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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 대

김욱래 장편소설 《이탈-그 여름의 추억록》 제2부

by 김욱래

팔을 푼 그가 천천히 일어났다. 서정락은 꼭 헛것을 보는 것 같았다. 뜨악한 서정락은 이제 제 시력도 의심스러워졌다. 신병이 허락도 없이 일어섰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노려보며 옅은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서정락은 그가 왜 일어서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고 궁금하기도 했다.

“뭐, 뭐야. 누가 일어나랬어? 대가리 다시 안 박아?”

서정락이 어쩌나 보려고 계속 장난치는 것에 그는 이제 흥미가 사라졌다. 그는 지금까지 연기를 하고 있었다. 이제껏 모든 것은 연기였다. 충실한 이등병 연기! 진짜 신병인 척한 것도, 두드려 맞고만 있었던 것도, 남들이 처맞는 것을 멍청히 보고만 있었던 것도 전부 연기였다. 그런데 이제 그 연기는 더는 감당할 수 없는 중량으로 한계점을 넘었다. 인생의 모든 것이 다 연기라지만, 그중에서도 육군 이등병이라는 배역은 정말이지 이제 그도 더는 견뎌 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그 연기가 너무 지겨워졌다. 이제부터라도 그는 다시 스스로에게 진실한 인간이 되고 싶어졌다.


경악한 서정락이 뒷걸음질 치다가 입을 벌린 채 멈췄다. 공포로 얼어붙은 사냥감을 향해 늑대처럼 그가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갑자기 오른 다리를 움찔하려다가 상을 찡그렸다. 서정락은 이때다 싶었다. 그의 뺨을 갈기려고 서정락이 손바닥을 쳐드는 순간이었다. 쾅, 하며 뭔가가 서정락의 왼 볼에 작렬했다. 서정락은 무슨 해머에라도 맞은 듯 빙빙 돌아가는 정신으로 무너지듯 풀밭에 고꾸라졌다.

서정락의 아구창에 주먹을 꽂아 넣은 그는 여전히 말없이, 땅바닥에 처박힌 서정락의 멱살을 잡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서정락은 아득한 정신으로도 무슨 말을 좀 해보려고 버둥거렸지만 소용없었다. 이번엔 그가 서정락의 마름모꼴 머리통을 싸쥐더니 무릎을 면상에다 몇 번 꽂아 올렸다. 곧바로 선혈이 터졌다. 피범벅이 되어 흉측하게 이지러지는 서정락의 면상에서 처절하고 구슬픈 신음이 비져나왔다.

그가 머리통을 풀자 서정락의 몸뚱이는 풀잎처럼 깔렸다. 서정락의 목을 지그시 밟은 그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꺼낸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후, 하고 한숨 같은 연기를 뱉으며 활주로 건너 멀찍이, 흡사 무슨 피라미드처럼 생긴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산은 어스름해져 있었다. 그 삼각산을 빗대서 남들이 떠들던 얘기가 있었다. 군 생활이 산 중턱까지는 갔다느니, 꼭대기를 넘어서 이제 꺾였느니 어쩌니 하는 것들이었다. 난 겨우 산기슭에서 종 치는구나. 그럼 너희들은 내가 무슨 선택을 하길 원했나……, 그는 그렇게 체념했다.


뻗어 누운 상병의 목덜미를 지르밟은 그가 나직하게, 그러나 어둡게 그르릉 대는 무서운 음성으로 말했다.

“어이, 서정팔. 오늘 널 패 죽일 거야.”

서정락이 숨을 쉬어보려고 입을 떡 벌렸다. 그 입은 갑자기 물 밖으로 끌려 나온 메기 아가리 같았다. 그는 허리를 숙여 질식의 공포로 메기의 그것처럼 벌어진 서정락의 입안에다 담뱃재를 털어 넣었다. 메기 아가리 모양의 재떨이가 컥컥 댔다.

“……너, 내가 인간 이등병으로 보였나 보다? 그치? 서열? 까고 있네. 이제 어떠니? 서열 같은 거 ×도 아니지? 인생은 그런 거야 인마. ……하기야 너희 같은 놈들 인생에 무슨 철학 같은 게 있을 턱이 없지.”

물론 서정락은 그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그도 무슨 대답 따윈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확고하게 단정하고 있었다.

“군 생활 일 년 좀 넘게 하면 엄청 출세한 거냐? 그게 뭐라고 그 지랄을 해댔냐? 씨발, 인간들이란…… 다 그 지랄들을 떨어. 모조리 처맞아야 해!”

그는 인간 재떨이를 경멸적으로 내려다보고 있다가 또 어떤 이야기가 뜬금없이 떠올랐다.


지도자가 되지 않으면 자신보다 못한 사람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다.


그의 판단으론 플라톤(Plato)*이 얘기했던 듯싶었다. 잠시 전의 훈계에서 그가 철학 어쩌고를 운운했던 탓일 터였다.


그도 서정락을 지배하기로 했다. 그는 허리를 굽혀서 생사의 갈림길에 묶여 요동하는 상병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야, 인마. 세상엔 병신 같은 놈들만 있는 게 아냐. 네놈처럼 살면 이렇게 뒈지는 거다. 기분이 어떠니? 너, 오늘 뒈지면서 새겨들어! ……어이, 서정파리. 개새끼는 말이다. 바로 너 같은 놈이야. 내가 교육시키는 거 잘 듣고, 뒈진 다음에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그렇게 살지 마라.”

상병의 몸뚱이가 꿈틀댔다.

“……어이, 서정팔, 이 개자식아. 그 지랄을 떨면 누가 너 무서워할 것 같았지? 천만에, 이 병신아. 지금까진 용케 살았어. 그치? 네놈은 임자 만난 거야. 너희 개새끼들. 군대가 처음부터 그러라고 시킨 거야, 그냥 너희들이 알아서 핥는 거야? 병신 같은 새끼들…. 인생엔 이깟 군대 생활만 있는 게 아냐. 인간 세상은 다 마찬가지야. 잠깐 설치다가 골로 가는 거지. 너, 여기서처럼 사회 나가서도 그러면 맞아 죽어. ……그래! 하긴. 어차피 뒈질 테니까 내가 끝을 보지.”

서정락의 몸뚱이로부터 격렬한 경련이 그의 활동화 밑창을 타고 올라왔다. 살고 싶어 하는 구차한 목숨의 몸부림에 그가 냉소했다. 이런 병신 같은 새끼한테 처맞은 걸 생각하면, 후……, 그는 이제껏 왜 자신이 서정락에게 몸뚱이를 내맡겼었는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군대라는 게 참 더러워요. 내 참, 같잖아서……. 그가 허망하게 웃었다. 그가 서정락을 으깬 것은 어찌 보면 생물학적 요구였다. 빵빵하게 들어찬 묵은 변을 내보내야 하는 것처럼. 그래야 살 수 있는 것처럼. 그가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너 같은 찌질이 때문에 이게 뭐냐? 그래! 개 × 같은 군대. 너 죽이고 육군교도소 가자. 자, 마지막이다. 참회해, 이 새끼야. ……서정파리, 잘 가라.”

그가 이렇게 말을, 아니 욕을 많이 해보기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는 큰 대자로 누운 상병의 목을 여전히 밟고 선 채 오히려 담담히 식은 마음으로 감감해지는 먼 하늘을 한동안 응시하고 있었다.




* 귀족 출신이었던 플라톤은 레슬링과 판크라티온에도 조예가 깊었다. 판크라티온은 글러브를 끼지 않고 하는 권투와 레슬링이 조합된 잔인한 경기이다. 플라톤이라는 이름은 ‘어깨가 넓은 사람’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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