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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라이프치히 슈만하우스에 가다

by 채굴꾼
clara-schumann-jpg--83996-.jpg '영혼의 피아니스트' 또는 '음악의 귀부인' 클라라 슈만. (출처: 위키백과)

클라라 슈만. 또는 클라라 비크. 혹시 제목은 '슈만 박물관'인데 예상했던 슈만이 아니라 다른 슈만이 나와서 놀랐는가? 그럴 수 있다. 1819년생이니 남편보다 9살 어린 클라라는 클래식 역사에서 이름을 꽤 굵직하게 새긴 작곡가 겸 연주자 가운데 하나다. 19세기를 풍미하는 피아니스트 두 명을 고르라면 쇼팽과 리스트를 고를 수도 있겠지만, 클라라는 살롱 피아니스트에서 그치지 않고 전문 연주자가 되었으며 쇼팽에 비해서 활동기간이 훨씬 길기 때문에 적어도 연주에서는 쇼팽보다 훨씬 큰 족적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물론 클라라는 작곡에도 재능이 있었다. 재능이 없었으면 지금쯤 마리 플레옐 정도의 이름밖에는 남기지 못했을 거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며 역사학은 지금까지 대체로 묻혀 있던 소수자들의 역사를 새롭게 드러내고자 했고, 아마 클라라 슈만을 비롯한 여성 작곡가 재발굴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다만 클라라의 곡은 생전에도 꽤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때로 클라라와 같은 맥락에서 재발견이 이루어진 것처럼 묘사되는 파니 헨젤 (처녀 적 성 멘델스존) 과는 약간 결을 다르게 한다고 봐야 한다 생각한다.


클라라 슈만 (처녀 적 성 비크)의 이름을 쓸 때마다 고민에 빠진다. '클라라'라고 부르는 것부터가 이미 '슈만'이라는 이름의 디폴트값을 로베르트에게 주고 클라라를 남편의 부속물로 치는 이름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 말이다. 그렇다면 클라라 비크라고 해서 비크라 불러야 할까? 그런데 그러자니 또 비크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이름 아닌가. 그럼 비크라 부르는 것은 클라라가 선택한 남편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 아닌가. 그것이야말로 클라라의 선택을 안 존중하는 것 아닐까. 우리나라 작곡가라면 평범하게 '진은숙' 이렇게 부르면 되는 일이지만, 외국에서는 결혼과 함께 남편의 성을 따르는 문화가 있다 보니 변하지 않는 부분이 필연적으로 이름이 된다. 그래서 이름으로 부르자니까, '슈만'이라고 부르면 격식을 차리고 존중의 의미를 담은 것 같지만 '클라라'라고 부르면 너무 가깝고 친근하고 초등학교 동창 부르는 듯하지 않은가. 그러니 미리 밝혀두겠다... 맹세코 이 글에서 클라라 슈만을 '클라라'라고 칭한다 해서 클라라를 역사 속의 남성 작곡가들에 비해 낮춰 부르려는 의도는 없다. 순전히 편의를 위한 것이니 '클라라'라는 다소 낮춘 듯한 호칭을 양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슈만 박물관 이야기를 하기 전 내게 일어났던 소소한 사건 이야기를 잠깐 하고 넘어가고 싶다. 여기서 이 소소한 사건 이야기를 건너뛰었다가는 여러분이 박물관 사진의 화질에 불만을 표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2024년 6월 19일, 나는 여름방학을 맞아 독일에 놀러 온 친구와 함께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보고 왔다. 바그너의 소중한 루트비히 2세가 지었으나 결국 그 재원 낭비로 인해 파산한 성, 동시에 디즈니 성으로 유명한 그 성 말이다. 절경이었고 나는 연신 감탄했다. 고된 등산을 한 나와 내 친구는 기차를 타고 뮌헨으로 돌아왔지만, 밥을 먹을 데가 마땅치 않던 바람에 역 근처에 있는 허름한 쌀국숫집에서 저녁밥을 먹었다. 저녁밥을 먹고 나오는 길, 가게에서 나와 3분 정도가 지나고 나는 내가 휴대폰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게에 들어갈 때만 해도 분명 손에 있었기 때문에 가게에 놓고 왔겠거니 했다. 그런데 웬걸, 휴대폰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까 앉았던 자리를 종업원이 닦고 있었고 내가 뭔가 못 봤냐고 묻자 종업원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몇 번이나 가게에 들어가 확인했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가게의 손님들도 슬슬 내가 왔다 갔다 하는 것에 짜증을 내는 눈치라서 나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장마라 해도 좋을 정도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뮌헨 거리로 다시 나왔다. 친구와 나는 휴대폰을 찾아 헤매고, 내 휴대폰 위치추적이 가능했던 몇 시간 동안 절박하게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고, 뮌헨 경찰서에도 찾아갔다. 경찰서에서는 휴대폰의 고유번호를 알지 못하면 단순히 기종으로는 신고를 접수할 수 없다며 IMEI 번호를 알아오라 했지만, 내가 IMEI 번호를 알 턱이 없었다. 나중에 어머니가 IMEI 번호를 온 집을 뒤져 알아내 주긴 하셨지만, 그때는 이미 번호를 받은 친구가 자기 호텔로 돌아가 버렸던 터라 나는 만하임에서 3시간 거리인 뮌헨에 아는 사람 한 명도, 돈 한 푼도 (카드를 휴대폰과 같이 들고 다녔기 때문에 몽땅 같이 잃어버렸다), 기차표도, 휴대폰도 없이 남겨졌다.

GQr22--W8AAzJTU?format=jpg&name=large 휴대폰을 잃어버리기 전 마지막으로 찍었던 사진... 보니까 또 눈물이 난다. 이때 휴대폰을 잃어버리지만 않았어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박물관까지 갔을 텐데...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뮌헨 역사로 돌아가서 만하임으로 가는 다음 열차를 알아보자 새벽 세 시 기차였다. 뮌헨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유로 2024로 활기를 띠던 역은 추웠고, 더러웠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부활절 휴가 때 기차가 이상한 곳으로 가 버리는 바람에 체코의 이름 모를 시골 역에 낙오됐던 날에도 나는 뮌헨역에서 밤을 새웠었다. 뮌헨이랑 나랑은 상성이 안 좋은 모양이다. 비가 와서 축축한 데다가 화장실은 유료화장실뿐이었고, 맥도널드에서 추위를 피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으나 나는 맥도널드에 갈 돈조차 없었다. 처음에는 무서웠던 마음도 슬슬 피로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만하임으로 돌아왔을 때쯤에는 얼떨떨했으나 두렵지는 않았다. 일말의 희망은 가지고 있었지만, 휴대폰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버린 지 오래였다. 기숙사에 돌아가 IMEI 번호를 확인하고, 만하임 경찰서에서 절도 신고를 접수했다. 원래 단순 분실신고가 될 뻔했으나, 카드사에 들어가 카드 사용 내역을 조회하자 도둑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뮌헨 역 맥도널드에서 내 카드로 약 2만 원어치의 식사를 결제한 내역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절도로 신고가 접수될 수 있었다. 그 카드의 원래 주인은 맥도널드에서 6유로짜리 부리또 롤 하나 사 먹을 돈이 없어서 떨고 있었는데, 도둑은 13유로나 긁었다니. 유럽 여행을 하며 가장 화가 치밀어 올랐던 순간이었다. 한국에서도 가 본 적 없던 경찰서를 독일에서 가게 되다니, 신기했다. 드디어 나도 유럽 여행하면서 썰 풀 거리가 하나 생겼구나 하는 생각마저 태평하게 들었다.


사실 휴대폰을 잃어버린 건 그렇게까지 큰 문제는 아니었다. 기숙사에만 갇혀 있으면 와이파이 쓰면서 연락도 다 할 수 있고, 휴대폰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은 본인인증정도였다. 문제는 현금이 땡전 한 푼도 없다는 것이었다. (땡전 한 푼까지는 거짓말이긴 하다. 한 30유로 정도 있었다) 심지어 교환학생을 와서 만났던 학교 선배들도 6월 말, 이미 학기가 끝난 바람에 모두 만하임이 아니라 각자 여행지로 흩어져 있어 내게 돈을 뽑아줄 수 없었다. 천만다행으로 사정을 이야기하자, 드레스덴에 어학연수를 와 있던 친구가 라이프치히에서 만나 돈을 뽑아 주기로 했다. 원래 예정되어 있었던 라이프치히 여행이었지만, 이제 사력을 걸고서라도 라이프치히에는 어떻게든 가야 하는 셈이었다. 라이프치히 지도 스크린샷을 찍어 놓고, 티켓도 전부 스크린샷을 찍어 놓고, 때로는 인쇄도 하고, 아이패드와 노트북까지 꽉꽉 챙겨 나는 사상 초유의 휴대폰 없는 4일짜리 라이프치히-츠비카우-할레잘레-바이마르 여행을 떠났다.


2024년 6월 라이프치히에 도착했을 때의 날씨는 처음 라이프치히에 도착했던 2022년 6월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도시의 분위기는 무척 달랐다. 2022년 6월 라이프치히는 오손도손하고 아기자기한 중간 정도 크기 도시로 느껴졌다면, 2024년 라이프치히는... 시끄러웠다. 뜨거웠다. 북적였다. 라이프치히로 가는 기차에 빨간색과 하얀색 체크무늬 티셔츠를 입은 사람이 수상하게 많이 보였다. 라이프치히 역에 내리자 그 사람들은 모두 내려 한 방향으로 뭐라 뭐라 크게 외치며 걸어갔다. 독일어는 아니었다. 독일에 6개월을 지내다 보니 억양으로 독일어인지 아닌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의문은 그 사람들이 부부젤라와 국기를 들었을 때서야 풀렸다. 라이프치히 역사 안에는 거대한 유로 2024 환영 게이트 같은 것이 있었다. 하필 와도 라이프치히가 축구로 미쳐 돌아가는 시즌에 온 것이다. 나의 살기 좋고 아담한 라이프치히여, 안녕. (아담하다는 말도 동독 제2의 도시에 대고 웃기긴 하지만, 내게는 그렇게 느껴지는 곳이다.)

fan-zone-leipzig-croatia-v-italy-group-b-uefa-euro-2024.jpg?s=1024x1024&w=gi&k=20&c=i_yQ8cxjgnz2ksNLtsDsIu8XPN9K-YRMMF2RJ5FonM8= 그러니까 나는 대충 이런 풍경을 하루 종일 보고 다닌 거다. 2024년 라이프치히 유로 2024 크로아티아-이탈리아 경기 응원을 나온 분들이 잔뜩이었다. (출처: 게티이미지)

다행히 내가 가는 방향은 그 사람들이 가는 방향과는 달랐다. 이제 핸드폰 지도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표지판과 내 감에 의존해 내가 라이프치히에서 지도 없이도 찾아갈 수 있는 유일한 건물로 향했다. 바로 멘델스존 박물관 말이다. 멘델스존 박물관은 2월에 라이프치히에 갔을 때도 휴대폰이 잠겨버리는 바람에 휴대폰 없이 찾아갔던 곳이었다. 또 휴대폰 없이 찾아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잠시 멘델스존 박물관 앞마당에서 숨을 돌린 뒤, 앉아서 지도 속 스크린샷을 확인해 봤다. 멘델스존 박물관에서 약 10분 거리에 슈만 박물관이, 5분 거리에 그리그 기념관이 있었다. 오늘은 그 두 곳 가운데 라이프치히 슈만 박물관으로 먼저 가 보자.


멘델스존 박물관이 제법 대로에 가까운 곳에 있던 것과 달리, 슈만 박물관은 완전히 주거 지역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쨍쨍 내리쬐는 해 아래 핸드폰 없이 헤매는 길치라는 악조건을 달고 나는 쓰레기장과 학교 주변을 몇 번이나 빙빙 돌았다. 여름의 쓰레기장 악취란! 내가 길을 처음부터 제대로 찾았더라면 맡을 일 없는 냄새였지만 어쩌겠는가, 휴대폰이 없는 것을. 장을 보고 돌아오는 독일 사람들 몇 명이 스쳐 지나갔다. 그 사람들 눈에는 커다란 가방을 메고 낑낑대는 동양인이 얼마나 이상해 보였을까. 뭐 구경할 것도 없는 주거지역에 뭐 하러 왔대 싶었을 것이다. 끝없는 신호등 지옥을 마음을 졸이며 건넌 뒤, 또 한참을 빙빙 돌다 마침내 파란 표지판을 발견했다. 슈만 하우스! 바로 옆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 같은 것이 어렴풋이 들렸는데 여기가 맞단 말인가? 맞았다. 문을 열고 1층 (한국 기준 2층)으로 올라가자 매표소가 나왔다.


라이프치히 슈만 박물관은 로베르트와 클라라가 라이프치히에 살던 시절 머물던 집을 개조한 것이다. 2019년, 클라라 슈만 탄생 200주년을 맞아 개관한 박물관은 2024년에도 잘 관리되고 있었고 새것 같아 보였다. 사람이 너무 없긴 했지만. 개관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박물관은 로베르트보다는 클라라 슈만의 인생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로베르트는 고작 1840년부터 1844년까지 라이프치히에 잠깐 머물렀을 뿐이지만 클라라는 1819년 태어나서부터 1844년까지 라이프치히가 집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슈만 이야기는 츠비카우에서 실컷 할 테니, 라이프치히에서는 클라라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스크린샷_14-1-2025_185246_my.matterport.com.jpeg 살롱은 이렇게 생겼다. 가장 안쪽 노란색 원이 멘델스존 의자. (출처: 슈만박물관 공식 홈페이지 버츄얼 투어)

표를 사고 가장 처음 보이는 방으로 들어가면 푸른빛 의자 몇십 개가 피아노 앞에 놓여 있다. 로베르트와 클라라의 살롱을 재현한 듯했다. 그 가운데 의자 몇 개에는 하늘색 덮개가 씌워져 있고, 클라라와 로베르트의 인생에 중요했던 친구들 이름이 몇 개 적혀 있다. 일단 내 무거운 가방을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가 적힌 의자 바로 옆 의자에 놓아두었다. (감히 멘델스존 의자 위에 내 미천한 짐을 놓아두기에는 멘델스존이라는 이름은 내게 너무 소중하다.)

WIN_20240624_21_49_17_Pro.jpg 노트북으로 찍은 것 치고는 꽤 잘 찍었다. 멘델스존 의자.

살롱 왼쪽의 방은 클라라의 유년기와 성장기를 다룬다. 얼굴이 비치는 매끄러운 검은 벽에는 독일어 글자만이 잔뜩 적혀 있었다. 오디오가이드를 QR코드를 통해 들을 수 있었지만 핸드폰을 도난 맞은 바람에 오디오가이드마저 들을 수 없었다. 뭐, 다행히 내게는 이미 클라라 슈만 평전을 통해 얻은 클라라의 인생에 관한 배경지식이 잔뜩 있었다. 클라라는 1819년 프리드리히 비크와 마리 비크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래로 동생이 몇 있던 것 같지만, 클라라가 그 형제들과 얼마나 친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비크 부부는 곧 별거하게 되었고, 클라라는 다섯 살 때까지 어머니와 함께 지내다가 다섯 살이 되자 아버지에게로 보내졌다. 심리적 문제였을까? 네 살이 되도록 클라라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동안 비크 부부는 클라라에게 청각장애가 있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언어보다 음악을 먼저 배운 클라라는 이후에도 말보다 음악으로 소통하는 것을 훨씬 편하게 생각했다. 말에는 재능이 하나도 없고 글에만 재능이 많았던 로베르트와 꽤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비크는 클라라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봤고, 좋게 말하자면 클라라를 교육시켰으며 나쁘게 말하자면 학대했다. 클래식 음악 역사를 살펴보면 모차르트부터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아주 나쁜 선례를 남겼다) 베토벤, 리스트까지, 재능을 알아봤지만 그 재능을 키우는 데만 몰두하다가 기본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수준의 교육까지 등한시해 버리는 '신동'의 사례가 종종 나온다. 클라라도 이 불운한 '신동' 가운데 하나였다. 클라라는 열한 살 때 이미 공개연주회에 데뷔했고, 프리드리히 비크는 소중한 딸아이와 유럽 전역을 누비며 돈을 쓸어 담았다. 정확히는 프리드리히 비크가 쓸어 담았고 클라라에게는 가끔씩 그 수익 한두 푼 정도와 선물 조금을 주는 게 전부였지만. 클라라는 점점 나이를 먹어갔지만, 또래 친구도 없었으며 학교에서 응당 받아야 하는 교육조차 받지 못한 채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습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프리드리히 비크는 클라라에게 일기를 쓰도록 시켰는데, 그 일기 내용을 매일같이 살펴보며 클라라의 일기를 첨삭하고 때때로는 클라라의 일기장에다가 1인칭으로 자신이 클라라인 양 내용을 적어 넣기까지 했다. 또 문을 잠글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이후 열다섯 살이 된 클라라가 로베르트와 연애를 시작하자 연애를 맹렬히 반대하며 편지를 감시했던 것도 빼놓을 수 없겠다. 비크는 클라라에게 상습적으로 '내가 아니면 넌 아무것도 아니고 금방 잊힐 것이다' 같은 언어적, 정서적 학대를 했던 것으로 보이며 클라라에게 땡전 한 푼도 주지 않고 클라라를 집에서 내쫓기도 했다. 이미 연주회 수익을 그렇게 떼어먹은 것만 해도 경제적 학대인데, 나중에는 클라라에게 자신이 해 준 바이올린 레슨비를 토해내라는 식으로 굴기까지 했던 모양이다.


https://my.matterport.com/show/?m=dY4jL8us6Jp&ss=23&sr=-2.72%2C.24&tag=WQItD8voDAg&pin-pos=9.09%2C1.21%2C-3.21 (클라라의 인생을 그림으로 요약한 영상으로 박물관 버츄얼 투어에서 제공된다. 설명이 정말 잘 되어 있다.)


... 박물관에서는 이런 학대의 내용을 오디오가이드로 설명해 준다. 오히려 벽에 붙어 있는 내용은 번역기를 돌려 보자 클라라가 얼마나 프리드리히 비크에게 감사했를 표했는지나 다루고 있다. 학대 내용을 좀 더 다뤄야 한다고 생각한다. 벽에 붙어 있는 설명만 보면 클라라의 '남들은 우리 아빠가 나를 학대했다고 생각하던데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내 음악에 대한 사랑과 내 피아노 실력은 전부 아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다, 아빠가 좀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긴 했지만 그 정도는 천재를 키워내려면 당연히 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내가 젊었을 때 한 말 때문에 사람들이 아빠를 많이 오해하는 것 같아서 슬프다! 그때 내가 한 말이 실수였다'라는 주장만 보고 실제 비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없다. 특히 클라라의 '나는 사람들이 우리 아버지가 내게 가했다는 가혹행위에 감사한다'는 말은 정말 화룡점정이다... 이것만 보면 비크가 기껏해야 레오폴트 모차르트 수준의 통제만 한 것 같아 보인다. 그러니까 여러분들께서는 꼭 오디오가이드를 들을 수 있는 휴대폰을 지참해 가시기를 바란다. 아니, 아내가 남편의 통제광 기질로 인해서 집을 나가고 별거와 이혼을 19세기 초반에 감행했다고 한다면 남편이 문제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가? 프리드리히 비크는, 내가 보기에, 베토벤과 요한 슈트라우스 1세를 뛰어넘는 인간쓰레기다. 피아노 교육 시켜줬으니 됐다, 음악 잘 가르쳐줬으니 됐다? 음악이 아무리 지고한 존재라고 해도 천부인권의 고귀함을 어떻게 음악이 뛰어넘는다는 말인가! 정당화할 수 없는 학대와 폭력을 보고도 프리드리히 비크가 그래도 교육은 잘 시켜주지 않았나? 그럼 된 거 아닌가 라 의문을 품고 있다면 당장 이 글을 그만 봐주기를 바란다.


작은 방 한구석에는 클라라의 손 모형이 있다. 손 모형의 손가락을 톡 건드리면 음이 하나 재생되고, 클라라의 손 위에 손을 포개면 클라라가 어린 시절 작곡했던 곡이 흘러나온다. 클라라의 손을 만진다니. 부드러운 살갗 같은 촉감이었으면 그것도 그것대로 기분이 나빴겠지만 딱딱하고 차가운 나무를 만지니 기분이 미묘했다. 약간 섬칫하기도 했다. 손 모형이다 보니 손목만 잘린 채 설치되어 있는데, 박물관에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클라라의 손은 이렇게 차갑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래도 손 두 개가 포개진 형태를 보니 아주 약하게 클라라와 실제로 연결되는 기분이 느껴지긴 했다. 클라라의 곡은 언제나처럼 편안하고 좋았다. 로베르트의 곡보다는 좀 더 아카데믹한 초기 습작이라는 느낌이 확 왔다. 과연 멘델스존의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나고 자란 아이다운 아카데믹함이었다. (딱히 비난이 아니라는 점을 미리 말해둔다. 나는 그 아카데믹함을 별로 싫어하지 않는다. 제일 좋아하는 작곡가들 가운데 브람스랑 멘델스존이 들어간다.) 초상화 속 빨간 옷을 입은 클라라와 시선이 마주친다. 클라라의 초상화는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저 어린아이가 친구도 없이 악기 연습만 해야 했다니. 누군가는 천재는 범인과는 달라서 그것만으로도 행복했을 것이라 말하지만,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음악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은 아예 알지 못해서 음악의 길이 행복하다고 믿었던 것일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프리드리히 비크는 클라라에게서 선택의 자유를 뺏어간 셈이다. 클라라가 행복하다니 됐다, 이번만큼은 그런 말로 퉁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나마 베토벤 아버지는 애를 패고 돈만 가져갔지, 클라라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는 '가스라이팅'의 정의를 보여줬고 클라라가 말년까지도 아버지에게 부채감과 감사함을 느끼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봤을 때 어느 정도 성공하기까지 했다. 착잡하다. 현대의 착취당하는 아이돌들과 너무 닮아 있는 모습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주물럭거리면서 자신의 마음대로 조종한다니... 심지어 처음에는 결혼반대로 인해 아버지와 연을 끊었던 클라라가 나중에는 다시 아버지와 화해한다니... 언제나 화해와 용서가 능사일까? 때로 누군가는 용서받지 못할 짓을 한 것 아닐까... 모르겠다. 어려운 일이다. 너무 많은 폭력이 '그건 가정의 문제' '그건 그 아이와 부모 사이 특수한 관계의 문제'라는 말로 정당화되지 않았는가 생각해 보게 되는 방이었다.

14-Schumann-Haus-Klanginstallation-Claras-Hand-von-Erwin-Stache-bildlexikon-leipzig-stadtgeschichte-foto-1.jpg 박물관의 '클라라의 손'. 저렇게 톡 건드리면 음악이 재생된다. (출처: Bildlexikon LEipzig)

비록 나중에 비크와 화해를 하게 되긴 하지만, 적어도 슈만과의 결혼을 기점으로 클라라의 삶에는 약간의 선택권이 주어졌다. 그 단적인 도약을 보여주는 방이 클라라의 어린 시절과 반대쪽에 있는 클라라의 연주여행 방이다. 동화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모든 부부가 그렇듯 로베르트와 클라라도 문제가 꽤 있었다. 클라라가 살아 있을 당시 로베르트는 그리 유명하지 않았고 가계를 책임지는 것도 클라라였다. (우스운 일이지만, 그 클라라가 벌어 온 돈을 살림 각각에 분배하는 것은 로베르트의 몫이었다. 왜 클라라가 벌어온 돈인데 경제권은 로베르트한테 있는 건가?) 로베르트는, 19세기니까 더더욱 그랬을 텐데, 아내와 자식도 제대로 먹여 살릴 수 없는 본인의 무능함에 자주 절망했던 것 같다. 클라라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지 아닌지와 별개로 그냥 자존감이 떨어져 버린 거다. 이는 살롱의 오른쪽 방에서 다룬 클라라의 러시아 연주여행 멀티미디어에서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다. 앞서 뒤셀도르프 슈만 박물관에서 멘델스존 이야기를 할 때 잠깐 언급했듯, 클라라는 (로베르트가 아니라) 멘델스존과의 상의 후 러시아로 향했다. 러시아에 간 슈만 부부 둘 가운데 클라라는 제대로 된 대접을 받았지만, 로베르트는 거의 아무도 알지 못했다. 원래도 음악 발전이 늦은 러시아인데, 로베르트처럼 덜 유명한 데다가 너무 최근 것인 음악을 알 턱이 없었다. 로베르트는 자꾸만 '패싱'당하는 본인을 보고 자격지심과 괴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자격지심을 느낀다는 사실에 또 괴로워했다. 클라라의 작곡이나 연주활동을 반기지 않았던 것도 그렇게 보면 클라라가 하는 행동이 '여성답지 못하다'가 아니라 '내가 돈을 벌어오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당신이 돈을 벌어와야 하는 게 싫다'에 가까운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여전히 슈만이 '돈은 남자가 벌어와야 한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뜻이 되겠지만 말이다. 이 갈등은 로베르트와 클라라의 결혼생활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갈등인 듯하다. 프리드리히 비크가 슈만 부부의 결혼을 막기 위해 슈만을 비난하는 장문의 탄원서를 드레스덴 궁정 법원에 보냈을 때 맞는 말이 하나 있긴 했나 보다. 클라라는 예술가의 혼을 지닌 아이로 길러졌다는 것. 슈만이 더 잘 나갔더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둘 다 하고 싶은 대로 잘 먹고 잘 살고 슈만도 자격지심을 느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클라라는 로베르트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예술가로서 활동도 하고 싶어 했고 그 욕구는 슈만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 같다.

스크린샷_14-1-2025_19433_my.matterport.com.jpeg 클라라의 핀쿠션! (출처: 슈만하우스 버츄얼 투어)

물론 이건 정말 둘 사이의 이야기니 내가 넘겨짚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슈만 부부에 대한 분석은 이미 차고 넘치니 말이다. 둘이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다고 이야기하려는 것도 아니다. 일단 뭐든 간에 통제광 프리드리히 비크에게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커다란 권리개선이다. 박물관에 있는 유일한 진품 소장품인 클라라의 핀쿠션에는 Clara Schumann의 이니셜 CS가 박혀 있다. C와 S가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 클라라에게 '클라라'와 '슈만'이 얼마나 불가분의 관계였는지가 느껴지는 것만 같다. 내 과대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클라라 본인이 슈만이라는, 새로이 선택한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C만 적어놓았어도 됐을 테니까 말이다. 시침핀 외에도 캐비닛에는 다양한 생활감 있는 물품들이 들어 있지만, 실제 클라라가 쓰던 것은 없다. 캐비닛 오른쪽에 들어 있는 드레스도 클라라가 원래 입던 것이 아니라 클라라가 입었을 법한 옷을 재구성해서 만들어둔 것이다. 클라라가 소장했던 의류 중 상복이 아닌 것은 뒤셀도르프에서 봤던 백조털 망토뿐이다. 그렇게 통상적으로 여성적이라 불릴 법한 것, 평범한 가정집의 어느 중산층 여자라도 가지고 있었을 물건들과 대조되는 것이 바로 벽의 광활한 클라라의 연주여행 지도다. 서쪽 끝부터 러시아까지, 때때로 '그 시대에 작곡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 작곡가에게 '슈퍼우먼'이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에 거북함을 느끼는 나지만 클라라에 한해서는 정말 맞는 말이라고 동의해 줄 수 있다. 러시아 투어에서 멘델스존의 '무언가' 중 '봄노래'를 연주하고, 죽을 때까지 남편의 곡을 알리고, 보수파의 거두 브람스를 키우고, 바그너를 욕하고, 연주하고, 가르치고, 1878년부터 죽을 때까지는 프랑크푸르트 모 음악원의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 교수로 재직했고, 그러면서 자녀 여덟을 어떻게든 기르고 그 가운데 몇의 죽음과 몇의 정신병력으로 인한 고생을 목도했다. 우리와 다를 것 없는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강인할 수 있는가. 대체 어떤 힘으로 남편이 죽고도 40년을 더 버틸 수 있던 걸까. '사랑 후에 오는 것들', 클라라 슈만의 너무나 길었던 인생에 부제를 붙인다면 그렇게 붙이고 싶다. (그리고 사랑 후에 요하네스 브람스와의 사랑이 왔다는 이야기는 절대 하고 싶지 않다.)

003.jpg 클라라의 여행경로! 덴마크부터 러시아까지... 정말 대단하다. (출처: 슈만하우스 라이프치히)

남은 전시실들은 체험형 전시실이다. 하나는 평범하게 클라라와 로베르트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미디어 스테이션이고, 하나는 '나만의 음악을 만들어 보아요' 전시실인데, 동그란 무늬가 그려진 카펫의 원 위에 서면 악기 또는 악기가 아닌 것으로 만든 규칙적인 소리가 들린다. 어떤 '게임'을 하고 싶은지 선택할 수 있는데, '오디오에서 들려준 소리와 바닥에 들어온 불빛을 따라서 똑같은 소리를 내 보세요!'라든가 '선택한 악기 (이는 때로 그냥 발을 구르는 소리처럼 음악을 만드는 악기 소리가 아니라 생활소음일 수 있다)를 가지고 이 음악을 연주하면 어떻게 될까요?' 같은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나름 재미있었지만 혼자뿐인 박물관에서 스물이 넘은 성인 여성이 하기에는 조금 부끄러웠던 바람에 내용만 확인하고 바로 마지막 방으로 향했다.

WIN_20240624_22_11_33_Pro.jpg 슈만 하우스의 Klangraum. 소리 실험실 정도 되겠다.

마지막 방은 로베르트와 클라라의 인생에 중요했던 몇 개의 테마를 주제로 하는데, 특정 키워드 (예를 들어 '아이' 나 '사랑)가 적힌 서랍을 열면 그에 맞는 음악과 함께 영상이 재생된다. 영상은 물이나 바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 풀밭, 꽃잎처럼 추상적이고 안타깝게도 전부 독일어라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영상에 뭐라 뭐라 클라라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글을 자막으로 달아 주는데 알 수가 없으니 원. 독일어 못하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싶었다.

17-Schumann-Haus-Ausstellung-Experiment-Kuenstlerehe-bildlexikon-leipzig-stadtgeschichte-foto-1.jpg 라이프치히 슈만하우스의 마지막 테마전시실. 정식 명칭은 '두 예술가의 결혼 실험실'이었을 것이다. (출처: Bildlexikon Leipzig)

'아이' 섹션을 잠깐 보고 있던 중 밖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영상에서 나는 건가 했지만 '사랑' 같은 다른 서랍을 열어서 영상을 바꿔도 여전히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났다. 전시실 바깥으로 나가자 복도 끝에 문이 한 개 더 있었다. 투명한 문이었는지 반투명한 문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생각했던 것보다 박물관이 작았기에 혹시 옆 방도 박물관인가 하고 문을 열자 아이들이 잡기놀이를 하는 중이었는지 내 존재를 무시하고 쏜살같이 복도 반대편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아, 옆이 초등학교구나. 돌아와서 검색을 해 보니 그 초등학교가 '독립 초등학교인 '클라라 슈만' 초등학교'라고 나왔다. 독립초등학교가 뭘까? 대안 학교 같은 것일까? 그건 모르겠지만, 슈만과 클라라 부부가 살았던 집의 조용함과 과대비되는 아이들의 활기가 느껴졌다. 하기사 아이가 여덟이었던 부부니까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려야 마땅한 집이었겠지! 어쨌든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는 문을 조용히 닫아주었다. 유로 2024로 완전히 다른 도시처럼 느껴졌던 라이프치히는, 음악가와 아이들의 웃음소리라는 두 가지 공통 분모로 2022년의 라이프치히와 내 머릿속에서 통합되었다.


최종 평가

스크린샷_14-1-2025_18440_www.google.com.jpeg 라이프치히의 우글우글한 작곡가 박물관으로 인해 확대 지도다. 왼쪽부터 바흐, 멘델스존, 그리그, 슈만 박물관.
명칭: 슈만하우스 라이프치히 (Schumannhaus Leipzig)
운영시간: 월-금 14:00~18:00, 토-일 10:00~18:00
입장료: 성인 7유로, 할인가 5유로
사이트 링크: Clara and Robert Schumann's Home - Schumann-Haus Leipzig

1. 도시 접근성: ★★★★

라이프치히의 접근성은 맨 처음 바흐박물관에서 다루었으니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2. 도시 내 접근성: ★★★

주거지역에 있는 데다가 건물에 박물관 표시가 크게 되어 있지 않아 생각보다 찾기 까다롭다. 하지만 역에서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고, 버스를 타지 않고도 걸어서 25분 정도면 갈 수 있다. 참고로 멘델스존하우스와는 도보 10분 정도 거리다.


3. 소장품: ★★

진품은 아까 본 클라라의 시침핀 하나뿐이니 기대하지 말기를. 대부분을 미디어 전시로 때웠고 클라라의 물건들을 '상상해서 재현해 보았습니다'가 더 많다.


4. 언어 지원: ★★

내가... 영어만 잘 지원해도 3점을 준다. 근데 군데군데 독일어만 지원되는 부분이 있는 데다가, 오디오가이드를 텍스트로 제공하지 않고 오직 음성과 영상으로만 제공해 주기 때문에 이어폰까지 있어야 한다. 살롱의 '슈만 부부 친구들의 의자'에는 각 인물을 설명해 주는 오디오가이드가 동반되어 있는데, 멘델스존 파트를 들어보았으나 (역시 영어 버전도 없고 독일어 텍스트도 없다. 오직 독일어 음성뿐이다) 내 비루한 독일어 실력으로는 30% 정도밖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5. 가성비: ★★

할인받으면 5유로, 할인 안 받으면 7유로인데... 이보세요, 2층짜리 하이든하우스가 할인 안 받고도 5유로였어요. 미디어가 많아 유지비가 많이 들 것이라는 점은 알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7유로는 사기꾼 아닌가?! 멘델스존 박물관 (규모 3층, 층당 면적 슈만하우스 약 3배) 이 할인받으면 8유로라고!


6. 규모: ★★

미디어 영상이 많아서 1점을 줄까 하다가 2점을 주었다. 그러나 그 설명을 다 들어도 30분이면 넉넉하게 관람 끝난다.


7. 상호작용: ★★★★

클라라의 연주여행 영상이 있고, 영상으로 재현한 클라라의 러시아 투어 중 멘델스존 '봄노래 연주'가 있고, 가끔 콘서트도 하고, 클라라의 손 (...) 위에 손을 겹쳐 음악을 들어 볼 수도 있고, 어린이용 '음악 만들기 체험실'도 있고. 생각해 보면 되게 다양하다. 최근 만들어진 박물관다운 상호작용이다.


8. 굿즈: ★

로베르트와 클라라 옷 입히기 인형이 데스크에 있었는데, 그 못난이 옷 입히기 종이인형이 제일 갖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구입할 수 있는 곳은 찾지 못했다. 작은 배지가 있던 것 같고, 클라라의 마들렌 (?)처럼 페이스트리류를 몇 종류 팔고 있었다. 정말 배가 고파서 한 개 사 먹고 싶었지만 슈만하우스 입장료를 내고 나자 수중에 10유로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다... 혹시 라이프치히 슈만하우스에 가는 분이 계시다면 이 페이스트리 후기를 부탁드린다.


9. 큐레이팅: ★★★★

은근히 큐레이팅 점수는 높게 주고 싶다. 다양한 전시방식을 사용해서 지루하지 않았다가 가장 큰 장점이다. 특히 친구 한 명 한 명을 액자를 걸어놓고 설명을 붙이는 방식으로 고리타분하게 갈 수도 있었는데, 의자에 친구들의 자리를 각각 마련해 준 큐레이팅을 높이 평가한다. 또 클라라 손도,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10. 총평: ★★

로베르트 슈만 팬, 비추천. 클라라 슈만 팬, 뒤셀도르프를 갈 여건이 안 된다면 추천. 그러나 뒤셀도르프를 갈 수 있다면, 그냥 뒤셀도르프를 추천. 입장료도 그쪽이 더 싸다.

최대 장점: 클라라에게 집중된 박물관의 주제와 심심하지 않은 상호작용

최대 단점: 부정적인 쪽으로 미친 가성비와 불친절한 오디오가이드

추천 여부: X, 개인적으로 그리 추천하지 않는다. 하지만 '로베르트 슈만'이 아니라 '클라라 슈만 박물관'이라는 점에 주목해서 평가하면 △정도는 줄 수 있다.


25화 예고: '역시 시간이 부족하셨던 건지... 거리가 너무 멀었던 건지... 북쪽으로는 못 가셨군. 나는 노르웨이나 핀란드에도 관심이 많은데...' 아쉬워하지 마시기를! 놀랍게도 라이프치히에는 북쪽나라에서 온 솜사탕 같은 눈송이의 흔적이 남아 있다. 멘델스존의 음악원에서 진절머리 나는 몇 해를 보냈던 에드바르 그리그의 출판사 문을 두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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