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는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부모님과 형님과 누님, 남동생과 여동생, 4남 2녀였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계셨는데 아프셔서 돌아가실 무렵에는 셋째 아들인 우리 아버님에게 오셔서 몇 달 혹은 몇 년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아프셨다는 것밖에 없다.
지금까지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와서 불을 환하게 켜놓은 방에서 할머니의 수의를 만들고 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 방구석에서 자다가 일어나서 할머니를 더는 보지 못한다는 슬픔 때문에,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대여섯 살 때인 것 같다.
‘나도 죽으면 어떻게 하나? 엄마도 못 보는데 어떻게 하나?’ 하며 울었다. 조금 자다가 일어나서 또 울고, 소리도 못 내고 또 울고.
형들과는 나이 차이가 크게 났고 누나는 세 살 차이였다. 누나는 학교를 한해 늦게 들어가서 동기들보다 덩치가 컸다. 이 누님은 내 경호원이었다.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못했다. 누나의 친구들도 무척 귀여워했다. 그래서 중학교 다닐 때까지 누나를 언니라고 불렀다. 다른 사람들이 놀려도 그렇게 불렀다. 그렇게 부르는 것이 편하고 좋았다.
기억하기로는 우리 집은 그렇게 어려운 집은 아니었다. 먹고살기에 몹시 어려운 형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단지 아버지의 큰 형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이 문제였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었는데도 불구하고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일해본 게 별로 없다. 내게 주어진 일은 소를 뜯기는 일이었다. 여름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소를 끌고 산으로 들로 풀을 뜯기러 다녔다. 친구들과 함께할 때도 있었지만 같이 몰려다니면 제대로 풀을 못 뜯기게 된다고 혼이 난 후로는 혼자 다닐 때가 많았다.
우리 악동들은 책에 있는 그림에서 본 대로 소등에 타고 싶어서 안달했다. 사람을 등에 태워보지 않은 소들은 사람을 등에 태우면 펄쩍펄쩍 뛰면서 사람을 떨어뜨렸다. 우리도 한 번씩은 소등에 올랐고 날뛰는 소 때문에 땅바닥에 내쳐졌다. 그래도 우리는 타보고 싶어 했다. 나도 타보고 싶은 욕심에 소를 물도랑에 몰아넣었다. 우리 소는 태워줄 거라는 근거 없는 희망을 품었다. 내가 그렇게 많이 소 뜯기기를 했는데 설마 나를 떨어뜨리겠어?
도랑 옆의 길이 소등보다 약간 낮았으므로 올라타기는 아주 좋았다. 나는 호기롭게 소등에 올라탔다. 하지만 우리 소도 다른 소와 똑같았다. 내 희망을 박살 내고 물도랑 속에 처박았다. 온통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집에 가면 혼 날까 봐 옷을 빨아서 젖은 채로 입었다. 다행히 집에 갈 때까지 다 말랐다. 그날 우리 소는 내 회초리 맛을 호되게 봤다.
소를 뜯길 때도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는데 공부한다고 자랑하느라고 그랬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조용히 노는 편이었고, 집에서 무언가를 만드는 것과 책 읽기를 좋아했다. 형이나 누님 책 읽는 것이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나았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큰 형님은 서울에 취직해서 가셨고 작은형은 군에 입대했다. 집에는 일꾼이 부족했다. 누님은 농사를 도우셨고 나도 조금씩 농사일을 도왔다.
아버지는 교육열이 있어서 서울에 있는 형님께 딸려서 고등학교로 보냈다. 고등학교 입학과 때를 같이하여 형님의 사업이 실패했고 형님 집은 살림이 어려워졌다.
고교 시절의 첫 시작은 큰형의 신혼 단간 방에 딸린 부엌 위 다락방이었다. 일 년을 보냈다. 그 후에 완전히 망해버려서 2학년 때에는 서초동에 있는 친척 집으로, 3학년 때에는 포이동으로 쫓겨 다니며 학교에 다녔다.
그 시절 강남은 허허벌판이나 마찬가지였다. 완전 시골이었다. 서초동은 돌보지 않고 버려진 과수원들이 있었고, 불도저로 밀어놓은 흙무더기와 큰 돌덩이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 논과 밭이 흩어져 있었다.
강남대로는 길은 넓은데 가운데 2개 차선만 포장되어 있었다. 길옆으로는 작은 단층집들이 길을 따라 일렬로 서 있었다. 왼쪽 산 위에는 태권도 국기원 하나만이 덜렁 자리 잡고 있었고 오른쪽에는 고속도로 옆으로 칠성사이다 공장이 보였다. 밤이면 고속도로에서 나오는 바람 찢는 소리만이 강렬했던 곳으로 기억된다.
포이동은 완전히 시골이었다. 작은형과 둘이 세 들어 사는 주인집은 농사짓는 집이었는데 소를 여러 마리 키우고 있었다. 학교에 가려면 집에서 나와 논둑을 가로질러 말죽거리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서 차를 타야만 했다. 가을에는 논둑 옆으로 늘어진 노란 벼 이삭들이 이슬을 가득 머금고 언제든지 뿜어낼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이슬에 내 바지와 책가방을 흠뻑 적시곤 했다.
그 시절의 통학버스는 늘 만원이었다. 약수동쯤에 오면 학교 앞 정류장에 학생들이 내렸다. 이제 갓 중학생이 된, 키가 제 가방만 한 여자아이들이 버스에서 몸만 빠져나와 발을 동동거리며 울기 일쑤였다. 차 안에 승객들은 책가방을 머리 위로 농구공 패스하듯 건네서 내려줬다.
그 시절 나는 여전히 잘 웃고 잘 떠들던 철부지였다. 가난한 것은 형이나 형수 몫이었다. 학비는 어떻게 하든지 만들어 주셨다. 정말로 가난하다고 느낀 것은 대학에 가지 못하고 일찍 포기했을 때였다.
졸업식과 학교에 갔더니 담임선생님 말씀이
“너 졸업 못 하는 줄 알았다. 수험료가 두 번이나 밀렸었더구나.”
2학기 수업료를 통째로 못 내고 있었다는 말씀이었지만 전혀 알지 못했고 그만큼 태평했다.
“어제 확인해 보니 냈더구나”
그렇게 졸업했다.
그리고 형이 주선해 준 대로 저울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다. 몇 달 다니다 보니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다행히 군에서 제대하고 공장에 다니던 작은 형이 도와주셨다. 공부를 시작했다.
아카시아꽃도 져버리고 오월도 다 지나간 초여름이었다.
그러나 대학입시에 실패했다. 시작이 너무 늦었고 학원에 다닐만한 형편이 못되어 혼자 공부하다 보니 역부족이었다.
다음 해 봄 나는 큰 형을 따라다니며 절의 불사를 했다. 형은 미륵부처를 만들었다. 6~7m 크기였다. 그 앞에 시멘트로 다보탑과 석가탑을 만드는 것이 내 몫이었다. 높이가 2m 정도 되는 작은 모형이었다. 3~4개월 정도 따라다니며 몇 개를 만들었다. 그 일도 시들해져서 고향 집으로 내려왔다.
몇 개월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해 여름이 되자 다시 대학에 가고 싶었다. 실력도 없고 대학 다닐만한 경제력도 없는 젊은이의 괜한 몸부림이었다. 2달 동안 준비를 했으나 또 떨어졌다. 뚜렷이 할 일 없는 젊음의 분출구 없는 방황의 시간이었다. 다음 해 봄에 군에 징집되었다.
3년간의 군 생활이 끝나고 또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미 부모님은 환갑을 넘으셨다. 연로하신 부모님께서 농사짓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돈 없는 서울 생활에 지친 나는 고향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렇게 농사꾼의 삶이 시작되었다. 기울어진 가세와 집이 가난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돈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부모님 모시고 산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부모님께 얹혀사는 생활이었다.
돈보다는 하루하루 친구들과 어울려서 이웃집 형님들과 농사일하는 것이 좋았다. 그렇다고 전혀 근심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농촌의 가난은 발바닥의 껌딱지처럼 내게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머리를 흔들며 떨어 버리려고 애썼다.
하루하루가 똑같은 시골 생활이 감수성이 왕성한 젊은이에게 마냥 좋을 수만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문화생활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TV도 라디오도 없었다. FM 라디오 방송은 언감생심이었다. ‘별이 빛나는 밤에’ 같은 인기 있는 심야방송이 있었지만 내 고향은 난청 지대였다. 그 당시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외국의 팝송이나 포크송을 들을 기회조차 없었다. 그래서 내 젊은 날의 몇 년간은 유행가나 팝송에서 완전하게 단절된 시간이 있다.
어쩌다 토요일 저녁이면 친구와 함께 면 소재지 다방에 가서 TV에서 방영하는 토요 명화를 보는 것이 우리의 문화생활의 전부였다. 어떤 때는 다방의 아가씨들은 소파에 기대어 잠들어 있고 나와 친구만 영화감상을 하고 있었다.
영화가 끝나면 우리는 나오면서 그들을 깨워 가게 문을 닫게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주인아주머니께서 우리들의 영화감상을 막지 말라고 해서 늦게까지 우리는 영화감상을 할 수 있었다. 고마운 분이었다.
매일의 고된 일과 속에서도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읽었다. 책이건 잡지건 찢어진 신문지도 눈에 띄면 읽었다. 어쩌다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갈 때도 저녁에는 책을 몇 권 들고 왔다. 잡다한 지식으로 머릿속을 채우며 하루하루의 노동을 이어갔다. 읽을거리는 힘든 노동의 탈출구였다.
어릴 때부터 있었던 지적인 호기심은 밤늦게까지 책을 읽도록 만들었다. 우리 집은 담배 농사를 지었는데 새벽 다섯 시면 품앗이하러 다른 집에 일 가야 하는데 세 시 네 시까지 책을 읽다가 쪽잠을 자고 일하러 가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때의 일기장에는 젊은 날의 고뇌가 갈피마다 남아있다.
지금도 후회되는 한 가지가 있다. 고향에는 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동생들이 있었다. 그 동생들은 영어를 읽고 쓰고 싶어 했다. 어느 날 내게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못했다. 농촌의 일과는 피곤했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지금도 이것이 마음 한구석에 미안함으로 남아있다.
4년간의 농사일이 끝나던 가을에 나는 내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는 농촌에서의 삶은 희망이 없다고 느껴졌다. 경제적인 면에서 점점 쇠퇴해 갔다. 가난한 농사꾼의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연로한 부모님만 괴롭히는 꼴이었다.
부모님을 도와 농사지으면서 행복하게 살겠다는 야무진 꿈은 치기 어린 생각일 뿐이었다. 기울어진 가계를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겨울에 사용할 땔나무를 준비하면서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
“아버지 농사짓는 것은 장래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해마다 빚만 늘어가고 가난을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아버지는 말이 없으셨다.
“나가서 돈 벌렵니다.”
“무슨 계획이라도 있니?”
“대전에 전기 가르쳐주는 학원이 있다고 하는데, 그곳에 가려고 합니다. 기술 배워서 해외 가서 돈 벌어오겠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중동 건설 붐으로 뜨거울 때였다. 젊은 노동력은 넘쳐났고 국내에는 일거리가 부족했다. 해외에서는 우리의 노동력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흐르는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끝내지도 못하고 아버지 앞에서 일어나서 내 방으로 건너갔다.
내 인생의 한 시절의 농사일은 그렇게 끝났고 늙으신 부모님의 깊게 파인 주름을 뒤로하고 고향을 떠났다.
29살, 겨울이 깊어져 갈 무렵이었다.
그 후에 대전전기 학원에서 한 달간 전기를 배워서 고리원자력발전소로 갔다. 학원은 겉으로 내보이는 간판이었고 실제적으로는 인력 소개소격이었다. 본격적인 전기 쟁이로 가난의 탈출을 꿈꾸었다. 가을에 보령화력 발전소로 옮겼다. 이듬해 봄 3월에 해외 노동자로 싱가포르 현장으로 떠났다.
푸르른 20대가 끝나는 30살, 개나리가 노랗게 꽃망울을 터트리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