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욱래 장편소설 《이탈-그 여름의 추억록》 제2부
이제는 일 없을 쓴 물 나는 막사 뒤편 쓰레기통 쪽으로 그는 느릿느릿 돌아갔다. 거기에 구부정하게 선 가련한 이등병 하나가 맛나게 담배를 빨고 있었다. 침상에 걸레질을 막 끝낸 참이라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손정원이 잠시 한숨 돌리는 중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손정원이 보니 터덜거리며 달랑 하나뿐인 소대 후임병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서정락에게 저녁마다 불려 나가는 것도 길어야 이제 일주일 정도면 끝날 것이었다. 요즘 손정원은 약간 들떠있었다. 제 밑에도 어느덧 후임병이 들어오니 안 갈 줄만 알았던 시간도 이제 좀 가는 것 같았다. 소대 신병이 대는 좀 센 듯했지만, 눈썰미도 있고 머리도 좋은 것 같았다. 손정원은 그가 든든했다. 그가 앞까지 왔을 때 손정원은 깜짝 놀랐다. 그날, 소대 후임병이 얻어맞던 그곳엔 아무도 없었고 손정원은 코가 저릴 듯한 화장실 말고 오랜만에 쾌적한 공기를 맡으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 신병의 체육복엔 피로 온통 칠갑이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손정원은 부리나케 검지를 튕겨 불똥을 털고는 막사 지붕으로 담배꽁초를 쏘아 올렸다. 손정원은 오해할 만도 했다. 누가 그랬냐고, 도대체 누구냐고 자꾸 손정원이 그를 귀찮게 했다. 손정원과 차요철은 전라도 병력이었지만 인간성은 확연히 다른 듯 보였다. 역시 지방색만으로는 선입견을 가질 것이 아니었다. 전라도 출신이 어쩌니 해도 사람마다 다른 것이 맞았다. 그가 전입온 후 손정원은 소대 ‘쫄다구’를 하나 겨우 받은 기쁨을 애써 숨기려 했지만 미숙했다. 신이 난 손정원은 제 ‘쫄다구’에게 무슨 누이같이 소곤소곤 상냥했다. 모포 각 잡는 거나 관물대 정리정돈, 침상 ‘미싱하우스’ 등 자질구레한 것들을 매우 보드랍게 알려주면서도 제 말로는 전주 시내에서 제일 큰 나이트클럽을 아지트로 하는, 그 클럽 상호이기도 한 ‘월드컵파’ 소속이라고 떠벌렸다. 물론 손정원과는 어울리지 않는 과거였다. 손정원의 그 후임병은 그 ‘월드컵파’가 무슨 조직이 아니고 어떤 댄스팀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한때는 조직원이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기는커녕 그에게 이것저것 가르쳐줄 때나 뭘 조심스레 시킬 때 와닿는 여성적일 정도로 여리고 다감한 손정원의 성격 때문이었다.
처음에 그는 손정원에게든 누구든 말을 놓아버리려고 했었다. 어차피 때려치운 신병 연기였다. 하지만 손정원의 쪼끄맣고 가냘픈 이등병 계급장을 잠깐 쳐다보다가 평상시 그 자그마하고 까무잡잡한 얼굴이 씩, 웃음 질 때마다 일본 여학생 모양으로 귀엽게 드러났던 덧니가 떠오르자 그는 그러기가 힘들어졌다. 원인 모르게 갑자기 그도 감상적이 되어, 선뜻 그 불쌍한 바로 위 고참, 아니 한때는 고참이었던 이에게 말을 놓기가 쉽지 않았다. 속으로 그는 제기랄, 하고 짜증이 났다.
“아니, 제가 그런 겁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손정원은 믿지 않았다. 그가 자해라도 한 줄로 안 손정원은 후임병의 몸을 구석구석 살폈다.
“그게 아니고, 서정팔이 그 새끼 박살 냈습니다. 후훗, 이거 그 자식 핍니다.”
그가 허탈하게 웃을 땐 이미 손정원의 눈이 동그래진 뒤였다. 그래도 서정원은 믿을 기색이 없었다. 그는 더듬대며 계속 사실을 확인하는 서정원의 짙은 갈색 얼굴이 빠르게 핏기가 사라지며 연회색으로 변하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는 더는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곧 왠지 좀 알려주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예. 그 새끼 박살 낸 거 맞습니다. 대공초소에서 지금.”
갑작스레 손정원의 어깨가 푹 무너졌다. 잠시 후 기가 막혀서 콱 막혔던 숨을 손정원이 토해냈다.
“크……큰일 났다. 우권아. 이……이제 어쩌면 좋냐? 고……고참들이 알면 넌 죽어. 가만있자. 그래, 우……우선 거기, 그래, 화장실로 가서 숨어. 그 새끼 아직 고참들에게 이르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더듬거리면서도 손정원은 다급했다.
“그래, 그, 그 새끼 고참들에게는 얘기 못 할 거야. 쪽팔려서. 내가 상황 보고 알려줄게. 자, 빨리, 우권아, 어서!”
손정원은 조급하게 그의 등을 떠밀었다.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그가 편안한 한숨을 뱉었다.
“지랄 말고 빨리 가. 가 있으란 말이야. 내무반 가서 돌아가는 거 보고 갈 테니까.”
안절부절못하는 손정원의 몸짓에서 어떤 정 비슷한 것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손정원을 포함 상병 5호봉 이하들이 서정락이란 인간을 여태껏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는지 그는 그게 문득 의아했다.
손정원은 처음엔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내무반으로 뛰어들어가다가 모종의 벅찬 희열에 휩싸였다. 저도 모르게 쾌재가 새어 나왔다. 서정팔, 개새끼. 언젠간 내 그럴 줄 알았어. ……우권이 자식! 이 괴물 같은 놈…. 손정원은 웃음이 터져 올랐지만, 간신히 낯빛을 간추렸다. 이제 분명 어떤 변화가 올 것이었다. 불안한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손정원은 무슨 잔치같이 괜스레 신나고 들떴다.
잠시 그는 망설였다. 하지만 그래도 하나뿐인 소대 ‘쫄다구’를 어떻게 한번 살려보겠다는 그 이등병 때문에, 썩 내키진 않았지만, 손정원이 통사정한 대로 터덜터덜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허, 이딴 곳에도 일말의 의리 같은 게 존재한단 말이지……? 그는 약간 맥이 빠지는 것 같았다. 화장실 슬레이트 지붕 위로 저녁 어스름이 덮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