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욱래 장편소설 《이탈-그 여름의 추억록》 제2부
오후인데도 웬일로 작업이 없었다. 대신 연병장 가에 아기자기하게 늘어선 특공장애물 코스를 몇 번 통과했다. 그러는 중에 지프차가 한 대 들어왔다가 갔다. 체력단련시간이 끝나고 내무반으로 돌아와 주황 체육복으로 갈아입으면서 그는 누구의 무슨 문장들을 기억해 내려고 애를 썼다. 벌써 머리까지 굳어버린 것 같았다. 그게…… 용기는 비판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가는 것……, 그리고 그다음엔……, 그는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드디어 어김없이 서정락이 손짓해 불러냈다. 둘만의 볼일이 있었다. 그가 군용 ‘솔’ 담뱃갑과 일회용 플라스틱 라이터를 천천히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 넣고 일어나며 한숨을 낮게 푹, 하고 내쉬었다. 내무반을 나서는 그의 몸은 그리 무겁지 않았다. 막사 뒤편으로 막 돌아갈 때에서야 웨인 다이어(Wayne Dyer)*1의 그 말들이 명확해졌다.
용기란 비판의 한복판에 뛰어드는 것. 자기를 신뢰하는 것. 자기의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이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가 뒷벽에 붙어 서자 서정락이 시작했다.
“이제 군가는 웬만큼 하지? 자, 군가 한다, 군가. 군가는 여대생 미쓰리. 시작!”
서정락은 처음엔 친절하게 나갔다.
“연지 찍고 분 바르고 예쁘게 하고서 정찰대에 몸을 바친……”
나지막하게 그 노래를 부르다 말고 그가 멈췄다. 계속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노랫말도 지저분했다. 여대생 미스리는 제 스스로 팬티를 벗고 선착순으로 정찰대원에게 몸을 바쳐야 한다는 게 그 노래의 요지였다. 만약 다른 걸 시켰다면 그때 그는 부를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육군 이등병도 아닌 여대생이 그래야만 한다는 내용의 노래는 감당이 되지가 않았다.
“어, 이 새끼 봐라. 안 불러?”
그의 뺨을 때리려고 서정락이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까먹었는데요.”
그가 말끝을 ‘요’로 마무리했고 그걸 강조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그는 비웃듯 여유 있게 조소까지 흘리고 있었다. 서정락은 황당했다. 아니 당황스러웠다. 순간 제 청력도 의심해 보았다. 하지만 어쨌든 신병이 그 노래를 ‘까먹었다’고 한 건 분명했다. 일단 서정락은 진정했다.
“이 새끼? ……좋다. 한번 봐준다. 독사가*2 해봐. 그거도 까먹었으면 뒈진다.”
서정락이 을렀다.
“그것도 까먹었는데요. 돌대가리라면서요?”
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너…… 이 새끼! 뒈지려고 환장했구나. 이 개새끼, 너 따라와.”
서정락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분명히 신병은 말끝마다 확실히 ‘요’ 자를 달았다. 서정락은 정상인 제 귀를 잠시 신뢰하지 않았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적잖이 당혹스럽기도 했다. 이 새끼, 한번 개겨 보겠다는 건가? 어라, 관등성명도 안 붙이네? 게다가 비웃는 듯 느긋한 태도! 너무 패 닦아서 이 새끼가 돌았나……? 서정락은 머리를 좌우로 세게 털었다. 이 새끼는 다 알고 있는데도 부러 까먹은 척하고 있다. 그저께는 이 새끼 웬만큼 다 했었어. 머리는 좋은 새끼야. 그래, 진짜로 한번 개겨 보자 이거지? 오냐, 내 오늘 반쯤 죽여 놓겠다……. 그렇게 부아가 터져 오르던 서정락에게 문득 걱정이 생겼다. 아 참! 이 새끼 태권도가 3단이지? 그러나 서정락은 제 ‘짬밥’이 생각났다. 3단? ×을 까, × 새끼야. 여기서 그딴 게 무슨 소용이야? 군대는 짬밥이다, 개새꺄. ……그런데 이 새끼 눈깔엔 겁대가리가 없어. 김신혁이가 이 새끼 눈깔에 무슨 살기가 있다고 했지? 신병 교육 하나 제대로 못 시킨다고 김신혁 그 새끼한테 이 짬밥 먹고 갈굼 당한 거 생각하면……, 서정락은 김신혁이 떠오르자 재차 분통이 솟았고 그걸로 용기가 올랐다. 선임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내 오늘 제대로 느끼게 주겠다. 이 새끼, 뻔질거리는 낯판대기도 싫다. 축구도 개발인 새끼가 선임 앞에서 그리 족구장에서 잘난 척을 떨어? 뻣뻣한 새끼! 그렇게 잘난 새끼가 왜 군대는 오고 지랄이야? 잘난 건 군대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지. 내 그걸 확실히 느끼게 해 줄 테다. 내 짬밥은 딱지치기로 딴 게 아냐. 선임 새끼들에게 × 나게 맞으면서―에이 × 새끼들!―여기까지 버텨 온 나다. 개새끼, ‘요’ 자를 딱딱 붙여? 내 기가 차서……, 제 ‘짬밥’을 돌아본 서정락은 억울했다. 그래, 짬밥이란 게 뭔지 내 오늘 이 새끼한테 제대로 가르쳐 주겠다…. 서정락은 분주했다. 몸이 벌벌 떨렸다. 서정락은 녀석에게 빨리 그걸 일깨워줄 장소를 찾아야 했다. 그래! 대공초소……. 거기서 라면 아무리 신병이 비명을 질러대도 절대 행정반이나 내무반에까지는 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뾰족한 엉덩이를 홱 돌린 서정락은 위엄을 잔뜩 부리면서 앞장섰다. 그는 피식 웃고 나서 휘적휘적 상병을 따라갔다. 언덕 위, 예닐곱 그루의 큰 나무 밑에 무성한 키 작은 아카시아와 허리께까지 오는 들풀들을 헤치며 앞서가던 서정락이 반쯤 허물어진 대공초소 못 미쳐서 멈췄다. 서정락이 일그러진 낯짝을 홱 돌리더니 무당개구리 같은 입술을 끈적하게 벌렸다.
“너 이 새끼. 그럼, 서열은 다 외우지?”
서정락은 신병에게 만회할 기회를 주려고 했다. 서열만 줄줄 외운다면, 그래서 제 체면을 좀 챙겨준다면 굳이 눈에 살기도 있다는 신병을 손보지 않고 그냥 눈감아 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그는 그 서열이란 것을 읊고 싶어졌다. 교육담당 상병에게 자신의 특출한 암기력을 한 번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는 재빨리 차렷 하곤 그건 다 외웠다고 대답했다. 물론 관등성명도 댔고 어미도 ‘다’로 끝냈다. 서정락은 약간 안도했다.
신병은 술술 부대 서열을 외워냈다. 서정락은 제가 몸소 수고했던 교육 성과와 무시 못 할 ‘짬밥’의 위력을 확인하며 점점 흡족해졌다. 서정락은 갑작스레 꼬리를 내린 신병을 비웃고 있던 참이었다. 언뜻 2소대 일병의 이름 하나가 이상했다.
“그만! 일병 임 뭐라고?”
서정락이 잡아낸 것이었다.
“이병, 나우권! 임상홍 일병입니다.”
신병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틀렸다. 그 일병은 임홍상이었다. 서정락도 사실은 한동안 그 이름이 헷갈렸었다. 하지만 서정락은 호기를 잡았다. 거칠고 용맹한 눈썹을 추켜올리며 서정락이 침을 튀겼다.
“다 외우긴 뭘 외워? 이 개새끼야. 대가리 박앗!”
그는 아차, 했다. 그 빌어먹을 놈의 임상홍이 임홍상이었나? 아니면 임홍상이 임상홍이었던가? 도무지 헷갈렸다. 에이, 스타일 구기는구먼. 추잡스러운 노래는 못 부르더라도 서열은 한번 멋지게 읊고 싶었는데…… 제기랄, 임상홍이 놈 때문에 다 틀렸어. 아니야, 임홍상이었던가? 그는 여전히 헷갈렸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곤 그는 순순히 서정락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래도 맨땅은 피해 푹신해 보이는 풀포기에 머리를 심고 느긋하게 뒷짐을 짚었다. 옆 눈으로는 서정락의 발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예측이 맞았다. 서정락의 전투화발이 그의 복부로 맹렬히 날아왔다. 그가 미리 단단히 힘을 주고 있었던 까닭에 서정락의 전투화는 텅, 하며 튕겨 나갔다.
허벅지도 아니고 곧장 배를? ……자신이 국민학교 다닐 때, 마을 한가운데의 집에 사는 미친 총각이 있었다. 그는 위아래의 낡아빠진 민무늬 군복 앞섶을 다 풀어헤치고―꺼멓게 그을은 알몸의 웃통이 그대로 드러났다―뭐라 알 수 없는 소리를 계속 중얼중얼하면서 동네길을 휘적휘적 돌아다녔다. 우권이 그때 부친에게 듣기로 그 총각은 군대에 갔다가 하도 맞아서 미쳤고, 미쳐서 내쫓겼다고 했다. 한날은 우권이 하굣길에 뒤돌아서있는 그를 보았는데 개천 쪽에다 대고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위행위였다. 그는 군대가 만든 망령이었다.
우권은 상당히 씁쓸했다. 이 새끼가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구먼…….
*1 1940~. 미국의 작가, 심리학자
*2 한국 육군의 특전사, 특공부대, 정찰부대, 수색부대 등에서 흔히 ‘독사가’, 또는 해병대에서 ‘해병유격대가’로 불리는 이 노래는 원래 해군의 ‘해양가’이다. 해군으로 위탁 교육을 갔던 특전사 요원들이 ‘해양가’의 가사를 개사해서 부르던 것으로 차후 그들이 특공부대 창설 요원이나 정찰부대, 수색부대 등으로 전출을 가서 퍼뜨리거나, 특전교육단에 위탁 교육을 온 타 부대의 인원들을 교육시키며 가르친 것이 발단이 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