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이라는 나라는 끝없는 지평선이 며칠을 차로 달려도 그 마지막을 보여주기를 부끄러워한다. 푸른 카펫을 펼쳐놓은 초원에 양이며 염소, 말, 순록, 낙타 등 가축화된 그들은 구속하지 않고 강제하지 않는, 자연의 풍만함 속에서 얽매이지 않고 복이 넘치는 축생의 삶을 즐긴다. 어쩌면 여기가 에덴이지 싶다. 다만 고마움의 표시로 젖과 고기와 털을 인간에게 나누어주면 공생의 규칙은 지켜지고 평화는 존속된다. 그들은 몽골리안의 오만함도, 징기즈칸의 자부심도 역사의 앨범 속에 박제 해놓고 소박함과 겸손함으로 초원을 지키며 산다. 다만 우리의 엉덩이에 지울 수 없는 몽고반점은 중국집 간판이라고 웃어넘길까?
이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적의 악기를 살펴보자. (부끄럽게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음을 고백하며 악기의 구조를 가르치려함이 아님을 밝혀둡니다.)
그들의 조상이 이 땅에 자리하고 마두금이라는 악기를 만들어 제사나 축제, 장례식에 사용했다고 한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모양은 바이올린 형태로 길이는 약 1m 정도이고 두 개의 현으로 되어 있으며 말꼬리의 털로 만든다. 음은 첼로와 비슷하고 찰현 악기로 해금과 같은 호금류 악기라 하고 음은 3옥타브 정도이며 활로 연주한다. 다만 악기 위에 말 모양의 조각을 붙여놓아서 마두금 이라는 이름을 달았다고 한다.
한 가지 더 알아야 하는 것은 흐미라 부르는 우리의 판소리 같은 전통 노래인데 도대체 이 노래는 아프리카의 원주민이나 남미의 정글에 사는 원시 부족들은 흉내도 못내는 세상어디에도 없는 하나밖에 없는 천상의 소리이다. 그 소리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의 창도 득음을 위해 폭포수 아래 귀에 들리지 않는 시끄러움 속에서 심연에서 올라오는 한의 소리를 만든다고 한다. 목에서 피가 넘어와 그 상처가 수년을 가도 스승에게 종아리를 맞아가며 피눈물을 흘리고 인내의 보따리를 수십 번 싸고 또 풀었으리라. 가슴에 한을 실은 소리가 청중의 가슴에 아픔과 슬픔의 절절함을 표현해야 한다고 가르친단다. 오죽하면 한을 품으라고 눈을 멀게도 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몽고 역시 어떤 한이 많은지 모르지만 제일 큰 한이라면 세계를 모두 지배해야 하는데 삼분의 일에 그친 한이 크지 않을까? 우리의 창보다 더 혹독한 훈련을 통하여 소리꾼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 흐미 라는 노래는 쉽게 예를 들자면 그 옛날 시골 장터에 가면
“몸에 좋은 비암 이야 비얌! 얘들은 가라”
외치던 목안에서 나오는 쇳소리 같은 뱀 장수의 그 소리가 기본인데 그 높낮이가 5옥타브를 오르내리며 두 개의 다른 음이 동시에 들리는 소리가 한사람이 부르는 신기한 전통 노래인 것이다.
초원이 끝날 즈음에 광활한 고비사막이 나타난다.
그 사막에 낙타가 산다. 등에 두 개의 봉우리가 있는 쌍봉낙타이다. 낙타는 사막의 배라고 할 정도로 사막에 최적화된 동물로서 한번에 100L의 물을 마시고 한 달 동안 먹자않아도 봉우리에 축적된 기름으로 살 수 있다니 대단한 가축이다.
사막은 척박하다. 길을 잃어 새끼와 어미가 헤어질 수 있고 모래 폭풍에 묻힐 수도 있다. 분만하다가 어미가 죽기도 하며, 병들어 죽기도하여 아직 젖을 떼지 못한 고아가된 새끼들이 가끔 나온다한다. 방사해서 사육하는 몽고의 초원에서 젖을 사람이 먹여 인공적으로 키우기는 어렵다 한다. 더군다나 수시로 이동하는 그들의 생활 습관이 더욱 어렵게 한다. 문제는 다른 어미는 남의 새끼를 접근조차 못하게 하고 젖을 동냥하러 달려드는 고아를 발로 사정없이 차버린다는 것이다. 이때 마두금을 어깨에 메고 나타나는 장인이 흐미를 노래하는 연주자이다.
먼저 약5분 정도 마두금을 연주하고 흐미를 노래하는데 인간이 들어도 눈시울이 젖어들 정도로 가락이 서글프다. 끊어질 듯 이어지고 사라질 듯 나타나는 그 곡조는 단장의 아픔과 찢어지는 가슴의 파열음을 전해주고 영혼을 만지는 샤먼의 신성 까지 담겨 있는 것 같다. 그 가사를 추리해보면 이런 것이 아닐지?
낙타야! 낙타야! 쌍봉낙타야!
너도 예쁜 새끼를 키워보았지?
어린 새끼가 엄마를 잃었단다.
배가고파 슬피 울고 있구나.
너의 따뜻한 젖 한 모금만 나누어주지 않으련?
죽어가는 저 새끼가 울면서 애타게 엄마를 찾는구나.
단 한 모금만 적선해주지 않겠니?
갑자기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조금 지나자 눈물이 흐르더니 아예 쏟아 낸다고 표현을 해야 할 것 같다.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는다. 소나 말도 눈가에 슬픔을 눈물로 나타낸다고 하지만 이건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듯 쏟아지는데 경악을 금 할 수 없다.
아무리 낙타가 물을 많이 먹는다 해도 이런 현상은 초자연적이지 않나 싶다. 이때 더욱 놀라운 것은 그렇게 냉정하게 발길질 하던 낙타가 젖을 내어주고 새끼를 핥아 주기 시작 했다. 인간과 동물의 교감이 신비스럽고 잠자던 모성애를 깨우는 저들의 악기의 선율과 흐미의 노래는 기적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러 형태의 모성애를 보고 들어왔다. 입안에 새끼들을 넣어서 키우다 자생력이 생기면 뱉어내고, 그동안 먹지 못한 아빠 물고기는 죽음을 맞게 된다. 연어는 태어난 계곡을 찾아 수천 킬로를 목숨을 건 산란의 여행을 마치고 죽어간다. 불이 난 화재 현장에서 아이를 끌어안고 죽음을 선택한 엄마의 품안에서 살아난 기적 같은 모성애를 ...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계모가 자식을 학대하는 것은 일상이고 엄마가 혈육인 자식을 추운 겨울날 벌겨 벗겨 얼어 죽게 만들고, 장애가 있는 자식을 집 안에 버려두고 한 달 동안 여행을 가서 굶겨 죽인 변질된 모성애는 분노가 아니라 전율을 일으킨다.
유전자가 변형되어 모성애를 잃어버린 마른 수수깡 같은 그들을 교화 하기위해 몽고의 그 악사를 초빙하여 눈물을 흘릴 때까지 공연에 참석 시켜 한 양동이 정도 차면 감형을 시키는 눈물의 파티를 열면 어떨까?
여기에 나의 두 딸을 악사에게 특별 과외를 부탁해야겠다. 독신주의를 선언하고 결혼을 발로 차버린 그녀들. 딸이 하나면 해외여행을 가고 둘이면 우주여행을 간다는데 다 그만두고 손자나 안겨 달라는 게 나의 버킷리스트 제 일번이 되어 버렸다. 우리 집안의 대를 끊어 버리려는 그들의 영혼을 변화시켜 죽어있는 모성애를 깨우자. 핵폭탄 급 모성애를 일으켜 아이를 가지고 싶은 욕망을 가지게 된다면 그 들 과의 지루한 싸움을 끝내고 나에게도 손자를 안아 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불가능은 아닐 것 같은데 사람에게도 효력이 있을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