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굴꾼 Nov 12. 2024

16. 코트 생탕드레 베를리오즈 박물관에 가다

'근대 관현악법의 아버지' 엑토르 베를리오즈. (출처:위키백과)

루이 엑토르 베를리오즈. 1803년 태어나 1869년 죽은 프랑스의 작곡가. 대표작은 표제 음악의 시초로 유명한 '환상교향곡'... 외에 많은데, 아마 '환상교향곡' 이상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하다. 혹시 관심이 있다면 그의 오페라나 극적 전설 등에 해당하는 '파우스트의 겁벌' '베아트리체와 베네딕트' '트로이 사람들'이나, 교향곡 계열에 속하는 '로미오와 줄리엣' '이탈리아의 해롤드' 그리고 가곡 '여름밤' 정도를 추천드린다. 엘리트 코스를 거의 밟지 못했고 파리 음악원에 들어가서야 아카데믹하게 쓰는 법을 배웠지만, 결국 '정통' 계보에서는 벗어난 이단아, 혁명가, 세기의 낭만주의자, 3B*의 원래 주인. 최초로 관현악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집대성한 근대 관현악법의 아버지이자 왕, 표제 음악의 창시자, 그리고, 그저, 평범한 사람.


*3B: 바흐, 베토벤, 브람스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지만 원래 3B는 바흐, 베토벤, 베를리오즈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B를 전부 독일 작곡가로 맞추다 보니 베를리오즈가 빠졌다.


가끔 '음악은 좋은데 사람에는 관심이 안 가는 작곡가'가 있고 '음악은 별로인데 사람에는 끌리는 작곡가'가 있다. 내게 베를리오즈는 후자였다. 처음에는 '뭐라고? 여자친구가 고무신 거꾸로 신었다는 소식을 듣고 권총과 독약을 챙겨 메이드로 위장해 여자친구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운 미친 작곡가가 있다고?'라는 호기심이었지만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베를리오즈는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논리적이지만 감정적이었고, 열정적이지만 냉정했고, 혁명적이었지만 보수적이었다. 원래 사람은 모순이 좀 있어야 재미있는 법이다. 기록에 따라서 이 정도로 평가가 갈리는 작곡가는 처음이었다. 그의 거대 오케스트라와 금관악기에는 아직도 적응하지 못했지만 베를리오즈의 서간집을 찾아 번역해 읽을 정도로 나는 베를리오즈라는 사람에게 푹 빠져 있다. 지금도. 심지어 최근에는 내 성격이나 가치관이 베를리오즈랑 비슷하다며, 가장 비슷한 작곡가 골라주기 놀이를 했을 때 베를리오즈가 계속 뽑히다 보니 점점 베를리오즈에게는 친근감이 든다. 다른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베를리오즈의 사고 과정이 내 눈에는 대충 보일 때가 있을 정도로 나는 베를리오즈와 닮아 있다. 그렇다고 내가 나를 배신한 남자친구를 쫓아가 권총으로 쏠 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왜 내가 베를리오즈와 닮았다고 평가받는지는 이 글을 읽다 보면 점점 느껴질 것이다.


우리가 흔히 서울에 대해 '서울공화국'이라 부를 정도로 한국에서 서울과 서울 외 지역의 격차는 크다. 마찬가지로 프랑스도 '파리공화국'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파리와 파리가 아닌 도시 사이의 격차도 크다. 그러니 프랑스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파리만 다녀와서는 한참 부족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파리에서 40년이나 살았음에도 불구 파리는 베를리오즈를 기념해 주기에는 너무 바쁘고 큰 도시기에 베를리오즈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상술했듯 베를리오즈라는 사람에 대해서 더 알 수 있다면 전 재산이라도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베를리오즈에게 동질감을 느꼈던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베를리오즈 박물관을 가겠다고 결심했다. 이번이 아니면 절대 갈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베를리오즈 박물관은 일반적인 관광 코스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루이 엑토르 베를리오즈는 1803년 라 코트 생탕드레라는 리옹 근교의 소도시도 아니고, 인구가 당시 2만 명 밖에 안 되던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 마을의 이름은 '라 코트 생탕드레' (La Cote Saint-Andre). 베를리오즈의 집안은 적어도 1600년대에는 이미 이 마을에서 살고 있던 지역 유지였다. 베를리오즈가 쓴 본인의 회고록에는 이 마을에서 자라나며 느꼈던 자연에 대한 감상이 자세히 적혀 있다. 베를리오즈의 많은 작품에서는 관악기를 이용한 목가적 선율이 등장하는데, 많은 학자들이 이 선율은 베를리오즈의 성장배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베를리오즈에 대해서 더 자세히 조사해 보면, 베를리오즈는 익명성 없는 시골의 분위기를 답답하다 생각했던 모양이다. 성인이 되며 상경한 그는 이후 평생을 파리에서 살았는데, 시골로 은퇴해서 조용한 삶을 살기를 꿈꿨던 다른 작곡가들과 비교해 보면 특이한 사람이다. 시골에 대한 판타지를 가지고 있던 작곡가들과 진짜 시골이 뭔지 알았던 현지인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나도 시골에 대한 판타지가 좀 있던 것 같다. 이전에 독일의 아기자기한 중세마을 로텐부르크 오브 데어 타우버 (인구 약 1만 명) 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 배경이었던 콜마르 (인구 약 7만 명)에 갔을 때는 그야말로 동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잘은 몰라도, 어쨌든 라 코트 생탕드레도 따지고 보면 프랑스의 시골마을 아닌가?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프랑스 시골의 이미지 아닐까 하면서 기대감을 잔뜩 안고 출발했다. 사실 흔히 생각하는 프랑스 시골의 이미지가 뭔지도 모르겠지만.


출발 거점은 리옹이었다. 리옹이 대도시라서 교통이 편리하기도 했고... 리옹에 호텔 베를리오즈라는 호텔이 있기 때문이었다. 인테리어도 베를리오즈 음반 사진을 액자에 걸어두고 제공하는 칵테일 이름도 베를리오즈의 작품들이었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 다시 베를리오즈 박물관으로 가는 이야기를 해보자. 리옹에서 바로 코트 생탕드레로 갈 수는 없다. 코트 생탕드레로 갈 수 있는 대중교통은 오직 버스뿐이다. 비엔느, 그르노블, 부아홍이나 부르고앙잘리외 네 곳에서 버스를 탈 수 있다. 벌써 이 버스 탑승지 도시들부터 이름이 생소하다. 이 가운데 내가 베를리오즈 전기에서 들어봤던 곳은 두 곳, 비엔느와 그르노블이었다. 비엔느는 베를리오즈의 여동생이 시집을 가서 살게 됐던 도시였고 그르노블은 베를리오즈의 외가가 있었고 또 다른 동생이 시집을 가기도 했던 도시였다. 덕분에 베를리오즈가 그르노블에 갔다는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데, 아마 완전 시골에서 읍내로 나가는 정도 느낌이었겠지 싶었다.


그르노블로 향하는 길 나는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마치 성곽처럼 깎인 절벽이 너른 평원을 둘러싼다. 숲에 비해서 산이 많지 않은 유럽의 특성상 유럽에서 지내며 자주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5월의 연둣빛과 하얀 구름, 푸른 하늘이 경탄이 나올 정도로 잘 어울렸다. 내가 자연을 보고 감탄하는 일은 잘 없는데, 그르노블로 향하는 길 펼쳐진 산은 자연에 대한 경이를 느끼게 했던 몇 안 되는 곳이었다. 누군가가 도장으로 납작하게 만든 것 같은 산맥이라니! 분명 프랑스의 평원이 보이는데 동시에 한국 강원도 언저리에서 잔뜩 봤던 것 같은 산맥이 보였다. 그 익숙함과 생경함이 조화를 이루니, 오히려 완전히 새롭기만 한 풍경보다도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산이 그렇게 아름다울 줄이야. 지금도 그 산을 보기 위해서 다시 그르노블로 가고 싶을 정도다.

버스 안에서 본 그르노블의 산.

그르노블에 내리자 벌써 해가 뜨겁게 내리쬐기 시작했다. 독일에서는 긴팔 긴바지를 입어도 추운 날씨였는데 프랑스에서는 반팔에 얇은 재킷, 치마를 입고 왔는데도 더웠다. 위도는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는데, 기후라는 게 정말 무섭긴 무섭구나 싶었다. 그르노블에서 코트 생탕드레로 가는 기차가 출발하기까지는 두어 시간 정도가 넉넉하게 남아 있었다. 그르노블에 대해 검색해 보자 프랑스의 알프스 도시로 가장 유명하며, 겨울이 되면 스키를 타러 관광객들이 꽤 많이 온다는 내용이 나왔다. 그때 관광객들을 실어 올리는 것이 그르노블의 명물인 케이블카였다. 케이블카로 향하다 보면 그르노블 마을 광장 분수대 곁의 베를리오즈 조각상을 만날 수 있다. 과장되게 부풀린 머리, 몸을 두른 넓은 케이프와 생각에 잠겨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베를리오즈의 사색적이고 목가적인 정서를 대변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였다.

그르노블의 베를리오즈 조각상.


계속해서 뚜벅뚜벅 걸어가다 보면 또 예상치 못한 작곡가를 한 명 만날 수 있다. 그르노블은 베를리오즈와도 관련이 많은 도시지만, 베를리오즈를 존경하던 또 다른 하나의 프랑스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 (1908~1991) 과도 관련이 있는 도시다. 아직 너무 최근 분이시라 평가를 하기도 애매하고 내가 곡을 즐겨 듣지도 않는 작곡가지만, '시간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 나 '투링갈릴라 교향곡' '새의 카탈로그' 등 다양한 작품과 스케치가 남아 있는 분이시다. 무려 컬러 사진이 남아 있는 시대의 작곡가인 데다가 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해 본 분이시라니. 메시앙은 여름휴가를 주로 그르노블에서 보냈었다고 한다. 언젠가 내가 현대 음악에 내성이 생긴다면 이 메시앙이 여름휴가를 보내던 집도 또 새롭게 보일까?

메시앙을 기념하는 설명문.

그르노블 케이블카가 보이는 다리까지 도착하면 5월에 절대 볼 수 없을 것 같은 풍경을 보게 된다. 내 뒤로는 열대 식물들이 울창한데, 내 앞으로는 알프스 봉우리 꼭대기에 만년설이 맺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스위스의 살인적인 물가와 밀렸던 우선순위로 인해 멘델스존이 좋아했던 마터호른이나 융프라우라고는 코빼기만큼도 보지 못했지만, 베를리오즈 덕에 알프스는 보게 된 셈이었다. 봉우리 끄트머리 녹지 않은 만년설 위로 구름이 쓱 지나갔다. 구름과 산꼭대기의 눈이 구분 가지 않았다. 숨을 헉, 하고 들이마시게 되는 광경이었다. 그러니까, 소빙하기였던 1820년대와 30년대에 청년기를 보냈던 베를리오즈도 마찬가지로, 그르노블에 온다면 한여름의 알프스를 볼 수 있던 것 아닌가! 그러니까, 베를리오즈는 알프스 소년이었던 셈인가! 물론 베를리오즈가 태어났던 코트 생탕드레에서는 만년설은 보이지 않으니 농담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알프스와 근접한 지역이긴 했다.

진짜로! 그르노블에서는 알프스가 보인다. 구름과 눈이 분간되지 않는 환상적인 풍경. 왼쪽의 케이블카에도 주목해 주시기를.

코트 생탕드레에 내리면 베를리오즈 사망 100주기 동상이 우리를 맞이한다. 베를리오즈의 사진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아 '와, 내가 정말 베를리오즈의 도시 (x) 마을 (o)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이 동상이 있는 엑토르 베를리오즈 광장에서 도로를 따라 10분 정도 걸어가면 베를리오즈 벽화가 그려진 건물이 나온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사이로 몰아치는 금빛 악기들... 특히 베를리오즈가 좋아하던 관악기와 피아노를 못 치는 베를리오즈가 대체품으로 쓰기도 했고 젊은 시절 이탈리아 산을 찾아다닐 때 메고 다니기도 했던 통기타가 그려져 있다. 왼쪽 아래로는 지휘하는 베를리오즈의 모습이 거친 하얀 붓질로 그려져 있는데, 왼쪽에 설명을 보면 '베를리오즈의 땅(Terres de Berlioz)' 같은 문구와 함께 베를리오즈의 음악 몇 마디가 적혀 있으나 이때는 이미 기온이 25도 가까이를 돌파했던지라 너무 덥고 지쳐 아무 생각도 안 들었던 것 같다.

베를리오즈 벽화.

다시 반대편으로 도로를 따라 걸어가면서 학교 옆에 걸려 있는 '2024 베를리오즈 축제' 안내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베를리오즈 축제는 매년 8월 코트 생탕드레에서 하는 축제인데, 이 축제 기간에 한해서는 버스가 하루에 두어 대 더 편성되기까지 할 정도로 1년 중 코트 생탕드레가 가장 생기를 띤다. 나도 이왕이면 그 기간에 맞춰서 가고 싶었지만 그 기간이 되면 이 작은 동네의 숙박업소들이 꽉 차버릴 것은 물론이고 8월이면 나는 이미 한국으로 귀국한 뒤일 것이었기에 그렇게는 할 수가 없었다. 낡고 갈라진 공인중개사 사무소 앞에 있는 베를리오즈 조형물, 어딜 봐도 베를리오즈, 베를리오즈. 자랑할 게 하나밖에 없는 시골이면 이런 모양인가 보다 싶었다.

뒤의 '보험' 글자가 보이시는가... 이 텁텁한 시골마을의 건조하고 더운 기후가...느껴지시는가.

베를리오즈 박물관은 나름 동네에서는 시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그래 봐야 동네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는 데 10분도 걸리지 않지만. 그 동네 끝을 벗어나면 끝없는 풀밭에 풀밭뿐이다. 푸석푸석하고 누렇거나 연둣빛의 풀들이 웃자란 시골 프랑스 마을은 상상 이상으로 작았다. 내 할머니 댁인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과 인구수는 똑같은데 동네는 더욱 고립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나마 대한민국 시골은 가다 보면 중간중간 유자빵을 파는 트럭이라도 나오지 베를리오즈네 동네는 그냥... 어디 농촌봉사활동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지하철, 트램, 버스 등의 대중교통이라고는 거의 오가지 않고 오직 자가용이 있어야만 올 수 있는 곳이었다.

이게 프랑스 시골의 현실이었다.

어쨌든 동네 한가운데에 베를리오즈 박물관이 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코트 생탕드레의 모습이 1800년대에도 그대로였더라면 (그리고 아마 거의 그대로일 것이다, 조금만 동네 외곽으로 나가면 중세풍 과수원이 복원되어 있고 13세기부터 내려오던 직물회관 골조도 남아있다고 한다) 베를리오즈는 꽤나 동네 중심부에 살았던 셈이다. 베를리오즈의 아버지는 의사이자 한때 마을의 시... 아니 이장 정도도 맡았던 지역 유지기 때문에 (기록에 따르면 동네에서 두 번째로 땅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굿즈샵과 카운터가 나온다. 입장료는 무료므로 카운터에서 영어를 못 하는 직원분과 길게 입씨름할 필요 없이 그냥 들어가면 된다. 베를리오즈 박물관은 지하 1층부터 3층까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꾸 중간중간에 층이 한 개씩 더 있어서 사실 6개 층이라고 봐도 될 지경이었다.

베를리오즈 박물관 전경.

베를리오즈라는 작곡가는 우리에게 익숙한 작곡가가 아니기 때문에, 베를리오즈가 생소한 사람들이라면 꼭 1층을 먼저 둘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위에서 약간씩 설명을 했으니 모든 독자들께서 어느 정도 감을 잡았겠지만 박물관 오디오가이드를 대신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보겠다. 베를리오즈는 박물관 2층에 있는 식당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특출 난 감수성과 예술성을 보였으나, 아들이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길 원했던 베를리오즈의 아버지는 베를리오즈가 자신을 따라 의사가 되었으면 했다. 아버지의 말을 따르긴 했지만, 의대는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고 파리에 상경해 오페라를 줄곧 보러 다니던 베를리오즈는 아무리 생각해도 의사는 안 되겠다, 난 작곡가를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 과정에서 여배우 해리엇 스미드슨의 연기를 보고 완전히 홀딱 반해 당대 음악계에 '표제음악'이라는 새로운 혁신을 불러일으킨 '환상교향곡'을 쓰고,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포도 몇 송이로 하루 끼니를 때우다가 결국에는 국비 지원 음악장학생 선발 경연에서 로마대상, 즉 1등 상을 타 작곡가로서 드디어 길이 열리나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첫 번째 오페라를 대차게 말아먹으며 이후 오페라 극장에서 아무런 제의를 받지 못한다. 베를리오즈의 인생이 크게 꼬이게 된 것은 아마 그 첫 오페라의 대실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음악이 너무 좋았던 베를리오즈는 부업으로 평론까지 하면서도 자비로 출판을 하고, 기악곡을 쓰면서도 오페라를 더 쓰고 싶다고 오페라에 거의 집착하다시피 하면서 살아갔다. 평론가로서의 이름은 드높아 가는데 작곡가로서는 여전히 너무 혁명적이고 낭만주의적인, 정신 나간 생각뿐이라는 평을 들으면서도 베를리오즈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그 사이 어디쯤을 줄타기하며 정말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새로운 시도를 했다.


그러나 새로운 야심작들을 올릴 때마다 야심작들은 실패해 베를리오즈에게 파산만을 가져다주었다. 음악 교수 같은 안정적인 직장이 생길까 하면 늘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운이 겹쳐 고꾸라졌다. 전기를 읽어 보면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기회가 생길 때마다 미끄러지는지 신기할 정도다. 심지어는 괜찮은 직책이 주어지기 직전 투표에서 '베를리오즈는 작곡가가 아니라 평론 가잖습니까! 작곡가를 뽑아야죠!'라는 소리까지 들었다고 한다. 국내에서 인정받지 못했지만 해외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던 베를리오즈는 독일이나 러시아처럼 본인의 음악을 인정해 주는 외국으로 나돌 수밖에 없었고, 파리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좋게 보지는 않았으리라. 파리의 냉대에도 불구 꾸준히 곡을 쓰던 베를리오즈는 결국 아들의 죽음과 두 번째 아내의 죽음, 친구의 죽음, 가장 공들였던 오페라의 흥행 참패 등으로 인해 67년부터는 절필하다시피 하고, 얼마 가지 못해 두 차례 낙상 사고를 겪고 크게 쇠약해져 사망했다. 그의 유언은 '이제는 그들도 내 음악을 연주해 주겠지' 였다고 전해진다. 평생 인정받지 못했다 생각했던 자신의 음악과 자신에 대한 자기 연민이 드러나는 말이었다.


베를리오즈의 장밋빛 미래 전망을 깨자면, 아직도 베를리오즈의 음악은 그리 대중적으로 연주되는 편은 아니다. 일단 무엇보다 편성이 너무 크고 너무 길다. 금관도 너무 많이 들어간다. 과하고 텍스처가 고르지 못하다. 그래도 본인이 태어났던 동네와 그 근교 도시에서까지 잘 챙겨주고 있으니 어느 정도는 한을 풀지 않았을까 싶다. 베를리오즈 박물관에서는 아까 그르노블에서 봤던 베를리오즈 조각상을 본떠 또 전시하고 있고, 1840년 베를리오즈의 초상화도 소장하고 있다. 파란 프록코트와 어울리는 파란 배경과 베를리오즈의 파란 눈이 무척 인상적인 초상화니까 1층 베를리오즈의 삶을 설명해 주는 전시실도 놓치지 말기를 바란다. 베를리오즈가 살았던 시대 상황이 궁금하다면 시대상황 역시도 설명해 주는 방이 있으므로, 베를리오즈가 겪었던 2월 혁명과 7월 혁명, 당시 음악계의 발전 등에 대해서 더 상세히 살펴볼 수 있다.

1840년 베를리오즈의 초상화.

1층을 다 보고 나면 본격적으로 베를리오즈의 생가 투어가 시작된다. 다양한 방들은 19세기 벽지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만 장롱이나 액자 등은 모두 베를리오즈와 관련된 물품을 전시하고 있기 때문에 박물관에 온 분위기와 생가에 온 분위기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투어는 중이층의 부엌에서부터 시작된다. 부엌은 베를리오즈가 살던 19세기 당시의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베를리오즈 집안의 유모였던 모니크 네티가 지내던 벽감 속 침대도 재구현되어 있다. 화려한 장식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칙칙한 나무에 조명도 없이 창가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벽난로에 걸려 있는 라이플 한 자루... 19세기 부엌도 이렇게 칙칙한 줄은 몰랐다. 하지만 오히려 그 칙칙함과 따가운 햇빛이 중세 배경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름대로 잘 어울렸다.

부엌. (출처: 이제레 베를리오즈 박물관)

부엌 반대편의 중이층 방은 식당처럼 꾸며져 있다. 실제 방의 용도는 불명이지만 말이다. 19세기 초반의 식기들로 꾸며놓은 유사식당을 지나, 베를리오즈 가족의 가계도가 있는 방을 지나면 베를리오즈의 아버지, 닥터 베를리오즈의 방이 나온다. 닥터 베를리오즈, 또는 루이 베를리오즈는 엑토르 베를리오즈의 아버지로, 원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변호사가 되어야 했으나 자신은 의사가 하고 싶다며 아버지와 마찰을 일으킨 뒤 결국 파리에서 의학을 배워 다시 코트 생탕드레로 돌아온 인물이다. 흔히 말하는 '너 같은 딸/아들 낳아 봐라' 하는 저주가 실현된 셈 아닐까 싶었다. 루이 베를리오즈는 대체적으로 선량하고 이성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마을 사람들에게는 '맘씨 좋은 루이 씨' (Le Bon Louis)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었다. 엑토르는 자신의 아버지를 이성적이고 계몽주의적이었던, 덕분에 자신에게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가르쳐주었던 분으로 기억하며 평생 긍정적으로 회고했지만 내가 자료를 통해서 읽은 닥터 베를리오즈는 놀라울 정도로 차갑고 논리적이며, 때로는 냉정하지만 그렇다고 비도덕적이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그 차가운 닥터 베를리오즈의 방에는 책상과 책장, 그리고 닥터 베를리오즈가 가지고 있던 물품들을 전시해 놓은 벽장이 있다. 책장 속의 책들과 벽장 속 물품들은 대체로 원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닥터 베를리오즈의 우산과, 나중에 엑토르가 물려받은 은색 회중시계가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가 죽은 뒤 파리에 있던 베를리오즈는 급하게 코트 생탕드레로 내려왔었는데, 그때 아버지의 회중시계를 손에 꼭 쥐고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을 서 있었다고 한다. 이게 그 회중시계일까 궁금해하며 나는 시계를 한참 동안 빤히 바라봤다.


그다음 방은 어린 시절 엑토르 베를리오즈가 쓰던 것으로 추정되는 방이었다. 그러니까, 식당을 지나... 복도를 지나... 아버지의 방을 지나... 가만, 아버지의 방을 지나? 정말이다. 닥터 베를리오즈의 방을 지나지 않고서는 어린 베를리오즈의 방으로 갈 수가 없다. 우와, 정말 잔인했다. 아버지랑 여차해서 싸우기라도 하면 나가고 싶어도 아버지가 문만 지키고 있으면 못 나가는 것 아닌가. 채광도 좋고, 창도 꽤 크고, 발코니로 나갈 수도 있는 방이었지만 사실상 일방통행인 방이라는 점이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베를리오즈의 자유로운 성격을 생각해 보면 아버지 몰래 바깥으로 나갈 수 있도록 창가에서 뛰어내리는 기술만 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방에는 베를리오즈의 졸업장, 베를리오즈가 어렸을 때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타 한 대가 있었고 박물관에서 나눠주는 어린이용 학습지를 해결할 수 있는 책상 하나와, 생각의자처럼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책걸상 세트가 하나 있었다. 베를리오즈의 어린 시절이 제법 행복했던 건 내가 전기를 그렇게 많이 읽어 봤으니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는 책걸상을 보자 어색하기도 하고, 아버지 방을 통하지 않고서는 들어올 수 없다는 점이 벌 받는 것 같기도 했다. 에잇, 아버지 방을 통하지 않고서 밖에 나갈 수 없으면 숙제를 다 못 했을 때 농땡이를 피울 수 없는데!

어린 베를리오즈의 방. 사진은 없고 비디오뿐이라 캡처했다.

그다음 층, 2층은 방 3개가 이어져 있는 형태다. 2층에 올라가자마자 바로 볼 수 있는 응접실은 베를리오즈와 베를리오즈의 연인들을 다룬다. 베를리오즈는 누가 프랑스인 아니랄까 봐, 사랑과 음악은 영혼의 양 날개다 같은 말을 남겼고 거의 언제나 사랑에 빠져 있었다. 열두 살 때 첫사랑의 열병을 앓고, 이십 대 때는 무대 위 오필리아를 연기하는 영국 극단의 배우 해리엇 스미드슨과 사랑에 빠져 과격한 팬레터를 보내다가 팬레터를 금지당하더니, 결국 영어라고는 거의 하지도 못하면서 그녀를 생각하며 쓴 곡 환상교향곡으로 마음을 얻어 결혼에 성공하더니, 해리엇의 자격지심과 본인의 바람기로 인해 별거생활에 돌입해, 해리엇이 죽자마자 이미 오랜 시간 사귀던 여자친구 마리 레치오와 결혼해 공처가처럼 잡혀 살다가, 마리가 죽자 다시 한번 첫사랑의 추억에 사로잡혀 육십이 넘은 노인이 되었는데도 첫사랑 에스텔에게 청혼을 하는 정신 나간 작곡가였다. 따뜻한 분위기의 벽지와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나른한 분위기의 조명이 되어 주었다만, 베를리오즈의 격정을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방을 지나 왼쪽으로 꺾으면 베를리오즈 가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호화스러운 18세기말~19세기 초반 인테리어로 그랑 살롱이 나오지만 내가 흥미를 가지는 부분은 아니었기 때문에 넘어가도록 하겠다. 중요한 것은 응접실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나오는 식당인데, 여기서부터 베를리오즈 박물관의 진가가 드러난다. 식당은 호사스러운 인테리어의 왼쪽 방에 비하면 평범한 줄무늬 벽지뿐이라 그리 화려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 방은 베를리오즈의 인생에서 그나마 가장 성공적이었던 해외 투어 시절을 다루고 있다. 특히 베를리오즈를 따뜻하게 맞아 주던 두 곳인 러시아와 독일 이야기가 가장 많다. 캐비닛에는 베를리오즈가 받은 기념 지휘봉이나 월계관, 기념 잔, 메달, 넥타이핀, 도장 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크기로 인해 내 눈을 끌었던 지팡이를 제외하면) 가장 눈에 띄는 전시품은 베를리오즈의 레지옹 도뇌르* 메달이었다. 레지옹 도뇌르를 거부하기도 하는 지식인들과는 달리 베를리오즈는 소위 말하는 '국뽕'이 있는 인물이었고, 레지옹 도뇌르 5급과 4급을 받은 뒤 늘 자랑스러워하며 단 한순간도 빼놓지 않고 레지옹 도뇌르 약장을 패용하고 다녔다. 베를리오즈의 사진이나 초상화를 보면 늘 옷깃에 네모 배지 같은 것이 달려 있는데, 그게 바로 레지옹 도뇌르다. 베를리오즈가 가지고 있던 그런 소중한 물건을 직접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레지옹 도뇌르 자체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없지만, 베를리오즈가 좋아했던 훈장이라는 점에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

베를리오즈의 레지옹 도뇌르.
베를리오즈의 훈장과 기념 바톤, 지팡이를 전시하는 캐비닛.

*레지옹 도뇌르(Legion d'honneur): 프랑스의 훈장으로 나폴레옹이 수여하기 시작했으며 원래 군사훈장이었으나 현재는 국위를 선양한 프랑스인들과 유명한 외국인들에게 모두 주어지는 훈장이다. 레지옹 도뇌르 수상자 중에서는 때문에 외국인도 많다. 총 5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숫자가 클수록 낮은 등급이다. 베를리오즈는 4급 슈발리에까지 수여받았다.


하지만 이 레지옹 도뇌르의 가치도, 또 다른 소장품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친다. 정면에 보이는 65년도 베를리오즈의 초상화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베를리오즈의 초상화로, 사진만 있던 시대에 초상화를 남겨주었음을 무척 좋아한다. 파란 눈과 어울리게, 하얀 머리카락에 살짝 푸른빛 명암이 돌고, 초록색 태슬이 달린 의자, 그리고 맞은편의 피아노, 가슴의 레지옹 도뇌르 4급과 왼손 약지의 결혼반지까지 어디 하나 버릴 디테일이 없는 초상화기 때문이다. 이 초상화만으로도 이미 벅차지만, 이 초상화 바로 아래 놓여 있는 피아노가 바로 초상화 속의 피아노고, 방구석에 있는 초록색 의자가 초상화 속의 그 의자 그대로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감동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탁자와 의자는 베를리오즈가 살던 마지막 집인 칼레 가 4번지에서 가지고 온 물품들이며, 시리얼 넘버 19972의 에라르 피아노는 베를리오즈의 두 번째 아내 마리가 샀던 것으로 (베를리오즈는 작곡가 치고는 드물게도 피아노를 칠 줄 몰랐다) 2015년 베를리오즈 박물관이 경매를 통해 사들인 것이라고 한다. 마음 같아서는 그 소중한 가구들을 꼭 안아주고 앉아도 보고 연주도 해 보고 싶었지만, 박물관이라는 것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문화와 교양이 있는 시민으로서 국가망신을 시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참았다.

베를리오즈의 1865년 초상화와 박물관에 전시된 초상화 속 의자. 역광이라서 속상하다.

중삼층이라는 단어가 있는지 모르겠으니, 다음 방은 2.5층이라고 설명하겠다. 2.5층으로 올라가면 오른쪽으로는 축음기와 라디오의 발전사에 대해 다루는 방이 있다. '레트로퀴즈' 라며 퀴즈를 풀어볼 수 있는 기계도 있었는데 내가 눌렀을 때는 작동하지 않았다. 왼쪽으로 꺾으면 아델과 낭시의 방이 나온다. 아델과 낭시는 베를리오즈의 두 여동생으로, 낭시는 베를리오즈와 다섯 살 차이고 아델은 베를리오즈와 열한 살 차이였다. 베를리오즈의 기록에 남은 모습을 놓고 보자면 낭시는 똑똑하고 냉소적인 면에서는 베를리오즈와 비슷했지만, 관습에 얽매이고 편견을 쉽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음악가인 데다가 외국인이랑 결혼을 강행하기까지 한 오빠와 멀어졌다. 반면 아델은 그에 비해서는 다소 수줍고 전통적인 여성상에 걸맞게 상냥하고 부드러운 성격이었지만, 오빠가 여배우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당시 배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빠의 사랑을 지지해 준 이후 베를리오즈와 무척 가까워져 베를리오즈가 가장 아끼는 동생이 되었다. 낭시와 아델의 방은 역시나 이어져 있는데 내가 찍어온 영상을 보고 우리 언니는 '아니, 베를리오즈 집은 아빠 방을 지나가지 않고서는 아들 방에 못 들어가고, 언니 방을 지나가지 않고서는 동생 방에 못 들어가고, 이게 뭐냐? 뭐 이런 데가 다 있냐?'라고 물었다. 한쪽 방은 19세기 가정집처럼 꾸며져 있다. 안쪽으로 푹 들어간 벽감에 놓인 작은 침대가 무척 아늑해 보였다. 벽 안쪽으로 쏙 들어간 침대와 계단 아래 비좁은 공간처럼 사이에 꼭 끼어 있기를 좋아하는 내게 상당히 사랑스러운 방이었다.

아델의 방으로 추정된다. (출처: 이제레 박물관 홈페이지)

그 옆방은 베를리오즈의 말년을 다룬다. 베를리오즈의 마스크와 베를리오즈의 훈장, 베를리오즈의 머리카락이 있다. 이 가운데 베를리오즈의 머리카락이 유달리 내 시선을 끌었다. 여러분들도 벌써 15곳의 작곡가 박물관 이야기를 나와 함께 읽었으니 알겠지만, 작곡가 박물관들은 작곡가의 머리카락을 꼭 한 타래씩 가지고 있다. 베를리오즈 박물관도 그런데, 다른 박물관들과 약간 다른 느낌을 준다. 보통 갈색이나 회색인 머리카락 몇 가닥 정도가 액자에 곱게 끼워져 있는 것과 달리 베를리오즈의 머리카락은, 정말로 '타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숭덩-잘려 있는 것이다. 정말 눈처럼 새하얀 백발이었다. 아래층에서 보고 온 1864년 초상화에서 베를리오즈의 머리카락을 너무 눈이 시릴 정도의 하얀색으로 묘사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은빛이나 회색빛이 아니라 정말 백발이었다. 베를리오즈의 머리카락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많은 캐리커처가 나왔다. 흔히 보기 힘든 '붉은 머리' 또는 '불그스름한 금발'로 묘사되는 베를리오즈는 마치 '대걸레처럼' 또는 '우산처럼' 머리카락을 넓게 기르고 다녔는데 1830년 빌라 메디치에서 그려진 초상화를 보면 정말 머리카락이 구름처럼 복슬복슬하다. 40년대 후반 정도가 되면 슬슬 머리카락이 가라앉고, 완전 곱슬거리기보다는 웨이브가 들어간 머리카락정도로 정돈되더니, 67년이 되면 말려 있던 머리카락이 완전히 풀려서 리스트의 단발에 가까운 머리카락이 된다. 아마 이 기다란 하얀 머리카락 타래는 인생 최말년에 잘린 것일 텐데, 잘려서 남긴 머리카락조차도 다른 작곡가들보다 과감하고 특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만 그 머리카락을 보고 있으면 국수나 인사동에서 파는 꿀타래가 떠오르며 한 입 먹어보고 싶기도 하고, 돌잔치 상에 장수를 뜻하는 실타래로 올려놓아야 할 것도 같다.

베를리오즈의 머리카락.

여기까지 보면 19세기풍으로 꾸며진 생가 영역은 다 봤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제 3층과 지하 1층만 남았다. 3층은 크게 두 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한쪽은 저술가로서의 베를리오즈, 다른 한쪽은 작곡가로서의 베를리오즈를 다룬다. 작곡가로서의 베를리오즈에 대해서는 주로 베를리오즈의 오페라를 다룬다. 망작 오페라 벤베누토 첼리니, 극적 전설 파우스트의 겁벌, 야심작 트로이 사람들과 베를리오즈가 사랑하던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기반한 베아트리체와 베네딕트까지. 베를리오즈 박물관에 갔을 때 내가 들어 봤던 곡은 이 가운데 베아트리체와 베네딕트뿐이었기 때문에 내용이 막 재미있지는 않았다. 특히 베를리오즈 오페라의 정수로 꼽히는 것은 보통 트로이 사람들이기 때문에, 트로이 사람들을 보고 갔더라면 훨씬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 하지만 몰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벽에 걸려 있는 풍자화들이었다. 베를리오즈, 리스트, 바그너 이렇게 셋은 흔히 '진보파' 또는 '미래의 음악'으로 싸 잡히곤 했는데, 베를리오즈는 이 분류를 무척 싫어했다. 일단 '바그너, 리스트, 베를리오즈'가 순서로 이름이 나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거니와 본인은 사실 글루크*와 베토벤을 사랑하는 고전주의자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베를리오즈는 '음악의 미래는 있겠지만 미래의 음악은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바그너와 거리를 두고 싶어 했지만 지금도 그렇고, 풍자화들을 봐도 거리 두기에 성공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트로이 사람들' 섹션에 가 보면 풍자화가 하나 걸려 있는데, 신생아 '트로이 사람들'을 안고 있는 베를리오즈에게 자기도 좀 봐달라며 매달리는 바그너의 '탄호이저'를 보고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글을 읽고 있는 팬분들께는 미안하지만, 솔직히 바그너의 어법은 리스트나 베를리오즈 등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지 않던가. 그렇듯이 탄호이저가 트로이 사람들과 얼마나 비슷한지가 당대에도 지적됐던 것이다. 아마 바그너는 그 풍자화를 봤더라면 무지하게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베를리오즈도 마찬가지일 테고... 결국 탄호이저와 트로이 사람들이 동시에 공연되며 트로이 사람들은 탄호이저에 묻혀 참패당했기 때문에 둘 모두에게 아픈 풍자화였을 것 같다. 지금은 둘 다 명작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트로이 사람들의 명성이 탄호이저에 못 미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냥 탄호이저랑 트로이 사람들이 같이 언급되는 것만으로 베를리오즈에게 꽤나 심리적 타격이 가지 않을까.

베를리오즈에게 자기도 봐달라 칭얼대는 탄호이저 풍자화.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글루크: 고전 시대 독일의 오페라 작곡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 '이피게네이아와 타우리스' 등으로 유명하며, 당시 끓어오르고 있던 '내용이 중요하냐 음악이 중요하냐' 문제라고 설명할 수 있는 두 오페라 전통의 대립이었던 부퐁 논쟁을 정리한 중요 작곡가이다.


저술가 베를리오즈 섹션은 내가 이 박물관에서 가장 좋아하는 섹션 가운데 하나기도 하다. 나는 베를리오즈의 글을 정말 좋아한다. 드라이하고, 후추 뿌린 듯 매콤한 블랙 유머와 한 마디로 사람을 '순살 만드는' 촌철살인, 그런 베를리오즈의 글이야말로 내가 글을 쓸 때 추구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최고의 스승이지만, 모든 제자를 죽이지."라든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 행운으로는 충분치 않다. 행운을 가져오는 재능도 필요하다." 같은 문장들을 대체 어떻게 쓰는 걸까? 베를리오즈가 작곡가로서 얼마나 천재였는지는 내가 음악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말할 수 없지만, 나름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봤을 때 그의 글은 정말 천재적이다. 비록 번역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음악여행자의 책'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베를리오즈의 회고록을 읽어 보면 필요한 내용은 다 들어 있으면서도 전혀 글이 지루해지지 않고 뛰어난 가독성으로 술술 읽힌다. 가히 경이롭다. 분명 19세기의 저술을 읽어보면 바그너의 '나의 생애' 나 리스트의 '쇼팽' (리스트는 쇼팽 전기를 저술했다. 그 글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겠다) 등, 장황하고 미사여구로 가득한 책이 많다. 분명히 베를리오즈의 편지를 읽어보면 베를리오즈도 그런 장황한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닌데, 글이 착착 감긴다. 거짓말이 아니다. 너무 글이 맛깔나서 그 글을 읽고 베를리오즈라는 사람에 대한 흥미가 생길 정도라면 믿겠는가? 19세기 음악계의 환경과 베를리오즈가 직접 풀어주는 '썰' 들은 일반인이 봐도 재미있을 정도다. 그 전설적인 멘델스존과의 지휘봉 교환 일화와 메이드복 일화도 그의 자서전에서 나온 것이니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평론가 베를리오즈다. 앞서 말했듯 베를리오즈는 작곡으로는 먹고살기 충분하지가 않다 보니 30년 가까이 평론가로서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았는데, 작곡가로서의 베를리오즈는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평론가 베를리오즈는 인정했던 듯하다. 그리고 그럴 만했다. 베를리오즈는 본인이 평론에는 재능이 없고 평론 같은 글은 잘 써지지도 않아 쓰레기통에 구겨 넣은 원고만 수십 장이라고 하지만, 베를리오즈의 평론은 전설적이다. 물론 베를리오즈도 잘못된 평가를 내린 적이야 많겠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리오즈의 글에서는 번뜩이는 통찰이 종종 엿보인다. 아니 종종으로는 부족하다. 내가 보기에는 천직이라고 해도 모자랐다. 정말 재미있는 일화가 많지만 한 가지만 소개하자면, 평론가들의 전문성을 믿지 않아 평론단을 단체로 골탕 먹이려던 리스트가 유명 사중주단과 그보다 덜 유명한 사중주단이 자리를 바꾸어 연주하게 한 적이 있다. 거의 모든 평론가들이 자리가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역시 유명 사중주단의 연주가 제일 훌륭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었을 때 베를리오즈만이 두 연주단이 바뀌어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카르멘을 쓰지 않았던 시절의 비제에게 주목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본인이 '진보파'에 속해 있다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브람스나 멘델스존에게도 호의적이었으니 놀라운 일이다. 뇌물도 받지 않고, 정말 자기 신념대로 글을 써내려 갔는데 그 글이 무서울 정도로 날카롭다. 본인의 사적 감정과 무관하게 음악을 평가했고, 심지어는 본인의 적이 칭찬할 만한 곡을 써내면 칭찬해 주는 것에서 묘한 즐거움까지 느꼈다고 한다. 겉보기에는 감정에 치우쳐 있는 사람이었지만 진지하게 알아보기 시작하면 베를리오즈만큼 이성적인 사람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가지 하게 된다. 대단한 사람이다. 자신의 감정과 평가를 분리해 내기가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다. 지금 놓고 보면 가끔 베를리오즈의 표현이 과격해 보이지만, 원색적인 표현이 난무했던 19세기 평론계에 놓고 보면 베를리오즈의 평론은 사실 굉장히 품위가 있는 편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통찰력을 가지고 글을 쓸 수 있는 걸까... 나는 그런 그의 평론을 보면서 늘 궁금해한다.


내가 베를리오즈 박물관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장품도 이 '평론가 베를리오즈'와 관련되어 있다. 요즘은 휴대폰이나 노트북으로 많이 대체되긴 했지만, 영화관이나 극장처럼 휴대폰을 사용할 수 없는 곳에서 가끔 볼 수 있는 평론가들의 필수품이 있는데 바로 손바닥만 한 수첩이다. 베를리오즈도 저녁마다 평론을 쓰기 위해 공연을 보러 가며 그 노트를 챙겨 다녔던 모양이다. 수첩 안에는 베를리오즈가 연필로 마구 휘갈겨 쓴 글자들이 기어 다니고 있다. 그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과 단어들을 마구 휘갈겨 쓴 뒤 집에 와서 그 감상을 보며 정리하는 작업을 하는 모습이 눈앞에 생생히 그려졌다. 역시 로시니는 별로야, 연주자들이 베토벤의 음악을 난도질해 놓았어, 멘델스존의 지휘는 언제나처럼 훌륭하네, 이런 생각을 하며 수첩을 닫고 극장을 나서는 베를리오즈의 모습... 아, 인간으로서는 그다지 닮고 싶지 않지만 평론가로서는 닮고 싶은 사람이다.

베를리오즈의 수첩. 대충대충 휘갈겨쓴 C'est... Cette oeuvre, le prix 등등의 단어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외에도 '오케스트라와의 저녁' '관현악법서'처럼 기념비적인 작품들과, 활발하게 편지를 쓰던 편지 수/발신인 베를리오즈의 이야기도 나온다. 각각의 섹션에서는 베를리오즈가 쓴 글들의 초고나 원고, 편지 원본이 전시되고 있으므로 꼭 전시장의 왼쪽에 있는 서랍을 빼서 원고를 보기를 바란다. 프랑스어를 읽을 수 없어도 좋으니 말이다. 베를리오즈 박물관은 당연하게도 베를리오즈 연구에 앞장서고 있는 곳이고 가장 많은 원본 원고를 소장하고 있는 곳이다. 다른 곳에서는 한두 장만 있어도 자랑하는 편지와 원고가 열몇 개씩 전시되어 있으니 가 보지 않으면 큰 손해다. 게다가 (비록 프랑스어밖에 지원되지 않긴 하지만) 베를리오즈 박물관이 디지털화에 성공한 원본 편지들 스캔본을 읽어 볼 수 있는 미디어 스테이션도 있다. 색깔, 인물, 날짜, 주제별로 분류까지 해주는 완벽한 베를리오즈 도서관인 셈이다. 역시 시 지원금을 받는 게 좋긴 좋다, 입장료도 무료인데 이런 기계까지 들여 주고...


여기까지 봤으면 지상층은 다 봤다. 이제 지하로 내려갈 차례다. 지하에는 베를리오즈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작은 홀이 있다. 살짝 서늘한 공기가 뺨을 스치고 멀리서부터 베를리오즈 음악 소리가 은은하게 흘러나온다. 그래서 가까이 들어가 보면 수많은 베를리오즈의 곡을 재생할 수 있는 큰 스피커가 있다. 나는 어김없이 베를리오즈의 곡 가운데서 가장 좋아하는 환상교향곡 2악장을 틀어 놓고 가만히 음악에 잠겼다. 따스한 햇살과 코트 생탕드레의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가 긴장을 풀어 나를 나른하게 만들었다. 쭉 그곳에 머무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쾌하고 발랄한 베아트리체와 베네딕트 서곡을 틀어놓은 뒤 나는 박물관 정원으로 나가 다시 한번 베를리오즈 집을 바라보았다. 베를리오즈 집 사진을 찍을 때면 늘 보이는 구도가 내 눈앞에 있었다. 그 정원에서 베를리오즈 콘서트가 열렸고 베를리오즈가 뛰놀았다. 지금까지 갔던 그 어떤 박물관보다도 아늑한 ㄷ자 모양의 가정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여태껏 생가가 주는 공간의 힘을 이렇게 강력하게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아마도 그건 단순히 건물만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 환경이 거의 자연환경뿐이다 보니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베를리오즈 시대의 흔적까지 합쳐져셔 느껴진 감상이 아닐까 싶었다. 몇 장 사진을 찍고 시계를 보자 벌써 입장한 지 두 시간 가까이가 지나가 있었다. 베를리오즈 박물관이 생각보다 다 너무 컸고 내 취향이었던 것이다. 작곡가로서의 베를리오즈는 몰라도, 내가 인간 베를리오즈는 정말 흥미롭게 생각하긴 하는구나 싶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베를리오즈 서간집 3권. 프랑스어로만 되어 있다. 인터넷에서 사면 종이가 빳빳한 하얀색이고 박물관에서는 약간 푸석한 누런색이었다. (출처: ABEbooks)

자고로 이런 멋진 박물관에 왔으면 돈은 팍팍 써줘야 하는 법이다. 나는 오늘 지갑 시원하게 열어주마 하고 잔뜩 벼르며 굿즈샵으로 향했다. 굿즈샵은 크기가 크지는 않지만 품목은 무척 다양하고, 베를리오즈 관련 DVD와 CD를 파는 것이야 당연하고 저술가로서도 활발했던 베를리오즈의 특성상 베를리오즈의 저술 (오케스트라와의 저녁, 관현악법서, 회고록 등...)과 베를리오즈의 서간집도 팔고 있었다. 족히 15분은 고민한 끝에 나는 1941년도 베를리오즈를 모티브로 한 영화 하나와 (DVD인 줄 알았는데 VHS여서 틀 수는 없게 됐지만, 뭐 괜찮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저작권 만료로 인해 유튜브에 공짜로 올라와 있다) 베를리오즈 실링 왁스 세트를 골랐다. 실링 왁스가 그냥 깔끔한 B 이랬으면 좋았을 텐데, 베를리오즈의 얼굴이 캐리커처로 새겨져 있긴 해서 아쉬웠다. 그다음으로는 베를리오즈의 서간집 8권 중 1권을 집어 들었는데 카운터 뒤를 보니 이런, 1권만 재고가 있는 줄 알았는데 다 재고가 있지 뭔가. 베를리오즈의 서간집 전권을 대학교 도서관에 신청까지 해놓은 내가 이런 방앗간을 지나칠 수는 없었다.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건 3권, 1842년부터 50년까지 편지를 모아둔 서간집 4권이었다. 이 순간 나는 내가 여행을 오기 전 짧은 프랑스어를 배워뒀다는 사실에 속으로 감사하며, 손짓발짓과 내가 아는 모든 프랑스어를 총동원해 서간집 3권을 달라고 부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파파고가 있는데 뭐 하러 그런 짓을 했나 싶기도 하다. 그렇게 3가지를 결제하자 10만 원이라는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가격이 나왔다. 서간집이 6만 원이었고 다른 굿즈는 그리 비싸지 않았으니 오해 없으시길. 서간집 3권을 펼쳐 보고 감격해서 종이에 얼굴을 파묻는 나를 보며 직원은 '무척 기쁘신가 봐요' 라 이야기했고 나는 '네, 네, 진짜 기뻐요'라고 답했다. 베를리오즈 박물관까지 가기 위해 했던 고생이 조금도 아깝지 않은 환희의 순간이었다.


행복했다. 비록 버스는 이미 끊겼고 (오후 세 시였는데도!) 지하철도 트램도 어떤 대중교통도 기대할 수 없는 촌이라서 택시비 10만 원을 결제한 채로 택시 픽업을 기다려야 했지만 말이다. 가벼워진 지갑과 무거워진 양손으로 나가기 전 불현듯 머릿속에 스친 생각이 있었다. '오르골'. 오르골, 오르골이 프랑스어로 뭐더라? 음악상자... 음악상자! 아, 그래, Boite de musique였다! 오르골 수집을 취미로 하고 있는 내게 베를리오즈 오르골은 엄청난 희귀 소장품이 되어줄 것이 분명했다. 나는 태생적 내향적 기질을 극복하고 용기 내어 물었다. "혹시 오르골 파세요?" 안타깝게도 돌아온 답은 "아뇨, 미안하지만 팔지 않아요"였다. 그런데...


2024년 9월, 내가 귀국한 지 두 달이 지나고 베를리오즈 박물관 인스타그램에 충격적인 사진이 올라왔다.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어.

'파우스트의 겁벌'은 베를리오즈의 오페라 (베를리오즈는 '극적 전설'이라 부르기를 선호했고 오라토리오로 분류되기도 한다)로, 그 안에 나오는 '헝가리 행진곡'은 나름 베를리오즈의 곡 가운데 유명한 축에 속한다. 아니, 그런데, 파우스트의 겁벌인 주제에 껍데기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나. 이렇게 분홍... 분홍하고 예뻐도 되는 건가? 파우스트는 지금 지옥의 업화에 휩싸여 죽어가고 있을 텐데...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을 정도로 껍데기가 아름다웠다! 둥그런 오르골 상자 위 베를리오즈의 초상화는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La Damnation De faust... 베토벤 박물관과 모차르트 박물관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오르골은 본 적이 없었다. 껍데기에 그 곡의 이야기를 담아주다니!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불운한 것은 베를리오즈 박물관에서는 해외배송을 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온라인샵이 아예 없어서 국내배송도 안 해준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절박하게, '안녕하세요, 저는 베를리오즈에 무척 흥미가 많은 한국인입니다, 5월에 갔을 때는 오르골이 있냐 물어 없다는 답을 받고 무척 아쉬웠는데 나온 걸 보고 정말 너무너무너무너무 오르골이 갖고 싶어 연락드립니다 어떻게든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라고 인스타그램 DM을 보냈다. 무려 한 달이 지나서야 온 답변은 역시나 배송은 불가하다였다. 하지만 박물관은 그런 내 구구절절한 설명을 보고 연민을 느꼈는지 내게 비밀을 하나 귀띔해 줬다. 바로, 환상교향곡 오르골이 조만간 굿즈샵에 출시될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베를리오즈의 대표작, 내가 가장 사랑하는 교향곡 가운데 하나인 환상교향곡 오르골이 나온다니... 아, 교환학생을 1년 더 늦게 갔어야 했다. 환상교향곡 오르골, 생각만 해도 감격적이라서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다. 10만 원을 주고서라도 살 의사가 있는데, 혹시, 프랑스 리옹 근교에 살고 운전면허가 있는 분들, 시간이 있으시다면 이 불쌍한 대학생을 위해 오르골 대리구매 해주실 수는 없으신가요. 여러분들의 연락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베를리오즈 박물관에서 그르노블로 돌아오며 무려 10만 원이라는 택시비를 날린 나는 이때 결심을 했다. 운전면허를 따야겠다고 말이다. 정말 운전이 없으면 이렇게 돈도 날리고 시간도 날리는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고 한국에 귀국하자마자 나는 운전면허를 땄다. 혹시 다시 프랑스에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이번 방문보다는 고생해서 베를리오즈 박물관에 있기를 바라며... 제주도에서 렌터카를 타야 해서 같은 이유도 아니고, 프랑스 시골 구석에 처박혀 있는 작곡가 박물관에 편하게 가고 싶어서 운전면허를 나도 참 나다. 엑토르 베를리오즈 박물관께서는 어서 셔틀버스라도 편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루에 두 번 버스 다니는 동네가 뭐냐고요, 정말!


최종 평가

도시에 있지 않다 보니 혹시라도 위치가 어딘지 감을 잡지 못하실까 걱정되어 좀 확대한 사진을 가지고 왔다...
명칭: 베를리오즈 박물관 (Musee Hector-Berlioz)
운영시간: 10:00~12:30, 13:30~18:00 (9월부터 6월까지는 화요일 휴관, 7, 8일은 무휴)
입장료: 무료
사이트 링크: Hector Berlioz Museum

1. 도시 접근성:

별을 줄 수 없을 정도로 접근성이 나쁘다. 하루에 농어촌버스가 두 대 다니는 수준의 시골이다. 자동차가 없다면 갈 생각도 하지 말기를 바란다.


2. 도시 내 접근성: ★★★

일단 코트 생탕드레까지 도착했다면 그 뒤로는 쉽다. 어차피 동네의 모든 표지판이 베를리오즈 박물관을 가리키고 있고 동네 중심부라서 조금이라도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데로 따라가면 금방 베를리오즈 박물관이 나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3. 소장품: ★★

편지가 정말 많다. 악보도 정말 많다. 베를리오즈가 받은 기념품이랑 기념품은 다 있다. 가구도 칼레 가에서 뜯어왔다. 머리카락도 있고 인장도 있고 문진과 필기도구도 있고 사진도 있고 지팡이도 있고 기자(또는 평론가) 수첩도 있고 훈장도 있고... 안경이나 깃펜 같은 건 없더라도 각각의 소장품들이 충분히 의미와 무게 있는 소장품이기 때문에 4점을 주었다.


4. 언어 지원: ★★★

영어 지원을 기대도 하지 않고 왔는데 의외로 오디오 가이드에서 영어가 제공된다. 의외로 영어 퀄리티도 괜찮다. 기대를 하나도 안 하고 가서 그런지 더 괜찮게 느껴진다. 다만 벽에 설명이 프랑스어로만 붙어 있기 때문에 오디오 가이드에 100%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참고로 오디오 가이드 역시 무료며, 오디오 가이드를 처음 틀어보면 '베를리오즈의 목소리로 직접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라고 하는데 대부분의 내용이 베를리오즈의 회고록을 그대로 읽어주는 내용이다. 베를리오즈의 회고록을 이미 달달 외운 나는 거의 다 아는 내용이었지만 회고록을 전혀 읽어 본 적 없는 사람은 베를리오즈가 쓴 말을 직접 생생하게 듣는다는 점이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다.


5. 가성비: ★★

0유로. 그렇게 많은 작곡가 박물관을 돌아다녀봤는데 0유로는... 0유로! 무료! 요즘에 이런 박물관이 어디 있냔 말이다! 성별 국적 나이 직업 불문 전원 무료! 30명이 들어가도 무료! 무조건 무료! 역시 국비지원이란 좋은 거다! 0원이면 슈베르트 박물관이었어도 가성비 5점이었다! 무료다 보니 가심비가 미쳤다!


6. 규모: ★★★★

작곡가 박물관 중 상당히 큰 편에 속한다. 총 4층에 달하는 규모의 건물이기도 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넓어 보이지 않는데 오디오 가이드 분량이 빡빡하고 3층 베를리오즈의 저술과 베를리오즈의 오페라 전시관은 공간을 아껴서 쓰기 때문에 볼륨이 크다. 거기다가 지하 1층에 내려가서 음악 한두 곡 듣고 나면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져 있다.


7. 상호작용: ★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미디어 스테이션이 있고, 어린이를 위한 베를리오즈 박물관 학습지도 있다. 위층에는 베를리오즈의 오페라나 음악을 설명해 주는 미디어스테이션과 앞서 말한 편지 읽기 미디어스테이션이 있지만 기계들 관리가 잘 되지 않고 있는 것 같아 3점으로 마무리하겠다.


8. 굿즈: ★

지금까지 굿즈 점수를 짜게 준 것은 전부 베를리오즈 박물관에서 5점을 주기 위한 빌드업이었다. 아직 모든 작곡가 박물관의 미감이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는 증거인 건지, 대부분의 굿즈가 심플하지만 인상 깊다. 가장 큰 장점은 작곡가 얼굴을 인쇄하지 않고 작곡가의 서명을 인쇄했다는 점이다. 볼펜, 연필, 크레용, 지우개, 컵, 키링, 노트, 부채, 마그넷 등을 팔고 있는데 (물론 일부 굿즈에는 작곡가 초상화를 인쇄하는 못된 버릇이 남아 있다) 베를리오즈의 서명이나 악보 일부를 인쇄해 어디 들고 다녀도 부끄럽지 않은 굿즈를 판매하고 있다. 작곡가 박물관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듯 베를리오즈 곡 CD와 오페라 DVD, 베를리오즈 관련 저술과 베를리오즈'의' 저술도 모두 판매하고 있다. 물론 영어가 지원된다는 보장은 없다. 처음에는 오르골이 없어서 점수를 1점 깎으려고 했는데, 내가 그날 박물관에 가서 오르골은 안 파냐고 물어본 것이 영향을 미쳤는지 이제 파우스트의 겁벌 오르골이 나온 데다가 곧 환상교향곡 오르골까지 나온다 하니 5점을 주지 않고는 참을 수 없다. 정말로...내가 지금껏 본 클래식 오르골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오르골이다. 갖고 싶다...


9. 큐레이팅: ★★★★☆

대체로 인생사를 따라가며 진행하고 있지만, 각 방별로 '어린 베를리오즈의 교육' '베를리오즈의 여자들' '저술가 베를리오즈' '베를리오즈의 오페라' 등 테마가 있는 방들이 중간중간 있어 각 방이 19세기풍으로 꾸며진 것과 별개로 깔끔하게 정리된 주제와 전시품을 따라가는 맛이 있다. 하지만 전시품 설명의 너무 많은 부분이 베를리오즈의 회고록 읽기라서 아쉬운 마음에 0.5점을 깎았다.


10. 총평: ★★★★☆

이렇게 좋은 박물관인데... 위치로 인해 도저히 양심상 추천을 할 수가 없다. 아...이게 정말 좋은 박물관인데 왜 이런 곳에 박물관을 지어서... 아니 이해는 가지만 위치가...하...

최대 장점: 소비욕을 자극하는 굿즈, 무료라는 은혜로운 가격, 넉넉한 규모와 풍성한 소장품

최대 단점: 자가용 없이는 꿈도 못 꿀 극악한 접근성

추천 여부: X. 차를 가지고 계신 분께도 섣불리 추천드리지 못하겠다. "나는 정말 베를리오즈 박물관 못 가면 죽을 것 같다" "베를리오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다" "베를리오즈가 내 인생을 구원했다" 가 아닌 이상 추천을 드릴 수가 없다. (나는 첫 번째 경우에 속했다.)

혹시나 베를리오즈 박물관을 가 볼까 생각하는 분들을 위해 시간표를 첨부한다. 코트 생탕드레에서 그르노블로 가는 버스는 금요일을 제외하면 오후 1시 45분차가 막차다. 무슨 이런..

17화 예고: 독일어 수업에서조차 '바그너로 먹고사는 도시'로 소개되는 바이로이트로 향해 바그너의 본거지에서 멘델스존을 틀어주겠다는 일념을 불태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