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욱래 장편소설 《이탈-그 여름의 추억록》 제2부
잠시 후면 끊어질 생명의 절박한 모종의 시도를 그는 오른쪽 신발 밑창으로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저무는 하늘만 바라보았다. 아직 그에겐 잠시의 여유는 남아있었다. 많은 것을 정리해 보기엔 너무 촉박했지만, 그 여분의 시간을 조용히 저녁 하늘을 감상하는 데 쓰고 싶었다. 그 어스름한 하늘이 그에겐 특별했다. 어차피 이미 결심했던 일이었다. 상병을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는 단지 자신을 표현해야 했었다. 자신이야말로 찌질하게 겨우 상병 하나를 으깨어 놓고 엄청난 대가를 받겠지만 그는 담담했다. 인생이란 언제나 되는 데로 흘러왔었다. 거기에서 더 나은 무얼 바랄 것도 없었다. 그는 그저 홀가분했다.
그가 먼 하늘만 쳐다보고 있자 서정락은 기회다 싶어 부지런히 딴전을 피웠다. 살기 위해서 서정락은 혼신의 힘을 다했다. 하늘을 바라보며 무슨 상념에 잠겨있는 제 지배자에게 혹 들킬까 봐 조바심을 내면서도 꼬물거리며 한 손으로 땅을 파내고 있었다. 서정락은 딱딱하게 박힌 돌멩이를 제발 제가 제발 뽑아낼 수 있기를 기도했다. 지배자는 그 짓을 그냥 용인하고 있었다. 모든 게 귀찮았다. 이등병연기란 게 정말이지 치가 떨렸다. 지금부터 다 뒤집어버릴 테다. 왜냐고? 그럼 그래서는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그의 아랫배로부터 증오가 끓어올랐다.
서정락은 용케 들키지 않았다고 믿었다. 간절한 심정으로, 손톱이 젖혀져 피가 나도록 파낸 돌멩이로 제 경부를 밟고 있는 지배자의 발목을 찍으려는 회심의 순간, 절절한 서정락의 기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살짝 발을 뺀 그가 그대로 서정락의 손목을 걷어차버린 것이었다. 서정락이 남은 힘을 다해 휘둘러보았던 그 구석기는 3m 정도를 날아가 땅바닥에 굴렀다. 그는 돌멩이가 서정락의 손아귀에서 이탈되는 순간 그대로 그 발을 끌어들여 솟아오르는 머리통을 공 차듯 다시 걷어찼다. 그 일련의 동작들에는 전혀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가 공을 그렇게 다뤘었더라면 그 모멸을 겪을 이유가 없었을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에겐 공은 공이고 머리통은 머리통일 뿐이었다. 머리통에 가해진 충격은 상당할 것이었지만 서정락의 그것은 무슨 돌멩이같이 원체 옹골졌다. 오히려 그 충돌에너지를 이용해 벌떡 일어난 서정락은 언덕 아래쪽으로 냅다 튀기 시작했다.
그의 다리 힘줄은 아직 정상이 아니었다. 그런 다리로 돌멩이나 진배없는 머리통을 걷어찼던 그가 상을 찌푸리며 곧바로 서정락의 구석기를 집어던졌다. 구석기가 빨랫줄처럼 곧장 뻗어갔다. 오금에 정확히 돌멩이를 맞은 서정락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그때부터는 데굴데굴 비탈을 굴러 내려갔다. 막사 뒤뜰에 처박힌 서정락이 처음엔 얼마간 죽은 듯이 꼼짝하지도 않고 쓰러져 있었다. 그러다가 불쑥 다시 일어난 서정락은 비틀비틀하면서도 황망히 이동했다. 서정락의 도주로는 단순했다. 막사의 좁다란 뒤뜰로 내빼더니 곧장 애초에 기가 막힌 사건이 비롯된 시커멓게 타고 찌그러진 그 양철통 앞, 얼마 전까지도 제가 지배하던 교육장을 통과해 벽 모퉁이에서 사라졌다. 도주 방향으로는 서정락이 사람 살리라며 1 내무반으로 뛰어들어 갔을 게 분명했다.
그가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체육복을 내려다보니 여기저기 온통 피 칠갑이었다. 상상 속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어스름해지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에겐 주위의 색채가 변해있었다. 살짝 저녁 미풍이 스쳐 갔다. 황야의 것들처럼 마구 자란 들풀과 가시나무들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처럼 정이 갔다.
저런 개새끼는 죽일 가치도 없어……. 그는 살아보려고 내뺀 상병을 경멸하면서 담배를 다시 꺼내 물었다. 수도 없이 걷어차였던 허벅지가 뜨끔거렸다. 이젠 어찌할까 하다가 그는 터덜터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래 난 잘라버린 거야. 그는 웨인 다이어의 말을 되새겼다.
나 자신을 믿고, 나 스스로 결정을 내린 인생을 사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믿고, 남이 한쪽 끈을 잡고 반대 방향으로 잡아당기려 하는 끈을 잘라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약간의 절망은 섞였지만 단호한 심정으로 그는 그 언덕을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