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 또는 프레데리크 프란치셰크 쇼팽. 보통은 프랑스식 이름으로 불리지만 세례는 프레데리크 프란치셰크 쇼팽으로 받았다. 위키백과에 쇼팽의 국적을 폴란드로 단일 등재할 것인가, 아니면 폴란드와 프랑스를 병기할 것인가에 대해 엄청나게 긴 논쟁이 펼쳐졌었다고 하는데, 쇼팽에게 물어본다면 쇼팽은 두 개를 같이 적으라고 했을지 아니면 폴란드만 적으라고 했을지 참 궁금하다.
흔히 불리는 별칭은 '피아노의 시인'인데, 슈만에게 주어진 '피아노의 시인'이 '시인' 쪽에 좀 더 방점이 맞춰져 있다면 쇼팽의 별칭은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뜻일 것이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쇼팽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는 힘들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일명 '입문 요정'인 작곡가. 군더더기 없고 깔끔한 테크닉과 풍부한 감수성이 없으면 제대로 칠 수 없는 작곡가기도 하다. 연습곡에 불과해야 했을 에튀드조차 콘서트 단골 앙코르곡으로 만들어버린, 피아노를 극한까지 실험해 본 작곡가 가운데 한 명이 아닐까 싶다. 다른 것에는 관심 없고, 나는 오직 피아노 하나만 판다!라는 결심을 한 건 아닐까 의심되기까지 한다. 비가 오는 날이면 아마도 드뷔시와 함께 단골 BGM인 작곡가일 텐데, 프랑스 곡에서 흔히 느껴지는 모호함과 동유럽 곡에서 느껴지는 어딘가 모를 우울함이 결합되어 다른 작곡가 곡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감성을 자아낸다. 클래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우리 어머니조차도 쇼팽 곡은 딱 들으면 안다고 할 정도로, 작곡 스타일이 지문인 작곡가 가운데 하나다.
내가 개인적으로 쇼팽과 맺고 있는 관계는 상당히 복잡한데, 쇼팽 박물관을 소개하는 것만 해도 오늘은 바쁠 것이므로 나와 쇼팽의 이야기는 다음 편인 젤라졸라 볼라 쇼팽 박물관에서 더 자세히 하겠다. 일단 오늘은 런던에서 돌아온 지 하루 만에 다시 부다페스트로 출발해 1박 후 크라쿠프에서 아우슈비츠 (폴란드어식으로는 오시비엥침) 수용소와 비엘리치카 소금광산을 다녀온 뒤 버스를 타고 바르샤바에 도착한 뒤의 이야기를 풀어보도록 하자.
폴란드. 쇼팽이 아니었더라면 평생 발을 들여 볼 일도 없는 국가였다. 유럽으로 교환학생을 간 사람들이 자기가 여행을 다녀온 국가가 얼마나 많은지 자랑하는 글에는 아이슬란드가 있을지언정 폴란드는 없다. 나도 클래식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폴란드를 갈 시간에 그리스를 다녀왔을 테다. 하지만 클래식을 좋아하면 보통 가장 먼저 좋아하게 되는 작곡가가 바로 쇼팽이고, 피아노 좀 쳐 봤다 하는 사람들이면 쇼팽 에튀드 정도까지는 가 봤으리만큼 쇼팽은 우리에게 친근한 작곡가다. 기억을 되짚어 보면 내가 피아노 연습을 진지하게 '재밌다'라고 느끼던 시절 내가 연습하던 곡은 베토벤의 열정 3악장과 쇼팽의 에튀드 op 10 no 5, 일명 '흑건'이었다. 지금은 쇼팽 곡에 그렇게 흥미가 있지는 않지만-나는 독주곡보다는 관현악곡이나 실내악을 좋아하기 때문에-쇼팽은 내게 클래식이 흥미로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작곡가 가운데 하나였고, 내게도 꽤 의미가 있는 작곡가였다. 당연히 내 주변에도 쇼팽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고 말이다. 그래서 폴란드를 다녀오는 것은 하나의 의무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남들은 가지 않는 곳에 간다는 점에서 내 여행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해주는 일일 것 같기도 했다. 아주 오랜 시간 고민을 했지만 결국 나는 산토리니를 포기하고 바르샤바를 택했다.
바르샤바 버스 정류장에 내려 버스를 타고 숙소로 향하며 내 머릿속에는 '서울 같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스쳤다. 널찍한 고가도로와 창밖으로 지나가는 고층건물들, 유리로 마감한 건물 외벽이 지금까지 간 도시들 중에서도 손에 꼽게 도시적인 인상을 남겼다. 물론 현대의 도시 대부분은 그런 고층 건물들을 몇 개쯤 가지고 있다. 다만 관광객들이 자주 다니는 도심에는 고층 건물이 얼마 없을 뿐이다. 나도 바르샤바의 올드타운부터 다녀왔으면 바르샤바가 도시적이라는 생각을 덜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바르샤바 중앙기차역이 있는 도심 지역에서 버스를 갈아탔기 때문에 문화과학궁전을 중심으로 한 신식 건물들 사이 둘러싸였다.
문화과학궁전. 바르샤바의 대표적 소련 건축물이자 랜드마크이다. 다만 사랑받지는 못하는 것 같다.
많은 한국인들이 폴란드의 역사가 한국의 역사와 닮았다 생각하며 폴란드의 역사에 공감한다고 한다. 사실 일부 '열강'에 속하는 국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한국이나 폴란드 정도 느낌이지 않나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과 폴란드 역사의 유사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만, 폴란드도 고생을 꽤나 한 나라로 유명한 것까지는 맞다. 자세한 사정까지 이야기하다가는 쇼팽 박물관 이야기는 시작도 못 할 테니 간단히 필요한 부분만 이야기하자면, 한때 동유럽의 강국이었던 폴란드는 1700년대 중반 완전히 조각조각 나뉘어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게 된다. 나폴레옹이 폴란드 지역을 점령하며 일부 지역을 '바르샤바 공국'이라는 괴뢰국으로 만들어 주는데, 이때 형식적으로나마 입헌군주제에 의해 통치되자 폴란드인들은 국가의 주권이 원래대로 회복되지 않을까 기대를 하게 되었다. 바르샤바 공국이 1807년 건국되었으니, 쇼팽이 1809년생이든 1810년생이든 쇼팽이 태어난 곳은 바르샤바 공국이 된다. 그러나 이 잠시간의 춘몽은 1815년 나폴레옹의 집권이 끝나며 짓밟힌다. 바르샤바 공국은 해체되어 폴란드 입헌왕국이 되었고, 폴란드 입헌왕국의 민중은 1830년 프랑스의 7월 혁명에 영향을 받아 러시아 위성국의 신세를 벗어나기 위해 봉기를 일으키나 실패한다. 그 결과 1832년 자치권이 더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1830년 봉기는 쇼팽의 인생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이후에도 폴란드는 63년 또 한 번 독립을 꿈꾸며 봉기를 일으키지만 역시나 실패, 1867년에는 자치권을 아예 박탈당한다. 1차 대전이 끝나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드디어 2 공화국을 수립해 독립을 해 보나 했더니 독일 제3 공화국의 침공으로 인해 2 공화국은 멸망하고 만다. 어찌 보면 독일보다도 많은 피해를 입은 국가였을지 모르는 곳이 바로 폴란드다. 바르샤바의 인구가 150만에서 38만으로 뚝 떨어졌고, 폴란드인들은 유대인들, 집시 등에 가려져서 잘 언급되지는 않지만 'P' 표식을 달고 다녀야 했다. 집단적 학살만 덜했다 뿐이지 폴란드인들에게 가해진 차별적인 법령도 만만치 않았다.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도 폴란드 크라쿠프 근교에 있을 정도로 폴란드와 2차 대전은 떼어놓고 싶어도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다. 2차 대전이 끝나고도 폴란드는 온전히 독립하지 못한다. 2 공화국과 2차 대전의 잔재 위에는 소련의 괴뢰국인 폴란드 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바르샤바의 랜드마크 가운데 하나인 문화과학 궁전이 바로 이 시기 세워졌다. 폴란드 인민공화국 시절에 대해서는 여기서 평가를 따로 내리지는 않겠다. 현재 폴란드의 국민들 가운데서도 이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고, 그 나름대로의 장점과 단점이 있던 국가기 때문에 내가 파편적인 정보로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1990년 제3 공화국이 세워진 이후 폴란드는 빠르게 성장 중이며, 독일이랑 러시아라는 초강대국 사이 낀 설움을 털어내 주겠다는 듯 이를 갈고 2024년 2분기 무려 4%의 성장률을 보여주었다. GDP도 다른 EU국이 0.3% 성장할 때 1.5%를 성장했으니 미래가 기대되는 국가다.
아마 폴란드 도심에 새로 지은 건물들만 많이 보였던 데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지 않았을까. 한국이 1950년대 한국전쟁으로 도시가 쑥대밭이 됐다면 그와 비슷하게 폴란드도 2차 세계대전의 여파를 심하게 겪은 나라니 말이다. 게다가 종교나 왕정의 잔재를 모두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사회주의 시절로 인해 더 때려 부수어졌으면 때려 부수어지는 것이 당연했으리라. 지금의 아름다운 바르샤바 올드타운조차도 2차 세계대전의 잔해를 치우고 아예 복원된 지역이다. 그러니 사실 쇼팽이 2024년 지금 부활한다면 바르샤바는 예전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테지만-과연 그걸 쇼팽이 신경을 쓸까? 쇼팽이 (간혹 아동용 동화에서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적극적인 독립운동가까지는 아니었을지라도, 독립된 조국을 볼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도시가 얼마나 변했는지와는 상관없이 반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944년의 바르샤바. (출처:AB Poland Travel)
쇼팽 박물관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바르샤바 이야기를 하는 데 너무 많은 글을 할애했다. 이제 정말로 나의 '바르샤바 쇼팽 투어'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계획은 간단했다. 하나, 쇼팽 박물관을 관람한다. 둘, 와지엔키 공원에서 쇼팽 연주를 듣는다. 셋, 쇼팽의 심장이 있는 성 십자가 성당에 간다. 문제는 오직 한 가지였다. 와지엔키 공원의 쇼팽 연주회는 우천 시 취소라는 점. 그리고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는 점. 그래도 박물관은 비가 오든 말든 가야 할 것 아닌가. 나는 한숨을 쉬면서 짐을 챙겼다... 그리고 내가 우산을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오는 버스에 놓고 내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원래도 쇼팽 박물관에서 빗방울 전주곡을 프린트한 우산이 있다면 살 생각이었지만 이제 쇼팽 박물관에서 우산을 사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어 버렸다.
쇼팽 박물관은 호텔과 무척 가까웠다. 도로를 가로질러 갈 수 있다면 2분 거리밖에 되지 않고, 육교를 통해 돌아서 가더라도 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당연했다! 왜냐하면 내가 호텔을 잡을 때 인테리어가 쇼팽 컨셉이라는 걸 보고 눈이 돌아가서 가성비를 포기하고 쇼팽 박물관 맞은편의 쇼팽 호텔을 잡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호텔 방 안 액자에는 성 십자가 교회와 'heart'가 있는 그림이 들어 있었으며 1층 로비에는 음표, 쇼팽 캐리커처, 쇼팽 악보를 프린팅 한 냅킨 등 다양한 쇼팽 컨셉의 물품이 준비되어 있었다. 서비스도 훌륭했고 깨끗했기 때문에 바르샤바에서 지내는 동안 무척 만족했던 숙소였다. 쇼팽 콘서트를 보겠다고 부다페스트를 갔다가 크라쿠프로 올라가서, 바르샤바까지 버스를 타고, 다시 바르샤바 공항에서 부다페스트 공항으로 비행기를 타고 넘어간 뒤 독일로 돌아간다는 정신 나간 계획을 세우는 바람에 몸이 무척 힘들었지만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일정 모두 포기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지친 몸을 끌고 쇼팽 박물관으로 향했다.
호텔 객실이다. HEART 는 좀 심했다.
쇼팽 박물관은 꽤 멋지게 생겼다. 개인적으로 스메타나 박물관 다음으로 멋지게 생겼다고 생각한다. 높은 계단과 건물 뒤쪽의 작은 정원 속 분수까지 조그만 저택 같다. 물론, 좀 많이 높게 지어 놓은 바람에 박물관 관람이 3층에서 시작한다는 것이 문제지만... 그러니까 우리나라 식으로는 무려 4층에서 관람을 시작한다는 소리다. 쇼팽 박물관은 총 4층으로, 우리가 관람하는 부분은 2층, 3층, 4층 그리고 5층이다. 하지만 이렇게 부르면 내가 무척 불편하기 때문에 우리가 입장하는 층을 0층이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지하 1층은 쇼팽의 음악과 쇼팽의 음악 해석 같은 내용 위주로 구성되어 있고, 2층은 특별전시실이라서 현재는 쇼팽의 다양한 조각상을 전시하는 용도로 쓰이고 있다. 때문에 이 글은 쇼팽 박물관의 0층과 1층을 중심적으로 다루겠다.
쇼팽 박물관. 멋지다.
쇼팽 박물관의 0층은 쇼팽의 유소년기를 다룬다. 보통 작곡가들의 집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던 다른 박물관들과 달리 입장하자마자 검은색의 매끄러운 바닥에 내 얼굴이 반사되어 보인다. 주로 검은색과 어두운 붉은색의 벽으로 인해 차분하고 고요하며 살짝은 차가운 느낌마저 든다. 첫 번째 방을 박물관에서는 '젤라졸라 볼라' 방이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물품은 레플리카로, 원본은 따로 관리 중인 듯했다. 다른 박물관에서는 '가져다 놓을 게 없어서 사진이랑 레플리카로 때우냐!'라고 원성을 토했던 나지만 쇼팽 박물관 운영 주체가 국립 쇼팽 연구소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쇼팽 박물관이 자료가 없어서 레플리카를 내놓은 것은 아니리라는 믿음이 들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원본을 가져다 놓는 것보다 훌륭한 점도 있는데, 원본을 가져다 놓지 않는 대신 쇼팽 박물관에서는 일부 자료들을 전부 디지털화해 관람객들이 각 페이지 내용을 살펴볼 수 있게 해 놓았다. 1관의 다이어리도 그중 하나에 해당하며, 옆에 있는 미디어 스테이션에서 페이지를 넘기며 안에 그려져 있는 쇼팽의 초상화와 쇼팽과 다이어리의 주인이 어떻게 함께 지냈는지 같은 내용을 읽어볼 수 있다. 레플리카 쇼팽의 세례증명서에는 쇼팽이 자기 생일을 3월 1일이라고 말하고 다녔던 것과 달리 세례를 2월 22일 받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데, 아직까지도 쇼팽이 1809년생인지, 1810년 생인지, 2월 22일생인지, 3월 1일생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젤라졸라 볼라 방 오른쪽에는 어린이 체험실이 있다. 내가 갔을 때는 오르골 만들기 체험과 나만의 악기놀이 체험, 쇼팽 동화책 등이 있었는데 과거 코로나 팬데믹 시절 박물관에서 제공해 준 3D 투어를 보니 또 다른 전시를 하고 있다. 아마 어린아이를 위한 체험도 계속 바꾸면서 제공하는 모양이다. 나도 체험을 해 보고 싶었지만 누가 봐도 어린이를 위한 체험실에 앉아 있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그다음 방은 쇼팽의 바르샤바 시절을 다루는 '바르샤바 방'이다. 비록 쇼팽이 태어난 도시는 아니지만 생후 6개월일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으니 쇼팽의 유년기와 소년기를 사실상 형성한 도시라고 봐도 될 듯하다. 사실 나도 쇼팽의 고향을 한동안 바르샤바로 알고 있을 정도였다. 프랑스계 이민자였던 쇼팽의 아버지가 바르샤바 리체움에서 직장을 얻어 프랑스어 교사로 근무하게 되며 바르샤바로 가게 됐던 것인데, 이때 쇼팽의 아버지는 하숙집을 운영하며 쇼팽의 많은 친구들에게 방을 내주기도 했다. (쇼팽 아버지의 이런 배경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던 이유인 동시에 쇼팽의 성이 폴란드의 일반적인 성과 달리 '쇼팽'이라는 프랑스어식 독음을 사용하는 이유이다. 폴란드의 성은 '-스키' 또는 그 여성형인 '-스카'로 끝나는 경우가 잦다.) 그 때문인지 이 시기 쇼팽의 편지나 쇼팽에 관해 남은 기록을 보면 쇼팽은 굉장히 장난도 좋아하고, 가끔은 교복 불량으로 벌점을 받을 뻔도 하고, 선생님을 우스꽝스럽게 그린 그림을 남기기도 하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외롭고, 쓸쓸하고 우수에 젖은 쇼팽과는 정반대다.
'바르샤바 방'. (출처: Migliore+Servetto)
바르샤바 방에는 흥미로운 전시품이 몇 개 있다. 하나는 쇼팽이 1820년, 그러니까 10살에 불과할 때 연주회를 하고서 받은 기념품 금시계다. 뒷면에는 프랑스어로 '1820년, 10살의 프레데리크 쇼팽에게, 바르샤바에서'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동년배인 리스트도 이때쯤에는 '르 쁘띠 릿츠'로 통하며 신동으로서 사랑을 듬뿍 받았음을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쇼팽도 10살 때 이미 그런 재능을 보였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아니, 쇼팽에게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생각부터 가끔은 잘 실감이 나지 않지 않는가! 또 쇼팽의 어린 시절에 생동감을 부여해 주는 다른 전시품은 쇼팽의 글씨연습공책이다. 단어와 알파벳을 아주 고급스럽게 연습한 공책인데, 1823년의 공책이니 약.. 13살 때다. 이 무렵 쇼팽이 아버지의 영명축일을 축하드리려 써준 시나 편지들을 보면 글씨가 무척 단정하고 예쁜데, 나이가 들어서 쓴 편지들에는 쇼팽 박물관에서도 종종 해독을 못 하는 글자가 있어서 (???) 또는 '이렇게 쓴 것 같은데 맞는지는 모르겠음'이라는 뜻으로 글자 아래 밑줄을 쳐놓는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나왔다. 사람이 글씨를 가장 심혈을 기울여 쓰는 나이는 원래 초등학교 때 아니던가... 나도 중학교, 고등학교 이렇게 진급을 하면 할수록 글을 쓸 일이 많아지다 보니까 점점 악필이 되어가는 중이다. 숨을 쉬는 행위를 의식하고 하는 것이 아니듯 글씨도 어느 시점부터는 무의식적으로 쓰는 수준이 되니까 말이다. 쇼팽도 남들과 다를 바 없이 어느 시점부터는 '나만 알아볼 수 있으면 됐지 뭐'라는 생각으로 글씨가 점점 흘림체가 된 것 아닐까.
쇼팽의 손글씨 연습장. (출처: 바르샤바 쇼팽 박물관 유투브 소개영상)
미디어 스테이션에서는 쇼팽이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쇼팽의 아버지는 어떤 살롱을 열었는지 등의 다양한 주제를 더 자세히 설명해 준다. 벽을 따라 쇼팽과 관련이 있는 장소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쇼팽이 바르샤바를 떠날 시기가 된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성공을 꿈꾸며 빈으로 향한 쇼팽은 빈에서 11월 봉기 소식을 듣게 된다. 쇼팽은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오스트리아에서 자신이 들은 반-폴란드적인 험담을 전하며 울분을 토하기도 하고, 자신이 친구들과 함께 봉기에 참여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친구들을 응원한다. 그러나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고, 쇼팽은 1831년 빈을 떠나 파리로 향하는 길의 일기에서 '신이시여, 당신마저도 러시아인인 것입니까?'라고 절망을 토로한다. 쇼팽의 편지 294편 정도를 읽어봤지만 그 정도로 쇼팽이 날것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다른 편지들에서는 거의 대부분이 가십 이야기나 일상 이야기뿐이던 쇼팽이 그런 일기를 썼다는 것에서 그때 느꼈던 절망감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간다. 아니, 사실 그때는 상상만 갔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 혼란스러운 나라와 그 혼란에 동반되는 불확실성, 실패로 돌아가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 때로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찾아오는 공포,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 리스트는 (물론 그의 책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쇼팽의 음악에는 번역이 불가한 'Zal'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이는 한국어로는 흔히 '한'이라 말하는 것인데, 이번만큼은 리스트의 말이 맞지 않을까 싶다. 쇼팽을 독립투사라 말하는 것은 과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쇼팽이 전쟁을 간접적으로 경험했다는 것도 맞다. 이 이전이나 이 이후에 위협을 느낀 적은 없다고 하더라도, 그 한순간 느낀 위협은 충분히 흉터처럼 사람의 가슴을 할퀴고 지나갈 수 있다. 흉터가 아문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쇼팽이 언제나 1831년의 상처를 의식하며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 느꼈던 감정들은 아마도 쇼팽의 안에 가라앉아 있다가 이따금씩 불쑥 튀어나왔을 것이다. 다시 국난이 현재진행 중이던 1831년 시점으로 돌아가보자. 이미 과거의 기억이 되어도 여전히 쓰린 아픔이었을 것이, 불확실성이 지속되고 본인이 속해 있는 집단을 향한 적의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상황이라면 어땠겠는가. 일단 그리 예민하지는 않은 나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쇼팽이라면 더더욱 그랬을 테고. 봉기로 인해 오스트리아에서 반-폴란드 감정이 고조되자 쇼팽은 오스트리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앞서 말했듯 폴란드를 분할지배하는 국가인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가 조국의 독립을 바라는 폴란드인을 반갑게 맞아줄 리가 없었기 때문에 쇼팽은 파리로 향해야만 했다. 프랑스는 그나마 폴란드인이 정착할 수 있는 곳이었고 쇼팽이 파리로 향했을 때는 이미 폴란드인 커뮤니티가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었다. 쇼팽은 파리에서 잠시 지내다가 곧 폴란드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모두가 알듯 그러지 못했지만.
이제 쇼팽 인생 후반전을 관람할 시간이다. 처음 봤던 고급스러운 Y자형 나선 계단의 난간을 잡고 1층으로 올라가면 0층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전시실이 나온다. 0층이 모던하고 어두운 색 위주였다면 1층은 밝고 가벼우며 고전적인, 신고전주의 때나 볼 수 있을 법한 하얀 회벽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갑자기 쇼팽의 집에 초대받은 듯한 기분이 들며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 할 것 같다. 바그너 집이 화려하긴 했지만 그곳은 뭔가, 붉은색이며 체크무늬 바닥이며 모든 것이 과장되어 있고 오페라와 같이 극적인 분위기라서 내 몸가짐이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 쇼팽 박물관 1층은 귀족을 접견하러 온 것 같은 기분이 됐다. 너무 부산스러워도 안 될 것 같고, 그렇다고 너무 격식을 차려도 안 될 것 같은 긴장감이 느껴졌다. 꼭 우리가 아는 쇼팽의 우아함을 닮은 곳이었다. 위로는 천장화가 그려져 있고, 몰딩은 우아한 금빛인 것이 궁전 같네-라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오스트로그스키 궁전 건물을 박물관으로 쓰고 있는 것이니까 궁전이라는 말이 틀린 말도 아니긴 하다. 쇼팽이랑 잘 어울리니까 그걸로 됐다.
쇼팽 박물관 1층. (출처: In your pocket)
잠시 2층 로비에 서서 궁전의 가볍고 산들바람 같으면서도 우아한 분위기가 쇼팽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에 감탄하고 있다가 가운데 전시실, 일명 '파리 살롱'으로 입장하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전시품은 쇼팽의 피아노다. 방돔 광장 쇼팽의 집에서 가지고 온 이 피아노는 바르샤바 쇼팽 박물관 제일의 전시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현재까지도 관리를 철저히 해 쇼팽 박물관 인스타그램에 들어가면 쇼팽의 피아노로 연주하는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의 영상을 볼 수 있다. 1848년에 제조된 피아노는 어김없이 플레옐 사가 제작한 것으로, 당시 피아니스트들의 경쟁만큼이나 치열했던 것이 바로 피아노 제조사들 간의 경쟁이었다. 에라르나 브로드우드 피아노를 선호했던 리스트와 달리 쇼팽은 곧 죽어도 플레옐 피아노만을 고집했는데, 플레옐로만 본인이 원한 섬세한 음색을 포착할 수 있다는 점과 다른 피아노에 비해서 건반을 누를 때 힘이 덜 들어갔다는 점이 그 이유였으리라고 추측되고 있다. 당시 플레옐 사를 경영했던 카미유 플레옐은 쇼팽과 떼놓을 수 없는 관계였다. 쇼팽은 일종의 플레옐 사 간판 모델이었다. 살 플레옐이라는 콘서트홀에서 공연하기도 했고, 종종 플레옐 사의 피아노 품질 검증을 하고 마음에 들면 피아노에다가 본인의 서명을 새기기도 했던 것이 쇼팽이다. 대체 플레옐 피아노가 다른 피아노랑 얼마나 다르길래 플레옐만 고민했는지, 건반을 누르는 느낌이 얼마나 다르게 느껴지는지 궁금하긴 하다. 쇼팽이 소유하고 있던 그랜드피아노 말고도 뒤쪽에 플레옐 사가 생산하고 쇼팽이 품질을 검증한 업라이트 피아노도 한 대 더 놓여 있다.
쇼팽의 플레옐 피아노.
반대쪽 구석에는 쇼팽이 소유하고 있던 가구 중 살아남은 유일한 가구 한 점, 쇼팽의 의자가 있다. 쇼팽도 본인 집의 인테리어에 무척 섬세한 편이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쇼팽은 당시 유행하던 화려한 벽지보다는 차분한 아이보리색이나 옅은 회색의 벽지를 선호했다고 한다. 그런데 남아 있는 쇼팽의 의자는 검은색 천에 화려한 꽃무늬가 가득하니 이상한 노릇이다. 나는 쇼팽의 가구라면 좀 더 무색무취의 모델하우스 가구처럼 생겼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참이라서 많이 놀랐다. 다른 가구들로 쇼팽의 취향을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면 좋겠지만 1863년, 쇼팽의 가구와 물품들, 그리고 피아노 한 대까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던 이자벨라 집에 쳐들어온 러시아군이 그 모든 것을 다 창 밖으로 집어던져 버리는 바람에 전부 소실되었다고 하니 안타까울 노릇이다. 어째서 국난이 곧 쇼팽의 수난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모든 사람은 국가와 사회의 산물이니까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음악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은 보편적으로 보이면 좋겠다는 마음에 그 사실을 듣고서 울화와 답답함이 치밀어 올랐다.
이자벨라가 살던 곳이다. 여기서 쇼팽의 피아노가 내던져진 것이다!
또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벽에는 쇼팽의 다양한 소장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쇼팽이 쓰던 동양풍 탁상종, 쇼팽의 다이어리와 연필, 쇼팽의 진주 커프스단추와 사탕상자, 핫초코 컵받침까지 쇼팽의 책상을 뜯어 온 듯한 전시품들이 잔뜩이다. 폴란드라는 나라에 얼마나 수난이 많았는지와 전쟁이 한 번 날 때 얼마나 많은 유물들이 소실되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 정도로 물건이 남아 있는 것만 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이외 파리 살롱에서 이어지는 두 개의 방은 각각 쇼팽과 상드의 노앙 생활, 그리고 쇼팽의 인생에 중요했던 여자들에 대해서 소개를 해 주는데 이 가운데 노앙 방에 있는 F.C가 수 놓인 손수건과 (아마 상드가 수를 놓아준 것 같다고 한다) 쇼팽의 모자 박스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모자 박스는 쇼팽이 여행을 다닐 때마다 들고 다녔던 것으로, 쇼팽의 편지를 읽다 보면 친구에게 모자 치수는 모자장수가 알고 있으니까 내가 맞춰놓은 거 대신 픽업 좀 해줘라, 모자는 어떤 색이고 바지는 어떤 색이고 하며 심부름을 시키는 내용이 꽤 자주 나온다. 옷이 아니더라도 대신 집 계약 좀 해 줘라, 집은 난방이 잘 되어야 하고 접근성이 좋아야 하고 또 작업공간이랑 쉴 공간 분리되어 있어야 하니까 방 구조가 이랬으면 좋겠고 같이 별 시시콜콜한 심부름을 다 시키는데 정말 자리에 앉아서 손가락 하나도 꼼짝하고 싶지 않은 사람의 자세여서 웃었던 기억이 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쇼팽의 진주 커프스단추도 쇼팽이 외모 치장에 얼마나 신경을 많이 썼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물품이기도 하다. 아파서 하인이 아래층으로 옮겨 주지 않으면 계단도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져 있을 때조차 옷은 제대로 갖춰 입었던 사람이 쇼팽인데, 푸치니가 했다고 전해지는 '모든 작곡가가 다 거지처럼 생겼을 필요는 없다, 이발사나 이 없애는 약 파는 사람이나 작곡가나 다 같이 좀 잘 살자'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런 까다로운 멋쟁이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이 쇼팽에게 있으니... 그 정반대의 모습을 이야기하기 위해 지하 1층으로 가서 우리의 투어를 마무리해 보자.
쇼팽의 모자상자.
지하 1층은 평범하게 쇼팽의 작곡에 집중하는 공간이다. 쇼팽 연주회가 열리는 공간도 따로 있고, 쇼팽이 작곡을 어떻게 했는지도 나와 있던 기억이 있다. 안쪽에는 쇼팽의 다양한 곡들을 들어 볼 수 있는 오디오 스테이션이 있는데, 다른 작곡가 박물관들과 다른 점이라면 쇼팽의 곡들을 장르별로 분류해 놓아서 '에튀드', '스케르초', '프렐류드', '소나타' 이런 식으로 본인이 원하는 장르만 죽어라 들을 수 있다. 연주 품질이 훌륭한 편이라던데, 나는 막귀라서 연주 사이 차이를 잘 간파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다. 자필보도 있었지만 나는 이 자필보도 그냥 흘깃 보고 넘겼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자필보에는 '바보가 바보에게'라고 쇼팽이 적어놓았다고 한다. 쇼팽의 곡을 들으면 쇼팽이 언제나 우울하고 감성에 젖은 예민한 사람일 것만 같지만 그 몇 글자만 봐도 쇼팽이 언제나 우울에 빠져있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가장 관심 있게 본 부분은 쇼팽의 영국 투어 부분이었다. 박물관에 갔을 시점 내가 쇼팽 편지 가운데 런던 여행기를 번역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흥미가 생겼다. 그래서 '쇼팽은 런던에서 뭘 했을까?' 하고 궁금한 마음으로 쇼팽의 1848년 다이어리 스캔본을 넘겨 봤는데, 처음 몇 장 정도는 무슨 부인께 피아노 레슨 해 드림, 몇 시에 저녁 약속, 연주해야 함 등등 같은 정상적인 내용이 적혀 있다가 몇 장의 낙서와 곡 스케치가 나오더니, 완전한 백지가 되어 버렸다. 중간에 지렁이 기어가듯 갈겨쓴 글씨 한두 줄, 그리고 또다시 한참 동안 이어지는 백지! 박물관의 그 어떤 물품보다도 쇼팽이라는 사람이 잘 느껴지는 물품이었다. 너무나도 1월에 다이어리를 사서 한 달 정도 열심히 써 보다가 어느 시점부터는 기록이 점점 뜸해지고, 기록하는 내용도 짧아지더니 아예 그 뒤로는 백지가 되는 내 다이어리 같았다. 음악의 치밀함에 비해서 다이어리는 너무 허술하지 않은가! 웃긴 사람이다. 진심으로.
너무나 게으른 쇼팽의 다이어리.
쇼팽의 이런 '귀차니스트' 면모는 다이어리만큼 편지를 통해서도 잘 드러나는데, 쇼팽의 많은 편지 도입부가 '편지 미루다가 이제야 써서 미안한데' '내가 원래 좀 게으른 걸 너도 알 테니까 그건 용서해 줄 것이라 믿고' 다. 심지어 멘델스존이 쇼팽에게 본인 아내를 위해서 짧은 악절 하나만 보내주면 안 될까 물어보는 편지를 받고 나서는 한참 동안 답장을 않고 있다가 무려 1년 뒤에나 미뤄서 미안하다며 답장을 해 준 적도 있다! 내가 많은 작곡가들이 스스로 게으르다고 하는 것을 봤지만 전부 자기 기준에서나 게으른 것이지 진짜 게으른 것은 아니었는데, 쇼팽은 (음악과 관련된 문제가 아닐 때는) 정말로 게으른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굿즈샵에서 쇼팽 우산을 산 뒤 바깥으로 나서는 마음이 예상보다 가벼웠다. 쇼팽의 인생이라고 하면 너무 무겁고 슬프게만 보는 사람이 많은데, 세상에 완전한 어둠도 완전한 빛도 없듯이 쇼팽의 인생에는 언제나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이 공존했다. 마치 박물관 0층은 어둡고 1층은 밝았던 것처럼 말이다. 지극히 감수성 풍부한 곡을 써내는가 하면 귀차니스트고, 국난으로 인해 마음이 어두워져 있는가 하면 유머를 잃지 않고...
쇼팽의 음악은 언제나 우울할 것만 같지만 론도 크라코비아크처럼 밝고 명랑한 음악도 있다. 쇼팽의 삶도 힘들었을 것만 같지만 즐거웠던 순간도 있다. 쇼팽은 언제나 슬퍼하고 울기만 했을 것 같지만 때로는 웃고 툭툭 털어 넘길 때도 있었다. 쇼팽의 곡은 작곡가를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듣지만, 그의 우수 어린 감성이 언제나 그의 모든 것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의 한 순간이 우리를 대변할 수도 없고, 지금의 불행이 영원한 불행을 암시하지도 않는다. '흐린 뒤 때때로 맑음', 나는 그 맑음을 믿는다. 온전한 맑음이 아니라 때때로의 맑음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그 행복의 파편을 믿는다. 그러니 올해의 크리스마스가 여러분들께 너무 우울하지만은 않았으면 좋겠다.
아, 혹시나 궁금했을 분들을 위해 이야기하자면 나는 와지엔키 공원의 쇼팽연주회를 들을 수 있었다. 운이 좋게도 하늘이 흐려지기만 했을 뿐 비는 오지 않았다. 폴란드 버킷리스트를 다 체크하고 갈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끝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에서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운이 정말, 정말 좋았다. 연주 내내 피아니스트를 내려다보는 듯한 자세의 쇼팽 조각상을 보면서 쇼팽이 마치 피아노의 수호신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어쩌면 그 하루 쇼팽이 내 버킷리스트를 지켜 주겠다고 한 시간 정도 비를 미뤄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쫄딱 젖었고, 추웠고, 배고팠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그 때때로 느끼는 행복을 위해 많은 평범한 나날과 우울한 나날을 견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2024년의 바르샤바.
그리고 비가 온 다음 날, 젤라졸라 볼라로 향하는 날은 해가 쨍쨍했다.
최종 평가
명칭: 바르샤바 쇼팽 박물관 (Muzeum Fryderyka Chopina w Warszawie) 운영시간: 월 휴관, 매일 10:00~18:00 (기념일로 인한 휴관 확인 필요) 입장료: 성인 30즈워티, 할인가 20즈워티 (수요일 입장무료) 사이트 링크: Fryderyk Chopin - The Fryderyk Chopin Museum
1. 도시 접근성: ★★★★★
공항도 있는 도시인데 접근성이 안 좋을 수가 없다. 참고로 바르샤바 공항은 도심과 상당히 가까운 편이다!
2. 도시 내 접근성: ★★★
올드타운 쪽이나 도심은 아니라서 트램이 가지 않는다. 건물이 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입구까지 걸어 올라가기가 힘들긴 하지만 그걸 빼면 버스로 무난하게 찾아올 수 있는 거리다.
3. 소장품: ★★★★
위에서 대부분의 소장품들은 이야기했는데, 사실 쇼팽과 관련된 대부분의 소장품은 국립 쇼팽 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이라서 박물관 소장품이 부족할 리는 없다. 다양한 편지, 노트, 소품, 악보 등을 소장하고 있고 상설 전시 외에도 특별 전시를 통해 편지를 로테이션 돌리는 듯하니 꼭 방문을 권한다.
4. 언어 지원: ★★★
영어 표기가 완벽하게 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한국어 지원이나 오디오가이드는 따로 찾지 못했지만 없어도 될 정도로 설명이 깔끔하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점은 위에서도 말했듯, 편지나 노트의 내용을 모두 번역해서 실어준다는 것. 심지어 상설전시가 아니라 특별전시인 경우에도 모두 영역을 해서 미디어 스테이션에서 내용을 제공해 준다. 영어만 할 줄 안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 곳이다.
5. 가성비: ★★★☆
내가 갔을 때는 각각 정가와 할인가가 25즈워티, 15즈워티 수준이라서 무척 저렴하다고 생각했는데 올해 가격이 좀 올랐다. 각각 30즈워티와 20즈워티 (약 10,500원과 7,000원) 수준으로 인상됐는데, 인상됐다고 하더라도 부족한 것 없는 박물관이기 때문에 돈을 내도 아쉬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할인가로 들어가면 가성비가 좋다고 느낄 것 같고 정가로 들어가면 조금 비싸다고 느낄 것 같다.
6. 규모: ★★★★
지하 1층부터 0층, 1층, 2층 (글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원래는 쇼팽의 여행을 위주로 다루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전시가 바뀐 듯하다)까지 모두 볼륨이 충분하다. 꼼꼼히 둘러보면 1시간 30분~2시간 정도는 걸릴 곳이다.
7. 상호작용: ★★★★
상호작용 자체는 그렇게 많지 않다. 어린이용 체험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어린이용 체험이 여기저기 꽤 풍부하고 맨 위층에는 '프레디가 미로를 탈출하게 도와주세요!' 라며 미로 찾기도 있고, 무엇보다 오디오 스테이션과 미디어 스테이션 설명이 무척 풍부하다.
8. 굿즈: ★★★☆
의문의 굿즈가 많다. 일단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쇼팽 초상화를 자꾸 프린트하는 것이 제일 큰 문제다. 당연히 쇼팽 관련 서적을 많이 팔고 있고, 쇼팽 에코백, 티컵, 그릇, 사탕, 초콜릿(?), 엽서, 노트, 쿠키, 지우개, 양말(??), 우산, 만년필 (???), 향수(?????), 그리고 모노폴리 (??????????) 등을 팔고 있는데... 정말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다 가져와봤어' 다. 만년필이나 향수... 쇼팽이 좀 고급스러운 이미지니까 그럴 수 있다 치자. 대체 모노폴리는 뭔가, 모노폴리는??????? 심지어 언니가 이야기해 준 것에 따르면 모노폴리 회사와 정식으로 계약을 맺고 상품화한 모노폴리 정품이라는데, 이게 더 의문스럽다. 진짜... 무슨 생각이지? 나는 친구에게 줄 노트와 우산을 샀는데, (노트는 아주 예쁘다) 우산이 쇼팽 악보 프린트 우산이 아니라 정말, 빨간색에 아무런 무늬 없이 '국립 쇼팽 연구소' 이거 딱 한 줄 박혀 있는 우산이라서 좀 많이 아쉬웠다. 그래도 15,000원도 안 되는 가격에 내구성 좋은 2단 자동우산을 샀으니까 그걸로 만족하고 있다. 눈이 오는 날에는 언제나 이 우산을 들고나가고 있는데, 빨간 우산 위에 하얀 눈이 쌓이면서 폴란드 국기 색이 되는 것이 기분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작곡가 박물관이면 작곡가 박물관답게 굴었으면 좋겠다.
추가로, 쇼팽 박물관은 다른 박물관들과 달리 쇼팽을 캐릭터화해서 팔고 있다. 일명 '프레디' (...) 폴란드어로는 프리체크인 것 같은데 번역은 전부 프레디다. 약 3만 3천 원의 가격에 판매 중이며... 쇼팽이 언젠가 본인이 금발이라고 했던 것을 반영한 것인지 금발로 디자인되어 있다. 쇼팽의 실제 일화에 기반해 '스케이트를 타러 간 프레디' '프레디, 인생 첫 연주회에 서다' 같은 동화들을 팔고 있다. 쇼팽 봉제인형을 가지고 싶은 분들께서는 한 번 고려해 보시기를.
"프레디".
9. 큐레이팅: ★★★★
크게는 인생사를 따라가는 수준이다. 쇼팽에게 중요한 노앙 이야기를 한쪽으로 빼놓고, 루도비카/제인 스털링/포토츠카/보진스카 등 여자 이야기만 다루는 방을 또 빼놓았다는 것 빼면 인생사 흐름을 그대로 따라간다. 하지만 각각의 사건에 대한 배경설명도 풍부하고, 각 전시품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에 박물관으로서 매우 스탠다드하다.
10. 총평: ★★★★
어느 모로 보나 모자란 것 없는 박물관. 박물관이 쇼팽스럽다
최대 장점: 꼼꼼한 설명과 수도에 위치해 있다는 점
최대 단점: 딱히 없다. 올라운더형 박물관.
추천 여부: O
쇼팽 박물관에서는 3D 투어를 지원하고 있다. 지금과는 전시 배치가 다른 부분도 일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