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忍(참을 인)

김욱래 장편소설 《이탈-그 여름의 추억록》 제2부

by 김욱래

“이 개새끼, 사회에선 얼마나 잘 나갔는지 몰라도 네놈의 새끼는 이등병이고 여긴 군대야. 개새꺄.”

체중이 실린 발길질에 그의 몸이 흔들렸다. 저녁마다의 그 시간이었다. 웬일인지 서정락은 그 교육용 노트를 들고 있지 않았다. 다짜고짜 머리부터 박으라고 해서 열중쉬어를 하려고 그가 뒤춤으로 손을 올리자마자 허벅지를 걷어차기 시작했다.

“개새끼, × 나게 뻣뻣하지? 제대하는 날까지 네놈의 새끼를 갈아 마셔 주겠어.”

서정락의 모진 발길질이 계속되었다. 엄살 핀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그는 쓰러지지 않으려고 끝까지 버텼다. 가격이 허벅지의 똑같은 부분에 반복됐다. 그는 부서지도록 이를 악물었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질끈 감고 서정락이 걷어차는 순간마다 힘을 줘서 다리근육이 덜 상하도록 데만 신경을 집중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서정락의 폭행이야 하루 일과의 하나였지만 이번엔 아주 미친 것 같았다. 그러다 불현듯 그에게, 전날 돗자리 위에서 그를 불렀던 크고 작은 병장 둘이 떠올랐다. 그리고 특히 차요철은 그대로 그냥 있을 인간이 아니었다. 목구멍이 데일 것 같은 뜨거운 숨결이 폐부로부터 치밀어 올랐다. 서정락은 그의 다리를 아주 부숴서 아예 못 쓰게 하려고 작정을 한 듯했다.


그는 풀린 다리가 휘청대는 걸 티 내지 않으려고 최대한 힘을 주면서 간신히 내무반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관물대 앞에 그가 간신히 다리를 접고 올라앉았을 때였다. 저만큼 떨어져서 말년병장 하나가 편지지 두어 장과 편지봉투를 내밀었다.

“이제 집에 편지 써도 돼. 나는 잘 있다고. 야. 받아 가.”

다리 상태 때문에 그는 망설였지만 그걸 갖다 달라고 할 순 없었다. 제 관물대에 기대앉은 말년에게 3m 정도를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는 허벅지가 끊어지는 듯한 통증으로 뻘뻘 진땀을 흘렸다.

“에이, 정락이 그 새끼. 애를 좀 살살 가르치지…….”

말년은 그가 왜 그러는지 대충은 짐작하는 것 같았다. 그가 받아온 편지지를 이를 지그시 물고 모포 위에 올려놓았다. 편지는 어차피 검열될 것이었다. 신병교육대에서 틈틈이 적어두었던 군용 수양록*럼. 그 작은 녹색 노트는 전입한 다음날 바로 없어졌다. 상병 하나가 그의 더플 백을 뒤졌고 불태워버린 것이었다. 육군본부에서 ‘군대 생활을 통하여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라며 훈련병들에게 지급한 거였다. 그 노트에 그는 어떤 결심을 굳히고 힘을 돋울 수 있는, 아주 예전부터 외우고 있던 명언과 문구 몇 개들을 적어 놓았었다. 이를테면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이나 까뮈 같은 것들이었는데, 바이런 걸로는


폭풍이 지나간 들에도 아름다운 꽃은 피어나고, 지진으로 무너진 땅에도 맑은 샘물은 솟아나며, 불에 탄 흙에서도 푸른 싹은 움튼다.


또는,


나는 세상의 더러운 인간에 아첨하지 않고 그 우상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등이었다. 그런 거 외엔 무슨 소감, 싸매두고 온 어떤 그리움, 지인들의 주소 등이었다. 그리고 맨 뒷장엔 다른 데엔 없는,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되는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불태워진 그 수양록이 그는 못내 안타까웠다. 소대원들은 필요 없이 잔인했다.


그는 떨려대는 볼펜으로 몇 자씩 적으려고 애를 썼다.


부모님 전 상서.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원래는 ‘안녕하셨는지요’가 더 맞았다. 군대에서 사용할 수 없는 어미의 ‘요’ 자 대신 ‘까’ 자가 무의식적으로 적혔다.


저는 얼마 전 자대에 전입하여 몸 건강히 잘


그 ‘잘’ 다음에 뭔가를 써야 했지만, 도무지 그는 더 문장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그는 편지지만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이제 좀 더 자유롭게 쓰고 싶어졌다. 꾹꾹 펜을 눌러서 그는 이렇게 썼다.


삼십 年(년)도 아니다. 십 年도 안 된다. 삼 年도 채 안 된다.


그는 머리가 저리도록 생각했다. 그래. 겨우 30개월일 뿐이다. 거기다 두 달이나 지났다. 이제 28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나……. 그는 펜을 멈췄다. 이런 식으로 어떻게 28개월을 살 수 있단 말이냐. 이래서 도대체 뭘 얻을 수 있단 말이냐. 난 개새끼처럼 두들겨 맞고 걷어차이고 짓밟히고 있다. 그는 다시 펜을 잡고 똑같은 글자를 천천히 세 번 썼다.


忍. 忍. 忍.


그렇게 그는 세 번을 참았다. 하얀 편지지 위로 갑작스레 검붉은 액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신병이 굵은 코피를 떨궈대자 말년이 편지는 안 써도 된다고 했다.

“어디 안 좋냐?”

말년이 신경을 쓰는 척했다. 그의 몸 상태는 푹푹 쑤셔대는 다리와 며칠째 대변을 못 봐서 짜증스러운 속사정 말고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의 코피가 참을 인(忍) 자들을 하나씩 덮었다. 그는 하얀 종이 위에 떨어진 굵직한 핏방울들이 까맣게 굳어가는 것을 내려다보며 한참을 앉아있었다.




* 일기장을 군대식으로 부르는 말. 1990년에는 초록색 노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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