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리스트, 또는 페렌츠 리스트. 전설의 피아니스트이자 최초의 아이돌이라고도 불리는 그를 어떻게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된다. 그는 정말이지 시대를 풍미한 유명인이었다. 처음 무대에 데뷔한 순간부터 그는 신동 피아니스트였고, 잠깐의 피아노 과외 선생님 생활 이후에는 살롱의 옴므파탈이자 귀족의 연인이 되었으며, 세계를 제패한 아이돌이 되더니, 신독일악파를 이끄는 바이마르의 카펠마이스터가 되었고, 진보파 음악가들의 대부가 되었으며, 바그너의 장인어른이 되고, 위대한 교육자가 되어 생을 마감한다. 이런 삶이 어디 있는가. 정말 인생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유명하지 않은 순간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가끔 농담조로 리스트가 태어난 이래 가장 유명하지 않은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그는 유명인이었다. 평생을 유명인으로 산다는 건 대체 어떤 느낌인가, 나는 아마 죽었다가 깨어나도 리스트처럼 평생이 유명할 일은 없을 테니 알 수 없으리라.
바이마르는 흔히 괴테와 실러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군도' '빌헬름 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돈 카를로스' 등 문학 덕후도 아니고 클래식 덕후인 내 입에서만 이 정도가 쏟아져 나오는 위대한 작가들이다. 이 둘이 꽃피운 사조가 괜히 '바이마르 고전주의'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괴테와 실러는 바이마르의 '황금시대'를 이끈 두 사람이었고, 그때부터였을까, 바이마르는 독일 문화의 가장 중요한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또 바이마르 하면, 법과정치를 배웠거나 세계사를 열심히 공부했던 사람들은 자연스레 '바이마르 헌법'이나 '바이마르 공화국'을 떠올릴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헌법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바이마르 헌법이 작성된 것이 바로 이 도시고, 그 헌법에 기초해서 만들어진 바이마르 공화국은 나치 직전의 국가로, 통설에 따르면 나라를 경제 위기에서 구출해내지는 못했지만 사회적으로는 진보적이었다. 물론 그 진보적인 정책들이 백래쉬를 불러왔지만. 거기다가 발터 그로피우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말러의 아내였던 알마 말러와 내연관계였으며 후일 알마의 남편이 된다)의 바우하우스 건축양식도 여기서 피어났다.
그러나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바이마르가 중요한 것은 황금시대 때문도 아니고, 현대 때문도 아니고 바이마르 '은의 시대' 때문이었다. (바흐가 이곳에서 근무했던 적이 있으니 바흐 때문에 관심이 가는 도시라고 해도 되겠지만, 여기서는 리스트 이야기를 하자.) 실러가 1805년, 괴테가 1831년 죽었다. 한편 프란츠 리스트는 1847년 순회연주자 생활에서 은퇴한다. 1840년대 유럽 피아노계를 재패한 아이돌의 은퇴선언이라니. 역시 1847년 우크라이나에 갔을 때 만난 카롤린과 정착하고 싶었던 마음이 한몫했을 것이고 그것과 별개로 그냥 순회연주 생활에 질린 것이 또 한몫했을 것이다. 그때! 바이마르 궁정에서 제안이 들어왔다. '우리 함께 괴테와 실러의 황금시대를 부활시켜보지 않겠느냐'라는 제안이. '예술' '천재' 이런 거 하면 또 방앗간을 지나칠 수 없던 참새 프란츠 리스트는 옳다구나 하고 바이마르로 이사한다.
그러나 바이마르 생활은 리스트가 생각한 것과는 달랐다. 으쌰으쌰 하며 본인과 성향이 잘 맞는 작곡가들의 음악을 열심히 홍보하려 했지만 리스트가 머무른다 해서 자동적으로 진보적인 색채를 띄게 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여전히 바그너와 베를리오즈의 음악은 반발에 부딪혔고, 사실혼 관계의 카롤린은 끊임없이 '결혼도 안 한 남자랑 같이 사는 게 적절한 일이냐'는 비난을 받으면서 주민들에게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아야 했다. 거기다가 리스트는 궁정에서 직책을 맡은 만큼, 이전의 자유로운 순회연주자 생활과는 달리 때때로 BGM 제공기 취급도 받아야 했고 (왕 앞에서 '왕이 말을 하니 조용히 해야지요' 하면서 연주를 중단해 버렸던 기개는 어디로 간 것인가!) 그 프란츠 리스트가 유니폼을 입기까지 해야 했다! 그렇다고 급료를 많이 받는 것도 아니었다. 일 년 연봉이 330~1600 탈러 밖에 하지 않았고 이 정도 액수는 리스트에게 담뱃값에 불과했다. 일 년 동안 피는 담뱃값만 빼도 남는 돈이 없어 리스트는 급여가 들어오면 농담조로 '담뱃값 벌었다'라고 하기도 했다. 그래도 10년을 꾸역꾸역 버티던 리스트는 결국 페터 코르넬리우스의 작품 '바그다드의 이발사'를 공연하겠다고 궁정 감독관에게 제출했다가 이 감독관이 '바그다드의 이발사'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반대 시위까지 주최하는 바람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사임한다.
이렇게 떠나버린 리스트를 다시 바이마르로 데려오려 애쓴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 카를 알렉산더 덕분에 리스트는 1868년 바이마르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때는 제대로 돌아온 것은 아니고, 바이마르에서 마스터클래스 수업을 해 주는 동시에 부다페스트와 로마에서도 몇 개월씩 지내는 '삼중생활' (Tripartite existence)을 하게 된다. 현재 바이마르 리스트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곳은 1848년부터 1858년 리스트가 살던 알텐부르크 궁이 아닌 1868년부터 리스트가 사용하던 집이다.
라이프치히와 츠비카우로 가는 길에 비해 바이마르로 가는 길은 상당히 귀찮았다. 일단 환승을 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단점이었다. 독일 여행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독일 여행을 하면서 환승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을 텐데, 환승시간이 20분 이하라면 20분 정도 기차가 늦어버려서 환승이 불가해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움부르크에서 환승을 하면 환승 1회만으로 그래도 바이마르에 도착할 수 있지만, 나움부르크 환승 편은 9시 출발이 아니면 17시 출발이었다! 때문에 바이마르에 갈 때는 RB-RE 1차례 환승만으로 갈 수 있었지만 돌아올 때는 바이마르에서 에어푸르트, 에어푸르트에서 라이프치히, 라이프치히에서 할레잘레라는 끔찍한 환승을 겪어야 했으므로 바이마르를 갈 여러분들께서는 참고하시기를 바란다.
바이마르를 가는 기차에서 또 꾸벅꾸벅 졸다 내렸다. 평소와는 역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누렇거나 딱딱한 회색 벽돌에 도이체반 중앙역이라 붙어 있던 건물들과 달리, 뮌헨에서 봤던 님펜부르크 궁전처럼 하얀 외벽에 빨간색 지붕이 얹힌 아기자기한 역 앞에는 잘 조경된 화단이 줄지어 서 있었다. 중앙역 앞은 바로 내리막길이었고 내리막길 양옆으로는 가로수가 우거져 있어 따뜻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중앙역 앞에 바로 펼쳐지는 것이라면 나름대로 대로일 텐데, 2차선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도로가 펼쳐졌다. 심지어 도로에는 트램 트랙이 없었다. 츠비카우마저도 트램이 다녔는데, 바이마르에는 버스만 1~8번 호선이 있는 모양이었다.
중앙역에서 1번 버스를 타고 가면 '이번 역은 도심, 괴테광장입니다' 하는 소리가 들린다. 더 가면 '이번 역은 바우하우스 대학교입니다' 하는 소리가 들린다. 중앙역부터 바우하우스 대학교까지 가는 길 사이에는 바우하우스 박물관도 있고, 괴테 생가도 있고, 괴테 박물관도 있고, 실러 생가도 있고, 조금 외곽으로 빠지면 괴테의 가르텐하우스와 니체 기념관도 볼 수 있지만 내게 그 기념관들은 전부 후순위였다. 버스에서 내리자 막 수업이 끝났는지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무리 지어 웃고 떠들며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좋은 날에 빵빵한 배낭을 메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혼자 돌아다니고 있는 동양인 관광객을 이상하게 보는 시선이 얼핏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작곡가에 미친 내게 그 정도 시선은 조금도 장애물이 되어주지 않았다.
리스트 박물관은 원래 궁정 정원사의 집으로 쓰이던 곳답게, 괴테의 가르텐하우스가 위치해 있는 일름 공원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일름 공원은 괴테가 본인의 세 번째 소설 '선택적 친화력'을 집필한 집이고, 공원 자체도 괴테의 계획에 따라 자연을 그대로 모방하는 자연스러운 양식인 영국식 정원 양식으로 만들어져 역시나 바이마르 고전주의의 일면을 잘 보여주는 귀중한 공간이지만 이 공원 덕에 나는 리스트 박물관을 찾지 못해 한 15분을 넘게 헤매었다. 도로변과 맞닿아 있지만 입구는 도로변을 등진 노란색 집이 리스트 박물관이니까 여러분들은 일름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 헤매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리스트 박물관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엄청난 실망을 마주해야 했다. 츠비카우 슈만 박물관에서 노트북을 들고 사진을 찍으러 다녔던 나의 눈물겨운 노력은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핸드백보다 큰 모든 가방을 반입제한하는 프란츠 리스트 박물관의 엄격한 규정으로 인해 노트북을 들고 들어갈 수 없었다. 핸드폰은 잃어버린 지 오래였으니 자연히 사진도 한 장 찍을 수 없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통사정을 해 보았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얌전히 노트북을 락커에 보관해 두고 시무룩한 마음으로 2층에 올라갔으나 올라가자마자, 아, 확실히 직원들이 그럴 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1884년 리스트의 살롱 사진과 1882년 리스트의 일요연주회를 묘사한 그림을 한 번 보고 시작하자.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줄무늬 커튼과 왼쪽의 베토벤 초상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사진과 그림은 같은 공간을 가리키고 있다. 두 번째 그림에서 양쪽으로 걷혀 있는 커튼 뒤쪽이 첫 번째 그림의 공간, 서재로 나누어진 구조이다. 자, 그럼 지금의 리스트 박물관에서 이 공간은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놀라지 마시라.
정답은 '하나도 안 변했다' 다. 달라진 점이라고는 사진과 그림 속에서는 살아 있던 인물들이 지금은 죽었다, 그 정도일까. 리스트가 잠깐 외출해서 자리에 없다거나 지금은 로마에 있다고 해도 믿을 구성이다! 하다못해 그 흔한 박물관의 접근 금지용으로 설치해 놓은 줄도 없다! 내 등 뒤에 벨벳과 가죽 부분이 너덜너덜해진 소파가 그대로 놓여 있고 앞에 있는 피아노에도 건반에 덮개가 씌워져 있을 뿐 조금도 달라진 구석이 없다. 손을 뻗으면 커튼도 테이블도 등받이도 모두 만질 수 있다. 물론, 박물관 직원들이 계속 순찰을 돌면서 만지지 않는지 감시하고 있으니 절대 그런 짓은 하지 말도록 하자. 우리 모두 문명인 아니던가.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사진을 토대로 전부 복원한 것일까? 아니다. 전부 리스트가 쓰던 것 그대로이다.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박물관이 많이 파손되었음에도 불구, 대부분의 소장품은 거의 다가 원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리스트가 1886년 죽고 대공과 대공비는 리스트 집의 모든 것을 손대지 말고 보존할 것을 명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 1887년부터 리스트 집은 우리가 보는 것과 똑같이 박물관으로 운영되어 왔다.
평소에는 거의 사람이 없는 박물관인지 박물관 후기를 찾아보면 대부분이 저렇게 텅 빈 살롱의 사진을 올려놓았다. 천장 조명이 따로 없거나 켜지 않는지, 오후에 가니 창가로는 빛이 환하게 쏟아져 들어오는데 정작 방 안은 무척 어두웠다. 어차피 사진을 찍었더라도 바이로이트 리스트 박물관처럼 사진이 엉망으로 나왔겠다 생각하니 섭섭한 마음이 그나마 조금 위로받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내가 갔을 때는 하필 어디서 바이마르 단체투어라도 온 건지 스무 명은 훌쩍 넘는 관광객들이 리스트 박물관을 활보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크지 않은 집에, 접근 금지 줄도 접근을 막는 유리도 없는데 사람들이 꾸역꾸역 차 있다 보니 누가 의자를 넘어뜨리기라도 하는 건 아닐지 마음이 다 조마조마했다.
리스트 박물관의 가장 큰 아이덴티티는 이야기했으니 이제 박물관을 소개해 보자. 리스트 박물관,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리스트의 집은 방 네 개로 구성되어 있다. 위 사진에서 보이는 살롱 겸 작업실, 침실, 식당, 그리고 하인방 이렇게 네 곳인데 이 가운데 살롱 겸 작업실과 침실은 1887년부터 그대로 보존되어 왔고 식당은 그보다 조금 뒤, 하인방은 가장 최근에 박물관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살아생전부터 리스트만큼 유명인사였던 박물관이 또 있을까. 거기에다가 맨날 천재론을 줄곧 이야기하고 다녔으니, 낭만주의 시대의 사람들답게 리스트의 집에는 '보존가치가 있다'는 판정이 내려진 것이 분명했다. 사실 예술가들에 대한 평가는 시대를 굉장히 많이 탄다.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했던 비운의 천재'는 클리셰일 정도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로는 '알 사람만 아는 작곡가'에서 '음악의 아버지'로 격상된 바흐가 있고, '무명 작곡가' 수준에서 비록 사계 한 곡이긴 하지만 이제는 '어디서 한 번은 들어 본 작곡가'로 격상된 비발디도 있다. 바흐의 경우 멘델스존을 비롯한 바로크-르네상스 곡을 탐구하는 역사주의 사조의 영향이 있었을 테고 비발디의 경우 '우리나라도 내세울 바로크 작곡가 있다!'라는 이탈리아 국민정서와 파시즘의 결합이 영향을 끼쳤다. 바그너의 경우 반대로 제3제국 시절 엄청난 인기를 누리다가 세계 제2차 대전과 나치 독일의 패망으로 인해 반유대주의적이었던 그의 사상과, 무엇보다 히틀러가 적극적으로 써먹은 작곡가라는 점이 결합되며 전후 20년간 거의 뭐 금기시되는 작곡가가 되고 말았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 곡 연주를 금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너무 최근 정권이 펼친 정책은 교과서에 싣지 않는 것처럼, 역사적 평가가 완료되지 않은 사람을 기념하는 일은 어찌 보면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리스트가 앞으로도 오래오래 기억될 사람이라는 확신은 어디서 온 걸까-생전에 하나의 '현상'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의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위인으로 남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리스트의 책상 위에는 베토벤의 데스마스크가 있고 벽에는 베토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천재'라는 개념을 빚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베토벤이라, 의미심장하다. 천재란 시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이 목 끝에서 걸려 나올락 말락 한다. 리스트 또한 상당한 시간 동안 현재에 비해 저평가를 받던 작곡가였는데, 그런 그가 죽자마자 바로 살롱의 붉은 줄무늬 커튼, 피아노, 책상, 셰즈 롱그, 진열장, 피아노 의자를 모두 보존하자는 결정이 어떻게 나온 것일까? 아무리 유명하다고 해도, 보통 유명인이 죽으면 그 소장품들은 경매로 여기저기 팔려나가지 이렇게 한 곳에 보존되지 않는다. 리스트가 역사의 한 순간이라고 규정하고 그 한순간을 박제하기로 한 것은 누구의 선택이었을까? 박물관이라는 것이 사후 평가가 완료되지도 않았을 인물을 위해 만들어져도 되는 것인가? 이것은 박물관이라기보다는 신전에 가깝지 않은가? 현재의 리스트 팬들에게는 분명 좋은 일이다. 소장품이 여기저기 흩어지지 않고 한 곳에 온전히 모여 있다니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러나 리스트 박물관이 만들어질 수 있던 이유가 단순히 '리스트는 살아생전에도 유명했으니까'라는 답변은 내게 만족스럽지가 않다.
그렇게 보존된 천재의 가장 은밀한 공간, 침실은 무척이나 검소하다. 리스트의 바이마르 생활 1기는 알텐부르크 '궁'이었고 자그마치 거기서 공작까지 키우며 매일매일 연회를 열어 손님들을 대접하는 화려한 생활을 했던 만큼 리스트의 청년기만 봤던 사람들에게는 무척 놀라운 풍경일 것이다. 세면도구와 장롱, 장롱 위의 시계 하나와 침대, 거울 정도를 제외하면 방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바이마르와 관련 있는 전설을 그린 그림 한 장 정도뿐이다. 리스트가 본격적으로 검소한 생활을 추구하게 되었던 것은 역시나 카롤린과의 결혼이 거부당한 뒤 로마 수도원에 살면서였던 것 같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우크라이나 방문 때 리스트는 카롤린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카롤린은 만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던 리스트를 따라, 자신의 혼인을 무효로 돌리고 리스트와 결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채 바이마르로 왔다. 바이마르에서부터 꾸준히 바티칸에 로비를 하며 카롤린의 결혼을 무효로 만들어 달라 부탁했던 둘은 1860년 마침내 결혼이 허락되었다는 통보를 받게 된다. (당시 가톨릭에서는 이혼이 금지되어 있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혼을 위해서 개신교로 개종해 버렸는데, 클래식 음악사에서 이혼을 위해 개종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리스트의 딸이자 바그너의 아내인 코지마가 있다. 뷜로를 버리고 바그너에게 가기 위해 이혼한 건이 유명하며, 요한 슈트라우스 2세도 아내와 이혼하기 위해서 개신교로 개종했다.) 리스트의 50번째 생일, 1861년 10월 22일에 결혼하자는 합의가 이루어졌고 리스트는 그 바로 전날인 21일 로마에 도착했다. 그런데 추기경과 차르 사이 모종의 이해관계로 인해 분명 내려졌던 결혼 허가가 취소되어 버린 것이다! 카롤린과 리스트는 낙심했고 이후 다시 결혼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 뒤의 리스트는 정말 세속적인 욕망은 술이랑 담배랑 카드게임 빼고 다 내려놓은 것처럼 살았다. 술과 담배와 카드게임이라고 하니까 가장 큰 세속의 욕망들이 남아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여자나 돈 욕심은 추호도 볼 수가 없다. 카롤린은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아무도 가질 수 없다'는 식으로 리스트의 성직행에 찬성했고 리스트는 어릴 적부터 확고하던 신앙을 고백하는 느낌으로 성직에 들어가 평생의 삶을 속죄했다. (본인은 그렇게 받아들인 것 같다.) 아마도 방의 검소함은 그런 죄의식의 발로 아닐까 싶다. 침실과 바로 이어져 있는 식당은 리스트의 알텐부르크 시절 가구들로 꾸며져 있는데, 베네치아산 유리 샹들리에와 화사한 푸른색 의자를 보면 확실히 몇십 년 사이 리스트에게 큰 변화가 있었음이 느껴진다. 동료 작곡가들이나 제자들에게 쓰는 돈은 늘 많았지만, 자기에게 쓰는 돈이 확 줄어든 것이다.
리스트는 늘 타인에게 관대했다. 한동안은 본인에게는 도덕적으로 좀 관대했던 것 같지만 나중에는 본인에게 아주 엄격해진 것으로 보인다.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아라'라는 계명을 거스른 것을 무척 후회한다 이야기했다는 일화도 전해지니까 말이다. 박물관 기행글에서만 봐도 알겠지만 리스트는 많은 작곡가들을 지지하고, 지원해 줬으며 때로는 경제적으로도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힘썼다. 누군가가 돈을 달라고 했으면 별 의심 없이 줬고 그 관대함의 가장 큰 수혜자가 바로 바그너였다. 본인 통장이 거덜 날 때까지 바그너에게 돈을 줘서 나중에는 바그너에게 '내가 보이는 것만큼 그렇게 부자가 아니다 이제 줄 돈 없으니까 달라는 소리 그만해라'는 이야기까지 한다. 바그너가 거의 돈을 갚지도 않는데 저 정도로 말했으니 정말 관대한 사람이다. 심지어는 누군가가 자신의 제자라고 거짓말을 하고 다녀도 개의치 않았고 본인의 제자들이 욕을 먹고 있으면 적극적으로 나섰으나 본인에 대한 비판에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리스트에 대해 '그처럼 질투심 없는 사람은 처음 본다'라고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누군가가 바이마르 리스트의 집에 놀러 오면 이미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리스트는 하나밖에 없는 침대를 선뜻 내주고 본인은 셰즈 롱그 (긴 소파)에서 잠을 청했다고 한다. 제대로 밥을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쁘게 소년가장 노릇을 하다가 계단에서 잠들고 다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던 어린 시절과 아직 기찻길이 제대로 놓이지 않아 며칠씩 마차를 타고 험한 길을 달리다가 마차 안에서 잠을 자야 했던 순회연주자 시절을 생각해 보면 리스트에게 셰즈 롱그에서 자는 것쯤은 그리 힘든 일도 아니었겠다 싶으면서도, 그 나이를 먹었으면 셰즈 롱그에서 자거나 굳이 야간기차 이등석을 타고 다니는 짓까지는 할 필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바이로이트 리스트 박물관에서도 느꼈지만 리스트라는 인물의 가장 큰 매력과 가장 큰 약점은 둘 다 그 관대함이다.
그러나 그런 리스트에게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야망이 하나는 있던 모양이다. 너무나 낭만주의적이고 천재나 품을 수 있을 법한 초월적인 야망으로 느껴진다. 오디오가이드에 의하면 리스트는 옷장에 옷을 넣어두고 있지도 않았다. 옷장에 넣어둔 것은 옷이 아니라 악보들. 누가 옷을 훔쳐가는 것보다는 악보를 훔쳐가는 걸 훨씬 큰일로 받아들였던 리스트는 옷장에 옷이 아니라 악보를 넣어 뒀다고 한다. 리스트의 욕심이 외양이나 평판보다는 예술적 가치의 추구에 있었음을 가장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리스트는 자기가 아직도 유튜브 소개 영상에 '너무 잘생겨서 여자들 혼절시킨 19세기 최초의 아이돌' 같은 제목으로 등장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꽤 서운해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아이돌로 살았던 시간은 길어 봐야 한 25년 정도일 테고 나머지 인생은 진지하게 음악 하면서 살았는데 말이다. 게다가 그 '아이돌'로 살던 시기는 리스트 본인도 나중에 좀 부끄러워하면서 그때 쓴 연습곡들은 전부 시장에서 회수했었는데. 여자랑 세속의 명예를 포기하더라도 천상의 명예, 불멸의 업적을 이루고 싶던 리스트였을 텐데 역시 그의 초절기교 연습곡이나 마제파처럼 화려한 곡 이야기를 하기에는 어딘가 마음이 껄끄럽다. 원래는 바이로이트에서 리스트의 죽음을, 부다페스트에서 리스트의 말년과 명예를 다루었으니 이제 바이마르에서는 순회연주자 시절과 바이마르 카펠마이스터 시절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이 소박한 방을 보고 나니 그런 호사스러운 이야기를 하기가 미안해진다.
물론 앞서 본 소박한 방들과 달리, 레이아웃을 알지 못해 박물관에서 임의로 가구를 배치해 놓은 식당만은 리스트의 알텐부르크 시절, 그러니까 카펠마이스터 시절을 언급하기 적절한 곳으로 느껴진다. 담뱃대, 훈장들, 도자기들, 잔, 초상화들... 다른 두 박물관에서도 지겹게 본 것들이 여기에도 또 지겹게 널려 있었다. 하나하나 이야기를 담은 물건들이겠지만 이쯤에 와서는 그저 경외심과 피로가 느껴질 뿐이었다. 옛날에 앨런 워커의 리스트 전기를 읽을 때, 마지막쯤에 '리스트가 수여받은 훈장과 직위 목록'이라는 페이지가 따로 있었다. 그 훈장과 직위 목록이 두어 페이지를 꽉 차지하고 있던 기억이 얼핏 난다. 그때 느꼈던 압도감과 피로감이 이곳의 영예에서도 느껴졌다. 리스트도 아마 그 훈장과 영예들을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너무 많이 받아서 뭐가 뭔지 기억도 안 나고, 이제 이런 의미 없는 것들을 받아보아야 무엇하냐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그 '맥시멀'한 훈장들을 보고 있으면 세속의 영예에 등을 돌려버린 그가, 종교라고는 전혀 믿지 않는 나이지만 조금 이해가 갈 듯도 하다.
마지막 방은 하인 방으로, 리스트가 쓰던 지팡이 열몇 개가 꽂혀 있다. 심플하게 생긴 대나무 지팡이부터 박물관 소장품 소개 페이지에 있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화려한 조각이 되어 있는 지팡이까지 있었다. 옆의 캐비닛에는 바그너가 리스트에게 헌정한 파르지팔 악보가 있었다. 벽의 '리스트 씨, 환영합니다!' (Eljen Liszt) 작품도 시선을 잡아끌었지만, 어김없이 내 눈이 머무른 곳은 다시 한번 코지마와 리스트의 흉상에서였다. 오디오가이드가 반대편 벽의 리스트 흉상과 코지마 흉상이 얼마나 닮았는지를 보라고 말했다. 둘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닮았지만, 코지마에게서는 리스트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는 그의 너그러움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바그너조차도 리스트의 헌신과 너그러움에 감복하며 파르지팔을 헌정했지만 코지마는 아마 끝까지 리스트의 관대함에 조금도 감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코지마는 바이마르 리스트 박물관에 온 적이 있다. 딸의 손을 잡고 온 코지마는 "이 아름다운 것들이 여기서 별 쓸모도 없이 전시되고 있다니. 아버지께서 왜 자기 가족들에게 이것들을 남기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니까."라는... 희대의 불효발언을 한 적이 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면, 리스트의 유산, 20만 프랑은 전액이 다 카롤린의 딸인 (카롤린과 리스트 사이 딸이 아니고, 카롤린이 이전의 결혼에서 얻은 딸이다) 마리 호엔로헤에게 간 것이다. 마리는 이 돈을 리스트 박물관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 코지마 입장에서는 충분히 어이가 없을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만약 그 돈이 코지마에게 갔다라면 리스트 박물관이 만들어질 수나 있었을까...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만일 코지마에게 그 돈이 갔더라면 바그너를 기리는 바이로이트의 축제 어디쯤에서 그 돈은 전부 사라지지 않았을까. 코지마의 그 말에서 내가 느낀 것은 오직 바그너만을 향한 그녀의 편협한 애정이었다. 코지마는 리스트를 닮았다. 그러나 그의 가장 중요한 것을 닮지 않았다. 유산이 코지마에게 가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런데, 분명 다행인데, 이상하게 리스트 박물관을 나서는 걸음이 썩 가볍지 않았다. 좋은 박물관이었고 많은 전시품들이 있었는데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바이로이트에서도, 부다페스트에서도 느꼈던 그 감정이 바이마르에서는 훨씬 강하게 느껴졌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어딘가 모를 불편함. 긴장. 다른 작곡가 박물관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츠비카우의 슈만 박물관이나 프라하의 드보르작 박물관이 아무리 많은 소장품을 가지고 있어도 리스트 박물관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왜일까? 귀국을 해서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간략한 리뷰를 남기고 옛날에 찍어놓았던 박물관 영상들을 다시 봤다. 리스트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영상을 보고 혼절하기 직전이 되었다. 1841년 베를린을 휩쓴 리스토마니아 광풍이 여기도...라는 생각과 함께. 그때 이유를 깨달았다. 왜, 리스토마니아 광풍이 절정에 달했을 때 사람들은 리스트 집에 침입해서 목욕물을 향수병에 떠가고 머리카락 잘라달라고 난리를 쳐서 리스트가 개털을 깎아 보내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내가 마치 그런 극성팬이 된 기분이었던 것이다. 리스트의 허락도 안 받고 내밀한 공간을 침범한 느낌이랄까.
리스트를 다루는 박물관들 속 리스트는 너무나 '박제가 된 천재' 같다. 공리주의를 주장한 철학자 제레미 벤담은 자신의 시체를 박제해서 박물관에 전시하는 것이 모두에게 공리주의적으로 도움이 된다며 시체를 박제할 것을 부탁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 지금도 박물관에 전시 중이라는데, 리스트 박물관들의 경우에도 리스트를 그렇게 전시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런데 이제 벤담의 경우와는 달리 리스트의 동의를 받지 않고서 삶이 전시되는 것 같달까. 나는 원래 검열을 무척 싫어하고 작곡가의 편지들에서 '출판하기에 부적절한 부분'을 멋대로 편집한 편집자들이나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분통을 터뜨린다. 하지만 이렇게 정말 하나도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집을 그대로 전시해 놓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카롤린이 리스트의 편지를 검열해서 출판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갈 것도 같았다. 리스트의 집은 언제나 방문객이 끊이지 않았고 바이마르 리스트 박물관에도 연주회가 열리는 날이면 살롱에 의자가 잔뜩 놓여 사람들이 바글바글해진다. 거기서 커튼 한두 개만 지나가면 리스트의 침실이라는 점이 어딘가 섬칫하게 느껴진다. 마치 인생에 공과 사의 분리가 없는 사람 같다. 한 차례의 가공을 거친 다른 작곡가들의 박물관은 어디에 무엇을 놓아야 하고, 어떤 정보와 어떤 전시품을 연결 지어야 하는지에 따라 전시를 재구성해놓은 반면 바이마르의 리스트 박물관은 보존과 재현을 목적으로 하고 있던 것이다.
리스트는 이렇게 자신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침범해 들어오는 관광객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무서운 가능성이 뇌리를 퍼뜩 스친다. 어쩌면, 리스트에게는 사생활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척이나 희미했던 것 아닐까?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 함께 연주여행을 다녔고, 1840년대부터는 일거수일투족이 보도되는 생활을 하다 보니 이미 어디까지가 남에게 공개해도 되는 자신의 인생이고 어디서부터 아닌지가 혼란스러웠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정반대로 이미 질릴 정도로 많이 겪은 사생팬들과 극성 기자들에게 시달렸던 기억으로 관광객들에 진절머리를 낼지도 모른다. 사생활을 너무 중요시해서 신비주의로 살았다는 베르디나 아내와의 편지를 태우기로 합의를 본 그리그처럼 말이다. 리스트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자료와 기록이 남아 있다. 곡도 그렇지만, 그는 낭만시대 가장 많이 그려졌고 묘사되었고 후일에는 사진을 찍힌 인물이었으며 상당한 저술을 남겼고 그의 편지들은 아직도 분석 중이다. 제자들로부터 수많은 회고가 전해저 내려오고 신문기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순간 리스트가 남기고 싶었던 것은 자신의 음악적 유산과 자신의 이상이었을 텐데 신발 사이즈를 알아내고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쥐 잡듯 뒤지며 하루 일과표를 조사하던 나 자신이 순간 파파라치처럼 느껴졌다. 평소에는 지인들에게 농담조로 '너 정도면 작곡가 사생팬이야'라는 소리를 들어왔고 나도 웃었지만, 어쩐지 모든 것이 날것 그대로 전시된 바이마르 리스트 박물관에서는 그런 나 자신에게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이 글을 쓰면서도 조금은 얼굴이 화끈거린다. 작곡가의 옷이나 지갑 같은 게 남아 있기만 하면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던 나지만, 이상하게 그 먹잇감이 가장 풍부하게 주어진 리스트 박물관에서는 오히려 모든 것이 너무 잘 차려진 밥상처럼 놓여 있던 탓인지 희열보다는 묘한 불쾌감이 밀려들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온 기분이 들었다. 변태적인 관음증 환자들을 위한 훈장과 영예의 전시가, 한 번도 거르지 않은 삶의 모습을 전시한 것이, 한편으로는 너무 좋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이렇게까지 날것을 봐도 되는가? 그런 마음 한구석의 외침이 계속 내 가슴을 콕콕 찌르던 탓일 테다.
바이마르에 기념관이 있는 또 다른 유명인인 니체의 여동생은 관람료를 징수하고 병들어 누워 있는 니체를 사람들에게 구경시켜 줬다는데, 나 또한 그런 돈을 내고 유명인을 구경하고 온 듯한 죄책감이 씻겨지지가 않는다. 리스트의 편지가 '생채소처럼' 다뤄지지 않고 '옷을 제대로 갖춰 입은 채' 보이기를 바랐던 카롤린처럼 이 박물관도 조금은 더 '재현'이 아닌 '전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정답이었을까? 벌써 스물아홉 곳의 작곡가 박물관을 소개한 나도 그 정답은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리스트의 호의와 관대함을 남용하고 있는 또 다른 사생팬은 아닐까? 지금도 마음이 복잡하다. 내게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든 곳은 리스트 박물관이 유일했다. 리스트가 보이고 싶었던 모습, 리스트의 실제 모습, 남에게 보이던 리스트의 모습, 내가 보는 리스트의 모습이 희끄무레한 기름덩어리처럼 뒤섞인다. 괴테와 실러, 리스트와 니체, 수많은 유명인들이 오고 간 바이마르는 그렇게 내게 커다란 질문과 함께 회의를 던져주었다.
명칭: 리스트 하우스 (Liszt-Haus)
운영시간: 수요일-일요일 10:00~18:00, 단, 3월 말부터 11월까지만 운영한다. 검색 엔진에 따라 겨울에 연다고 나오기도 하는데, 현재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3월 21일에 다시 문을 연다고 나오며 최신 구글 리뷰는 11월 리뷰에 멈추어 있으므로 겨울에 닿는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한 듯하다.
입장료: 성인 5유로, 할인가 4유로... 인 듯한데 내가 갔을 때는 무료였고 'Free entry'라고 적혀 있어서 0유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다.
사이트 링크: Liszt House - Klassik Stiftung Weimar
힘이 들었다... 기차 환승이 정말 싫다. 마음먹고 가면 못 갈 곳은 아닌데, 접근성이 은근히 까다로워 차라리 라이프치히에서 차를 타고 가는 게 더 나을지 고민이 된다. 라이프치히를 거점으로 잡아도 한 번은 환승을 해야 하는, 은근히 작은 대학도시다 보니 접근성이 좋은 편은 아니다.
지하철은 따로 없지만 버스가 거의 리스트 집 바로 앞, 바우하우스 대학교에서 정차한다. 걸어서 가면 30분 정도를 각오해야 하지만 어차피 걷는 와중에도 실러와 괴테처럼 유명인 박물관과 볼거리가 많기 때문에 심심하지는 않다. 버스에서 내린 뒤에는 2분 안에 도착할 수 있다. 공원 안쪽으로는 리스트 기념 동상이 있고 도시 반대편으로는 리스트 음악학교가 있으므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리스트에 관련된 모든 장소를 방문해 보기를 권한다.
부다페스트에서 이미 5개를 초과하는 개수의 별이 한 번 나왔지만 여기는 더하다. 나를 불편하게 할 정도로 모든 게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박물관이었다. 주변 가구에 닿기라도 할까 봐 노심초사해야 하고 어떤 가구에 앉아도 전부 리스트가 가지고 있던 가구다 보니 소장품 훼손이다. 이렇게 조심스러워지는 박물관이라니... 한편으로는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하고 불편하다. 소장품이 너무 많아도 문제라는 것을 여기서 처음 느꼈다.
평범하게 영어가 지원된다. 오디오가이드는 무료고, 오디오가이드가 없으면 그 어떤 설명도 제공되지 않으니 반드시 오디오가이드를 받아가야 한다. 오디오가이드는 기기로 대여하지 않아도 휴대폰에서 바이마르 리스트 박물관 홈페이지를 검색해서 무료로 다운로드할 수 있다. 한국어 지원은 따로 없다.
오디오가이드 분량이 약 45분 정도다. 할인가가 4유로니까 비싼 돈은 아닌데, 집이 그리 크지 않다 보니 묘하게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그 안에 모든 소장품이 리스트 소유 원본들이다 보니 가성비가 절대 나쁜 건 아니다. 아, 물론 나는 무료로 입장했지만 (이유는 모른다) 여러분들은 돈을 내야 할지도 모르니까 4점이다.
오디오가이드가 있으면 45분이 걸린다. 절대 크지 않은 규모다. 없으면 부다페스트보다 조금 큰 수준이다. 원래는 1층에도 리스트의 음악을 들을 수 있고 리스트의 손 모형도 있는 상설전시관이 운영되고 있었는데, 2024년 기준으로는 운영되지 않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1층 상설전시가 2024년까지 운영되고 있었더라면 3점 정도는 줄 수 있었을 텐데.
하면 안 된다. 절대 만지면 안 된다. 절대, 절대 안 된다. 전부 다 리스트가 쓰던 물건이다. 거기다가 당신의 손때를 묻히고 싶다는 마음은 알겠지만 그러지 말자. '한국인이 리스트가 쓰던 물건에 손 대서 벌금' 이런 기사가 나오면 국격이 그대로 실추될 것이다.
책갈피와 엽서가 있다. 장사 더럽게 못 한다. 리스트라는 거물을 맡은 박물관이면 19세기 사람들처럼 피아노 모양 초콜릿 같은 걸 팔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이다.
9. 큐레이팅: ★★★
보존형 박물관이라서... 점수를 어떻게 매겨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박제를 해 놓았는데... 큐레이팅이랄 게 따로 있을까? 부다페스트도 그랬지만 바이마르는 정말로 리스트가 살던 모습을 그대로 둔 것이라서 할 말이 없다. 무섭다. 무서워서 오래 둘러보고 있을 수가 없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최대 장점: 리스트의 초가삼간을 뜯어온 것도 아니고 그냥 초가삼간을 그대로 보존해 놓은 박물관의 소름 끼치는 전시품들, 나름 저렴한 가격
최대 단점: 굿즈가 전혀 없음, 아무것도 만질 수가 없음, 큰 가방 못 들고 들어감
추천 여부: O, 이런 박물관은 유럽에서 좀처럼 찾기 힘들다. 이렇게 많은 가구가 그대로 남아 있는 작곡가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어차피 바이마르에 볼거리 많으니 한 번 살짝 들렀다가 가면 좋은 박물관이 아닐까? 물론, 이 박물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바이마르를 방문할 가치가 있다.
29화 예고: 드디어 마지막 박물관이다. 벌써 마지막 박물관이라니 시원섭섭하다. 2022년 6월, 2024년 2월, 2024년 6월 세 번의 방문. 1화 라이프치히 바흐 박물관에서 시작해 우리는 다시 라이프치히로 돌아왔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곡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언급했지만 일부러 순서를 맨 뒤로 미룬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 어쩐지 갈 때마다 사건사고가 터지지만 그래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박물관! 라이프치히 중앙역에 내려서 지도 없이도 찾아갈 수 있는 박물관, 라이프치히 펠릭스 멘델스존 박물관을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