연탄불 앞에 쪼그리고 앉아 국자 끝에서부터 살살 저어가며 타지 않도록 능숙하게 만들었다.

 " 니 혼자 뭐하노?"

 열심히 쪽자 만들기에 심취한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어 쳐다니 자기 키만 한 높이의 문을 꽉 채우고 서있는 언니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가 용돈 주고 나가 놀라고 했다."

 "집에 또 사람들 많이 와 있나?"

 "어. 민이 이모야하고, 숙이 이모야하고, 모르는 아줌마랑 아저씨 한 명이서 지금 춤추고 있다."

 "하...."

 언니가 왜 한숨을 쉬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화난 표정을 보니 '엄마가 무척 복해 보였다'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속으로 삼켰다.

 "집에 가자. 고마."

 부모님이 맞벌이로 일 나가시는 우리 집에선 언니가 주로 내 보호자였기에 언니 말을 거스를 수 없었다. 어쩐 일인지 잔뜩 화가 난 언니의 심기를 건드려 좋을 것 없었기에 후다닥 똥과자로 만든 자를 손에 들고 쫄래쫄래 언니를 따라 집으로 갔다. 집 앞에 다다르자 여전히 전자 오르간의 앵앵거리는 음악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엄마와 엄마 친구들은 왔다 갔다 하며 열심히 지르박이라 불리는 춤을 추고 있었다.

 "벌컥, 쾅!"

 언니가 화난 감정을 그대로 담아 문을 열어젖힌 통에  미닫이 문은 큰소리를 내며 벽 끝에 가서 부딪혔다. 일순간 이모들은 얼음이 되어 동작을 멈추었고, 엄마는 당황한 듯 후다닥 전축의 전원버튼을 눌러 음악을 꺼버렸다.

 "왔나... 이제 다 갈라꼬 하고 있었다."

 1시간 전 행복을 가득 머금고 웃고 있던 엄마의 얼굴은 경직되어 붉으락푸르락 변해가고 있었다. 당황한 이모들과 아저씨는 쫓기듯 대충 신발에 발을 구겨 넣은 채 나갔고 언니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 데리고 오지마라고 쫌!"

 열 네살이 된 언니는 매우 예민했고, 나는 그저 집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예민한 언니가 더 예민해졌나 보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엄마는 봄바람과 함께 찾아온 '춤바람'이라는 것으로 인해 매일같이 집으로 사람들을 불러 지르박 댄스를 배웠고 그로 인해 집안일도 뒷전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계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쯤부터 아빠와 엄마는 종종 싸웠고, 얼마 후 옆집 예쁜이모네에서 일어났던 그날처럼 우리 집 물건이 던져지고 부서지는 큰 싸움이 일어났다.

 "니들은 다 나가있어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단호하고 무서운 아빠의 목소리에 우리 삼 남매는 부뚜막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서 문뒤로 와장창 깨지는 소리와 고성을 들으며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리고 얼마 뒤 꺼이꺼이하는 엄마의 울음소리만 낮게 들려왔을 뿐 사방이 고요해졌다. 아마도 이웃집 모두 우리 집안에서 일어나는 소리에 다들 숨죽이고 있었으리라...

 조심스레 방문을 열어보니 아빠의 흰 러닝셔츠는 다 찢어져있었고, 아빠의 눈에 걸려있던 안경은 한쪽으로 날아가 알이 깨져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눈두덩이가 부은 채로 119를 불러달라고 하더니 그대로 실신했다. 아빠는 그저 엄마가 잠시 기절한 것이니 놀라지 말고 함께 병원에 가라고 했다. 언니는 침착하게 방에 들어가 어질러진 방을 정리했고, 오빠와 나는 울면서 쓰러진 엄마와 함께 구급를 타고 인근 종합병원 응급실로 갔다. 그날 나는 오빠와 함께 병원 입구 계단에 앉아 꼬박 밤을 새웠다. 병원에 몇 시에 도착했던 건지, 몇 시간이나 그렇게 앉아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꽤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춘삼월이 지나가는 계절이라 그다지 춥진 않았지만 엄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 무서움에 오빠랑 부둥켜안고 울 떨다 꾸벅꾸벅 졸다 보니 시간이 흘렀고, 건너편 건물들 사이로 미미하게 하늘이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고, 아이들이 왜 병원입구에 앉아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물어봐주는 이도 없었기에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직 해가 다 떠오르기 전, 엄마가 밤에 봤을 때보다 더 시퍼레진 눈을 부끄러운 듯 가리고 나오다가 입구에 앉아있던 우리를 보고 화들짝 놀라 불렀다.

 "니들 여서 계속 앉아 있었디나. 얼른 집에 가자."

 엄마의 목소리에 졸다가 깬 나는 엄마를 보자마자 안겨서 엉엉 울었다. 엄마의 집에 가자는 말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다신 집에 안 들어간다고 할까 봐 조마조마했던 마음"집에 가자."는 한마디에 안심이 되면서 겨우 닫혔던 눈물샘이 다시 폭발것이다.

 하지만 그 안심이 두려움으로 바뀌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않았다.  몇 달간은 골목길 안집 모두가 평온한 듯 아무 변화 없이 조용했다. 조금은 습기를 머금 살짝 더운 공기를 몰고 온 바람만이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게 지나간 봄바람처럼 엄마의 춤바람도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다신 엄마의 봄햇살 같았던 웃는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괜찮은 줄 알았다. 하지만 잔뜩 습기를 머금고 눅눅해진 벽지 안에서 피어나던 곰팡이처럼 엄마의 마음에도 보이지 않는 곰팡이가 커져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장마가 끝나자마자 참았다는 듯 뜨겁게 타오르던 태양빛처럼, 엄마 마음속 곰팡이를 걷어내고 태양을 맞이할 준비를 했던 것 같다.

무더위를 맞아 초등학교도 방학에 들어가던 날, 엄마는 장롱에서 닥치는 대로 옷을 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옷가지들을 꺼내어 커다란 여행가방에 꾹꾹 눌러 담더니 그 길로 우리를 떠났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옷가지들과 활짝 젖혀져 힘없이 덜걱거리는 장롱의 문짝이 마치 우리 남매의 허탈한 마음 같았다. 옷장 가득 채워져 있던 옷들이 반이상 없어져 텅 비어버린 장롱처럼 우리 삼 남매의 마음에도 그렇게 다시는 채워지지 않을 커다란 구멍이 생겨버렸다. 

 그날 엄마는 구겨 넣은 옷 속에 우리를 향한 사랑도 함께 넣었을까? 아님 텅 빈 옷장 속에 같이 버려두고 갔을까...


 "할머니는 하고 싶은 것도 못 해보고 철없을 때 할아버지를 만나 결혼하셨대. 그리고 아이 셋이나 낳아 키우면서 많이 힘드셨나 봐."

 나이가 들고, 다시 엄마와 왕래하면서 가끔은 그때 일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때의 엄마를 완벽히 용서하진 못했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서 엄마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기에 아이들에게 외할머니에 대한 나쁜 편견은 주고 싶지 않았던 나는 조금은 엄마의 입장이 되어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내 말을 가만히 듣던 딸아이가 말했다.

 "그런데 엄마는 나랑 동생도 키우고 일도 하면서 우리 키우잖아. 그래도 우리 많이 사랑해 주고 아껴주는 우리 엄마는 진짜 대단하네? 엄마, 고마워. 사랑해."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안다더니 언젠가부터 딸아이가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듯한 말을 이따금씩 해주곤 했는이 말을 듣자마자 나는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언제 이 아이가 이렇게나 컸을까? 

  "엄마, 왜 울어? 울지 마. 엄마 울면 나도 슬퍼."

 내 눈물을 보며 함께 우는 아이들을 안고 한참을 더 울었다. 지난 내 어린 시절에 대한 애틋함과,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메워지지 않던 구멍이 조금은 메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 품에서 나와 함께 울어주는 내 아이들의 사랑이 엄마가 떠난 날 생겨버린 구멍을 메워주고 있었다.

 '그렇구나. 가족의 빈자리는 가족으로 채우는 거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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