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어머니' 헨델이라는데, 이 말 때문에 바흐랑 헨델을 부부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는 판에 이렇게 부르는 게 맞는 걸까? (출처: 위키피디아)
조지 프레데릭 헨델. 태어나기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로 태어났지만 영국으로 이민을 가버렸으니 영국식인 조지 프레데릭으로 써주었다. 가장 유명한 곡은 오페라 '리날도' 중 '울게 하소서', '왕궁의 불꽃놀이', '수상음악, 그리고 오라토리오 '메시아'중 '할렐루야'. 바로크 시대 때부터 꾸준히 히트였던 헨델의 인기는 생전부터 지금까지 꺼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 사실 뜯어보면 그렇게 바로크적이지는 않은 바흐의 음악과 달리, 헨델의 음악은 미친 듯이 바로크적이다. 거의 바로크의 전형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인 것 같다. 왜, '바로크'라는 말부터가 '찌그러진 진주'라고 예쁘면 다 갖다 붙여 균형이 망가진 상태를 비꼬는 말이지 않았던가. 헨델의 음악도 '바로크'에 걸맞게 화려하고 반짝반짝거린다.
바흐와 동갑, 1685년생, 독일 라이프치히 근교 동북부 도시 할레잘레에서 태어난 헨델은 바흐와는 판이한 인생경로를 걸었다. 평생 독일을 벗어나지도 않았고 독일 남부나 독일 서부로도 간 적 없는 바흐랑 달리, 헨델은 독일, 이탈리아, 영국까지 종횡무진하며 스타의 삶을 살았다. 이탈리아 오페라로 유명해진 헨델은 1712년 영국에 도착했다. 약 십 년쯤 뒤 헨델은 영국으로 완전히 귀화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가면 헨델의 무덤도 있고, 내가 묵던 유스호스텔 근처에는 헨델이 지원하던 고아원도 있다. 이 정도면 헨델을 영국인으로 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그의 성장배경은 독일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디로 분류해야 하는지 참 애매해지는 작곡가다.
헨델이 영국에 정착하고 300년 하고도 좀 더 시간이 지난 2024년 6월 8일 나는 긴팔 셔츠 위에 두께감 있는 가을 재킷을 입고 덜덜 떨며 런던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래도 6월인데 설마 그렇게 춥겠나 생각했었는데, 한낮에도 15도를 넘길까 말까 하고 밤이 되면 4도까지도 떨어지는 미친 날씨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12월 오늘 하루 최고기온이 5도다. 런던 6월의 하루 최저기온이 한국 12월 하루의 최고기온과 똑같은 셈이다. 심지어 런던을 구경하는 동안 종종 날이 흐려지더니 몇 방울씩 비가 오고 바람까지 불었는데, 그럴 때면 살, 근육, 뼈가 함께 떨릴 정도로 추웠다. 이날로부터 5일쯤 전 다녀왔던 크로아티아에서는 반팔이었고 이날로부터 또 며칠 뒤에 간 크라쿠프에서도 반팔이었다. 폴란드랑 독일도 런던만큼 춥지는 않았다. 그 따뜻함을 버리고 런던으로 이민을 가다니, 헨델은 미친 건가 하는 생각도 종종 했다.
하지만 동시에 돌이켜 보면, 런던은 충분히 장정이 많은 도시다. 내가 수상하게 좋아하는 작곡가들인 멘델스존과 드보르작은 열 번 가까이 런던을 방문했고 하이든은 진지하게 런던 정착을 고려했었다. 런던에 장점이 없다면, 머리가 돌아버린 것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많은 작곡가들이 런던을 좋아할 수가 없지 않은가. 쇼팽의 불평처럼 런던의 물가는 실로 살인적이었지만 대중에게 개방된 최초의 갤러리인 내셔널 갤러리가 위치한 곳답게 거의 대부분의 미술관이 무료였고 도시 사람들도 의외로 굉장히 친절했다. 런던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하면 갤러리들에 다녔던 이야기와 서점 이야기를 한참 동안 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 시리즈는 작곡가 박물관 기행이기 때문에 지금은 헨델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헨델 헨드릭스 뮤지엄에 갈 때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발아래생긴 얕은 물웅덩이들과 런던 도시의 상징과도 같은 코블스톤 덕에 헨델 헨드릭스 뮤지엄으로 가는 길이 꽤 불편했다. 사실 코블스톤이 깔린 불편한 거리를 걸을 필요가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구글 지도가 정문이 아니라 후문으로 들어가라고 안내해 주는 바람에 한참을 헤맸다. 나를 더 헷갈리게 했던 것은 헨델 헨드릭스 박물관이 대체 23번지인지 25번지인지였다. 출구는 23번지인데, 입구는 25번지고, 대체 건물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독자 분들을 위해 미리 설명해 드리자면, 23번지와 25번지 집은 다닥다닥 바로 붙어 있다. 덕분에 사실 벽만 뚫고 약간의 공사만 하면 옆집으로 쉽게 건너갈 수 있는 구조이다. 헨델이 살았던 집은 25번지였고,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가 살던 집은 23번지였다. '헨델과 헨드릭스의 하우스'라서 H가 세 번 반복되고 운율도 좋으니까, 마침 위대한 음악가 두 명이 옆집에 살겠다 한 집으로 묶어서 박물관을 만들자는 결론이 나왔던 것으로 보인다. 캐치프레이즈가 "벽 하나와 300년의 시간을 사이에 둔 두 명의 위대한 음악가"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관람객들은 헨델 집인 25번지로 입장해, 헨드릭스 집인 23번지로 퇴장하게 된다. 신기한 박물관이다!
헨델 헨드릭스 박물관. 두 곳에 모두 유명한 사람이 지냈음을 알리는 Blue Plaque가 붙어 있다. (출처: 위키백과)
입구로 들어가자 아시아계로 보이는 직원분께서 나를 친절하게 맞아 주셨다. 유럽을 기행 하면서 박물관 직원 가운데 아시아계를 본 것은 처음이다시피한 일이라서 굉장히 신기하게 느껴졌다. 죽은 백인 작곡가들 박물관에 다니면서 백인 직원분들을 훨씬 많이 마주한 것이 당연한 일이다시피했고,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아시아계 직원을 만난 그 순간 그러고 보니 나도 아시아인이었지, 남들 눈에는 아시아인인 내가 유럽 작곡가 박물관은 이렇게 찾아다니는 것도 이상해 보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인종이나 성별을 크게 의식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만일 내가 인종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면 다른 박물관들에서는 소외감을 많이 느끼지 않았을까? 그 아시아계 직원분과 내가 살아온 환경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임에도, 나와 인종이 비슷하고 똑같이 클래식 음악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생각보다 큰 위안으로 다가왔다.
아무튼, 친절한 직원분이 오디오가이드를 주시며 사용법을 알려주셨다. 투어는 지하 1층 부엌에서 시작한다. 2023년 5월 대대적인 보수공사와 함께 새로 복원된 부분이었다. 지하 1층 부엌은 헨델의 생활습관이나 식습관에 대해 다루고, 부엌 내의 다양한 집기들을 설명해 준다. 내 어렴풋한 기억에 따르면 조리* 비슷한 것도 있었고, 물이었는지 우유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액체를 담아두기 위해 따로 만들어진 쇠 금고 같은 것도 있었다. 실제 헨델의 소장품이야, 바로크 시대에 살던 사람이니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기록에 따라서 헨델이 가지고 있었을 것과 최대한 비슷하게 구현했다' 같은 설명이 자주 나왔다. 아이제나흐 바흐 박물관에서도 느꼈지만, 많은 자료와 소장품이 사라져 버린 바로크 시대 연구가들이 오히려 더 독한 것 같을 때가 있다.
헨델박물관의 부엌. (출처: classical music)
지하 1층의 락커와 화장실을 지나쳐 0층, 아까 티켓을 받았던 곳으로 가면 오르간과 하프시코드가 놓여 있다. 내가 갔을 때가 이미 오후 3시에, 런던 특유의 우중충한 날씨까지 겹쳐 방은 상당히 어둡고 중후한 분위기가 풍겼다. 아니, 비까지 온 바람에 커튼을 치고 촛불을 켜놓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촛불에 금칠된 오르간 사이 있으니 버려진 공포의 저택 체험을 온 것 같기도 했다. 뒤쪽으로는 기념품 샵이 이어져 있었지만 기념품 샵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본격적인 투어는 1층 (우리나라 기준 2층)부터 시작된다. 2층은 헨델의 음악에 대해, 3층은 헨델의 생활에 대해서 더 자세히 다루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박물관은 헨델의 음악이나, 헨델의 인생사 전반보다는 영국에서 헨델의 일상에 더 주목하고 있다. 덕분에 내게는 딱 맞는 박물관이었지만, 리뷰 어플을 보니 많은 사람들이 헨델의 음악에 대한 맥락 설명은 부족하고 단순히 헨델의 생활습관에만 주안점을 두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었다.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비판이라고 본다. 1층은 식당, 응접실, 스튜디오와 '헨델의 음악가들' 전시가 있다. 헨델의 작은 살롱에서는 가끔 비정기적으로 연주회를 여는 것으로 보인다. 찾아보니 금요일에는 헨드릭스 플랫에서 라이브 기타 세션이 있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바로크 음악 연주회를 연다고 한다. 응접실에서는 헨델의 미술품 수집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죽고 10개월 뒤 미술품이 경매로 넘어가는 바람에 헨델이 소장하고 있던 모든 미술품의 목록을 위키피디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헨델 하면 늘 먹는 것과 화내는 것과 작곡하는 것밖에 기억하지 못했는데 미술도 좋아했다니, 놀랍지만 헨델과 나름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풍경화가 많았는데, 이탈리아 미술관을 돌아다니면서 봤던 카날레토*의 그림들이 컬렉션에 참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의 실내악연주회실. (출처: 포브스)
옆방으로 가면 불은 꺼져 있고 아무것도 없는 벽 위 빔프로젝터가 빛을 쏴 준다. 오직 헨델의 메시아를 위해서 할애된 방으로, 헨델이 오라토리오를 쓰면서 있던 일들, 작곡 과정과 일정, 타인의 평가 등이 나온다. 헨델이 메시아를 빠른 시간에 써낸 것과 대조적으로 영상은 늘어지고 지루하다. 악보를 띄워 주면서 악보와 함께 곡 일부분을 연주해 주는데, 곡이 연주되지 않는 중간중간 시퀀스가 너무 길어서 더 지루하게 느껴졌음이 틀림없다. 그래도 '할렐루야' 하나는 내가 어떻게든 보고 가겠다는 결심 하나만으로 그 영상을 끝까지 다 봤다. 할렐루야가 나오는 동시에 빔프로젝터에서 불꽃놀이 효과를 쏴 주는데, 그 순간의 카타르시스만큼은 꽤 가치가 있었다. '할렐루야' 말고 메시아의 아무 부분도 모른다는 게 무척 부끄럽긴 했어서, 조만간 헨델의 '메시아'를 통째로 들어봐야겠다는 결심을 했었으나... 아직까지 그 결심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다음 방 헨델의 음악가 전시는 헨델과 관련이 깊던 소프라노나 첼리스트, 또는 테너나 바리톤, 바이올리니스트 등의 이야기를 해 준다. 각각의 설명은 자세했지만 놀라울 정도로 작곡가들 곁에 있는 작곡가들의 주변인들에게는 관심이 없는 내게는 불경 읽는 소리처럼 들렸다. 오히려 제일 안쪽에 있는 스튜디오 부스에 들어가서 헨델의 곡을 듣는 편이 훨씬 재미있었다. 스튜디오에서는 헨델의 다양한 곡을 지원해 준다. 장르별로 오페라, 오라토리오, 기악 이런 식으로 나뉜 부스마다 몇 개의 곡을 선정해서 들을 수 있게 해 놓았다. 헨델에게는 관심이 없고 헨델 음악이 너무 좋아서 박물관에 온 사람이 있다면 2층은 아예 건너뛰고 이 감상실에서 죽치고 앉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하지만 여러분들도 모두 아시다시피 나는 작곡가의 일상에 훨씬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음악감상실에서는 '왕궁의 불꽃놀이' 한 곡 정도만 들어준 뒤 나는 빠르게 2층으로 이동했다. 2층은 헨델의 침실로 시작한다. 침실 한가운데에 있는 작고 높은, 붉은 천의 캐노피 침대가 바로 눈을 사로잡는다. 내가 발 뻗고 누울 수도 없을 정도로 짧은, 아무리 길어 봐야 1.5m를 넘지 않는 침대였다. 미디어가이드를 살펴보니 헨델 때는 이렇게 짧은 침대가 유행이었고 짧은 침대 위에는 눕는 것이 아닌, 베개에 등을 기대고 차 등받이를 최대한 젖힌 것처럼 눕는 것이 소화와 건강에 좋다고 믿어졌다고 되어 있었다. 관람객들이 착각을 하기라도 할까 봐 걱정됐는지 아예 나이트캡과 나이트가운을 침대 위에 투명인간이 입은 듯하게 배치해 두었다. 마네킹이 앉아 있었으면 소름 끼쳤을 텐데 오히려 마네킹이 없으니까 투명인간 같고 귀여웠다. 헨델 또한 그 식욕으로 인해 의사에게 아마 저렇게 앉아서 자라는 권고를 받았을 것이라고 하는데, 역류성 식도염이나 소화불량을 겪는 사람에게는 정말 효과가 있는 방법일 수도 있지 않을까. 다른 방은 몸단장하는 방으로, 유명 (?) 한 헨델의 대머리 초상화에서 나온 붉은색 가운과 헨델이 기분 좋을 때면 복슬복슬하게 흔들렸지만 헨델이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무서울 정도로 가만히 있었다는 하얀 가발도 재현해 놓았다. 개인적인 소견으로는,헨델보다는 비발디 가발 같아 보이긴 했다. 17세기 가발 문화에 대한 설명은 굳이 듣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가발 문화에는 익숙했기 때문에 바로 다음 층으로 넘어갔다.
헨델의 침실 (출처: Britain express) 과 헨델박물관의 가발. (출처: Londonist)
헨델 박물관은 여기서 마무리된다. 이제 '헨드릭스 박물관' 차례다. 헨델과 헨드릭스 사이에는 250년 정도의 간극이 있다. 1942년 미국에서 태어나 1970년 영국에서 죽은 헨드릭스는 블루스나 록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이름을 들어 봤을 정도로 유명한 기타리스트다. 어느 조사에서나 역대 최고의 기타리스트 순위를 매기라고 하면 1위를 차지하는 소위 말하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라는데, 현대음악에 미친 영향은 어쩌면 헨델보다 헨드릭스 쪽이 더 클지도 모른다. 나도 헨드릭스에 대해서 거의 아는 바가 없어서 검색해 보자 우리가 생각하는 일렉트릭 기타의 소리를 거의 개발해 냈다고 봐도 되는 사람이라는데, 헨드릭스 침실로 들어가기 전 있는 헨드릭스 인생 요약 전시를 보니까... 아니, 인생이 28년 만에 끝나 버리는 것이다. 헨델은 스물일곱 살에 영국으로 이주했는데, 헨드릭스는 그때 죽었다고? 헨델과 헨드릭스가 죽은 나이를 합치면 101이 되는데 이중 74가 헨델이다. 아무래도 헨델이 영국에서 보낸 세월은 45년 이상이고 헨드릭스가 영국에서 보낸 시간은 3년에 불과해서 그런지 박물관의 규모는 헨드릭스보다 헨델 쪽이 훨씬 크지만, 박물관 방문객들은 대체로 헨델보다는 헨드릭스에게 관심이 있어서 찾아가는 것 같다. 근거는 없지만 유튜브에 올라오는 영상이나 리뷰를 보면 헨델 박물관보다 헨드릭스 박물관에 대한 느낌이 많아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 (출처: 롤링스톤즈)
전시는 헨드릭스의 삶을 담은 연표로 시작한다. 각각의 연표와 주요 음반이나 공연 영상에는 미디어 재생기가 달려 있어 헤드셋을 끼고 음악을 들어 볼 수 있다. 평소 메탈이나 록에 손을 잘 대지 않는 내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블루스와 록의 중간쯤이라서 그런지 내 귀에도 딱히 듣기 불편하지 않았다. 어제 이 글을 쓰며 '지미 헨드릭스 제일 유명한 곡' 플레이리스트도 혹시 몰라서 재생해 봤는데, 전체적으로 듣기가 괜찮았다. 퍼플 헤이즈는 그냥 그랬지만 Foxey Lady가 내 취향이었는데... 이런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더 자세히 하자. 박물관에는 헨드릭스의 기타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전자기타도 전시하고 있는데, 뭔가 거창하게 유리케이스에 전시되어 있으니 헨드릭스의 기타여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전시실 모습. (출처: 헨델헨드릭스 하우스 공식홈페이지)
런던에서 체류하던 시절 헨드릭스의 삶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건강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술, 마약류는 물론이고 야밤의 잼 세션까지. 잼을 왜 야밤에 하냔 말이다. 음악가들이라는 건 원래 다 그런 존재인 것일까. 여자친구를 비롯한 다양한 친구들과 이 방에서 잼을 즐겼다며 여러 가지 사진들을 보여줬는데, 사진 덕분에 헨드릭스의 방을 23번지 꼭대기층에 그대로 재현해 놓을 수 있었던 듯하다. 또 헨델과는 달리 헨드릭스를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자료는 직접 찾아가서 물어보면 확보가 쉬웠다. 바닥에 발 디딜 틈도 없이 깔려 있는데도 계속해서 사 모은 카펫이 한구석에 말린 채 놓여 있고, 헨드릭스의 필체를 모방한 편지도 놓여 있고, 각종 헨드릭스 앨범이 깔린 바닥과 진홍색의 낮은 침대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작곡가 박물관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화려한 패턴과 강렬한 색채감이 1960~70년대 특유의 분위기를 잘 포착해 줘서 그런지, 헨드릭스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방을 보는 순간 헨드릭스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었다. 침대 다리가 이불로 가려질 정도로 낮은 침대 위에는 기타가 놓여 있고, 옆에는 의자가 하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포토스폿으로 삼을 만한 곳이었는데, 아쉽게도 나는 혼자 가는 바람에 그 포토스폿에서 사진을 찍어 줄 사람이 없었다. 물론 훌륭하게 포착해 낸 분위기와는 별개로, 실제 헨드릭스의 물건은 벽에 있는 작은 타원형 거울 뿐이긴 하다. 그래도 헨드릭스 박물관의 핵심은 과학적 접근과 학자적 연구가 아닌 그 '분위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 지미 헨드릭스의 잼 세션처럼 사람들이 다 같이 바닥에 둘러앉고, 연주자는 침대에 앉아서 진행하는 연주가 헨델 헨드릭스 박물관에서 종종 열리는 모양인데, 연주회 하면 의자에 앉아서 들어야 할 것 같고 콘서트 하면 서서 들어야 할 것 같은 이분법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작고 친밀한 분위기를 주는 연주회인 듯해 기회가 된다면 보고 싶다.
헨델 헨드릭스 박물관의 라이브 기타 세션. (출처: 박물관 공식 인스타그램)
녹음에 관한 내용 조금을 제외하면 별다른 내용이 없던 옆방까지 보고 나서 출구를 찾지 못한 나는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기록용으로 작곡가 박물관 사진과 영상을 남겨놓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라, 문이 죄다 잠겨 있었다. 여기서 내 헨델 헨드릭스 박물관 기행이 죄다 꼬여버리게 된다. 원래대로라면 영상을 통해 중요한 자료나 시설물들을 남겨놓는데 아직 박물관 닫는 시간이 30분이나 남았음에도 불구 문을 하나하나 잠가버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맨 처음 봤던 부엌도 잠겨 있었고 헨델의 응접실도 잠겨 있었다. 출구는 또 여기가 아니라고 하고! 방문들은 죄다 잠겼고! 심지어 1층 로비에 있던 직원도 사라졌고 커튼도 쳤고 조명까지 꺼져버렸다! 이러다가 진짜 나 갇히겠는데,라고 생각하며 나는 황급히 불이 아직 꺼지지 않은 기프트샵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기프트샵 직원들은 다섯 시에 잠그는 거 맞으니 걱정하지 말고, 다른 문들은 사람이 없어서 잠근 거라서 (그분들은 박물관 안내 직원과는 또 별개인지 문을 여는 키는 갖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미 직원들이 퇴근해 버린 이상 다시 문을 열 수가 없다고 밝혔다. 소중한 영상도 못 남겼고 사진도 못 찍어 시무룩해져 있는데, 직원들이 물어봤다. "근데, 23번지 쪽 전시들은 혹시 보고 나오신 건가요?"
박물관의 헨드릭스 침실. (출처: 박물관 공식 홈페이지)
23번지에 헨드릭스 침실 말고 뭐가 있었던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혼란에 빠져 있자 기프트샵 직원분들께서는 친절하게 내가 보지 못한 전시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고 어떤 방이 있는지까지 설명해 주셨다. 폐관 30분 전 남은 방이 아직도 다섯 개쯤 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절로 신음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박물관을 안 가면 모를까, 갔는데 놓친 전시실이 하나라도 있는 것은 수치로 여기는 나였기에 나는 기프트샵 직원분들께 감사를 표하고 황급히 나머지 전시실로 갔다. 23번지 전시실들은 2022년 재개관 때 추가된 방들로, 25번지 방과 연결되어 있지만 23번지와 25번지를 잇는 문은 직원들만 열 수 있는 듯했다. 재개관 전에도 있던 전시실들이 헨델과 헨드릭스의 일상에 집중하고 있다면, 23번지의 새로 추가된 전시실은 '헨델-헨드릭스 뮤지엄'이라는 말에 걸맞게 둘의 음악적 영향과 둘이 살던 시대배경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해 준다. 트립어드바이저의 '맥락이 없다'는 리뷰는 나처럼 23번지 전시를 죄다 놓쳐버려서 나온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30분밖에 시간이 남지 않은 상태에서 급하게 본 바람에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헨드릭스가 후대에 미친 영향, 헨델이 미친 영향, 헨델의 오페라 등이 있었던 것 같고 헨델의 1710년대 런던과 헨드릭스의 1960년대 런던을 비교하는 방도 있었다. 시간이 더 많았다면 헨델과 헨드릭스 시대를 비교해 보면서 이 기행문에서도 흥미롭게 다룰 수 있는 내용이었을 텐데, 마음이 너무 급했다. 글이 눈으로 들어오는지 코로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읽었던지라 지금은 전부 내용이 휘발되어 버렸다. 아쉬운 마음이다. 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기억이 나는 것은 1710년대 의상 체험과 1960년대 의상 체험 옷걸이가 둘 다 있다는 것이었다.
23번지 문을 통해서 나온 시각은 약 오후 4시 55분이었다. 5분만 더 늦었으면 박물관에 갇힐 뻔한 셈이었다. 다음번에는 절대 폐관시간이 가까워 오는 박물관에는 가지 말아야지 하는 결심을 하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델 헨드릭스 박물관에서 받은 인상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왜일까? 이미 그때 느꼈던 감정이 상당히 희미해진 지금 정확히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어쩌면 런던이라는 도시의 다양한 사람들을 박물관에서 만나볼 수 있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동양계의 자원봉사자, 미국 흑인 기타리스트, 독일에서 영국으로 이민 간 백인 작곡가, 공지보다 30분이나 빨리 닫히는 박물관과 내가 놓친 전시가 있을까 봐 추가 전시까지 알려준 기프트샵 직원들까지. 런던은 정말 바쁘고, 시끄럽고, 사람 많은 대도시였다. 평소에는 그런 소란스러움과 북적거림을 싫어했지만, 헨델 헨드릭스 박물관을 가 보니 알 것 같다. 도시에서만 볼 수 있는 수많은 사람의 모자이크라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흥미로우며, 간혹 편안함을 안겨주기도 하는 것인지 말이다.
도시는 변화한다. 헨델의 런던과 헨드릭스의 런던과 나의 런던은 모두 다르다. 다른 박물관들에는 나의 시간과 작곡가의 시간만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헨드릭스의 시간이라는 새로운 시간 층위가 생겼다. 평상시에는 내가 작곡가의 시간에 빨려 들어갔다면, 헨델 헨드릭스 박물관에서는 이미 헨델과 헨드릭스 사이 이미 시간의 간극이 한 번 있었기 때문일까, 유독 내 시간인 2024년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최종 평가
내 기행 중 가장 서쪽에 있는 박물관이었다.
명칭: 헨델 헨드릭스 하우스 (Handel Hendrix house) 운영시간: 월화 휴무, 수~일 10:00~17:00 입장료: 성인 14파운드, 학생 10파운드 사이트 링크: Handel & Hendrix in London | Home
1. 도시 접근성: ★★★★★
수도, 그것도 유럽 안에서도 손에 꼽게 큰 수도가 5점이 아니면 민망할 것이다. 다만, 다른 EU 국가들 사이 이동을 할 때는 별다른 입출국심사가 필요 없으나 이제 브렉시트로 인해 출입국 심사 절차로 인해 비행기를 탈 때 상당히 귀찮은 국가긴 하다. 그래도 유럽 여행 계획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도시 런던의 접근성은 5점일 수밖에 없다.
2. 도시 내 접근성: ★★★☆
워낙 지하철(Tube)이 많이 다니는 동네다 보니까 여기도 본드 스트리트 역에서 내리면 가깝다. 근데 도시 자체가 너무 큰 바람에 (...) 찾아다니기 좋다는 생각은 따로 들지 않는다. 주변에 딱히 볼 것도 없고 쇼핑몰뿐이라서 동선이 빡빡하다면 끼워넣기 참 애매한 박물관이다.
3. 소장품: ★★
헨델의 원본 소장품이 뭐가 있었는지 열심히 기억해내려 하고 있는데, 기억이 안 난다. 분명 기사에 따르면 다양한 악보 등을 소장하고 있다는데... 왜 난 본 기억이 없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원본을 하나도 전시하지 않고 재현만 한 바람에 박물관보다 테마파크 같은 느낌이 들지 않나 싶다. 헨드릭스 쪽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 아참, 그래도 헨드릭스 쪽은 오히려 원본 가구가 아닌 덕분에 헨드릭스의 방과 똑같이 꾸며진 방에서 나도 의자에 앉아보고, 침대에 앉아서 기타도 쳐 볼 수 있다는 게 장점이긴 했다. 아니, 그런데 헨델이야 그렇다 쳐도 헨드릭스는 왜 이렇게 소장품이 없는 걸까?!
4. 언어 지원: ★★★
영어가 제1언어인 설명문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미디어가이드로 다양한 언어를 지원하지만 따로 한국어를 지원하지는 않는다. 평범하고 무난하다.
5. 가성비: ★★
나... 쁜 것 같은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영국 물가 자체가 비싸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겠지만... 분명히 생각해 보면 음악가 두 명의 집을 동시에 둘러보긴 했지만... 10 파운드면 12유로쯤인데, 12유로면... 바흐 아이제나흐 박물관보다 비싸지 않은가. 아니... 영국 물가를 고려해 보면 나쁘지는 않겠지만, 미술관들은 죄다 무료인 동네에서 10파운드짜리 박물관인데 그리 크지도 않으니 어쩐지 자꾸 가성비가 나쁘다는 생각이 든다...
6. 규모: ★★★☆
아주 큰 건 아니지만, 총 4~5층 가까이 되는 박물관이기 때문에 보이는 것에 비해 관람 시간이 오래 걸린다. 가이드도 정보량이 많아 가이드를 꼼꼼하게 읽으면서 다니다 보면 시간이 꽤 걸린다. 1시간 30분 정도는 잡고 가는 편을 추천한다.
7. 상호작용: ★★★★
헨델과 헨드릭스의 음악을 들어 볼 수 있는 오디오스테이션이 있었고, 23번지의 전시는 대체로 어린이박물관에서 두꺼운 카드 넘기면서 정보 확인하는 것처럼 상호작용을 하게 되어 있었다. 1710년대 옷뿐 아니라 1960년대 옷도 입어볼 수 있다는 점을 높게 사 4점을 줬다.
8. 굿즈:?
점수를 매기지 못한 것은 처음인 것 같다. 글을 보면 알겠지만 내가 보지 못한 전시실을 허겁지겁 관람해야 했어서 굿즈샵을 제대로 둘러볼 시간이 없다. 이런저런 가이드나 헨델 관련 어린이 책 정도가 있던 것은 기억이 나지만 딱 그 정도가 전부다. 이런.
9. 큐레이팅: ★★★★
무엇을 기대하고 왔느냐에 따라 평가가 크게 달라질 것 같다. 주로 헨델의 일상에 중점을 두고 설명해주고 있는데, 헨델 음악이나 시대적 맥락, 인생사에 관심이 더 많은 사람이라면 무척 아쉽게 느낄 것이 분명하다. 사실 나는 작곡가가 살던 집이라면 재현해 놓은 방과 그 물품들에 어떤 스토리나 의미가 얽혀 있는지를 풀어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고, 그 점에서는 훌륭하게 내 취향이었던 박물관이다. 다만 할렐루야 이야기를 또 안 할 수는 없고, 주변인들 이야기도 해야 할 것 같고... 하며 테마가 흐려진 감이 있어서 점수를 조금 낮게 줬다. 맥락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23번지 전시를 봐야 하는데, 헨델의 일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데 헨델 일상이야기만 잔뜩 해주는 느낌이라서 아쉬워한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헨드릭스 박물관의 경우, 찾아가는 사람들 중 많은 숫자가 이미 헨드릭스 골수팬이라서 헨드릭스에 관한 웬만한 이야기는 다 알고 있는 바람에 헨드릭스의 소장품을 더 보고 싶어 하거나, 헨드릭스의 음악과 시대 배경 이야기를 더 해주었으면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헨드릭스의 일상 이야기만 해 준다는 아쉬움을 적은 리뷰도 보였다. 사실 이 점은 23번지 전시로 크게 보완된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맥락과 배경 설명을 해준 뒤에 일상설명을 해주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좀처럼 떨쳐지지 않으나 제법 괜찮은 구성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박물관이라는 건, 어디에나 세워도 되는 것 아닌가. 음악가의 집이 박물관으로 만들어졌을 때는 이렇게 공간의 특수성을 살려주는 것도 난 좋다고 본다.
10. 총평: ★★★
헨델을 보러 가면 헨드릭스를 보러 오고, 헨드릭스를 보러 가면 헨델을 보고 오게 되는 박물관
최대 장점: 두 명의 음악가를 동시에 만나볼 수 있다니? 정보량 풍부한 가이드
최대 단점: 소장품 거의 없음, 비싼 가격
추천 여부: △. 헨델과 헨드릭스 둘 중 하나에게 관심이 있다면 가볼 만하겠지만 둘 중 누구의 팬도 아니라면 굳이 갈 필요까지는 없는 박물관.
21화 예고: 체코,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영국... 여기까지는 흔한 유럽여행 코스지만, 여기서 폴란드가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까? 제발 와지엔키 공원 쇼팽 콘서트를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염불을 외며 폴란드 바르샤바 공항 이름의 주인, 쇼팽 박물관을 찾아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