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리크 프란치셰크 쇼팽. 또는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 폴란드어 별명은 '프리첵'. 쇼팽은 저번에도 말했듯 나와의 역사가 꽤 복잡하다. 대한민국의 학생 절반은 어릴 적 피아노나 바이올린 학원을 다녀봤을 것이고 (또는 레슨을 받아봤을 것이고) 나도 그 절반 가운데 한 명이었다. 우리 어머니께서는 '악기는 평생의 친구'라는 말의 신봉자시고, 전에 그 말씀을 하셨을 때는 흘려들었지만 클래식을 좋아하게 되면서는 그 말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일곱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지만 처음에 피아노는 지독하게도 재미가 없었다. 하농, 바이엘, 체르니-지금 생각해도 진절머리가 난다. 체르니 100이라는 거대한 관문을 넘고 연주곡들에 들어가서야 숨통이 좀 틔었다. 지금도 체르니는 싫다. 베토벤과 살리에리의 제자이자 리스트의 선생이었던 고양이 집사 체르니는 좋은데, 체르니 100, 30, 40, 50을 떠올리는 순간 속이 울렁거려 온다.
다행히 쇼팽은 체르니가 어느 정도 쉽게 느껴질 때쯤 찾아온 기분전환이었다. 피아노 '기술' 연마에 지쳐있었다고 하면 누구나 알 것이다. 나는 연주곡이 치고 싶었다. 선율이 느껴지는 곡. 도레미파솔라시도 도시라솔파미레도로 도배되어 있지 않은 곡 말이다. 베토벤 소나타와 쇼팽 에튀드가 바로 그 기분전환이었다. 체르니 다섯 번, 베토벤 다섯 번, 쇼팽 다섯 번을 쳐야 하면 체르니 한 번 칠 시간에 베토벤과 쇼팽을 세 번씩 쳤다. 그 정도로 베토벤과 쇼팽이 매력적이었다 (또는 체르니가 싫었다). 그렇게 2년 정도를 쳤던 것 같다. 에튀드 no.10 5번 일명 '흑건'과 9번 '혁명'을 치면서 피아노와 클래식에 흥미를 붙였지만 동시에 그 두 곡, 그리고 거기에 더해 환상즉흥곡은 내 실력의 한계를 체감하게 하는 곡이었다. 감상하는 건 좋았지만 그 아름다운 곡들을 훌륭하게 연주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는 귀찮았던 거다. 내가 연습하고 싶은 만큼 연습해서는 결코 그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피아노를 치는 건 분명 즐거웠지만 유튜브에서 원곡들을 찾아들으면 그 연주와 내가 내는 소리 사이 간극이 괴로웠다. 그러나 마침 내게는 '고등학교 입학'이라는 좋은 핑계가 있었고, 나는 학업에 집중해야 한다는 명목(?) 아래 피아노를 그만뒀다. 그러니까 괴로웠지만 오래 괴로워하지는 않은 셈이다. 가끔 음악사를 뒤져보다 보면 원래는 작곡가로 대성하고 싶었지만 작곡가로서는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평론가로 돌아선 사람들이 종종 보이는데, 나도 약간 그런 느낌이 있는 것 같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취미생활에서는 내가 기울이는 노력 가지고는 절대 그 경지에 못 오를 것 같으니까 아예 작곡가들 인생을 조사하는 쪽으로 틀어버리는 느낌 말이다. 그러니까 쇼팽은... 지금도 내게 일종의 벽이다. 하지만 또 모르는 일이다. 최근 첼로, 콘트라베이스, 가야금같이 악기를 하나씩 다루는 친구들을 보면 나도 그때 피아노를 관두지 말 걸 그랬나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하고... 어쩌면 새로운 악기를 하나 시작해 볼지도 모르겠다.
쇼팽과의 긴장관계는 그 뒤로도 이어졌다. 클래식 작곡가를 좋아하게 된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쇼팽 아니면 베토벤 둘 중 한 명을 좋아하며 다른 작곡가들에게로 관심이 옮겨가는 코스를 밟는다. 음... 아니 생각해 보면 쇼팽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끝까지 쇼팽'만' 좋아하는 쪽인 것 같고, 베토벤을 좋아했던 사람들만 여기저기 다른 작곡가들로 흩어져갔던 것 같다. 둘을 같이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쇼팽이 '베토벤은 나를 불안하게 해'라는 말을 했던 것을 고려해 보면 둘을 동시에 좋아하는 사람은 적지 않을까 싶다. 베토벤과 쇼팽은 '괴팍한 예술가'와 '예민한 예술가'라는 예술가에 관한 흔한 스테레오타입을 대변하는 두 작곡가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많은 작곡가들이 괴팍하고 예민하다) 베토벤의 의지와 극복서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쇼팽을 보다 보면 '뭐 그런 거 가지고 예민하게 굴고 있어'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쇼팽을 인간으로서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는데, 쇼팽을 좋아하는 사람이 주위에 워낙 많아서 쇼팽에 대해 조사를 하다 보니 그가 생각보다 예민하고 우울한 사람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고 껄끄러움이 좀 가셨다.
그래서 폴란드 여행도, 쇼팽이 좋아서 갔다기보다는 쇼팽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좋아서 다녀온 것이긴 했다. 즐거움만큼이나 의무감이 컸던 여행이었던 셈이다. 그 의무감이 얼마나 굉장했던지 바르샤바에서 60km 가까이가 떨어져 있는 쇼팽의 생가까지 찾아갔다. 3월에 파리를 방문할 때 이미 페르 라셰즈에는 갔고, 젤라졸라 볼라로 향하기 전 쇼팽 박물관과 쇼팽 피아노 리사이틀까지 다녀왔다. 죽음과 성장은 봤으니 탄생을 볼 차례란 말이다.
젤라졸라 볼라는 전에 갔던 베를리오즈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시골 동네다. 코트 생탕드레보다 수도에는 훨씬 가깝지만. 젤라졸라 볼라에서 가장 가까운 주변 도시는 소하체프로, 젤라졸라 볼라에서 8km 정도 떨어져 있다. 소하체프 역에서 젤라졸라 볼라까지 걸어가면 약 2시간 정도가 걸리고, 자동차를 타고 가면 13분 (...) 이 걸린다. 정말 부정의한 차이다. 베를리오즈 박물관에 이어서 다시 한번 운전면허가 없음이 서러워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소하체프 역에 내리면 버스 정류장이 있는데, 1번부터 7번 버스까지 중 6번이 쇼팽 박물관으로 가는 버스다. 6번 버스 가운데서도 종착역이 '젤라졸라 볼라' 나 'Mokas'라고 표기된 버스만 가고, 다른 버스는 거기까지 가지 않으니 종착역을 잘 보고 타야 한다. '그래도 버스가 다닌다고? 그럼 금방 갈 수 있겠네! 버스로 간다고 해도 30분 이상이 걸리지는 않을 것 아니야!'라는 나의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었다.
버스정류장 그늘 아래 앉아 버스가 몇 분 뒤 오는지 표시해 둔 전광판을 본 나는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 눈앞에서 6번 버스가 떠나가는 것을 보고 '이런, 다음 차를 타야겠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광판을 보니 '다음 버스까지: 90분'이라는 믿을 수 없는 숫자가 있던 것이다. 90분이라고... 90분, 한국에서 90분을... 본 적이 없다. 광역버스조차도 60분 이상은 기다려 본 적이 없었다. 쇼팽 박물관에서는 '6번 버스 타고 오시면 금방이에요~' 이런 식으로 적어놓아서 배차 간격이 짧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베를리오즈 박물관이나 쇼팽 박물관이나, '오시는 길' 란에 버스를 적어놓을 때는 그 버스의 배차간격이 얼마인지도 적어놓는 것을 의무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배차 시간표를 찾기 어려워할 분들을 위해 여기 적어두자면 소하체프 역에서 젤라졸라 볼라 쇼팽 박물관으로 가는 버스는 오전 5시 16분, 6시 16분, 7시 21분, 8시 48분, 10시 30분, 오후 12시 07분, 1시 40분, 2시 31분, 7시 41분에 있다. 반대로 돌아오는 버스는 오전 7시 33분, 9시 15분, 오후 12시 20분, 2시 42분, (휴일 한정) 3시 54분, (휴일 한정) 5시 19분, 6시 35분, 그리고 7시 59분에 있다. 이렇게 시간표를 계속 따지는 것이 귀찮다면 몇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산책 삼아 2시간 정도 걷는다. 둘-택시를 부른다. 셋-자전거를 탄다. 넷-단체 투어를 신청한다. 개인적으로는 걷는 것 말고는 전부 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 정보도 없이 맨땅에 헤딩하듯 젤라졸라 볼라에 찾아온 내게 배차간격 90분은 예기치 못한 변수였고, 나는... 그 여름날 90분을 정직하게 기다렸다. 버스정류장에는 에어컨이 없지만 시골 작은 역이더라도 소하체프 역사 내에는 에어컨이 나오니 혹시 오래 기다릴 일이 있다면 역사 안에서 기다리는 편이 좋다. 어쨌든 90분을 기다려 젤라졸라 볼라에 도착한 나는 쇼팽박물관은, 어떤 의미에서는 베를리오즈 박물관보다도 문명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베를리오즈 박물관은 시골 '동네'기라도 했지, 쇼팽 박물관 정류장에서 내리면 고속도로 한복판에 떨어진 히치하이커 체험을 할 수 있다. 주변에 문명이 없다. 한 삼사백 미터에 한 번씩 먹을 것 파는 가게가 나오는 것 같다. 그 가게들을 제외하면 농지, 농지, 농지. 푸른 풀밭만 한참이 펼쳐져 있었다. 이런 곳이니까 쇼팽 부모님이 두 살 때 바르샤바로 이사 갔지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젤라졸라 볼라는 스카르벡 집안이 쇼팽네에게 빌려준 작은 집이었다. 원래는 스카르벡 궁이 옆에 있었지만, 쇼팽 집안과 스카르벡 집안의 웃음소리가 함께 울려 퍼지던 시간은 1834년에 끝났다. 젤라졸라 볼라의 마지막 소유자가 1834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 잊혀 있던 젤라졸라 볼라를 역사 속에서 끄집어낸 것은 러시아 5인조의 리더였던 밀리 발라키레프로, 1891년 젤라졸라 볼라에 방문한 발라키레프는 폐허뿐이라며 참담한 심경을 전했다. 3년 뒤 발라키레프는 쇼팽 기념비를 건립한 젤라졸라 볼라에 와서 마주르카, 프렐류드, 왈츠 등을 연주해 주었고 쇼팽 박물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으나 이 주장은 발라키레프 사후에나 현실화되었다. (여담이지만, 발라키레프만큼 쇼팽을 좋아했던 큐이가 그때까지 발라키레프랑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어서 둘이 같이 갔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1924년, 쇼팽 박물관은 모금을 통해 1차 세계대전 때 상태가 안 좋아졌던 생가를 고치고 박물관을 열었다. 쇼팽이 태어난 방을 잘못 추정했지만 그 정도 실수는 충분히 있는 일이다. 1933년 쇼팽 박물관은 공원을 주위에 건설하기로 결정했고, 공원 공사는 1939년에 끝나 1939년 가을에 박물관이 재개관할 예정이었다. 문제는... 우리 모두 1939년 가을이면 무슨 일이 있던 해였는지 안다는 것이다. 그놈의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건물은 부상자 수용소, 그리고 독일군 병원으로 쓰였다. 건물도 전시도 소실되었다. 쇼팽 박물관이 다시 문을 연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9년이었다. 1949년, 정확히 쇼팽이 죽은 지 100년이 되는 해의 그날이었다. 2015년 전시가 전체적으로 한 차례 수정됐고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박물관이 되었다.
젤라졸라 볼라 쇼팽 박물관은 크게 쇼팽 생가와 신관으로 나뉜다. 신관은 미디어감상실, 굿즈샵, 매표소, 세미나실 등이 있는 곳이다. '학생 한 장 주세요'라고 했는데 학생증을 요구하는 곳은 이 박물관이 처음이었다. 대부분의 행사는 이쪽 신관에서 진행하는데, 나는 행사 따위는 관심 없고 오로지 박물관 전시를 보러 온 것이었기에 표만 사고 바로 전시관, 그러니까 생가로 향했다.
입구에서 생가까지 걸어가는 길은 멀고 길다. 발 아래쪽에 깔린 스피커에서 쇼팽의 음악이 울려 퍼진다. 늘 보는 프로모션 이미지나 영상들에는 언제나 사람이 가득했는데 내가 갔던 날에는 모든 것이 너무나 조용했다. 덕분에 쇼팽 음악을 더 잘 들을 수 있던 것은 좋았지만. 쇼팽 박물관에서 쇼팽이 태어난 그 장소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공원이다. 1930년대에도 쇼팽 박물관을 둘러싼 공원에는 모금과 국가 지원으로 채워진 수많은 식물들이 심겨 있다고 한다. 음악과 꽃과 물이 어우러져 있는 시즌에 가면 특히 더 아름답다. 특히 젤라졸라 볼라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쇼팽 생가 앞을 꽉 채우고 있는 하얀 수국인데, 운 좋게도 내가 갔던 6월 17일에도 수국 꽃이 있었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공원-또는 정원이었지만 사실 그때도 베를리오즈 박물관에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감격이고 뭐고 '내가 드디어 여기에 왔구나 와 진짜 나도 독한 놈이다 더워 죽겠는데 어떻게 살아는 있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긴 했다.
이제 내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차례인데, 할 이야기가 없다. 슈베르트 박물관만큼이나 할 이야기가 없다. 그게... 일단 방도 여섯 개 정도밖에 안 되는데, 첫 번째 방은 스카르벡 집안은 어떤 집안인지를 조명하는 방이고 두 번째 방은 쇼팽이 태어난 방이라는데, 있는 는 것이라고 해 봐야 쇼팽 흉상 하나와 피아노 한 대 밖에 없다. 피아노도 딱히 쇼팽이 쓰던 피아노도 아니다. 세 번째 방은 쇼팽 집안 인테리어를 재현하듯 꾸며 놓았지만, 마찬가지로 쇼팽의 편지 한두 통과 쇼팽 아버지의 서재에서 가져온 책 한 권을 빼면 모든 것이 쇼팽과 무관한 재현용 물품들이다. 쇼팽 가족들 초상화 조금 있고, '쇼팽 집은 아마도 이랬겠죠' 하는 추측 달아서 글 써놓은 설명문 하나 있고... 정말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의 실망감이었다. 그래도 다음 방들은 좀 낫겠지, 하고 가 봤더니 낫기는 뭐가 나아. 더했다.
젤라졸라 볼라에 왔다는 건, 바르샤바에서 차로는 한 시간 기차와 버스를 병행하면 두 시간이 걸리는 이 거리를 감수하고 왔다는 건 역시 쇼팽에게 무한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 아니겠는가? 그런데 쇼팽 이야기가 이게 전부다. 나머지는 쇼팽이 아니라 젤라졸라 볼라 쇼팽 박물관 역사 이야기다. 쇼팽 박물관 이야기를 발라키레프가 처음 꺼냈고요, 이런 공사로 이렇게 바뀌었는데, 그만 2차 세계대전이 터져서... 이걸 쇼팽 이야기와 똑같은 비중을 할애해서 다뤄주고 있다. 이미 빈약한 전시품에 살짝 열받은 상태였던 나는 박물관 이야기에 전시의 절반을 할애하는 모습을 보고 그냥 전시실을 나왔다. 박물관 이야기는 재미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젤라졸라 볼라 쇼팽 박물관 박물관'이 아니라 '젤라졸라 볼라 쇼팽 박물관' 아니던가. 나는 박물관의 역사에 대한 전시는 박물관 주제 전시의 5분의 1 수준을 넘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쇼팽 박물관의 전시실 여섯 개 가운데 다섯 개가 쇼팽에 관한 것이어야 하고, 한 개만이 쇼팽 박물관에 대한 전시였다면 얼마든지 OK였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아니라니까? 절반이 쇼팽 (쇼팽 이야기인 것도 아니다. 쇼팽 가족과 쇼팽 가족과 친했던 스카르벡 가족 이야기지.) 이야기고 나머지 절반이 쇼팽 박물관 이야기라니까? 박물관 이야기는 쇼팽 박물관에서 올려둔 유튜브만 봐도 다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렇다고 전시품이 딱히 화려한 것도 아니었다. 박물관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기차까지 타면서 온 게 허망했다.
그냥 떠나려니까 박물관까지 오는 데 걸린 두 시간이 아까웠다. 고작 20분이면 다 둘러보는 생가 하나 보러 온 게 아니었단 말이다. 그래서 집 앞의 연못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정처 없이 쇼팽 집 주변의 공원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정원 조경은 앞서 말했듯이 훌륭했다. 너무 우거지면 관리가 하나도 안 되어 있는 숲 같지만, 너무 정돈되어 있으면 인위적으로 만든 궁전 정원 같은 느낌이 난다. 쇼팽 집은 일명 '모더니스트적' 정원으로 디자인되어 있다고 한다. 건축과 자연이 하나 되어 조화를 이루는 일명 '홀리스틱'한 정원이라는데 이는 전일적인, 두 가지 요소가 따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 되는 정원이라는 뜻이다. 겨울에 갔더라면 볼거리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싸늘한 잡초뿐이었을 텐데, 여름에 가서 다행이었다. 어차피 극악한 배차간격으로 인해서 바르샤바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도 없었다.
돌아다니다 보면 발라키레프의 도움으로 세운 1894년 쇼팽 기념비도 볼 수 있다. 젤라졸라 볼라에 세워진 최초의 기념비기도 했고, 제정 러시아에서 거의 용납하지 않던 쇼팽 기념비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분명 앞에 설명이 더 적혀 있었고 당시 러시아 정부 측의 반발로 인해 원래 세우고 싶던 대로는 세우지 못했고 제한적으로 세웠다는 이야기를 봤던 것 같은데, 다른 모양이 아닌 오벨리스크 모양으로 세워야 했던 이유가 있던 것 같다. 그 이유가 뭐였고 차르 정부가 원래 계획의 어느 점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서 오벨리스크로 바꾸라고 했던 것인지는 사진을 찍어 놓았는데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런. 바르샤바에서는 1879년까지 쇼팽에 관한 유일한 기념물이 성 십자가 교회에 있던 '쇼팽의 심장 여기 있다'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1880년이면 발라키레프, 큐이, 그리그, 스크랴빈까지 태어났을 시점인데 좋아하는 작곡가를 기념해 주는 곳이 하나도 없어서 서러운 오타쿠의 마음이 뭔지 너무 잘 아는 나로서는 발라키레프의 기념비 건립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덕질은 이렇게 하는 거다.
해가 넘어가 공원에 노란 그림자를 드리웠다. 공원에 있는 다리 위에 서서 흘러가는 물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관리인인지 쇼팽을 좋아하는 노신사 분이신지가 지나가셨다. 바람은 거의 없었고 비스듬한 빛 가운데 먼지 몇 송이가 떠다녔다. 아름답고 덧없는 시간이었다. 따뜻하고 나른하고 무료한 시간이었다. 공원의 쇼팽 조각상들도 이미 다 둘러본 지 오래였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이 소하체프로 가는 차가 오기를 기다리기만 했다. 잠이 올 듯 말 듯 나른한 채로 굿즈샵에 가서 친구에게 줄 엽서 몇 장을 추가로 구입했다.
그게 끝이었다. 버스를 타고 소하체프 역으로 돌아갔다. 십오 분 정도만에 바르샤바로 가는 기차가 있었다. 기차를 타고 가는 길도 조용했다. 뭔가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이게 전부다. 거창한 기대를 하고 갔다고 언제나 거창한 기대가 충족되는 것은 아니니까 어쩔 수 없었다. 원대한 계획을 세웠고 다 실행했는데, 막상 실행하고 나 보니 뭔가 부족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설령 내게는 그런 무료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날이었더라도, 두 달 뒤 만난 친구는 쇼팽 노트와 엽서를 받고 무척이나 기뻐했으니까 그거면 됐다.
12월 31일이 끝나간다. 곧 있으면 1월 1일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기행문으로서는 다소 허무했으리라 짐작한다. 어쩔 수 없다. 원래 인생이라는 것은 때때로 허무하니까. 하지만 내게는 허무하더라도, 누군가가 보기에는 나만큼 알찬 한 해를 보낸 사람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올 한 해를 또 날려버렸다고 자책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무척 열심히 살았노라고 말하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처럼 보였던 것이 젤라졸라 볼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던 나처럼 무엇인가를 위한 시간일 테니까.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 2025년은 행복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명칭: 젤라졸라 볼라 쇼팽 생가-공원 (Dom Urodzenia Fryderyka Chopina i Park w Żelazowej Woli)
운영시간: 3,4,9,10월: 10:00~18:00/5,6,7,8월: 10:00~20:00/11, 12, 1, 2월: 9:00~17:00
입장료: 성인 30 즈워티, 할인가 25 즈워티 (월요일 입장무료)
사이트 링크: Fryderyk Chopin - The Fryderyk Chopin Museum
*5~9월에는 토요일과 일요일 10시, 1시, 4시에 피아노 리사이틀이 약 100분간 진행된다. 다만 9월의 마지막 두 주 일요일에는 오후 4시 리사이틀만 진행한다.
쇼팽 편지 한 두 통에다가 쇼팽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책 하나 가지고 소장품이 풍성하다고는 절대 말 못 해주겠다. 쇼팽 박물관 역사에 관련된 문헌들은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고 설령 원본 물품들이었다 하더라도 실제 작곡가 시대에서 오지 않은 것이라면 점수를 쳐주지 않기 때문에 2점으로 마무리하겠다.
볼 게 뭐가 있다고 점수를 줄 수 있겠는가. 1점 주려다가 '공원도 박물관의 일부'라는 쇼팽 박물관의 입장을 고려해서 아름다운 공원에 0.5점을 추가로 줬고 그래도 신관이라는 것이 존재하긴 하며 때때로 쇼팽 관련 영상을 틀어주기도 한다는 '주장'을 반영해 1점을 추가로 줬다.
없다. 돌아다니면서 구경하고 음악듣고가 끝이다.
전시랄 것도 없는데 큐레이팅을 뭐 평가해 주겠는가...
10. 총평: ★★★★
어느 모로 보나 모자란 박물관. 공원이 괜찮긴 하지만 괜찮은 공원에서 산책하자고 젤라졸라 볼라까지 가야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