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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침

김욱래 장편소설 《이탈-그 여름의 추억록》 제2부

by 김욱래

한 번은 걸러도 좋으련만 아침은 꼬박꼬박 왔다. 그는 팽만한 아랫배가 아프도록 딱딱해져서 혹, 안에서 돌덩이처럼 굳어버린 것은 아닌가 걱정했다. 어떻게 그것만 해결되어도 좀 나을 것 같았다. 그는 오기식 방식으로―달리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체육복 상의 아래 춤에 불룩하게 숨겨온 곰보빵들부터 재래식 변기 구멍 밑으로 털어버린 뒤 바지를 내리고 쪼그려 앉았다. 한참 동안이나 아래서 치고 올라오는 숙성된 변의, 머리가 저릴 정도로 시큼한 냄새 속에서 있는 힘을 다 썼지만 이미 안에서 굳게 응고가 된 것들을 도무지 밀어낼 수가 없었다. 무턱대고 끝장을 볼 때까지 그렇게 버티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곧 손정원이 찾기 시작할 것이었다. 그는 한숨을 뱉고 나서 체념했다.


신병교육대에서도 그가 느낀 거지만, 그곳은 북위 38도가 넘는 땅인데도 이상하게 아래보다 더 뜨거웠다. 날씨는 오전부터 숨이 턱턱 막혔다. 점심 먹고 두 시간 동안 오침하라는 전달이 인사계로부터 내려왔다. 조병주에게도 힘든 기온인 듯싶었다. 상병 주임도 남은 점심시간과 오침 시간을 내리 자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날 점심 후엔 ‘쫄따구’ 관리를 걸렀다.

4사단 정찰대는 그 여름날, 그 해 처음이자 마지막 오침에 들어갔다. 그는 입대 후 오침이란 게 처음이었는데 이 무슨 조화인가, 싶었다. 비록 잠깐일지라도 눕는 시간은 그의 영혼의 유일한 안식이었다. 등화관제를 내려 컴컴한 침상 위에 모포가 한 장씩 깔렸다. 내무반 공기는 바싹 달궈진 한증막 같았지만, 그가 드러눕자 무거운 몸뚱이가 침상 밑으로 꺼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좁고 어두컴컴한 골목 안에 그가 서 있었다. 뒤쪽에는 아마도 막다른 벽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되었으나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 골목 입구에 서 있는 여자는 자세히 보니 모친이었다. 그녀의 얼굴과 옷매무새를 얼추 알아볼 수 있는 걸로 보아 그로부터의 거리는 대략 10m쯤인 듯했다. 그녀의 뒤쪽에는 아마도 봄의 햇빛인 듯싶은 것이 화사했다. 환한 빛은 아늑했다. 모친은 작고 파란 땡땡이가 쳐진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무릎까지 오는 치맛단이 살랑거리는 미풍에 나풀거렸다. 까맣고 긴 머리의 모친은 날씬했고 흡사 처녀 같았다. 그는 모친 쪽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도무지 걸음이 떼 지지 않아서 밑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은 쑥색 전투복에다 큼직한 전투화를 신고 있었는데, 그 전투화가 마치 몇 톤이나 되는 양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절박해졌다. 그 기분은 엄마에게 가고 싶은데 누군가에게 붙들려있는 아기의 심정 비슷한 것이었고, 그것이 이미 다 커버린 자신의 심정이란 게 의아했다. 그렇지만 처녀 같은 모친에게로 빨리 가서 무언가 말하고 싶었다. 계속 어떻게든 발을 옮겨보려 했기 때문에 너무 많이 힘을 썼는지 허벅지가 저렸다. 모친은 그가 올 수 없는 상태란 걸 알았는지 결국 돌아서더니 노란빛 속으로 멀어져 갔다. 그는 울컥했다. 그녀가 사라진 골목 입구에는 봄빛만 환했다. 그는 그녀를 힘껏 불렀다. 하지만 자기 귀에마저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 상황이 너무 힘겨웠다. 그리고 아가씨 같은, 아마도 유아기에 보았을 수도 있을법한 젊은 모친을 떨어진 채로 잠깐밖에는 볼 수 없었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오침에서 일어났을 때, 그는 몸이 더 육중해진 것 같았다. 남은 오후의 작업 집합을 하러 내무반을 나섰을 때도 날은 극악(極惡)스럽게 뜨거웠다. 그런데 왠지 그의 가슴속 어느 공간으로 늦가을의 소슬바람 같은 서늘한 공기가 조금씩 불어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연병장에서 돌과 자갈을 골라내 움푹 파진 데에다 채워 넣는 작업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손정원과 한 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앞쪽에서 잡아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는 그냥 뛰었다. 그의 머릿속엔 아직 하얀 원피스 자락이 날리던, 아가씨 같던 모친의 잔영이 남아있었다. 그는 왜 그런 맥 빠지는 꿈을 자신이 꾸게 되었는지가 의아했다. 여태껏 그는 한 번도 그녀의 예전, 그러니까 아가씨 같은 젊을 때의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담가 자루를 잡고 뛰면서 그는 괜스레 모친에게 미안했다. 그런 다음에는 꿈속이었지만 무슨 아기같이 엄마를 불러 젖힐 정도로 자신이 순간순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허망한 웃음이 나왔다. 뱃가죽이 점점 더 팽팽하게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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