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슈만. 1810년 라이프치히 근교 도시 츠비카우에서 책방 주인 아들로 태어난 슈만은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만큼이나 문학적 감수성도 충만한 아이였다. 그의 문학적 감수성은 바이런과 괴테가 인기던 낭만주의 시대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고, 비록 생전에는 리스트가 언급한 '낭만파 형제들'에서 빠져 있을 정도로 존재감이 강하지 못해 아내 클라라 슈만에 대한 열등감을 보이기도 했지만 요즘은 전공생들과 피아니스트가 가장 사랑하는 작곡가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한 듯하다. 재미있게도 슈만의 별명을 찾아보면 쇼팽과 동일한 '피아노의 시인'으로 나오는데 쇼팽이 '피아노의' 시인이라면 슈만은 피아노의 '시인'인 까닭일 것이다. 특유의 애수 어리고 낭만적이며 시적인 감수성으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슈만의 대표작으로는 '시인의 사랑' '라인' 교향곡, '트로이메라이' 등이 있다.
슈만과 나는... 인연이 없다. 거짓말이 아니고 진짜 없다. 클래식을 듣게 해 준 시발점도 아니었고 요즘도 딱히 즐기는 작곡가도 아니며 슈만과 관련된 재미있는 스토리도 없다. 미안. 들어보면 그리 나쁜 건 아닌데 이상하게 손이 잘 안 간다. 선율미가 있는 걸 듣고 싶으면 슈베르트를 듣고 구조가 탄탄한 걸 듣고 싶으면 베토벤을 듣고 깔끔한 독일 낭만주의 음악을 듣고 싶으면 멘델스존을 듣고 약간 우울한 분위기의 곡을 듣고 싶으면 브람스를 듣다 보니... 슈만이 좀처럼 낄 자리가 없다. 내 취향이 어떤 애매모호한 지점이나 감성보다는 구조, 선율 등 어찌 보면 기술적이고 스펙트럼보다는 체크리스트처럼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위에서는 글 쓰기를 좋아하고 감성이 풍부한 면모를 들어 내가 슈만을 닮았다는 이야기도 하지만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15편 주인공 슈만보다는 16편 주인공 베를리오즈가 내게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슈만과 내 가장 큰 공통점은 멘델스존 이야기만 나온다면 사족을 못 쓰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늘 글에서는 어쩔 수 없이 멘델스존이 많이 언급될 것임을 미리 밝혀 양해를 구하고 간다.
1850년, 드레스덴에서 살고 있던 슈만은 음악감독직을 제의받고 클라라와 함께 뒤셀도르프로 이사하게 된다. 슈만 부부가 느꼈을 뒤셀도르프의 첫인상은 어땠을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느낀 뒤셀도르프의 첫인상 하나는 확실했다. "도시다." "돈 많은 도시다." 서울이나 경기도 권역에 사는 독자들은 쉽게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는 점이지만, 모든 도시에 지하철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지내던 만하임도 독일에서는 나름 규모가 있는 도시로 간주되지만 지하철은 없고 트램만 있었다. 그런데 뒤셀도르프는 기차역에서 내리자마자 무려 지하철역이 있는 것이었다! 깨끗하고 잘 닦여 있는 기차역이라, 독일에서는 좀처럼 느껴 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일반적으로 기차역이라 하면 어렴풋한 마리화나 냄새와 오물 냄새, 공기에 감도는 노숙자들의 체취와 각종 쓰레기, 담배 냄새가 코를 찌르곤 했는데 뒤셀도르프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거리는 넓었고 한국에서 많이 봤던 것 같은 고층 건물들, 현대적인 디자인의 유선형 건물이 나를 지나쳐 갔다. 뒤셀도르프가 고향인 내 버디*는 만하임은 너무 더럽고 살기에도 별로인 곳이라고 불평을 하곤 했는데, 만하임도 그리 나쁜 동네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던 나마저도 뒤셀도르프에 도착한 순간 '이런 동네에 살고 있었으니 만하임이 별로라는 생각을 했구나'라고 깨달았다. 독일의 대표적인 부촌이라는 말 다웠다. 관광객으로서는 볼 것 하나도 없는 도시지만 내게 무한한 재원이 주어지고 독일에서 살 도시를 하나 고르라고 하면 뒤셀도르프를 골라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버디: 만하임 대학교 등지에서 교환학생의 적응을 돕기 위해 붙여 주는 본교 학생
처음으로 향한 곳은 뒤셀도르프 시립공원이었다. 클라라는 뒤셀도르프의 잘 조경된 호수 근처 공원 산책을 좋아했는데, 그럴 만했다. 뒤셀도르프 본토 출신이었던 내 버디가 본인의 고향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도 시립공원이었다. 아침에 내렸던 비 때문에 축축해진 땅 위로 왜가리나 오리 종류로 보이는 새들이 떼를 지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니 사실 나무와 물이 있기만 하면 뒤셀도르프 어디를 가나 줄지어 꽥꽥거리는 새들을 볼 수 있었다.
새가 많다.
물론 내가 시립공원에 새만 보겠다고 간 것은 아니었다. 시립공원 바로 옆에는 뒤셀도르프 오페라 하우스 (Deutsche Oper am Rhein)가 있는데, 그 옆에는 뒤셀도르프와 관련된 인물의 동상이 하나 있다. 그 인물은 무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이다. 멘델스존 이야기는 이 시리즈의 마지막 편에서 한참 하겠지만 여기서 살짝 맛보기로 알려드리자면, 멘델스존은 어릴 적 쓴 징슈필* 카마초의 결혼이 미지근한 반응에 그치자 마음에 상처를 받았는지 이후 평생 오페라를 단 한 개도 완성하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25세의 나이로 얻은 첫 직장 뒤셀도르프 오페라 극장 감독으로 취임한 뒤 매일같이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의 해이한 기강에 개탄하며 라이프치히에서 이직 제안이 오자마자 옳다구나 좋아라 하고 라이프치히로 탈주했다. 다시 말해 멘델스존은... 뒤셀도르프를 싫어했다. 정말 싫어했다.
*징슈필: 독일의 민속 오페라 장르. 독일 오페라라고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다.
하지만 원래 그 사람이 좋아하는 도시라고 해서 그 사람을 기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과 연관이 있어야 기념하는 거지. 당장 바흐만 해도 그리 라이프치히를 좋아하지 않았고 모차르트만 해도 잘츠부르크를 좋아하지 않았다. 멘델스존을 기념해 주는 곳이 하나 늘어난 것이니 멘델스존이 싫어할지라도 내게는 좋은 일이었다. 멘델스존 동상 앞에서 세 명 정도 되는 관광객 그룹이 서성이고 있어 제대로 멘델스존 동상 사진을 찍기까지 한참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마침내 관광객 그룹이 떠나고 잠시 동상을 360도 각도에서 감상하고 있는데, 내 곁을 쓱 지나가던 자전거가 갑자기 멈춰 섰다.
뒤셀도르프 시립공원 앞, 오페라 극장 옆의 멘델스존 동상.
"그 사람은 여기 초대 카펠마이스터요." 난 순간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돌아보자 백발 성성한 노인분께서 자전거를 끌고 내게 다가오고 계셨다. 내가 얼어 있자 노인분께서는 "독일어는 좀 하시오?" 하고 다시 물었다. 내가 할 줄 아는 독일어는 '커피 한 잔 주세요' 정도 수준에 불과했지만 아주 못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아주 조금 할 줄 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노인분께서는 멘델스존의 약력을 읊으며, 멘델스존이 이 뒤셀도르프의 오페라 초대 음악감독이었으며 이후 1933년 나치가 집권하게 되며 그 명예가 많이 훼손되어 이 동상도 그때 헐렸다가 새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해주셨다. 사실 그 중간에도 분명 많은 이야기를 해 주셨을 텐데, 내 짧은 독일어 실력으로는 그 정도밖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야기를 마친 노인 분께서는 "Alles Gut?"이라 물으셔서 난 이제 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고 노인 분을 보내드렸다. 아마도 그분께서는 내가 동상을 보며 이 동상은 누구일까 궁금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나 본데, 이 시점에서 나는 이미 멘델스존하우스에 두 번이나 들렀고 멘델스존의 사망 시각을 이야기할 수 있는 멘델스존 마니아였기 때문에 노인 분의 설명으로 새로 알게 된 정보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동상 앞에 서 있는 동양인에게 다가와 갑자기 멘델스존 설명을 해 줄 정도로 멘델스존에게 관심 있는 사람이 독일에 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행복해진 마음으로 나는 30분을 걸어 구도심의 빌커 거리로 향했다.
슈베르트 박물관에 대해서는 너무 할 말이 없어서 탈이었는데, 슈만 박물관에 대해서는 너무 할 말이 많아서 탈이다. 뒤셀도르프 슈만 박물관은 1852년 슈만이 클라라와 함께 새로운 보금자리로 고른 빌커 거리에 위치해 있다. 하이네 재단에서 함께 운영하는 박물관인 모양인데, 무려 2023년 12월 개관한 박물관이다. 내가 뒤셀도르프에 갔던 것이 5월 8일이었으니까 개관한 지 5개월 만에 방문한 셈이다. 돈이 들어간 티가 팍 났다. 어딜 봐도 깨끗하고 현대적이었다. 심지어 그 흔한 코인락커조차도 코인을 쓰지도 않고 열쇠도 쓰지 않고, 들어갈 때 직원에게 카드키를 받아가면 된다. 카드키를 락커에다가 대면 삑 하고 열리는데,그 어떤 박물관에서도 보지 못한 시스템이라서 몇 번이나 열고 닫으며 신문물에 감탄하고 있었다. 직원 분들은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지만 내 빈곤한 독일어와 적당한 눈치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슈만박물관의 신문.
박물관은 슈만과 클라라가 이사 온 뒤셀도르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벽에는 슈만 부부의 연대기, 세계사, 그리고 음악사 연대기가 적힌 연표가 동시에 펼쳐진다. 뒤셀도르프에 처음 도착한 슈만 부부의 눈에 이곳의 의료, 교육은 어땠는지, 당시 시대상이나 법률은 어땠는지를 설명해 주며 한쪽에는 슈만 부부 일보가 놓여 있다. 한 면에는 뒤셀도르프에 오고서 몇 개월간 있던 슈만과 클라라 부부 관련 콘서트 기사를 써 놓았고 다른 곳에는 슈만 부부가 뒤셀도르프에서 좋아하던 레시피도 적혀 있다. 영어하고 독일어가 잘 지원되고 있어서 꼼꼼히 읽었다. 이 관에서는 소장품이 꽤 많은지, 내가 갔을 때는 클라라의 스타킹과 손수건이 전시되어 있던 것 같은데 주기적으로 소장품 로테이션을 돌린다고 한다. 하얀 스타킹에 C.S (클라라 슈만)이라 수 놓여 있는 게 참 귀여웠다. 체육복 잃어버리지 말라고 교복 살 때 교복점에서 이름 박아달라고 하는 것도 연상되고 그랬다. 이어 1관이 슈만의 뒤셀도르프였다면 2관은 뒤셀도르프의 슈만이다. 이 방에는 슈만의 '교향곡 '라인'악보도 있고, 슈만이 뒤셀도르프에서 어떤 직책을 맡아 어떻게 잘 헤쳐... 나가려고 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또 슈만 이전과 이후 뒤셀도르프를 거쳐간 주요 음악가들에 대해 적어놓은 책도 있었는데, 사실 슈만보다 먼저 뒤셀도르프를 거쳐간 작곡가 가운데 멘델스존이 적혀 있길래 펼쳐 봤던 책이었다.
3관은, 정확히는 2관에서 4관 사이로 넘어가는 복도니까 전시'실'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도 같은데, 슈만 가족에 대해서 다룬다. 로베르트와 클라라 사이에는 아이가 여덟이나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 가운데 많은 수의 인생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슈만에 대해서 한 회고도 있다. 집에서 슈만을 볼 수 있는 것은 밥을 먹을 때와 가끔 저녁시간이 전부였는데, 저녁시간이면 피아노를 치거나 도미노를 함께 가지고 놀기도 했다는 마리 슈만의 회고가 있었다. 각각의 아이들에 대한 내용을 각각의 사진을 뒤집어 보면 확인할 수 있는데, 어째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역시 슈만의 자식들 이야기 가운데 가장 슬픈 이야기를 가진 인물은 슈만과 클라라의 막내아들 펠릭스 슈만이었다. 펠릭스 슈만은 로베르트가 엔데니히 병원에 입원하기 직전 클라라가 가지게 된 아들이라서, 슈만이 정신병원에 있을 때 세상에 나왔다. 클래식 음악에 어느 정도 배경 지식이 있는 분이시라면 짐작할 수 있으시겠지만 펠릭스 슈만의 이름에서 '펠릭스'는 당연히 슈만 부부가 존경하는 동료이자 친구였던 펠릭스 멘델스존의 이름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고서 클라라는 다른 아이들 다섯과 함께 펠릭스의 사진을 찍어서 로베르트에게 보내줬고, 로베르트는 그제야 펠릭스 슈만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아버지와 아들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이냔 말이다. 펠릭스는 재능이 많은 아이였고, 비록 법학을 공부했지만 시를 쓰고 음악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대부였던 브람스는 펠릭스 슈만의 시에 곡을 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펠릭스(슈만)는 25세라는 젊은 나이로 죽고 만다. 어째 펠릭스라는 이름에 '행운아'라는 뜻이 있는 것과 다르게 이렇게 보니 재수 옴 붙은 요절자 전용 이름 같다. 어떻게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물론 슈만의 비극은 너무나도 개인적인 차원의 비극이라서 사회나 국가를 탓할 수도 없다. 그게 더 슬프다. 어떤 정당화도 불가하고 어떤 상황이었더라도 똑같이 일어났을 비참한 일 같기만 하다. 괴로움에 빠진 자의 인생이야 당연히 슬프지만, 그보다 더 슬픈 것은 언제나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인 것 같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남겨두고 떠난 멘델스존이나 슈만의 삶, 모두가 죽고도 남아 버린 리스트의 삶이 내게는 쇼팽이나 베토벤의 삶보다 훨씬 슬퍼 보였던 것 같다.
네 번째 방은 슈만의 방이다. 슈만의 방은 한구석에 슈만의 책상 형태로 마련된 전시공간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슈만의 곡을 들을 수 있는 미디어스테이션이 있다. 분명 이 미디어스테이션에서 들었던 음악이 무척 내 취향이었는데, 실내악곡으로 추정된다는 것 빼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서 큰일 났다. 슈만 박물관 미디어스테이션에서 나오는 슈만 곡이 뭔지 알고 있는 사람의 댓글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겠다.
슈만의 책상은 진짜 책상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상 위 전시되어 있는 물건까지 진품이 아닌 것은 아니다. 다. 개인적으로 내가 슈만 박물관에서 무척 좋아하는 소장품 두 가지가 이 방에 전시되어 있는데, 하나는 슈만의 인장 반지고 다른 하나는 슈만의 노트다. 슈만의 인장 반지라고 하는 건.... 아트박스를 가면 있는 실링 왁스 들어봤는가? 편지를 봉할 때 왁스를 붓고 그 위에 도장을 찍어 모양을 낸 다음 왁스를 굳혀 편지를 봉하는 방식인데, 이 도장이 반지에 붙어 있는 것이다. 슈만에게도 이 인장반지가 있었다! 무려 결혼기념일날에 맞춘 선물이라고 한다. 미디어 스테이션에 가서 확인해 보면 인장반지, 책상 위의 잉크와 펜은 19세기에 어땠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해 준다. 작곡가 박물관에서 시대배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면 재미가 크게 반감되곤 하는데, 그런 결점을 훌륭하게 잘 보완해 준 박물관이었다. 슈만이 하이네에게 보낸 편지 사본 등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어 시대배경과 슈만을 쉽게 연관 지어 볼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슈만의 인장반지이다.
슈만 방의 다음으로 나오는 방은 클라라의 방이다. 한구석에는 클라라의 피아노가 전시되어 있으며 반대편에는 클라라와 관련된 소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후에 느낀 점이지만, 내가 갔던 슈만박물관 세 곳은 모두 로베르트만큼이나 클라라가 박물관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도 크다. 뒤셀도르프 슈만하우스의 경우 이상하게 박물관의 하이라이트가 클라라 전시실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클라라의 삶은 슈만뿐이 아니라 다양한 층위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때로 어떤 전시품들은 로베르트와는 관련이 별로 없기도 하다. 클라라가 투어를 다닐 때마다 가지고 다녔던 컵이나 촛대, 19세기식 보정으로 인해 개미허리가 된 클라라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피아니스트인데 꾸역꾸역 허리를 얇게 보정해 주는 것이 이 와중에도 아름다운 여성상은 포기를 못 하는구나 싶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또 런던에 투어를 갔다가 귀중품이 전부 털릴 때 유일하게 도둑이 훔쳐가지 않은 클라라의 브로치도 있고 말이다. 어라, 이렇게 이야기해 보니 오히려 로베르트와 관련 있는 것이 없다. 오히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장품이기도 하고 박물관에서도 꽤나 자랑스러워하는 듯 팸플릿 첫 페이지에 인쇄되어 있는 소장품은 로베르트 슈만보다 펠릭스 멘델스존과 관련이 있는 소장품이다.
슈만 박물관인데 멘델스존 이야기라니, 슈만을 좋아하는 분들께는 죄송하다. 그러나 모든 클래식 작곡가를 통틀어서 멘델스존을 가장 좋아하는 내 손에서 멘델스존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더군다나 슈만은 멘델스존과 무척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작곡가가 아니었던가? 그 관계를 너무나 명백하게 보여주는 소장품이 하나 있는데, 바로 클라라 슈만이 가지고 있던 펠릭스 멘델스존의 머리카락을 담은 파란 에나멜 반지이다. 펠릭스 멘델스존이 로베르트 슈만과 처음 만났던 것은 1835년, 클라라 슈만과 처음 만났던 것은 무려 183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시 말해 멘델스존이 죽었을 때 클라라는 그와 15년을 알고 지냈고 로베르트는 그와 12년을 알고 지냈단 것이다. 심지어 클라라는 13살 때부터 멘델스존을 알고 지냈으니 그 정도면 멘델스존은 클라라에게 친한 이웃사촌 오빠 수준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로베르트와 클라라 둘에게 모두 멘델스존은 우상이나 다름없었다. 로베르트는 그를 '천상에서 바로 내려온 다이아몬드'라고 묘사했고 클라라는 멘델스존을 '지고한 존재'라고 평할 정도였다. 그러니 슈만 부부가 멘델스존의 죽음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능하다.
슈만박물관 홍보책자 속 멘델스존의 머리카락이 들어 있는 파란 에나멜 반지 사진.
멘델스존의 머리카락이 담긴 파란 에나멜 반지.
빅토리아 시대 (1847년은 초기 빅토리아 시대에 해당된다) 사람들은 죽은 이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반지, 팔찌 등의 장신구를 흔하게 패용했다. 지금 보면 좀 징그럽고 기괴하게 여겨질 수 있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죽은 이를 추모하는 평범한 방식이었다고 한다. 클라라가 받은 파란 에나멜 반지에 멘델스존의 머리카락이 들어 있는 것은 그런 이유이다. 예상치 못하게 누군가가 떠나버렸을 때의 슬픔은 두 배고, 예상치 못하게 누군가를 만났을 때으의 기쁨 또한 두 배다. 멘델스존의 죽음은 클라라와 로베르트에게는 갑작스러웠으니 두 배의 충격이었겠지만 내게 멘델스존 머리카락 반지는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만난 예상치도 못한 인물이었기에 두 배로 기뻤다. 다리에서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잠깐 주저앉아 숨을 골랐던 것 같다.
클라라의 백조깃털망토.
뒤셀도르프 슈만 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또 다른 멋진 소장품은 클라라 슈만의 백조깃털 망토다. 은빛으로 빛나고 있는 이 망토는 클라라 슈만의 의류 중 살아남은 유일하게 상복이 아닌 의류다. 덴마크 왕실에서 선물 받았다는 이 망토를 클라라는 추운 곳으로 갈 때마다 소중하게 챙겨 다녔다고 한다. 백조 털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꽤 따뜻했던 모양이다. 우리 어머니랑 언니는 처음 이 망토를 보고서 판초 같은 건 줄 알았다고 하는데 어이가 없는 일이다. 이렇게 아름답게 반짝반짝 빛나는 실크류 의류가 어떻게 판초 같아 보인단 말인가. 마지막 방인 '슈만의 죽음' 섹션에서 클라라가 쓰던 과부 베일이 보존되어 있다는 것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보면 클라라의 기구한 인생이 확 느껴진다. 결국 옷은 개성의 표현인데, 남편이 죽었기에 그 개성이 다 죽고 이제는 검은 옷 밖에 입을 수 없었다는 것이 참 슬펐다. 물론 재가하지 않기로 한 것도 그녀의 선택이고,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도 검은 옷을 벗지 않은 것 또한 그녀의 선택이다. 주체적으로 남편의 죽음을 잊지 않기를 선택했지만, 동시에 남편의 죽음이라는 과거에 의해 구속되었다는 느낌 또한 완전히 지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다는데, 남편을 잊지 않기 위해 새 사람을 만나지 않은 건 대단한 일이지만 동시에 슬픈 일이기도 했다.
클라라의 검은 베일.
클라라의 소장품을 지나면 로베르트와 클라라의 친구들에 대해 설명해 주는 방이 나온다. 몇 개의 보면대가 올려져 있고, 그 보면대 앞에 서면 빛이 들어오면서 각 인물에 대해서 설명을 해 준다. 내 기억이 맞다면 브람스, 요아힘 등이 있던 것 같다. 총 다섯 명 정도가 있었다. 각각의 인물들의 삶과, 슈만 부부와의 관련성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해 준다. 정확한 위치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 어디쯤에 슈만 방이 하나 더 있다. 슈만이 쓰던 바이올린과 슈만의 자필보 여러 개, 그리고 슈만의 머리카락 타래까지 있었다. 원래 슈만의 머리카락은 갈색이었다고 하지만 그만 공기 중 노출되어 색이 날아가 버리는 바람에 붉은색이 되어버린 채 전시되고 있다. 이런 쓸데없는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 전부 다 박물관에서 알려줬다. 박물관의 설명도 전부 영어와 독일어가 병기되어 있어 조금도 보는 데 무리가 없었다. 다만 되짚어보면 오디오가이드 내용이 거의 다 문자로도 적혀 있기 때문에 오디오가이드는 굳이 받아올 필요가 없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슈만의 죽음 방에서는 엔데니히 정신병원의 슈만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몇 년에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몇 년에 상태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등의 내용이 나와 있었는데, 그것 또한 참으로 읽기 힘들었던 것 같다. 그 옆 방에서 미디어아트와 함께 흘러나오는 '트로이메라이'가 너무나 슬퍼서 더 그랬던 것이 분명하다. 화면에는 아무런 내용도, 정보값도 없이, 뒤셀도르프의 시내와 라인 강물만을 찍은 흑백 영상이 계속 재생된다. 느리고, 가슴 미어지는 트로이메라이와 함께.
너무 센티멘탈해진 바람에 나오는 길에 충동적으로 슈만 오르골도 하나 샀다. 나오는 음악은 역시나 트로이메라이. 굿즈는 지금까지 본 박물관 가운데 가장 별로였지만 박물관의 분위기에 휩쓸렸다. 트로이메라이로 센티멘탈해진 감성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던 덕에 아예 라인강으로 향했다. 슈만이 투신을 시도한 바로 그 강! 투신했으나 하필 사육제 기간에 투신을 한 바람에 퍼포먼스로 오해받은 그 강! 그러나 라인 강변은 비극적인 자살시도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활기찼다. 강가에는 배가 떠 있고 클럽에서 나올 것 같은 유행가가 크루즈 레스토랑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저 멀리 남산타워처럼 생긴 도시 느낌 강한 타워까지 있었다. 이어폰을 끼고 '라인' 교향곡을 들으면 슈만이 투신한 곳이 되었다가, 이어폰을 빼면 젊은 연인들과 가족들의 놀이터가 되어 있는 햇살 쨍쨍한 뒤셀도르프 라인 강의 분위기는 두 얼굴을 가진 것처럼 느껴졌다.
평화로운 라인 강.
뒤셀도르프에 간다면, 뒤셀도르프의 일본 거리에 가는 것도 좋고 뒤셀도르프의 유명 관광지인 Konigsallee에 가보는 것도 좋겠지만 한 번쯤 슈만 박물관에 들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이렇게 좋은 작곡가 박물관은 쉽게 찾아볼 수 없으니 말이다.
뒤셀도르프 또한 관광지는 아니지만, 유동인구가 많은 큰 도시이다. 속해 있는 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니까 말 다했다. ICE로도 갈 수 있다!
2. 도시 내 접근성: ★★★☆
역에서 도보로 약 15~20분이 걸린다. 구도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딱히 접근성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3. 소장품: ★★★★
내가 원본 편지나 원본 악보를 거의 세지 않아서 그렇지, 그것들을 포함하기만 해도 상당한 소장품을 자랑한는 박물관이다. 소장품 하나하나가 내 취향에 꼭 맞는 것이어서 임팩트가 컸다. 특히 클라라의 방에 있는 소장품들은 단 한 가지도 놓칠 것이 없으니까 꼭 꼭 방문해주기를 바란다.
4. 언어 지원: ★★★
영어 텍스트와 오디오가 아주 깔끔하게 지원된다. 로베르트 슈만을 자꾸 '호베르트 슈만' 하고 발음하는데 아마 독일 원어 발음이 그랬던 것이겠지 싶어 딱히 거슬리지는 않았다. 영어 번역 퀄리티는 훌륭하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한국어는 지원되지 않는다.
5. 가성비: ★★★★★
2유로???? (성인 정가는 4유로이다. 그러나 나는 할인가로 입장했다) 2유로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슈만하우스 수준의 박물관을 즐길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없는 가격이다. 2유로로 박물관 유지는 가능한 것인가? 이해할 수 없다. 헐값이다. 이런 소장품, 이런 큐레이션에 2유로는 이해할 수 없다. 나는 12유로까지도 낼 생각이 있다.
6. 규모: ★★★☆
작지도 않고 크지도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0층과 1층 (또는 1층과 2층) 이 박물관이며 사실 0층(또는 1층) 은 리셉션이라서 한 층이다. 그러나 전시 볼륨이 꽤 빽빽해 오히려 모차르트 댄싱 마스터 하우스보다 크다는 느낌을 받았다.
7. 상호작용: ★★★★☆
돋보기를 끌어서 뒤셀도르프의 각 구역에 대한 설명을 읽을 수 있는 미디어 스테이션, 슈만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헤드셋, 옛사람들이 쓰던 필기체를 배워봐요 학습지, 슈만 투병 일지 넘기면서 읽기, 트로이메라이 미디어아트, 슈만 부부 일보까지 한 가지도 놓칠 구석이 없다. 하우스 오브 슈트라우스 정도 해야 5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5점은 주지 않았지만, 정말 훌륭했다.
'필기체를 배워 봐요' 학습지.
8. 굿즈: ★
오르골이 있어서 1점이라도 받았다. 슈만과 관련된 굿즈는 일부뿐이고 나머지는 슈만과 관련도 없는 굿즈를 팔고 있었다. 색색의 키링... 슈만과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다. 참고로 오르골도 양산형 오르골이니 그닥 추천하지는 않는다.
9. 큐레이팅: ★★★★★
각 방의 테마가 매우 명확하고, 뒤셀도르프 시절을 위주로 박물관이 구성되어 있어 나중에 나올 츠비카우 박물관의 전시 내용과도 겹치지 않는다. 이렇게 각 방에 내가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미 5점이다, 5점! 거기다가 음악을 사용해야 하는 곳에서는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전시품이 지루하지 않도록 서랍을 열고닫을 수 있거나 전시품에 얽힌 이야기들을 따로 설명해주기 때문에 큐레이팅 측면에서 5점을 주고도 한참 남는다.
10. 총평: ★★★★☆
새 박물관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박물관이 알려졌으면 좋겠다.
최대 장점: 적재적소에 사용된 부가설명과 미디어스테이션, 큐레이팅, 의미 있는 소장품
최대 단점: 빈약한 굿즈
추천 여부: OO
너무 좋아서 티켓사진도 첨부한다.
16화 예고: 박물관이 언제나 도시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인구 5천명에 하루 버스가 두 대 다니는 콩알만한 마을에 엑토르 베를리오즈 박물관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또 프랑스로 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