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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굴꾼 Nov 26. 2024

18. 바이로이트 리스트 박물관에 가다

1886년의 '피아노의 왕' 또는 '피아노의 파가니니' 리스트. 그러나 이 사진에는 '아베 리스트' 가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인 듯하다. (출처: Mahler Foundation)

프란츠 리스트, 또는 리스트 페렌츠. 1811년 라이딩에서 태어나 1886년 바이로이트에서 죽은 헝가리의 작곡가. 모국어는 독일어, 주로 쓰던 언어는 프랑스어, 그러나 본인이 생각했던 본인은 헝가리인. 그의 별명이라 하면 가장 유명한 것은 '피아노의 파가니니' '피아노의 왕' 일 테고, 농담조로는 종종 '세계 최초의 아이돌'이라고도 불린다. 얼굴에 황금비를 담은 완벽한 미남 피아니스트는 1830년대와 40년대,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그 두 국가를 넘은 전 세계에 '리스토마니아'라고도 불리는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튀르키예와 페르시아, 러시아에까지 미친 명성에 수많은 여성들이 실신하고 남성들이 눈물을 흘렸다. 피아노를 옆으로 놓고 연주하는 전통을 시작했고 피아노 단독 리사이틀이라는 개념을 창조했고 마시다가 남긴 차를 향수로 삼아 담아가는 팬, 머리카락을 수집하는 팬, 목욕물을 담아가는 팬, 손수건이나 장갑을 던져주면 찢어서 나눠가지는 팬까지 생기게 하며 유럽 전역을 광란으로 몰아넣었던 피아니스트. 그러나 곧 피아니스트 생활에 환멸을 느끼기도 했고 사랑하는 여인과 정착도 하고 싶던 리스트는 순회연주자 생활을 청산하고 바이마르에서 음악감독직을 맡아 일하게 된다. 이 바이마르에서의 생활도 여러 가지 불화로 인해 청산하고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도 교황청의 반대로 인해 무산되자 그는 속세에서의 젊었을 적 방탕함을 모두 뒤로하고 서품을 받아 사제가 된다. 최초의 아이돌에서, 교향시의 창시자가 되었다가, 아베 리스트가 되어 죽다. 이토록 극적인 인생을 어디서 또 만나볼 수 있을까.


바그너의 음악을 무척 싫어한다는 점에서 얼추 짐작이 가겠지만, 리스트의 음악도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주변에 21세기판 리스토마니아가 두 명이나 있는 바람에 B단조 소나타나 피아노 협주곡, 에스테장의 분수 등 유명한 곡들은 꽤 들었다. 친한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싫어하기란 힘든 법이기 때문에 리스트의 곡과는 우호적이지도 않지만 적대적이지도 않은 미묘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베토벤은 꽤 좋아하는 편인데, 베토벤의 영향을 많이 받은 리스트는 썩 좋아하지 않는다니... 내 취향이라는 것은 참 섬세하고 예민한가 보.


리스트라는 사람 역시 나와 우호적인 관계도 적대적인 관계도 아니다. 멘델스존과는 불편한 관계였지만 베를리오즈와는 절친이었고, 바그너와도 절친이었지만 나쁜 사람도 아니었다. 참 모순적이고 양면적인 사람이다. 피아니스트면서 교향시를 만들고, 결혼은 안 했지만 자식은 셋이나 있고,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주위에는 반유대주의자가 득시글거렸고, 좋은 스승이었지만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고, 사제가 됐으면서 술, 담배 여자 모두를 좋아했다... 어려운 사람이다. 탐구하는 재미는 있지만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은 아니다.


비가 그치고 하늘이 갰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바이로이트에 축제극장과 바그너 박물관만 보러 왔던 게 아니었다. 바그너가 감탄했던 변경백 오페라 극장도 봐야 했지만, 그보다도 바이로이트와 깊은 관련이 있는 또 다른 작곡가 한 명의 박물관을 가야 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전에도 몇 차례 연급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였다. '리스트' 하면 대부분의 클래식 애호가들이 떠올릴 도시는 바이마르, 부다페스트, 로마 거기에 하나를 더하자면 파리 정도일 텐데, 정작 리스트 박물관이 있는 곳은 바이마르, 부다페스트 그리고 바이로이트다. 바이마르, 부다페스트, 로마에서는 워낙 오래 왔다 갔다 하며 살았으니 직책이나 살았던 집이 있고 파리도 마찬가지지만, 바이로이트는 뭐란 말인가? 바이로이트에 뭐가 있는데 리스트 박물관이 바이로이트에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바이로이트는 1886년의 여름, 리스트가 죽은 곳이다.


바이로이트 바그너 박물관 뒤쪽으로 가면 정말 작은 건물이 하나 나온다. 그냥 가정집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작은 건물, 바그너 박물관의 화려한 진입로나 파사드 없는 단순한 벽돌집이었다. 여기가 진짜로 박물관이 맞는지가 의심스러워 몇 번을 주변을 빙빙 돌았지만 정말 리스트 박물관이었다. 바이로이트의 리스트 박물관이 그리 크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리스트의 명성에 비해서는 너무 소박하고 작게 느껴졌다. 정녕 이 박물관이 유럽인들을 광란으로 몰아넣었던 피아니스트의, 바그너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이후 교향악 작곡가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지대한 영향을 끼친 '교향시' 장르의 창시자가 잠든 박물관이란 말인가. 어찌 보면 리스트와 참 잘 어울리는 곳이기도 했다. 수많은 명예는 젊은 시절의 덧없는 거품처럼 꺼져버리고 남은 것은 작고 소박한, 사제에게 어울리는 검소한 집 한 채라는 점에서.

바이로이트 리스트 박물관. (출처: 바이로이트 관광청)

늦은 오후의 리스트 박물관은 작고 조용했다. 사람도 카운터의 직원 한 명을 빼면 없었다. 극장의 붉은색을 연상시키는 커튼 틈새로 비스듬한 햇빛이 들어왔다. 박물관에는 잔잔하게 리스트의 음악 '사랑의 꿈' 만이 적막 가운데 흐르고 있었다. 노곤노곤하고 나른한 분위기에 졸음이 밀려왔다. 악의와 증오를 가지고 들어간 바그너 박물관에서 잔뜩 날을 세우고 있다가 리스트 박물관에 오자 포근하고 따뜻한 분위기에 나도 그만 긴장이 확 풀려버렸던 것 같다. '아베' 리스트라서 그런가, 바이로이트에서 독이 바짝 오른 복어처럼 돌아다니던 내 가시도 기독교적인 사랑으로 감싸주었나 보다.


리스트 박물관은 방 다섯 개 정도로 구성되어 있다. 어린 시절, 파리 시절, 순회연주자 시절, 바이마르부터 죽음까지, 그리고 리스트와 리스트 주변 인물들의 관계. 대체로 인생을 시간순으로 따라가는 구성을 하고 있지만 바그너의 도시 바이로이트이니만큼 바그너와 리스트의 관계, 그리고 리스트와 리스트 제자들의 관계에 따로 할애된 방이 있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오디오가이드나 안내 어플은 따로 없었고 독일어로 적힌 설명문만이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다행히도 바그너의 인생에 대해서 내가 아는 바가 거의 없던 것과는 달리, 리스트의 인생에 대해서는 앨런 워커의 리스트 전기 3권을 이미 전권 완독한 뒤였기에 설명 없이도 대충 전체적인 전시물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리스트의 인생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다면 반드시 파파고를 지참하기를 권해드린다.


첫 번째 방과 두 번째 방은 리스트의 소년기와 청년기를 다룬다. 어릴 적 그 재능으로 인해 '신동'으로 대접받으며 연주여행을 다니게 된 바람에 리스트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투어 도중 아버지가 죽어버리며 소년가장이 되기까지 했다. 홀어머니와 자신 둘을 먹여 살려야 했던 리스트는 파리에 머무르며 피아노 교사로서 생계를 유지하다가 우울증에 걸리기도 했다. 결국에는 잘 이겨내고 귀부인들의 살롱을 드나들며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연주실력으로 사교계에 한 자리를 꿰찼지만 말이다. 그야말로 '화려한 삶 뒤편의 슬픔'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작곡가다. 두 번째 방인 파리 시절에서 나오는 수많은 여성과의 염문, 그리고 쇼팽을 비롯한 명사와의 교류에서의 화려함은 첫 번째 방에 놓여 있는 리스트의 일기와 대조적이다. 리스트는 일기를 썼는데, 이 일기는 리스트가 우울과 무기력에 빠져 베를리오즈를 제외하면 거의 아무도 보지 않았던 시절도 담고 있어 그 내면의 우울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각 방에는 리스트와 관련된 체험을 할 수 있는 기물이 하나씩 있었지만 관리 소홀인지 내가 갔을 때는 두 개 다 고장이었다.

어린 리스트의 일기장.

세 번째 방이 바로 리스트의 가장 화려하던 순회연주자 시절을 다루는 방이다. 1841년 베를린에 갔을 때 리스트가 방문한다는 이유로 학교에는 임시휴교령이 내려졌고, 리스트는 백마 네 마리가 끄는 마차를 타고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났다고 하니 이 세 번째 방이야말로 리스트 인생의 '절정'이었던 것이다. 가운데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한 대 놓여 있고, 벽에는 리스트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와 리스트가 직접 서명해 준 판화가 잔뜩 걸려 있다. 이쯤에서 나오는 음악이 '마제파'로 바뀌었다. 참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이 당시 리스트는 한 달에 1000 굴덴을 써버리는 정신 나간 탕아였다. 1000 굴덴이 얼마인지 잘 감이 오지 않을 텐데, 자식 다섯 명을 둔 멘델스존 가족이 일 년 동안 쓰는 돈이 1800 굴덴 정도였다. 남들은 일곱 명이서 열두 달을 쓰는 돈을 혼자 한 달 만에 써버린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리스트는 아이돌이었으니까. 후일 바이마르 궁정에서 버는 1500 탈러 정도도 리스트에게는 거짓말 안 하고 담뱃값이었다. 벽에 걸려 있는 판화들에 리스트가 직접 남겨 놓은 서명을 보면 팬사인회에 가서 앨범에 아이돌의 사인을 받아오는 모습이 어쩔 수 없이 연상된다. 다른 작곡가들은 앨범에 서명을 해 주는 경우는 있어도 이렇게 대놓고 '굿즈'에 서명을 해 주는 경우는 없다 보니 자기 얼굴이 그려진 판화에 자기 서명이 있는 작곡가라는 개념이 혁신적이었다. 옛날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참 사는 거 별 다를 거 없다.

리스트가 써준 앨범리프일까? 어쨌든 리스트의 서명이 있는 판화. (출처: Franz-Liszt Museum Sammlung online)


그러나 리스트도 이 삶이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 리스트는 인생을 함께하고 정착하고 싶은 여인 카롤린을 만나고서 연주자 생활 은퇴를 선언했다. 내가 리스트의 팬이었더라면 절망했을 소식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리스트 인생을 넓게 조망해 보면 이 선택은 리스트가 비르투오소 시절에서 벗어나 본인의 내면을 좀 더 다듬고, 음악적으로도 큰 성장을 할 수 있게 해 준 계기가 되어주었기 때문에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의 팬이라면 반길 수밖에 없는 선택이다. (물론 나는 피아니스트 리스트의 팬도, 작곡가 리스트의 팬도 아니지만.) 작곡가 리스트를 다루는 곳에서는 리스트의 명곡이 가장 많이 나왔던 곳인 바이마르에 대해 길게 설명하는데, 어차피 작곡가 박물관 기행 거의 마지막쯤 바이마르에 갈 예정이니 바이마르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뤄두자.


네 번째 방으로 넘어가기 전, 잠깐 세 번째 방 한가운데에 있는 진열장 앞에 멈춰 섰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 나 채굴꾼도 작곡가가 실제로 쓰던 물건이 진열되어 있는 진열장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리스트의 라이프마스크로 시작해 리스트에게 주어진 각종 메달과 작은 반지, 리스트의 모습을 본뜬 미니어처 흉상, 리스트가 사용하던 잉크통과 압지, 리스트의 지휘봉, 리스트의 카드게임 세트, 리스트의 벨트, 그리고 리스트가 말년에 신던 샌들 3종류까지 소장품들이 작은 진열장 안에 꽉꽉 채워져 있었다. 전기에서 읽었던 리스트의 모습이 하나하나 그려져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다른 작곡가들에 비하면 리스트는 취미도 없고, 음악과 관련되지 않은 인생의 서사가 하나도 없는 작곡가지만 그런 와중에도 카드게임 덱이 남아 있다는 것이 참 웃겼다. 작곡가가 신던 신발도 남아 있다 보니 자꾸만 눈이 갔다. 말년의 리스트는 샌들을 많이 신고 다녔다. 그렇다면 이 샌들을 통해서 리스트의 신발 사이즈를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해 봤다. 리스트의 발 크기 측정을. 딱히 소장품에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무척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눈을 최대한 피했다. 피아니스트답게 손을 쫙 펼치면 10도 정도는 우습게 닿을 정도로 손이 컸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과 달리 신발은 평범한 크기였다. 내가 아는 남자들 몇몇이 신는 것보다 살짝 작아 보이기까지 했다. 리스트가 자신의 손 크기가 그저 전설에 불과하다고 했던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한데, 내 예상에 비해 작은 신발을 보니 '신적인 피아니스트'라고 해서 꼭 손과 발까지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클 필요는 없는 모양이었다. (박물관 카탈로그를 살펴본 결과, 신발 사이즈는 265mm라고 한다.) 문득 바그너가 리스트는 언제나 돈이 많겠지 하는 착각을 하고서 리스트에게 2000~3000 탈러씩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떠오르며, 리스트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신화에 둘러싸여 있었는지 고민해 보게 됐다. 

리스트의 카드게임 세트.(출처: Franz-Liszt Museum Sammlung online)
265mm 신발. (출처: Franz-Liszt Museum Sammlung online)

이 모든 소장품들에는 밑에 '바그너 박물관에서 대여해옴' 이라고 붙어 있는데, 왜 리스트가 소유하고 있던 물건들이 바그너 박물관 소장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코지마가 후일 아버지의 박물관에 가보고 "이 아름다운 것들이 여기서 별 쓸모도 없이 전시되고 있다니. 아버지가 왜 자기 가족들에게 이것들을 남기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니까." 라고 이야기했던 것과는 달리 바그너 박물관 측에서 리스트 박물관에도 신경을 쓰고는 있는 것 같아서 안심이 됐다. 


네 번째 방이 바로 리스트가 죽은 방이다. 침대 하나와 가구 조금을 놓고 나면 뭐가 더 들어갈 공간도 없는 작은 방이었다. 벽 한쪽에는 리스트가 다른 작곡가들에게 얼마나 인정받았는지, 리스트의 음악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고 리스트가 헝가리 부다페스트, 독일 바이마르와 로마를 오고 가며 얼마나 미래의 음악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는지를 다루고 있는데 반대쪽 벽에서 리스트는 이미 죽어 있다. 데스마스크까지 있다. 하지만 데스마스크보다도 내 기분을 더 묘하게 만들었던 것은 죽은 직후 리스트의 사진이었다. 리스트를 좋아하는 친구 덕분에 죽고 나서 몇 분 되지도 않아 찍힌 리스트의 사진은 여러 차례 접해 익숙해져 있었다. 죽은 직후의 사진이 늘 그렇듯 리스트의 사진도 죽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손을 가지런히 한가운데 모으고, 제자들이 손에 쥐어준 물망초 한 다발을 쥔 채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코지마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아니, 사실 지키지 못한 것인지 지키지 않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심지어 죽기 며칠 전부터는 코지마가 본인이 간병을 하겠다고 선언해서 제자들의 출입도 막았다 하니 그의 죽음은 고독하기 짝이 없었던 셈이다. 엇갈린 사랑이라는 건 이성 간의 사랑 (또는 동성 간의 사랑일 수도 있겠다. 에로스적 사랑이라고 하자)에서도 충분히 슬픈 일이지만, 부모자식 간의 사랑에서도 참 슬픈 일인 듯했다. 보통은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깨달을 나이가 되면 이미 그 사랑을 돌려줄 부모가 이 세상에 없어서 슬퍼한다고 하는데, 이 경우에는 자식이 부모에게 사랑을 원하는 타이밍이 한참 지나가 버리고 나서야 자식에게 사랑을 주고 싶어 하는 부모가 됐으니 이 또한 비극이었다. 리스트와 코지마, 둘 중 나쁜 건 누구였을까? 둘 다 나빴던 것일까? 아니면 나쁜 사람은 없던 것일까? 금박 글자도, 메달도, 리본도 없이 죽은 리스트의 사진 주변을 제자들이 야생화로 꾸며준 액자를 보고 있으면 나까지 마음이 텅 비어버리는 기분이 된다. 어떤 면에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사랑받았으니 딸에게 증오당한 슬픔이 조금은 나아지지 않았을까 싶다가도, 그 또한 결국에는 딸에게 주어야 할 사랑이 제자에게 갔기 때문에 애초에 촉발된 슬픔 같기도 했다. 

꽃으로 장식된 사망 직후 리스트의 사진. (출처: Franz-Liszt Museum Sammlung online)


다음 방에 가면 안나 리스트, 블랑딘 리스트, 코지마 리스트와 다니엘 리스트의 사진이 있다. 세 남매가 한 자리에 모인 유일한 사진이다. 그리고 그 사진에조차 아버지와 어머니는 없다. 아이들이 원했던 것은 그저 그 사진에 아버지도 함께 있어주기 그뿐이었을 텐데, 정작 아버지는 돈 보내줬으니 그걸로 된 거 아니냐고 생각했으니... 본인이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식들을 누구보다 잘 교육시켜 보겠다는 결심을 한 채 아이들에게 누구보다 좋은 교육을 해주기 위해 돈을 벌어왔지만, 정작 그 사이 아이들은 아버지의 사랑이 결핍된 채로 자라고 말았다. 인생에서 중요한 게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외국 국가들은 '가족'이라는 응답이 절반을 넘었던 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나왔던 응답은 '돈'이었는데, 둘 중 어느 것이 명백히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리스트의 삶은 우리에게 분명 어떠한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

리스트 없는 리스트 가족사진. (출처: Franz-Liszt Museum Sammlung online)


마지막 방은 리스트와 리스트의 제자들, 그리고 리스트와 바그너의 관계를 다룬다. 리스트는 평생 바그너의 충실한 친구였고, 바그너가 가장 어렵던 시절에도 바그너를 여러 차례 금전적 그리고 음악적으로 도와주며 뻔뻔한 바그너에게조차 그 헌신을 인정받았다. 멘델스존이나 베를리오즈의 영향도 부정하지만 리스트에게 받은 영향까지는 부정하지 못한 것이다. 바그너는 리스트의 주머니 사정도 여의치 않을 때조차 리스트에게 돈을 보내달라고 졸라댔고 리스트는 빠듯한 살림일 때조차 바그너를 도왔다. 1848년 2월 혁명에 휘말린 바그너의 도피를 도왔던 것도 리스트였다. 바그너에게 보답을 받지도 못했지만 그는 언제나 그렇게 했다. 리스트의 속마음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겉으로 봤을 때는 바그너에게 제대로 '호구 잡혔다'라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는다. 어찌나 호구를 잡혔는지 현대 교양서들에서 리스트는 바그너를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바그너를 지지한 최초의 바그네리안, 바그너 챔피언 이런 것으로 다뤄지기도 한다. 재수가 없으면 아예 리스트 개인의 이야기는 지워지고 바그너와 맺은 관계의 맥락 속에서만 다루어진다. 심지어는 장례식 때조차 바이로이트 시장이 장례식을 치르며 "리스트는 바그너 운동의 헌신적인 주창자"라고 말했고 추도사 전체가 바그너 이야기뿐이었다고 한다. 74년을 영국부터 러시아까지 종횡무진 돌아다니며 작곡가, 교육자, 피아니스트, 저술가로 살아온 사람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그렇게 없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때문에 바이로이트 리스트 박물관도 오직 바그너와 리스트의 관계 이야기만 한참을 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었다.

바그너에게 과하게 헌신하는 리스트를 풍자하는 만평.

다행히도 위에서 볼 수 있듯, 바이로이트 리스트 박물관은 리스트의 인생을 충실하게 다루어준 편이었다. 바이로이트니까 리스트가 왜 바이로이트에 있고 리스트와 바그너가 무슨 관계였는지를 잠깐 다뤄주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일이었고 리스트가 바그너와 맺은 관계 외에도 다른 작곡가들과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후대 작곡가들이나 후대 피아니스트들과는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각각의 제자들과는 어떤 관계였는지를 의외로 충실히 다루어주고 있다. 바그네리안의 성지라 불리는 바이로이트에서도 리스트의 인생을 바그너에게 종속된 인생으로 해석하지 않는데, 간혹 보이는 바그네리안이 쓴 듯한 교양서들은 뭐란 말인가. 바이로이트 리스트 박물관을 보고 반성해야 마땅하다.


"정직한 자들이 주 앞에 살리이다."

리스트가 유언에 자신의 묘에 적어달라 한 구절이다. 그 유언은 지켜졌다. 아니 그 유언만 지켜졌다. 사람 인생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리스트의 인생도 마지막까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딸이 정치인과 결혼하게 해 달라 했더니 정치인과 결혼했지만 아이를 낳다가 죽었고, 딸이 음악가와 결혼하게 해 달라고 했더니 자신의 친구와 결혼했다. 리스트가 원하던 것은 전부 이루어졌지만 리스트가 원하던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남편이 죽었을 때는 몇 년을 폐인처럼 살던 것과 대조적으로, 코지마는 아버지의 시신 곁에서 태연히 졸고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코지마는 아버지의 유언에 대해 알지 못했고, 장례는 어떤 행사도 없이 간소하게 치르라는 말은 어겨졌다. 축제로 인해 몰려들어 있던 인파는 리스트의 장례식에도 몰려들었고 장례 행렬은 군중들로 인해 제대로 행사를 진행하지 못하기도 했다. 장례식에서 리스트의 곡은 단 한 곡도 연주되지 않았고 바그너의 '파르지팔'이 울려 퍼졌다.


리스트가 바이로이트가 아니라 바이마르나 부다페스트, 로마에서 죽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를 가끔 생각해 본다. 박물관이 좀 더 크고 화려하지 않았을까? 최소한 장례식에서 바그너 대신 리스트의 곡이 울리긴 하지 않았을까? 무덤도 좀 더 리스트의 명성에 걸맞지 않았을까? 리스트가 죽은 이후 리스트의 시신을 어디 안치해야 하는가에 관해 한참 동안 논쟁이 오고 갔다. 리스트의 제자들은 부다페스트, 리스트와 사실혼 관계였던 카롤린은 로마나 바이마르를, 코지마는 바이마르나 부다페스트에 리스트를 묻기를 원했다. 그러나 어디에 안치하든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생겼고, 리스트가 태어난 라이딩까지도 제기되었지만 결국에는 모두 기각되고 리스트의 무덤은 아직까지도 바이로이트에 있다. 평생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며 살았던 리스트답게 죽음까지도 혼란스러웠던 셈이다.


박물관 바로 옆에 있는 바그너 무덤과 달리, 리스트 무덤은 훨씬 멀리 가야 한다. 바이로이트 구석에 박혀 있는 리스트의 무덤으로 가는 길도 조용했다. 바이로이트라는 동네의 조용한 분위기에 걸맞은 쓸쓸한 길이었다. 장례식 자체는 시끄러웠지만, 그래도 무덤은 리스트가 바라던 대로 조용한 곳에 생겼다고 할 수도 있겠다. 옆으로 차 몇 대가 쌩 지나갔다. 비가 오고 난 뒤의 따뜻한 햇살을 느끼며 나는 걷고 또 걸었다. 30분 가까이를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작고 고요한 묘지에 들어가면 이곳은 빈 중앙묘지처럼 위인들의 무덤을 모아둔 곳이 아니라 정말 그저 평범한 사람들의 묘지가 훨씬 많은 것 같아서 남들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기분이 된다.


저질체력의 내게 도보 30분은 너무 먼 거리였다. 완전히 지쳐버린 나는 사원처럼 생긴 리스트의 무덤에 있는 작은 계단에 걸터앉았다.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왔다. 하얀 구름이 느릿느릿 흘러가는 하늘은 눈 아프게 빛나는 파란색이었고 햇살을 받은 나뭇잎은 싱그러운 연둣빛으로 빛났다. 생명으로 반짝이는 오월에 나는 누군가의 죽음 위 앉아 있었다. 보통이라면 아무리 리스트 무덤이 앉기 좋게 생긴 작은 건물이라고 해도 거기 앉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너무 지쳐 있었고-리스트라면 고향이 너무나 멀리 있고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여행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헝가리에서 태어났지만 헝가리어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고, 독일인이었지만 독일어보다는 프랑스어를 잘했으며, 프랑스어를 잘했지만 프랑스에서 태어나지는 않은 그. 헝가리에서 사브르를 받고 조국을 찾았다는 기분에 기뻐했던 리스트라면, 영국에서부터 페르시아까지 종횡무진 쉴 새 없이 여행을 다니고 야간열차를 타고 고된 공연 스케줄을 소화했던 리스트라면 내 한 몸 뉘일 고향 없고 잠시 앉았다가 갈 그루터기 하나 없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알았을 테니 나의 무례에도 나를 탓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삼십 분에 한 사람이 찾아올까 말까 한 한적한 묘지에 나만이 홀로 앉아 있었다. '위안' 3번, '탄식' 그리고 '사랑의 꿈' 3번을 들으며 덧없지만 아름답게 흘러가는 주변 풍경을 눈에 하나하나 담아 보았다.

리스트의 무덤.

딸 때문에 바이로이트에 왔고 딸 때문에 바이로이트에서 죽었지만 결국 그는 딸과 이렇게 떨어져 묻혀 있다. 코지마는 코지마 리스트가 아니라 코지마 바그너로 살기를 택했고 반프리트의 바그너 무덤에는 리하르트와 코지마 부부 둘이 함께 묻혀 있다. 리스트는 세 아이들의 어머니와 헤어졌고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에도 실패했으며 마음을 내어줄 형제자매도 없이 살아갔던 것처럼 바이로이트에도 홀로 묻혀 있다. 화려한 삶 뒤의 고독한 그림자라는 게 이런 것이었을까. 리스트의 천재성은 분명 전 세계를 비추었고 그가 원했던 '천재의 의무'를 실현하는 삶을 살았던 것일 수 있겠지만, 때로 우리의 아들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전 세계를 비추는 태양이 아니라 그저 몸을 녹일 수 있는 작은 모닥불이다. 그저 나만을, 나와 내 주변만을 밝혀주는 작은 불... 그러기에 리스트는 너무나 '큰'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에게 쏟는 불평등한 사랑을 그는 만인에게 나누어주느라 바빴다. 누구보다 자신의 온기가 필요한 사람은 자신의 아이들이었음을 알게 됐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평생을 아버지가 아닌 예술가로 살아왔고, 모든 것이 소용없어진 마지막 순간에서야 예술가가 아닌 아버지로 죽었다.


'리스트 무덤에서 들어야 하는 곡' 플레이리스트가 모두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비니프레트 바그너의 무덤 앞에 가서 멘델스존을 좀 더 들어줘야지, 하고 생각하던 그 순간 이마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그 몇 곡을 듣는 사이 순식간에 푸르런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마치 리스트가 아무리 잘못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핏줄을 이어받은 사람들에게 그러지 말아 달라고 나를 만류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 어떤 죄는 다른 사람이 대신 나누어 지어주기에는 너무 무거운 것이고 잊혀서는 안 되는 것임을. 나는 비가 한두 방울씩 내리기 시작하는 하늘 아래서 다시 한번 멘델스존의 아름다운 멜뤼진 서곡을 틀었다. 멘델스존은 유대계 음악가라서 독일 음악에 조금도 기여할 수 없다고 멘델스존을 깎아내렸던 리하르트 바그너, 리하르트보다도 적극적으로 멘델스존을 혐오해 줬던 코지마 바그너, 그리고 멘델스존의 음악이 공연조차 될 수 없게 했던 히틀러의 친구였던 비니프레트... 아니, 멘델스존만이 아니다. 멘델스존은 단지 그 시절 피해를 입었던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는 명사로 쓰였을 뿐이다. 음악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힌 사람들이었다. 물론 리스트가 평생 독실하게 믿었던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나는 내 적도 사랑해야 하겠지만, 나는 기독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아름다운 멜루진' 서곡이 재생되는 시간 동안 나는 다시 한번 미움과 증오의 마음으로 비니프레트의 묘를 바라봤다.

비니프레트 바그너, 용서하지 않겠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이제 기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정말로 출발해 봐야 하는 시간이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다가 다시 리스트 무덤 앞에서 발이 멈췄다. 너무 흔하고 뻔하고 내기 의미를 멋대로 끼워 맞추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리스트의 눈물 같아서. 내 자손들이 잘못한 것은 맞지만, 그렇게 미워하지는 말아 달라고, 결국 그 불행의 씨앗은 나였다고 후회하고 탄식하고 자신이 모든 것을 짊어지겠다고, 그들 대신 자신을 미워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만 같아서. 그게 가능했더라면 나도 그렇게 했겠지만, 나는 리스트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연민하긴 해도 그를 증오하지는 않는다. 그의 잘못은 언제나 온 인류와 온 세상을 우선으로 생각했던 것뿐일 테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잘못이다. 바이로이트의 비극이 온전히 리스트의 탓일 리도 없다. 그를 위로할 말을 찾아주고 싶었지만 찾아줄 수가 없었다. 어떤 말을 해주는 대신, 나는 그를 탓하지 않는다는 뜻과 혹여 그의 혼이 아직 이 세상에 떠돌고 있다면 안식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성호를 한 번 그어주었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 순전히 하나의 인간에 대한 연민과 존경으로서 그은 성호가 얼마나 효력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바이로이트 중앙역으로 돌아가는 길은 멘델스존의 '잔잔한 바다와 평안한 항해' 서곡과 함께였다. 폭풍우가 몰아치듯 휘몰아치는 음표와 함께 날도 점점 궂어졌다. 나는 바이로이트와 화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아무리 리스트가 누운 곳이라 하더라도 바이로이트는 너무나 바그너의 도시였다. 바이로이트와 바이로이트의 사람들이 남긴 상처가 온전히 치유되기 전까지... 아마 나는 바이로이트를 사랑할 수도, 바이로이트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 수도 없으리라. 예수의 가르침은 참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다. 나의 원수를 어떻게 사랑하란 말인가. 그러나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미약한 희망이 있다면, 그 희망은 아마도 리스트를 향한 나의 연민과 리스트의 인류애 속에 잠들어 있는 것일 테다.


최종 평가

명칭: 프란츠 리스트 박물관 (Franz Liszt Museum)
운영시간: 9월~6월: 월요일 휴관, 10:00~12:00, 14:00~17:00/ 7, 8월: 휴일 없이 10:00~17:00
입장료: 성인 2유로, 할인가 1유로
사이트 링크: ...가 없다. 바이로이트 관광청 링크를 달아놓는다. Franz Liszt Museum - Bayreuth

1. 도시 접근성: ★☆ 

바이로이트. 바그너 박물관과 동일하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2. 도시 내 접근성: ★★☆

위치 자체는 바그너 박물관 바로 뒤에 있지만, 길을 찾는 게 조금 어려울 수도 있다.


3. 소장품: ★★

최근 리뷰하는 박물관들 소장품 퀄리티가 다 상당히 괜찮다. 위에서 언급한 소장품들 외에도 각종 메달, 사진, 판화가 전시되어 있고 리스트의 편지도 있다. 아, 입구에 리스트가 빈에서 지내던 시절 사용하던 소리가 나지 않는 무음 피아노가 있으니까 놓치지 말기를. 


4. 언어 지원: ★

...없다. 독일어뿐이다. 힘내줘, 파파고!


5. 가성비: ★★★☆

정가 2유로, 바그너 티켓과 콤비네이션 티켓으로 구매 시 1유로. 그리고 나는 0유로로 들어갔다! 리스트라면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무료로 수업해주던 스승 살리에리의 정신을 본받아 본인 박물관 입장료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믿지만 2유로 정도면 아주 합당한 가격이다. 다른 것보다 리스트의 소장품들이 꽤 남아 있어서 그 정도 보려고 2유로 내는 것은 아깝지 않다.


6. 규모: ★★

열심히 둘러봐도 30분이면 느긋하게 보고 나올 수 있다. 방이 다섯 개지만, 각각의 방이 크기가 작은 편이라서 절대 크지 않다. 20평도 안 될 것 같다.


7. 상호작용: ★

뭔가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기기들이 있던 것 같지만 내가 갔을 때는 전부 고장이었다. 바그너 박물관과 리스트 박물관을 같은 기관에서 운영하고 있다면 바그너 미디어스테이션만큼이나 리스트에게도 관심을 기울여주기를 촉구하는 바이다.


8. 굿즈: ★

내가 리스트 엽서랑 리스트 이야기도 아닌 잡지를 사겠다고 이 박물관에 온 것이 아닌데... 한숨만 나왔다. 그렇지만 곁다리 박물관처럼 있는 리스트 박물관에 달리 더 많은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9. 큐레이팅: ★★★

인생사를 가볍게 훑어주는 박물관이다. 바이로이트에 있어서 바그너와 리스트의 관계만 가지고도 여섯 개 방을 전부 채울 수 있었을 텐데 리스트의 인생에 집중해주어서 가산점을 주었다. 리스트와 쇼팽, 리스트와 바그너의 관계 분석에는 짧은 섹션이 통으로 할애되어 있다. 또한 나중에 나올 부다페스트 리스트 박물관과 바이마르 리스트 박물관의 경우 리스트의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 시절에는 비중을 거의 할애하지 않기 때문에 의외로 리스트의 말년 말고도 초년 인생을 알기에 좋은 박물관이다.


10. 총평: ★★★

이 박물관만을 위해 바이로이트에 오는 건 미친짓이지만, 바이로이트에 왔다면 이 박물관을 보지 않는 것이 미친짓이다.

최대 장점: 규모에 비해 화려한 소장품, 다른 박물관에서 훑어주지 않는 인생사 전반에 대한 설명과 저렴한 입장료

최대 단점: 작은 규모, 형편없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는 굿즈, 오직 독일어로만 이루어진 설명

추천 여부: △, 총평 그대로다. 바이로이트에 왔으면 보고 가야 하지만 바이로이트에 이걸 보러 오는 건 추천하지 않는다.


참고로, 리스트 박물관을 오후에 가면 햇빛이 빨간 커튼을 통해 들어오기 때문에 온통 사진이 붉은빛으로 나온다... 나도 웬만하면 내가 찍은 사진을 쓰고 싶었지만, 사진 상태가 다 너무 좋지 않아서 이번에는 부득이하게 박물관 카탈로그를 뒤졌다. Franz Liszt Museum - Collection Online | Alltagsgegenstand 에서 모든 소장품을 확인할 수 있다.


19화 예고: 초심으로 돌아가 보자. 작곡가 박물관 리뷰 1편 작곡가가 누구였더라? 맞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였다. 설마 음악의 아버지씩이나 되는 인물이 박물관이 하나뿐이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 믿는다. 이번에는 루터와 바흐의 도시, 아이제나흐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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