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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굴꾼 Nov 19. 2024

17. 바이로이트 바그너 박물관에 가다

'악극의 왕' 리하르트 바그너.

리하르트 바그너. 일명 '오페라의 왕' 이라지만 주세페 베르디를 두고 바그너를 왕이라 칭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악극의 왕'으로 적고 싶다. 오페라의 판도를 바꿔놓으며 까와 빠를 동시에 미치게 만드는 진정한 의미의 스타, 리하르트 바그너. 로엔그린, 트리스탄과 이졸데, 반지,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파르지팔 등 심오하고... 나름대로의 사상을 담은, 극과 음악의 경계를 허무는 혁명적인 오페라를 썼다고 전해진다. 또는 악극이든가.


나는 바그너를 싫어한다. 이 글을 읽는 바그네리안이 있다면 미리 사과를 전한다. 뭐, 베를리오즈 챕터에서 이미 이야기했듯 소위 말하는 '진보파' 음악의 특징인 길고 장황한 패시지, 거대한 오케스트라,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하는 화성... 그 모든 것이 내게는 힘들었다. 바그너는 후대 작곡가 말러 정도를 제외하면 아마 내가 가장 싫어하는 요소들을 기가 막히게 종합해 놓은 작곡가일 것이다. 이미 별로 호감 요소가 없는 작곡가인데, 바그너는 심지어... 하... 인간으로서 너무 별로인 작곡가다. 내 주위 바그네리안들도 바그너의 음악은 나한테 영업하더라도 바그너 인간은 절대 영업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인간 바그너를 욕하면 즐거워하곤 했다. 내가 바그너를 싫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박물관 이야기를 하며 더 자세히 하도록 하겠다.


시작하기 전 미리 경고를 해두고 들어가겠다. 앞으로의 글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야기, 나치 이야기, 반유대주의 이야기, 가감 없는 바그너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들어 있을 예정이다. 바그너가 너무 좋아서 바그너를 비판하는 사람은 참을 수가 없는 바그네리안이 실수로 이 글을 눌렀다면 서둘러 지금이라도 도망치기를 권해드린다. 하지만 그런 비판쯤이야, 오히려 재미있어하는 바그네리안이라면 잘 오셨다. 이 글은 돈 주고도 못 보는 '바그너 까'의 바이로이트 여행기기 때문이다. 이런 기회 정말 흔치 않다. 바이로이트는 인구 7만 명의 작은 도시다. 내가 지내던 만하임에서 바이로이트까지 완행열차로만 타고 가자 3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출발할 때는 흐리던 날은 바이로이트에 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부슬비로 변해 도시 전체에 한층 더 한적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드리우고 있었다. 바이로이트 축제는 8월이었고 내가 도시에 도착한 것은 5월이었으니 시끄러울 이유가 전혀 없는 날이긴 했다.


바이로이트에서 내가 처음 향한 곳은 당연히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이었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일명 '벽돌극장'이라고도 불리는 극장으로, 바그너가 본인의 오페라를 상연하기 위해서 지은 극장이다. 화려하게 생긴 파리 가르니에 오페라 극장이나 우아함과 고상함이 뚝뚝 흘러넘치는 빈 슈타츠오퍼와 비교해 봤을 때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외관은 확실히 볼품없다. 초등학교를 지을 때나 써야 할 것 같은 붉은빛 벽돌에 하얀색 하이라이트라, 나름대로의 멋이 없는 건 아니지만 석조 극장이 아니다 보니 아무래도 그 위용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떨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연출의 귀재 바그너답게, 바그너는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을 어떻게 하면 멋있게 보이게 할 수 있을지 다 계획을 세워 놓았었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도시 한가운데 평지에 지어져 있는 오페라 극장들과 달리 혼자 경사 있는 산꼭대기에 지어져 있다. 어쩌면 이건 흔히 대학교 부지가 산 중턱에 지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지가 상대적으로 저렴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싶지만... 동시에 바이로이트 도심에는 변경백 극장이 있기 때문에 굳이 극장 두 개가 도심에서 경쟁을 하는 것도 이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고, 정말 어쩌면 이 부지가 주는 위압감까지 바그너가 계산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경사를 헉헉거리며 올라오다 보면 저 끄트머리에서부터 보이는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이 마치 산꼭대기의 신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경사가 있는 길을 올라가다 보면 목적지가 보일 때의 환희는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것임을 우리나라 고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다 알지 않는가. 바그너의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 올 정도면 보통 마차나 자동차를 타고 왔을 테니 내가 느꼈던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바그너 나름의 계획이 있던 것 아닐까.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으로 올라가는 길은 가운데에 꽃밭을 두고 양쪽으로 나뉘어 있는데, 지크프리트바그너 거리를 따라 10분 정도 걷다 보면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이 나오기 직전 왼쪽으로는 코지마 바그너 흉상이 오른쪽으로는 리하르트 바그너 흉상이 있다. 코지마 바그너는 내가 클래식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 바그너보다 더 싫어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하지만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는... 아무래도 바그너가 죽고 나서 이 바이로이트 축제를 유지해 줬던 사람으로서 기념하지 않을 수 없었나 보다. 두 흉상은 1930년대에 만들어진 것인데, 나치가 권장하던 아트스타일의 조각가가 만들었다고 한다. 으! 어떻게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하나하나 반유대주의자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단 말인가? 기분이 무척 좋지 않았지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게 맞지, 내가 쓰레기통에 기어들어와 놓고서는 쓰레기가 있다고 불평하는 꼴임은 알고 있었다. 바그너가 아무리 싫어도 바그너를 공부하지 않고서는 클래식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바이로이트의 코지마 바그너 흉상. 으!

아쉽게도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안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바이로이트 극장은 5월 초순까지 매주 일요일, 일주일에 한 번 영어 투어를 운영하는데 5월 투어가 종료되고 난 다음 주 일요일에 내가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 갔던 것이다. 그 지난주에 가려고 했을 때 폭우가 쏟아져 '그래, 다음 주에 가버리지!'라고 생각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하는 후회가 들었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하이라이트는 벽돌 외관이 아니라 바그너가 본인의 극에 꼭 맞게 디자인해 놓은 오케스트라 피트나, 무대와 객석 사이 거리나 객석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의도 없이는 어떤 것도 하지 않는 바그너의 오페라 극장에 간다면 그 의도들을 다 아는 것이 무척 중요한데, 투어를 통해 듣고 싶었던 그 의도를 제대로 듣지 못해 무척 아쉬웠다.


축제극장에서 내려가 바그너의 저택 반프리트로 향하기 전 잠깐 바이로이트 극장 뒤편으로 슬쩍 빠져 봤다. 기념품샵도 닫았고 축제도 열리지 않는데 뭐 하러 둘러봤냐고? 그 뒤편에 있는 리스트 흉상 때문이었다. 바그너와 리스트는 무척 각별한 사이였다. 음악적으로 깊은 동반자였다는 것도 틀린 설명은 아닌데, 개인적으로도 각별한 사이였다. 좋은 각별함인지 나쁜 각별함인지는 말을 아끼겠다. 위에서 나온 코지마 바그너, 바그너의 아내의 처녀 적 성이 코지마 리스트이다. 그러니까, 리스트는 바그너의 장인어른이다. 바그너는 리스트의 사위고. 참고로 바그너는 1813년생이고 리스트는 1811년생이다. 코지마와 리하르트 바그너의 나이 차이는 무려 24세. 리스트가 절연을 하고도 남았을 사이지만 리스트는 잠시 절연을 했다가도 결국 딸 생각에 바그너와 화해했다. 다음 편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리스트가 죽은 곳도 바이로이트다. 바이로이트 축제 기간에 딸을 보러 왔다가 바이로이트에서 그대로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당당하게 축제극장 앞을 장식하고 있는 바그너 부부와 달리 혼자 뚝 떨어져 있는 모습이 불쌍한 흉상이었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반프리트로 걸어가는 길에는 중간중간 색색의 바그너 조형물이 놓여 있었다. 내가 본 색깔은 자주색, 파란색, 검은색 정도였는데 다 모아두면 무지개색이 될까 쓸데없게도 고민해 보았다. 각각의 미니 바그너 아래에는 바그너와 관련된 인물들이나 사건, 공간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하늘 위로 두 팔을 뻗친 미니 바그너는... 이런 속된 표현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요즘 신조어로 '킹 받았다'. 자의식 과잉인 바그너가 이렇게 본인이 '우상숭배'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얼마나 기뻐할지... 무서울 지경이었다. 따지고 보면 팔아먹을 게 바그너 말고는 없어서 동네가 바그너로 도배되어 있는 것이겠지만 도시 어디를 가도 내가 싫어하는 바그너의 상판을 봐야 한다는 게 참 껄끄러웠다. 그나마 내 마음에 작은 위안이 되어 준 것이라면 자주색 바그너의 다리에 적혀 있던 "Anti-Semite" 였달까. 바그너로 먹고사는 도시라고 해도 바그너의 인성까지 미화해 주면 안 되니까 말이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뻤다.

바그너의 다리 오른쪽 아래를 잘 보면 희미한 Anti-Semite 글자가 보인다. 이 색색깔의 바그너는 도시 곳곳에 바그너를 기념하기 위해 설치되어 있다.

마침내 도착한 반프리트는 자동차나 마차를 딱 끌고 들어오기 좋은 진입로, 그리고 그 뒤로 빼꼼 보이는 입구가 인상적인 저택이었다. 아니 저택이라고. 다른 작곡가처럼 아파트먼트, 이런 소리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저택이었다. 둥그런 진입로 앞 루트비히 2세 흉상과, 건물 외벽에 새겨진 바그너 오페라 장면의 일부, 그리고 건물 뒤쪽의 분수, 화려한 조경, 양옆으로 날개처럼 달린 추가 건물들까지 바그너가 얼마나 잘 먹고 잘 살았는지에 대한 증명 같았다. 내가 지금까지 가봤던 그 어떤 박물관보다 거대했다. 자기 오페라처럼 말이다. 베토벤, 모차르트, 바흐 같은 독일-오스트리아 음악계의 거장들에게도 이런 규모의 박물관은 주어진 적이 없었다. 운 좋게도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날이었기에 8유로를 절감하고 지도를 받아 든 나는 정말 이 정도 크기면 8유로를 냈어도 아깝지 않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박물관을 입장할 때 티켓을 따로 끊는 것이 아니라 동그란 스티커를 붙이고 입장하는데, 신관에서 반프리트로, 반프리트에서 지크프리트 바그너 저택으로 이동할 때마다 스티커를 검사하므로 스티커가 뜯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바이로이트 바그너 박물관은 반프리트, 박물관 신관 그리고 지크프리트 바그너 저택 이렇게 세 곳으로 구성되어 있다. 반프리트 저택은 바그너라는 인간에 대해서 다루고 있고 박물관 신관은 주로 바그너의 작품과 공연 이야기를, 지크프리트 바그너 저택은 바그너와 바그너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나치와 바그너 일가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나는 신관에서 시작했는데, 백팩 정도 되는 크기의 가방은 신관 락커에 둬야 하니 갈 때 1유로 동전을 꼭 가져가도록 유의하자. 이번에도 베토벤 박물관에 갔을 때처럼 동전이 없던 나는 락커를 잠그지 못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내내 박물관을 돌아다녀야 했으니 말이다.


신관은 '신관'이라는 이름답게 모던하고 깔끔한 분위기였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의 벽이 많았고 공간이 커서 소리가 웅웅 울렸다. 독일어 투어 시간이었는지 독일어로 뭐라 뭐라 하는 가이드 앞에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 있었지만 어차피 독일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내게는 무의미했다. 신관 지하 전시실로 내려가자 순간 내가 바이로이트 바그너 박물관이 아니라 파리 의상박물관에 왔나 하는 생각이 들도록 마네킹 위에 걸쳐진 수많은 의상들이 제일 먼저 시선을 사로잡았다. 1800년대에 처음 공연되기 시작해 바그너의 오페라 또한 당연히 수도 없는 프로덕션을 거쳤다. 이 지하 전시관은 각각의 프로덕션에서 쓰였던 의상과 무대 스케치 등을 전시해 놓았고, 각 의상을 입고 공연하는 사진이나 그림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바그너 오페라를 단 한 곡도 듣지 않고 박물관에 갔기 때문에 그 흘러가는 시대에 따른 의상변화의 감동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지만, 바그너 오페라라면 사족을 못 쓰고 있는 프로덕션대로 다 관람했던 사람이라면 분명히 각각의 프로덕션에서 인물의 의상을 어떤 의도로 만들었고 어떻게 해석했는지 고민해 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반지' 프로덕션별 의상.

본격적으로 바그너 탐방에 들어가기 앞서 그래도 바이로이트니까 예의상 바그너를 한 곡은 들어줘야겠다 싶어서 전시관 뒤쪽에 마련되어 있는 미디어스테이션에 가서 앉았다. 연도별, 지휘자별, 오케스트라별, 작품별로 꼼꼼하게 분류되어 있는 카테고리를 봐도 나는 뭐가 무슨 곡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지휘자들의 특징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가장 옛날 음원으로 골랐다. 브루노 발터의 파르지팔 2막 중 "Hier war das tosen"이었다. 장황하고 느리고 조용했지만 아무 못 들어줄 것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보면서 역시 이런 날씨에는 바그너보다는 쇼팽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은 했다. 옆자리 바그네리안으로 추정되는 남자는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자신의 아이에게 바그너를 조기교육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바그너를 듣는 아들을 보는 시선이 너무 즐거워 보였다. 그 뒤로도 헤드셋이 있는 이 자리에 앉으려 기다리는 사람이 몇 명 정도 뒤에 줄을 서 있어서 눈치가 보였지만 나는 꿋꿋이 13분 동안 파르지팔을 들었다. 방문객 여러분들, 죄송합니다. 하지만 짜증이 나셨다면 저를 탓하지 말고 쓸데없이 곡을 길게 쓴 바그너를 탓하십시오.

'파르지팔' 을 재생 중인 미디어 스테이션.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자 내가 놓친 바그너 영화 상영관이 있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니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움직이는 바그너 얼굴이 나를 맞이했다. 아니 그런데, 배우 분이 바그너를 너무 닮은 것 아닌가! 난 잠시 바그너가 영화가 있던 시대에 살았는지 고민해 봤다. 그랬던 것 같지는 않았지만 배우가 정말 너무 똑같이 바그너였고, 키도 묘하게 작으셔서 (바그너도 170cm가 안 됐다) 움직이는 모양새조차도 바그너 같아 보였던 것이다. 그 뒤에 나오는 코지마와 루트비히 2세 배우는 그 정도로 닮지는 않았어서 착각은 금방 깨졌지만 말이다. 무성영화라서 중간중간 바그너의 인생에 대한 설명이 텍스트로 끼워져 있는데, 첫 번째 아내 민나와 살던 시절부터 루트비히 2세와 팔짱 끼고 친밀하게 이야기하던 장면, 스위스로 유배가 있던 시절을 보고 나왔다. 그 영상 하나만 봐도 바그너의 인생이 가볍게 정리되겠지만, 영화를 통째로 상영해주고 있어서 여기서 이 영화 보느라 시간을 다 써버렸다가는 바이로이트에서 봐야 하는 것을 제대로 보고 가지 못하겠다 싶어 황급히 나왔다. 다음은 반프리트 차례였다.


바그너의 저택 반프리트는 "광기가 잠들다" "망상 속의 평화" "미혹과 광기로부터의 평화와 자유"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Whan+Frieden의 합성어라는데, 바그너의 거대담론과 높다란 이상 속 일상의 평화를 여기서 꾀하고자 했던 것이라면 꽤 적절한 이름 같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체크무늬 바닥과 붉은색의 강렬한 벽지로 장식된 회랑이 나온다. 입구로 들어가는 문 양옆에는 바그너와 코지마 흉상이 놓여 있고 (으! 또 코지마란 말인가) 한쪽 구석에는 리스트의 흉상도 놓여 있다. 왼쪽으로 가면 식당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가면 리스트의 방이라 불렸던 곳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관람에 좀 애로 사항이 생기기 시작했다.

반프리트. 거실로 들어가는 입구.

바그너 박물관은 사실 영어 오디오가이드를 제공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유는 모르겠는데, 나는 오디오가이드를 받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박물관에 갔으면 보통 자동으로 '이거 오디오가이드인데 이거 누르고 재생하시면 소리 나와요~' 하는 안내와 함께 오디오가이드를 제공받았거나 최소한 '오디오 가이드 필요하신가요?'라는 질문을 받았어서 바그너 박물관에도 오디오 가이드가 있었더라면 당연히 내게 안내를 해 줬었겠지라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나는 바그너 박물관을 오디오 가이드 없이 다녔는데 여러분께서는 절대 이런 실수를 하지 말기를 바란다. 안내문의 절반 정도만 영어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나처럼 오디오가이드 없이 다닌다면 이 화려한 박물관을 제대로 즐길 수 없게 된다. 심지어 나중에 갈 지크프리트 바그너 박물관의 경우 바그너와 나치 관련 다큐가 통째로 독일어로 재생되고 있는데, 그 독일어를 알아듣지 못하면 재미가 반감되다 못해 삭제된다. 덕분에 나는 리스트의 방과 식당에서 쓸 만한 정보를 거의 하나도 건지지 못하고 응접실로 향했다.

바그너 반프리트 저택 거실.

바그너 집의 거실은 커다란 살롱으로, 의사가 몇십 개는 족히 놓여 있고 한가운데에는 눈에 확 들어오는 붉은색 커튼과 그랜드 피아노가 있다. 바그너는 이 응접실을 소소한 가족모임 용도로만 사용했다고 적혀 있었는데 아니, 이 정도가 가족 모임을 위해서 사용되는 응접실이면 대체 손님맞이는 어디서 하겠다는 건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천장의 조각, 샹들리에, 화려한 금테 액자와 고급스러운 벽지 어디 하나 바그너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바그너가 평소 사치스러운 성격이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집도 사람을 압도하게 호사스러웠다. 기분이 나빴다. 사치하는 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바그너의 사치는 종종 루트비히 2세가 국고를 탕진하고, 리스트가 사비로 바그너에게 돈을 빌려주었으나 거의 돌려받지는 못하는 등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서 쌓아 올린 부를 통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청년에게 자신에게 '투자'하라 할 정도로 바그너는 종종 비굴하고 추했다. 나름대로의 고귀한 예술을 하려고 애써도, 결국 자신의 내면이 추하고 빈곤하다는 것을 인정하기라도 하는 것인지 바그너의 집은 모든 곳이 과했다. 사치스럽고, 화려하고, 웅장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련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와 바그너가 현실에서 만났다면 주먹다짐을 하고 싸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바그너의 인테리어는 나랑 맞지 않았다.


다행히도 2층은 그 정도로 사치스럽지는 않았다. 바그너의 집에 오기 전에 이미 쇤브룬 궁전과 베르사유 궁전으로 사치 내성이 생겨 있기도 해서 쓰러지지 않고 바그너 집을 계속 관람할 수 있었다. 2층은 ㅁ자 구조로, ㅁ자 복도를 둘러싸고 있는 방 여러 개가 이어져 있는 구조다. 각각의 방에는 테마가 있었고 바그너의 인생사를 훑어주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번에도 바보같이 오디오가이드를 찾지 못한 내게는 그저 미로 같기만 했다. 때문이 이곳에서는 각 작품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면서 감상하지는 못하고 무슨 소장품이 있는지 보물찾기 하는 감상으로 돌아다녔었다. 바그너의 소파, 바그너의 핸드캐스트, 바그너의 마스크, 바그너의 자필보나 노트처럼 귀중한 자료들이 가득했다. 중간중간 있는 나선계단을 내려가 보면 바그너의 '나의 삶' (Mein Leben) 초고나 코지마의 일기처럼 귀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는 지하전시실이 있으니 지하전시실도 꼭 놓치지 말고 관람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인상적인 소장품은 바그너의 베레모였다. 바그너는 무슨 질환 때문에 베레모를 거의 분신처럼 쓰고 다녔다고 한다. 많은 사진들에서 베레모를 쓰고 있는 바그너를 볼 수 있어서 나와 다른 클래식을 좋아하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농담처럼 사실 베레모가 바그너의 본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곤 했다. 그 정도로 바그너의 베레모는 상징적인 물건이었다. 몇 번 이야기했지만 나는 이런 일상감과 사용감이 느껴지는 물건을 좋아한다. 악보나 일기 등은 이 사람이 살아 숨 쉬었다는 느낌을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까만 덩어리처럼 생긴 바그너의 베레모가 한때 정말 그 사람의 머리 위에 얹혀 있었을 거고, 바그너가 베레모를 써 보며 자기 머리에 맞게 밴딩도 늘어났을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그너 머리 위에 얹혀 있는 저 베레모를 봤을 것이고... 거기다가 지하로 내려가면 바그너의 로브, 코트, 톱해트, 신발에 우산까지 바그너의 옷과 거울 놓인 세면대까지 모두 전시되어 있다. 옷장을 떼어다가 전시해 놓은 수준이었다. 작곡가가 실제로 몸에 걸치고 다녔던 의류라는 것은 참 묘한 기분을 가져다준다. 바지, 그 위에 윗도리, 그 위에 모자, 그 아래 신발 이렇게 늘어놓으면 그 안에 들어갈 사람 한 명만 소환하면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진을 보다 보면 작곡가들과 작곡가들의 옷이 종종 한 몸처럼 느껴진다. 왜, 베토벤이 빨간 스카프를 몸에서 떼어놓을 수 없을 것만 같고 모차르트가 빨간색 쥐스토코르를 떼어놓을 수 없을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게 몸과 분리된 의류를 보면 이 사람들도 아이콘이나 상징이 아닌,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빗고 세수를 하고 신발을 벗는 사람이라는 점이 느껴져서 순간 가슴이 철렁한다. 우리가 이렇게 아이콘으로 만들었던 사람들이 피와 살을 가지고 살이 있는 인간이었듯이 우리도 언젠가 미래 사람들에게 이런 아이콘으로 비추어지고 실제 삶의 맥락은 제거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바그너의 베레모.
바그너의 옷장을 뜯어온 수준이다. 저게 다 바그너의 물건이다.

그래서 난 박물관이 좋다. 작곡가들을 교과서 속 개념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할 수 있게 해 줘서 좋다. 어떤 사람들은 바그너의 옷을 보고 숭고함을 느끼고 바그너에 대한 존경을 되새기겠지만 바그너의 옷을 보고 내가 느끼는 건 지금은 '박제가 된 천재'들도 어느 시점에서는 우리처럼 똑같이 숨 쉬었다는 것이었을 뿐. 바그너는 신이 아니다. 결점이 아주 많은 인간이었다. 바그너를 숭배했던 많은 작곡가들은 가끔 그 사실을 잊었던 것이 아닐까. 바그너가 하는 행동이 뭐든 멋있어 보여서 채식도 따라 해 보고, 오페라도 써 보던 작곡가들. 결점 많은 인간을 숭배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어딘가에서 들은 말에 따르면 '동경은 이해와 가장 먼 감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코지마가 바그너에 대해서 가졌던 감정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아버지가 쇼팽이나 베를리오즈를 동경했지만 이해하지 못했듯, 코지마도 바그너를 동경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코지마의 로브와 코지마의 향수, 코지마의 양산 앞에 서서 '바이로이트의 여주인'이 된 리스트의 딸을 생각해 본다.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코지마 이야기는 내가 이전에 한 번 한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코지마 바그너는 이 바이로이트 기행에서 너무나 중요한 존재기 때문에 이번에는 좀 더 자세히 다루고 싶다. 코지마는 1837년, 마리 다구와 프란츠 리스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마리 다구가 여전히 유부녀인 채로 출산한 자식이었기 때문에 코지마와 그 언니 블랑딘, 동생 다니엘은 리스트의 자식으로만 기재되어 있었다. 코지마는 피아노를 잘 쳤고 아버지의 기대를 받았다. 비록 아버지는 연주여행을 다니느라 바빴고 생모와 만나는 것조차 금지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친할머니 안나 리스트의 보호 아래서 삼 남매는 무럭무럭 자라났다. 리스트는 블랑딘은 예쁘니까 유력 정치가의 아내로, 코지마는 음악적 재능이 있으니까 음악가의 아내로, 그리고 다니엘은 법률가로 키우고자 하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블랑딘은 후일 프랑스의 총리가 되는 변호사에게 시집을 갔고, 코지마는 리스트의 제자이자 유명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에게 시집을 갔다. 여기까진 모든 게 다 리스트의 계획대로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아버지의 높은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했으나 그 과정에서 육체적으로 쇠약해져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으며, 블랑딘은 출산 후 잘못된 산후조리로 인해 죽고 만다. 한편으로 뷜로는 본인이 정신적으로 힘들다는 말을 댔고, 원래의 차가운 성격답게 코지마가 난산을 겪고 있었음에도 아내가 출산할 때 또 어디 혼자 처박혀 있었다. 이렇게 심적으로 지친 상황에서 코지마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 사람이 아버지의 친구이자 남편의 스승이었던 리하르트 바그너였다는 데 있었다.

코지마의 물품들이다. 코지마는 남편과는 달리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사치를 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코지마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던 가톨릭에서 이혼을 허락하는 프로테스탄트로 개종 후 바그너와 결혼해 버렸다. 코지마는 남편을 숭배했다. 그리고 그와 정반대로 아버지를 홀대했다. 그녀는 더 이상 코지마 리스트가 아니었다. 그녀는 코지마 바그너였다. 코지마는 남편이 베네치아에서 죽은 뒤 더욱 열심히 남편의 음악을 알렸고 바이로이트의 여주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바그너가 죽고 나서 코지마가 죽기 전까지 바이로이트는 코지마의 치하 아래 있는 작은 왕국이나 다름없었다. 앞서 본 신관과 코지마 흉상 앞에도 가보면 코지마와 바이로이트 축제의 관계가 설명되고 있다. 최근 읽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전기에서도 코지마가 축제에 깊이 관여하는 내용이 나왔다. 나는 바그너 부부의 결혼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바그너가 분홍색 속옷을 주문제작해서 입고 다니는 걸 보고도 흔들리지 않았고 남편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이렇게 노력했던 것을 보면 정말 사랑하긴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바그너와는 별개로 코지마의 사상은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사상이었다. 코지마는 작곡가 가운데 반유대주의자로 가장 유명한 바그너의 아내답게 남편보다도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자였다. 대체 그 사상을 어디서 배웠는지 궁금하다. 당시 반유대주의가 팽배했던 시대상을 감안하더라도, 코지마의 반유대주의는 이미 극단적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코지마의 일기를 보면, 바그너는 코지마에게 멘델스존에 대해 말하며 멘델스존이 "모차르트 이래로 나타난 최고의 천재"였고 그 "경악스러울 정도의 재능으로 인해 우리 음악의 발전에 기여할 자리는 없었다"라고 했다고 한다. 코지마는 이 말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았다. 코지마의 눈에 유대계 작곡가들은 그냥... 쓰레기였다. 코지마의 눈에 바그너는 신이었다. 그 누구도 바그너를 이길 수 없었다. 그러나 바그너도 코지마의 의견에 동의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그너는 비록 인정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본인이 누구에게 빚을 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자신이 이룬 성과도 불가능했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단지 그 모든 것이 자신이 해낸 일이라고 이야기하고 다니기만 했을 뿐이었을 테다. 그러니 코지마는 바그너의 불안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간단한 가계도를 이쯤에서 첨부한다.

뭐, 물론 이 모든 것은 내 생각일 뿐이다. 코지마에 대해 많은 내용을 읽어보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코지마는 바그너의 부인이었고 바그너와 가장 가까운 사람 가운데 하나였을 텐데. 코지마와 리하르트 바그너 부부의 생전 모습을 전혀 모르는 나 같은 제삼자가 왈가왈부할 내용은 아닐 테다. 그건 학자들이 답할 문제다. 하지만 코지마가 바그너를 신격화하는 태도를 보면 느껴지는 불편함과 거북함은 어쩔 수가 없다.


그 불편함과 거북함이 극대화되는 것은 지크프리트 바그너 저택에서이다. 지크프리트 바그너는 바그너와 코지마 사이의 아들인데... 으, 이름만 봐도 벌써 바그너의 '반지' 주인공 이름을 따온 것이 느껴진다. 내 이름이 지크프리트였더라면 나는 부끄러워서 학교에 고개를 들고 다니지도 못했을 것 같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 이 저택은 지크프리트가 지내던 일종의 별관이다. 지크프리트 또한 작곡가였지만 당연히 아버지의 명성을 넘지 못했고, 어머니 코지마가 죽고 나서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마찬가지로 죽었다. 코지마와 지크프리트가 죽은 것은 모두 1930년이었다.

지크프리트 바그너 저택의 식당. 이곳을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거쳐갔다.

1930년, 독일이 암흑기로 접어들기 바로 직전의 전간기였다. 지크프리트 바그너 저택도 마찬가지로 20세기 초반 스타일로 꾸며져 있다. 그 스타일을 어떻게 구분했는지는 물어봐도 해 줄 수 있는 대답이 딱히 없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 빅토리아 시대의 화려한 무늬 들어간 벽지와 금박 테두리의 시기가 지나가고 갈색 톤으로 안정된 인테리어와 민무늬에 가까운 흰 벽지, 직선적인 가구들로 인해서 그렇게 생각을 했다. 1930년은 지크프리트가 죽은 해인 동시에, 비니프레트 바그너-즉 바그너와 코지마의 며느리이자 지크프리트의 아내가 1945년까지 바이로이트 축제를 전두지휘하게 된 해였다. 거실, 식당 정도를 관람할 수 있고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은 막혀 있다. 이 저택에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같은 유명 작곡가가 머무른 동시에, 히틀러가 머물기도 했다. 비니프레트는 1980년 죽었고 그때까지도 열렬히 히틀러를 지지했다. 1980년,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71년생이시니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의 어린 시절에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 정도로 2차 세계대전은 너무도 현재 시대와 가까운 이야기이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전쟁 전에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신인류로 교체되는 것이 아니다. 전쟁을 불러일으킨 원인이 되었던 사람들은 곧 전후의 결과를 맞은 사람들이기도 했다. 비니프레트가 반성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불과 두 세대도 지나가지 않은 이야기인데 벌써 네오 나치들이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는 것이었다니. 떠듬떠듬 영상 아래 적혀 있는 영어 자막을 열심히 읽어 보았다.


비니프레트의 아들들은 히틀러를 '볼프 삼촌'이라고 불렀다.



오오,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없어. 머리가 갑자기 돌아가지를 않았다. 볼프 삼촌? 후고 볼프도 아닌데 무슨 볼프 삼촌? 히틀러가 그렇게 친근하게 불릴 자격이 있단 말인가? 누군가에게는 그런 끔찍한 짓을 자행한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친근하고 잘 놀아주는 볼프 삼촌이었다고? 내가 관람한 적은 없는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떠올리게 하는 발견이었다. 볼프강 바그너와 빌란트 바그너에게 유감은 없지만, 그런 '볼프 삼촌'의 실체를 알게 됐을 때 두 사람의 기분은 어땠을까? 과연 그들이 볼프 삼촌에 대한 애정을 지울 수 있었을까? 조금 더 조사를 해 보니 비니프레트 바그너는 히틀러의 만행이 만천하에 공개되었을 때도 '뵐페를'은 그런 짓을 했을 리 없으며 그 나쁜 짓은 모두 괴링이나 괴벨스 같은 사람이 했으리라 믿었다고 한다. (히틀러는 그녀를 비니라고 줄여 불렀다고 한다. 둘이 결혼할지 모른다는 루머까지 돌았다.) 그녀는 히틀러의 이상을 믿었다고, 애착관계는 오직 순전히 가족적인 것이었으며 정치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일단 나는 그 말을 별로 믿지 않는다. 히틀러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관계에서도 정치적인 요소는 배제할 수 없다. 어떤 경우에는 누군가의 사상을 배제하고 관계를 맺는 것조차 정치적인 선택이다. 비니프레트는 본인이 나치의 유대인에 대한 직접적, 물리적 폭력은 반대했다고 하지만... 글쎄, 이미 그녀가 한 선택은 바이로이트와 바그너의 이름에 먹칠을 하기 딱 좋은 선택이었다. 그녀의 반유대주의적인 행적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 시점에서 바이로이트와 히틀러의 관계를 깔끔하게 요약해 주는 사진을 잠깐 보고 가자.


히틀러와 나치를 너무나 혐오해 하겐크로이츠나 히틀러를 보기만 해도 신체적으로 반응이 오는 사람은 부디 여기서 스크롤을 멈춰 주시기를 바란다.





(출처: www.wagneroperas.com)


비니프레트의 아들 가운데 볼프강 바그너는 2010년까지 살아 있었다. 히틀러를 볼프 삼촌이라 불렀던 사람이 2010년까지 바이로이트 축제를 도왔던 셈이다. 바이로이트 축제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그 오명을 씻기 위해 전면적인 개혁을 단행했지만, 내 머릿속의 바이로이트는 나치의 이미지와 떨어져서 순수히 예술을 감상하기 위한 장소가 되어주기에는 이미 먹칠이 짙게 되어버린 곳인 듯했다.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다.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현재 진행 중인 일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나에게 위안이 되어주었던 것은 지크프리트 바그너 저택은 온전히 바그너와 바이로이트의 과오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껄끄러운 역사를 언급하지 않았더라도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바이로이트는 바그너의 신전이고 바그너 숭배의 정점으로 여겨져 왔으니까. 하지만 그 오점은 무시하기에는 너무 크다. 바이로이트를 방문하기 네 달 전 방문했던 베를린 유대인박물관에서는 유대계 연주자들이나 지휘자들이 바그너를 거부하거나 오히려 더 바그너를 공연하는 까닭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의 음악을 연주하고 싶지는 않아서, 오히려 바그너의 음악을 자신들이 연주하는 것이야말로 바그너에게 가장 큰 모욕이기에... 다양한 답변이 있었다. 그래서 나도 고민해 봤다. 코지마와 비니프레트에게 (그리고 리하르트에게도 덤으로) 가장 큰 모욕을 주는 방법이 뭘까.


오랫동안 생각해 봐도 멘델스존 음악을 재생하는 것만큼 적절한 것이 없어 보였다. 박물관 뒤쪽에 붙어 있는 바그너의 무덤 앞에 서서 이어폰을 귀에 꽂고 바그너의 '라인의 황금' 서곡과 수상할 정도로 유사점이 많은 멘델스존의 '아름다운 멜뤼진' 서곡을 틀었다. 혼란과 오명이라는 진흙을 지우듯 멘델스존의 음악이 맑은 물처럼 반프리트 한가운데서 내 귀에 울려 퍼졌다. 눈을 감았다. 내 마음속에서 바그너는 아직도 진흙에 한참 묻혀 있는 존재다. 아마 나는 깨끗한 물로 씻어내고 씻어낸 뒤에야 그 진흙에 가려진 바그너의 음악이라는 황금을 바라볼 수 있을 테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그럴 용기를 내기 전까지는 아직 깨끗한 물이 많이 필요했다.


최종 평가

명칭: 바이로이트 리하르트 바그너 박물 (Richard Wagner Museum Bayreuth)
운영시간: 10:00~17:00 (9월부터 6월까지는 월요일 휴관, 7, 8월은 무휴)
입장료: 성인 10유로, 학생 할인가 8유로 (*참고로 프란츠 리스트 박물관과 함께 구입할 경우 성인가 11유로다.)
사이트 링크: https://www.wagnermuseum.de/en/

1. 도시 접근성: ★★☆

아무래도 바그너 이름값이 있고 축제가 크다 보니 접근성이 아주 형편없지는 않다. 큰 도시에서 출발하면 환승은 거의 무조건 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하지만... 주변에 뉘른베르크와 밤베르크 등 나름 관광 코스로 묶이는 곳이 있어서 뉘른베르크와 밤베르크가 여행 계획에 있는데 바그너에 관심이 있기까지 하다면 살짝 끼워 넣어줘도 괜찮은 박물관 같다.


2. 도시 내 접근성: ★★★

박물관 자체의 접근성은 나쁘지 않다. 역에서 15분 정도 걸으면 됐다. 축제극장 접근성을 매기라고 했으면 2점을 줬을 것이다.


3. 소장품: ★★☆

편지, 악보, 공연 초연 포스터, 베레모, 옷, 코지마 관련 물품들, 원고, 책, 가구, 관 열쇠 등등 뭐 빠지는 게 하나도 없다. 글에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지하통로에 바그너 흉상을 올려놓고 양 옆으로 날개처럼 펼쳐지는 바그너의 라이트모티프 라이브러리가 있는데, 그 공간이 무척 압도감이 크다. 실제 바그너의 노트도 몇 권 정도 있다고 들었던 것 같다.

아쉬우니까 바그너의 노트.

4. 언어 지원: ★★★

영어 오디오가이드가 있다는데 나는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오디오가이드에 대해 점수를 줄 수가 없다. 안내문들은 일부만 영어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텍스트로 정보를 얻겠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다.


5. 가성비: ★★★☆

처음에는 '8유로? 비싼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바그너의 인생에 대한 폭넓은 전시와 엄청난 규모, 그리고 화려한 소장품만 봐도 8유로 값은 하고도 남는다. 여러분, 8유로면 빈 모차르트하우스보다 저렴합니다!


6. 규모: ★★★★★

이곳이 5점이 아니라면 5점을 줄 수 있는 박물관은 없다. 거짓말 안 하고 모차르트 박물관 3개는 되는 크기다. 정말 크다. 최고다. 바그네리안이라면 박물관에서만 하루를 통째로 보내고도 남는다. 적정 관람시간은 3시간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다. 아니 심지어 카페 반프리트라고 바로 옆에 박물관 카페까지 있다...


7. 상호작용: ★★☆

미디어 스테이션이나 무성 영화가 있지만 직접 해볼 수 있는 체험은 적기에 3.5점을 매겼다. 본문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지하 통로에는 체험이 하나 있는 것 같았다.


8. 굿즈: ★

사실 이곳보다는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굿즈가 나았던 것 같다. 축제극장 쪽에는 바그너 오르골이나 흉상도 많이 파는데 박물관에서는 전기, 분석 서적, 바그너 본인의 서적, CD나 오페라 DVD 위주로 더 많이 팔고 있었다. 그래도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마그넷을 구입할 수 있는 건 마음에 들었다.


9. 큐레이팅: ★★★★★

노이바우와 지크프리트 바그너 저택의 큐레이션이 훌륭하다. 지크프리트 바그너 저택에서 오명을 숨기려 하지 않고 마주하려 한다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고 비워놓은 공간에 들리는 독일어 음성이 덧없는 제3제국 시절의 영광을 떠올리게 한다. 반면 신관은 바그너의 음악과 오페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딱 맞게 되어 있으며 오페라를 좋아하는 사람이 흥미로워할 의상이나 프로덕션, 그리고 축제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다룬다. 반프리트 저택의 설명문이 조금 적은 건 아쉬웠지만, 그건 내가 오디오가이드를 가져가지 않은 탓인 것 같다.


10. 총평: ★★★★☆

바이로이트와 바그너의 암과 명을한 번에 만나볼 수 있는 박물관.

최대 장점: 역사를 직면하는 큐레이션, 바그너 곡만큼 웅장한 박물관의 규모와 가성비

최대 단점: 굳이 찾아가기에는 좀 애매한 접근성, 그리고 내용 자체의 무거움

추천 여부: O. 오디오 가이드가 없어서 추천할까 말까 고민을 했었는데 오디오 가이드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 무조건 추천한다. 독일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곡가 가운데 하나기도 하고, 음악사에서도 큰 역할을 하는 작곡가의 박물관이 이렇게나 잘 되어 있는데 안 갈 이유가 없다. 살짝 여행코스에서 벗어나더라도 갈 의향이 있을 정도로 괜찮은 박물관이다.


18화 예고: 바이로이트 축제 도중에 죽어 장례식조차 축제의 일부가 되어버렸던 코지마의 아버지, 바그너의 장인어른, 바그너의 명성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했던 또 다른 위대한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가 마지막 숨을 내쉬었던 방을 찾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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