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적어도 영국으로 이민 가기 전 그의 이름은 그랬다. 사생활 관리가 철저하고, 배짱도 두둑하고 지갑도 두툼했으며 식욕도 왕성했던 그는 뉴턴조차 손해를 봤던 주식 시장에서 이득을 봤을 정도의 탁월한 사업가였다. 그의 대담함은 어디서 온 걸까? 독일 한구석의 소도시에서 살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은 아닐 것 같고, 그냥 타고난 기질이었던 걸까? 일평생 40개가 넘는 오페라를 작곡했던 그의 승부사이자 사업가 기질은 헨델의 가장 큰 무기였고 동시에 가장 큰 위기를 안겨다준 특성이기도 했다. "Go big or go home" (크게 되든가 집으로 가든가)라는 말을 그대로 보여준 인물 헨델은 집에 가는 대신 대성하여 할레잘레의 자랑이 되었다.
할레잘레는 라이프치히 중앙역에서 지역열차를 타고 30분 정도 가면 나오는 작은 도시이다. 유로 2024로 라이프치히의 모든 호텔 방이 꽉 차버리는 바람에 내가 호텔을 잡은 곳이기도 했다. 어차피 도이칠란트 티켓이 있어서 고속열차를 제외한 모든 열차는 다 무제한으로 탈 수 있었으니 할레잘레에서 잔다고 해서 손해 보는 것도 별로 없었다. 오히려 대도시 라이프치히에 비해 방값도 쌌다. 바흐가 40년을 근무했던 도시와 헨델이 어린 시절 15~20년을 보냈던 도시가 고작 기차 30분 거리라는 점이 묘하다. 심지어 바흐와 헨델은 동갑 아니던가. 괜히 음악의 아버지 음악의 어머니 이렇게 세트로 묶어 부르는 게 아닌가 보다.
사실 이 여행을 라이프치히에서 시작하고, 츠비카우에도 다녀오고, 바이마르까지 다녀오고 하다 보니 도시에 대한 인상이 별로 없다. '잠을 잤던 거점 도시'라는 느낌이 지배적이라고 해둘까. 내가 해가 떠 있는 시각의 할레잘레를 볼 수 있던 것은 (아주 이른 아침을 제외하면) 단 하루뿐이었다. 그날이 바로 내가 할레잘레 헨델 박물관에 갔던 날이었다. 이미 해가 느지막이 넘어갔고 도시 전체가 황금빛 밀밭 필터를 끼운 듯이 나른했다. '마크트플라츠' (시장 광장이라는 뜻이다)를 가득 채운 것은 푸드트럭. 시간이 많이 흘렀고 찍은 사진 한 장도 없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리스식 요리를 팔던 가판대가 하나 있었다는 것과 카레부어스트를 파는 푸드트럭이 하나 있었다는 것은 기억난다. 주린 배를 붙잡고 한구석에 앉아 카레부어스트 푸드트럭을 얼마나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봤는지. 결국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자리를 떠났지만. 어느 도시나 그렇듯 중앙광장에 가면 있는 식수대는 내게 정말 소중한 자원이었다. 지갑이 다 털린 채 여행하는 사람에게 공짜 음식은 주어지지 않지만 공짜 물은 가끔 주어지기 때문이었다. 다섯 살이 채 안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들이 광장 분수 물이 나오는 곳을 밟고 뛰어다녔고 어머니들은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한쪽에서는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풍선에다 물을 가득 담아 부풀리며 소꿉놀이를 했다. 아이들에게 비켜달라는 말을 하지도 못할 정도로 소심하고 배짱 없는 나는 식수대를 독차지하고 있던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이 소꿉놀이 도구들을 정리하고 나서야 물을 받을 수 있었다.
식수대의 완전히 반대편에는 헨델 동상이 트램 정류장 쪽을 보며 서 있다. 이 동상은 1859년 건립된 것으로, 영국과 독일 각지에서 후원이 쏟아졌으며 헨델 콘서트가 열렸다고 한다. 심지어는 바흐의 도시 라이프치히에서도 후원이 들어왔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라이프치히에서 봤던 바흐 동상이 떠오르면서 둘을 비교할 수밖에 없는데, 라이프치히의 바흐 동상은 손에 악보를 든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고, 헨델 동상은 짝다리를 짚고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아주 건방지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똑같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선인데 어째 하늘을 올려다보는 바흐의 시선은 다짐이나 믿음을 담고 있는 것 같고 헨델의 시선은 도전장을 내미는 것 같다. 헨델도 오라토리오를 썼지만, 뭐랄까, 바흐의 오라토리오는 진심으로 쓴 오라토리오 같은 데 비해 헨델의 오라토리오는 너무 극적이랄까... 헨델 팬들께는 죄송하지만 역시 헨델에게서는 돈과 세속의 냄새가 많이 난다. 욕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나는 세속적인 작곡가들에게 유감없다. 결국 세속적이라는 건 성공 공식을 알고 있다는 것이고, 사랑받는 법을 안다는 소리다. 게다가 헨델은 지금까지도 이름이 남아 있는 작곡가 아니던가. 잠깐의 인기를 얻는 건 쉽지만 그것이 몇 백 년째 유지되고 있다면 분명 그의 음악에 어떤 강점이 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내세울 만한 유명인을 배출했다면 누구나 동상을 만들고 보는 법이니 헨델의 출생지에서 헨델을 기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그 동상이 마을 중심지에 있다는 점도, 중앙역 지하터널에는 거대한 헨델 그라피티가 있다는 점도 도시가 헨델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신호들이다. 나는 헨델처럼 위인을 배출해 낸 도시에 살아본 적이 없어서, 실제 내가 헨델의 도시에 살았더라면 공격적인 헨델마케팅을 반겼을지 반기지 않았을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진짜 할레잘레 시민이었더라면 헨델 그라피티에 돈을 쓸 시간에 다른 사업들이나 제대로 하라고 불만을 늘어놓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뭐, 나는 관광객이니까. 어딜 가도 작곡가를 홀대하는 것보다는 잘 챙겨주는 편이 훨씬 기분이 좋단 말이다.
헨델 박물관은 1937년 처음 매입되어 1948년 개관했다. 사실 20세기 초반 동안 헨델의 오페라들은 구시대적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헨델의 오라토리오들만이 연주되었는데, 그마저도 제3 제국 시절에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다 보니 나치가 멋대로 손질한 텍스트에 붙여 연주되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헨델 박물관은 의외로 일찍 생긴 셈이다. 노란 외벽과 빨간 지붕의 집은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고, 아치형 문에는 헨델 박물관 전시 관련한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내부로 들어가자 두세 명 정도의 직원을 제외하면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굿즈샵에는 헨델 CD와 DVD가 풍성하게 놓여 있었다. 라이프치히 바흐 박물관에서 바흐를 팔아먹는 것에 비하면 소소했지만 오르골처럼 있어야 하는 것은 다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말해둬야겠는데, 사실 헨델 박물관에 대한 기억이 굉장히 희미하다. 내가 박물관에 입장한 시각이 오후 4시였는데 박물관이 오후 5시에 문을 닫기 때문에 박물관을 정말 대충 허겁지겁 둘러봤기 때문이다. 그래도 각종 자료와 내 기억을 최대한 종합해 여러분들께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드리도록 노력해 보겠다. 2층에서 티켓을 검사한 뒤 전시는 3층에서 시작된다. 3층 전시는 큰 방 하나를 중심으로 두고 그 주위를 작은 방들이 둘러싼 형태이며 할레에서 살던 헨델의 유년기를 다루고 있다. 바닥에는 할레 지도가 검은색으로 깔려 있고 중간중간 헨델과 관련 있는 건물들이 작은 조형물로 세워져 있다. 특히 벽에 있는 액자들은 도시가 어떻게 헨델을 기념했는지에 집중하며, 헨델 동상이 건립된 이야기, 헨델의 탄생, 할레에 살던 때 헨델이 작곡한 곡 이야기, 헨델과 관련이 있는 할레의 교회 이야기 등을 해준다.
내 희미한 기억 가운데 그래도 확실하게 하나 기억이 나는 부분이 있는데, 헨델의 가족과 헨델이 할레 시절 작곡한 곡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방이었다. 헨델은 63세 (...)의 아버지 게오르크 헨델과 그의 두 번째 아내 사이에서 태어났다. 12살 때 (아버지가 75세셨으니 사실 자연사하셔도 이상한 나이가 전혀 아니다) 아버지를 잃은 헨델은 이후 잠깐 법학을 전공하다가 결국 오르가니스트로 틀어버리고, 함부르크에서 잠깐 일을 하다가 첫 오페라를 써서 성공을 거둔 뒤 이탈리아로 가서 음악을 배우게 된다. 박물관에서는 할레잘레에 살던 시절의 어린 헨델을 캐릭터화해서 학생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애니메이션 영상을 제작했다. 앞선 글들을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아시겠지만, 나는 체험이나 이런 영상이 있으면 꼭 눌러봐야 성에 차는 인간이기 때문에 또 박물관에서 준비해 둔 애니메이션을 재생했다.
영상 속 헨델은 열심히 앉아서 피아노를 뚱땅거리며 초기 습작을 작곡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까마귀와 고양이가 차례로 들어와 헨델을 방해하고, 헨델은 동물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바깥에서 여동생이 부르는 소리에 악보를 접어서 넣어두고 방을 나간다. 영상을 다 봤는데 왜 이런 영상을 만들었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재미가 없는 거야 박물관에서 억지로 제작한 영상이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딱히 교육적이지도 않았다. 그 영상을 보고 헨델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헨델이 친근하게 느껴지게 되지도 않았다. 초상화 속의 후덕한 헨델과 영상 속의 13세, 아직 머리카락도 있는 창창한 어린이 헨델 사이 간극이 너무 커서 그냥... 헨델 이름만 빌려 쓴 소년만화 주인공을 만들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작곡가 박물관을 갈 때마다 작곡가 캐릭터화 좀 시켰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나인데, 헨델 박물관을 방문해 보고 나니까 그런 짓을 하지 않는 게 맞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헨델 주니어'라는 영상 프로그램의 이름을 보면 어린아이들을 겨냥한 프로그램일 테니까 다 큰 성인이 영상의 재미와 효용을 판단하는 건 무용한 짓이기를 바란다. 실제 박물관을 방문한 어린이들은 영상을 보고 뭔가 느끼는 게 있을까?
어딘가 시원찮은 3D 애니메이션을 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할레를 떠난 뒤 헨델 인생에 관한 전시가 이어진다. 헨델의 이탈리아 유학 시절부터 시작해서 런던에 정착하기까지의 인생을 다루는 '유럽인 헨델' (Handel the European) 영상이 벽 한쪽에서 크게 재생되고 있다. 벽 한쪽에 있는 헨델 연표와 헨델이 돌아다녔던 지역을 표시한 지도를 보면 헨델이 세계를 얼마나 열심히 돌아다녔는지 알 수 있다. 연표는 할레, 함부르크, 베네치아, 하노버 그리고 런던 시절로 나누어져 있다. 연표를 보자 헨델이 확실히 할레보다는 런던에서 말도 안 되게 오래 살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열여덟 이후로 헨델은 할레에 가끔가끔 방문하기만 했는데, 아마도 1730년까지 살아계시던 어머니가 여전히 할레에 지내고 계셨기 때문이리라 보인다. '유럽인 헨델'은 헨델 상설전시의 제목이자 테마기도한데, 영상에서 헨델의 오페라와 엮어서 헨델의 인생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기 때문에 헨델의 인생을 잘 모른다면 영상을 꼭 보고 가도록 하자.
이다음 방에는 헨델 전집과 헨델 악보가 통째로 전시되어 있다. 서랍장을 열어보면 헨델의 자필보로 추정되는 악보가 들어 있다. 종이와 책의 장정 상태를 보면 꽤 예전에 인쇄된 것이 분명한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의 전집은 190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나왔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헨델은 정말 대접이 좋은 작곡가였음이 분명하다. 다른 한편에는 헨델의 전기, 헨델의 주변인들, 헨델의 초상화 등이 한꺼번에 놓여 있는데, 즉 이 방은 후대 사람들이 헨델에게 보내는 존경과 헨델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곳이다. 일부 전기에는 읽던 사람들의 코멘트가 달려 있기도 하다. 방 끝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면 런던 시절의 헨델과 헨델의 말년을 다루는 방이 나오며, 벽에는 주제와 관련 있는 판화나 사진이 걸려 있고 군데군데 옛날식 오르골이나 피아노가 놓여 있다. 물론 헨델이 원래 가지고 있던 악기들은 아니며, 대부분 재현한 악기들이다. 헨델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지만 이 정보들은 주로 인간, 개인으로서의 헨델보다는 헨델이 생활한 시대배경과 헨델의 음악이 감상되었던 맥락을 설명해 주기 때문에 내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차라리 내 흥미를 불러일으켰던 것은 거의 맨 마지막 부분에 있는 홀로그램 시어터였다. 홀로그램 시어터는 헨델의 인생 1기 오페라 시절과 2기 오라토리오 시절 가운데 1기 오페라 시절에 쓴 오페라들을 하나하나 뜯어볼 수 있게 해 준다. 각 오페라별로 헨델이 어떤 상황에서 이 오페라를 쓰게 되었는지, 이 오페라는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그리고 오페라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는지를 주로 다루고 있었다. 여기쯤 왔을 때는 관람시간이 10분도 채 남지 않았던 바람에, 나는 거의 영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나왔다. 하지만 이쯤에서 헨델이 오페라에서 손을 떼게 된 이야기를 한 번 해 볼까 한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프리마 돈나'라고 검색하면 뜻이 두 가지 나온다. 첫 번째는 오페라의 여자 주역이라는 뜻이 나오지만, 둘째로는 '자아가 무척 강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을 가리킨다고 되어 있다. 언제나 본인의 권한이 크고 본인이 참여하는 프로젝트 따위에서 수익에 미치는 영향이 클수록 사람의 콧대는 어쩔 수 없이 높아지는 법이다. 헨델의 시대, 많은 사람들은 프리마 돈나들과 그녀들의 기교를 보기 위해 무대로 찾아갔다. 음악보다는 기교가 앞섰던 셈이다. 특히 헨델의 시대, 바로크 후기에 이 경향성은 극에 달했고 이탈리아 오페라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것도 '얼마나 화려한 기교를 얼마나 적절하게 배치할 수 있느냐' 또는 '기교가 얼마나 화려하고 어려운가'였다. 나도 헨델의 '리날도'를 들어 보았으나, 솔직히 말해 스토리는 마법으로 모든 걸 해결해 산으로 가고 있고 캐릭터도 딱히 인상적이지 않았다. 중간중간 집을 나가 있던 내 정신이 돌아오던 것은 오직 프리마 돈나가 선보이는 화려한 기교가 들려올 때뿐이었다. (헨델 팬 분들께는 미안하다. 심지어는 멘델스존도 헨델을 꽤 좋아했는데도 나는 여전히 헨델 음악에 적응할 수가 없다. 바로크 음악은 처음부터 바로크를 좋아하는 체질로 태어나지 않는 이상 평생 적응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사실인 것 같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 헨델이 속해 있던 오페라 컴퍼니에는 두 명의 프리마 돈나가 있었다. 쿠초니와 보르도니는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최고의 소프라노들이었지만 동시에 콧대 높은 프리마돈나이기도 했다. 이 둘이 한쪽이 조금이라도 더 좋은 대우를 받는다 싶으면 화를 내는 것은 물론이었고, 둘만으로는 모자라 둘의 팬들까지 싸우곤 했다.
거기에다가 상대 컴퍼니는 또 다른 히트 작곡가 포르포라 (1686~1768, 헨델의 라이벌로도 유명하지만 하이든의 스승으로도 유명하다. 하이든은 포르포라한테서는 가르침보다 주먹질을 더 많이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였던 데다가, 존 게이의 오페라... 비슷한 '거지 오페라'가 공전의 히트를 치며 헨델과 포르포라가 잔뜩 찍어내던 정통 이탈리아풍 오페라의 쇠락을 확인사살해 버리고 말았다. 제작자 리치와 극작가 게이는 오페라 62회 상연이라는 대기록을 세웠고 (베토벤의 피델리오는 세 번의 공연을 한 뒤 내려갔다) '리치는 게이해졌고 게이는 리치해졌다' (*Rich got gay and Gay got rich, 리치는 즐거워졌고 게이는 돈을 벌었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돌아다닐 정도였다. 헨델은 이 뒤로도 오페라를 몇 번 더 시도해 보긴 했으나, 결국 만족할 만한 성공을 거두지 못하며 오라토리오라는 블루오션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분명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홀로그램 시어터에도 있었을 것 같지만, 정말로 박물관 문 닫기 5분 전이 되어갔다. 불행히도 3층에 있던 악기박물관을 둘러보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사실 헨델박물관의 하이라이트는 악기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헨델 박물관에서 악기박물관은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다. 헨델과 프랑스 오페라의 연관관계에 대한 당시의 특별전시를 지나치면 바로 옆에 나오는 것이 악기박물관이다. 헨델 박물관에는 700여 점이 넘는 시대악기가 전시되고 있으며, 아마 내가 지나다니면서 봤던 오르간들이나 피아노들도 그런 골동품들을 기반으로 제작된 것이 아닐까 싶다. 바흐박물관에서는 시대악기들, 바로크 시대에 주로 쓰였던 악기들의 소리를 들려주는 선에서 그친다면 헨델박물관의 악기들은 일단 바로크 시대에 구속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트롬본 등 다양한 악기들의 작동 원리를 간단한 장치로 구현해 놓아 직접 소리 내는 원리를 체험해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내가 다녀왔던 파리 음악박물관 등과 다른 점이라면, 헨델박물관의 악기들은 의외로 기상천외하고 내가 생전 들어 본 적도 없는 바로크-르네상스 시대의 악기들 컬렉션이 아닌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보고 접했던 악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유리전시장 안에 있는 악기들은 트럼펫, 오보에, 클라리넷, 바이올린처럼 현대 오케스트라에 있는 악기들이며 오른쪽에 있는 눌러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버튼들 또한 현대 오케스트라 악기의 소리를 들려준다. 한구석에는 오르간의 뚜껑을 열고 안쪽을 해체해 놓아 오르간의 내부 구조를 살펴볼 수 있게 해주는 전시품도 있으며, 트럼펫과 바이올린 제작 과정이 사진과 단계별 견본품으로 자세히 전시되고 있다. 또 한편에서는 소리굽쇠, 튜닝기 등 음을 조율할 때 사용하는 도구들만 전시해 놓은 공간도 있어서 '옛날의 신기한 악기를 보고 싶은 사람들' 보다도 '정말 순수하게 악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인 듯하다. 다행히 나는 악기에 크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악기 전시를 놓쳤다고 해서 많이 아쉽지는 않았다.
이렇게까지 빠듯하게 둘러본 박물관은 처음이었다. 비엔나에서 하루에 박물관을 다섯 개 돌 때도 생각보다 관람시간이 여유로웠는데 헨델 박물관은 정말 촉박했다. 좀 더 여유를 가지고 박물관을 둘러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비록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분명 괜찮은 박물관이었을 텐데 그 가능성을 100% 즐기지 못하고 온 것 같다. 여러분들은 헨델 박물관을 방문하게 된다면 시간을 넉넉하게 잡기를. 특히 라이프치히에서 할레잘레로 이동하는 시간과 할레잘레 중앙역에서 헨델 박물관까지 이동하는 시간을 간과하지 말기를.
명칭: 헨델 하우스 (Händel-Haus)
운영시간: 월 휴무, 4월~10월: 10:00~18:00, 11월~3월: 10:00~17:00
입장료: 성인 7.5유로, 학생 5유로
사이트 링크: Startseite | Stiftung Händel-Haus
할레잘레는 라이프치히 근교의 도시로, 30분 정도 S반 (경전철)을 타고 가야 한다. 그러나 꽤 많은 경전철이 라이프치히-할레잘레 사이를 이어주고 있기 때문에 접근성이 아주 나쁜 편은 아니다. 다만, 고속열차를 타고 한 번에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2. 도시 내 접근성: ★★★☆
마을 중심부에서는 10분 정도만 걸으면 나오지만, 마을 중심부와 중앙역이 좀 떨어져 있는 데다가 은근히 헨델 박물관이 좁은 골목 안쪽에 있기 때문에 찾기 힘들다.
3. 소장품: ★★
헨델이 워낙 옛날 사람이다 보니 소장품이 없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래도 대부분의 전시품이 현대 악기거나 헨델 시대의 할레 모습을 담은 판화, 헨델과 관련이 있는 인물의 초상화 인쇄물 등이었고 헨델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물품은 얼마 없다 보니 소장품이 썩 우수하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4. 언어 지원: ★★☆
대부분의 설명문이 영어로 번역되어 있긴 했지만 군데군데 번역되어 있지 않아 내용을 알 수 없는 전시물들이 있었다. 미디어들은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까지 3개 국어 이상을 지원하고 있어 영어조차 지원되지 않는 일부 전시 설명문들을 보면 어이가 없다.
5. 가성비: ★★★★
할인 시 5유로라는 저렴한 가격에 입장할 수 있다. 아래서 바로 말하겠지만 관람하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멀티미디어도 많아 관리비가 많이 들 텐데도 시에서 지원이라도 받는 걸까, 관람료가 생각보다 저렴해 기분 좋게 구경할 수 있었다.
6. 규모: ★★★☆
층수는 2층에 불과하지만 한 층 한 층이 넓고 영상이 많아 관람을 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헨델과 악기 둘 모두에 관심이 없다면 1시간 30분, 둘 중 하나에게 관심이 있다면 2시간, 둘 모두에게 관심이 있다면 2시간 30분 정도는 넉넉하게 잡고 가는 편을 추천한다. 나는 둘 모두에게 관심이 없어 1시간 정도면 넉넉하게 끝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택도 없었다.
상호작용이 상당히 많은 박물관이다. 홀로그램 극장도 그렇고,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헨델의 인생을 설명해 주는데 미디어의 퀄리티가 전체적으로 우수했기 때문에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허접하지만 애니메이션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악기박물관 쪽의 체험관이 정말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상호작용은 4점을 줘야 할 듯하다.
8. 굿즈: ★★★
오르골과 CD, DVD들이 있고 헨델 우산, 부채, 술 등 작은 가게 안에 다양한 품목을 팔고 있다. 다만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얼핏 엽서도 봤지만 대부분이 헨델 박물관들의 소장품이나 박물관 사진이었고 내가 사고 싶게 만들어놓은 품목은 없었다. 가격대는 바흐박물관에 비해 저렴한 편이다. 그 점이 장점.
내게 깊이 와닿지 않아서 그렇지, 큐레이팅은 굉장히 깔끔하게 되어 있는 박물관이었다. 3층에는 헨델의 성장배경과 헨델의 할레잘레 시절을 다루고, 2층에서는 그 이후 헨델의 인생과 작품세계를 다루고 있다. 음악보다는 사람에게 더 관심이 많은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배경설명과 시대상황 이야기가 너무 많아 지루하지만, 아마 대부분의 클래식 애호가들이라면 헨델박물관의 큐레이션을 균형 잡혔다고 평가할 것 같다. 마찬가지로 헨델에 대한 사전 지식이 굉장히 적었던 내게는 헨델에 관한 정보량이무섭게 빠른 속도로 쏟아져내려 오는 기분이었지만 헨델의 인생 전반에 대한 지식 약간만 가지고 가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곳이니 괜찮은 큐레이팅이라고 생각한다.
10. 총평: ★★★
좋은 박물관이지만 내 가슴을 뛰게 하지는 않는 박물관
최대 장점: 풍부한 상호작용과 깔끔한 큐레이팅
최대 단점: 소장품 거의 없음
추천 여부: O. 헨델을 좋아하는 사람도 헨델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악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적극추천하고 싶다.
27화 예고: 로베르트와 클라라, 클라라, 그리고 이번에는 로베르트. 출발역은 할레잘레, 도착역은 츠비카우. 아마도 쇼팽 다음으로 많은 사람 울렸을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의 고향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싣고 눈을 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