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욱래 장편소설 《이탈-그 여름의 추억록》 제2부
오전 10시에 기상했다. 수요일의 야간교육에서 복귀한 것은 새벽 3시였다. 점심 전까지는 정비라고 했다. 그는 진짜 오랜만에 숨쉬기가 좀 편했다.
“무신 좋은 일 있간디?”
지나치던 이권휘가 그럴 만큼 그의 얼굴빛이 밝아져 있었다. 군대 오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새벽녘에 자서 훤한 대낮에 일어난 것도 좋았지만 바깥의 밤바람을 쐴 수 있었던 것이 그의 숨통을 좀 트이게 했다.
전날, 땅거미가 지자 야간정찰 교육이 실시 되었었다. 3개 정찰소대는 국방일보를 태워서 물에 으깬 즉석 위장크림을 얼굴에 문지르고 단독군장에다 전투모를 썼다. 병력은 정문을 통과하지 않으려고 막사 뒤편 언덕으로 올라가 야트막한 담장을 넘은 다음 소대별로 갈라졌다. 처음에 3소대는 논두렁을 일렬로 밟아갔다. 그는 미끈거리는 진흙에 미끄러져 물을 댄 논바닥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런 남우세스러운 상황을 피하려고 힘을 준 허벅지가 쿡쿡 저렸다. 풀냄새가 버무려진 밤바람은 상큼했다. 인가의 어스름한 불빛이 드문드문한 촌 동네 입구를 지나 아스팔트로 올라선 후에는 갓길로 벌려 이동했다. 차량의 라이트가 간헐적으로 비치면 후다닥, 하고 산개해 노변 비탈 밑에 숨었다가 불빛이 지나간 후에 다시 이동했다. 야간정찰은 침투훈련도 겸했다. 부대를 나와 민간의 도로를 걸으며 여름밤의 풋풋한 공기를 쐬자 그의 기분이 한결 풀리는 듯했다.
도로는 옅은 밤안개가 깔린 어둠 속에 아스라이 뻗어 있었다. 패고, 맞고, 병신 머저리 같은 짓거리들…… 이게 다 뭐 하고 있는 것일까? 절뚝이며 쫓아가면서 그는 막연히 곱씹었다. 문득 고등학교 때 야간자습을 빠져나와 걷던 그 싱그러운 밤거리, 오가는 차들의 맑은 불빛, 그 아스팔트가 겹쳤다.
소대는 8km쯤 이동했다. 화강석의 6.25 전적비가 반환점이었다. 그 전적비 앞에서 잠깐 쉰 뒤 복귀한다고 했다. 오던 길에서 계속 뻗어져 안개 속으로 감감히 묻혀가는 도로를 그는 바라보았다. 아니 도로를 흡입하는 거대한 안개 덩어리를 보고 있었다. 그는 그 도로가 안개를 뚫고서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것인지 알고 싶었다.
외로움은 얼마나 행복한 것이었더냐……. 후, 하고 그가 긴 숨을 내쉬었다. 혼자 걷던 예전의 자신이, 그 길들이 떠오르자 그는 가슴이 설렜다. 고등학교 때의 그런 밤처럼 그런 설레는 길을 그는 걸어가 보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끝 모를 길을 혼자서 끝없이 걸어가고 싶었다.
점심 식사 집합을 조금 앞두고 그는 아랫배로부터 확실한 신호를 받았다. 느낌으로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게 분명했다. 화장실로 간 그는 자신감을 가졌다. 처음엔 딱딱한 것들이 애를 태우고 나서 겨우 빠지더니 이내 질척한 것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맞아, 너무 많이 처먹었어, 하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데 어느덧 소강상태를 보였다. 얼른 그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얼마쯤 있다가 다행히 다시 복부가 살살 아파 왔다. 배출이 재개되었다. 그는 점점 만족스러워졌다. 처먹는 게 능사가 아니지. 먹은 만큼 빼내야 하는 거다. 그는 자신의 그런 통찰에 온몸으로 동감했다. 또 자신의 신진대사 능력에도 뿌듯했다. 그는 더할 수 없이 시원했고 상쾌했으며 황홀했다. 그러고 나서는 홀가분하고 담담했다.
야간교육의 피로가 복싱선수에게도 남은 듯했다. 점심을 먹었는데도 집합이 없었다. 그리고 저녁 식사 다음에도 조병주는 집합을 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