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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프 루트비히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 ('멘델스존'은 특징적인 유대계 성이고, 후일 기독교도가 되며 멘델스존 가족은 전부 유대계 색채가 덜한 '바르톨디'라는 성을 이름에 덧붙였으니 원칙적으로는 그를 계속 멘델스존 바르톨디라고 불러야 맞지만, 편의상 간단히 '멘델스존'으로 적을 것임에 양해를 구한다) 1809년 2월 3일 태어나 1847년 11월 4일 사망한 독일의 작곡가. 대표작은 '한 여름밤의 꿈' 서곡,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교향곡 3번 '스코티쉬'와 교향곡 4번 '이탈리아', (나보다 중증 멘델스존 오타쿠인 친구는 2번 '찬양의 노래'와 5번 '종교개혁'도 좋아한다) 피아노 소품 '무언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곤 하는데, something이 아니라 songs without words이다. 가사 없는 노래라는 뜻이다), 엄격변주곡, 현악팔중주, 오라토리오 '파울루스'와 '엘리야',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한 여름밤의 꿈' 가운데 '축혼행진곡'이다. 보수적인 색채와 완벽한 기교, 절제된 표현과 때때로 바로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실험성과 괴짜 같음, 달콤한 선율과 온화한 분위기... 요즘 나는 어떤 곡을 들으면 그 곡이 멘델스존의 스타일과 얼마나 비슷한지에 따라 점수를 매길 정도다. 건강한 정신에 건강한 곡이 깃든다. 우울하지 않은 곡으로도 충분히 예술적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멘델스존에게 푹 빠진 건 2020년 10월쯤이었다. 생일선물로 베를리오즈의 회고록 한국어판 '음악여행자의 책'을 선물 받고 동시에 위키백과에 올라와 있는 뉴그로브 대사전 '멘델스존' 페이지를 읽었다. '음악여행자의 책' 속 베를리오즈의 시선으로 그려진 멘델스존은 귀여운 사람이었고 뉴그로브 대사전 속 멘델스존은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원래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때는 아무런 이유 없이 좋아하게 된다. 흔히 '최애는 점지받는 것이다'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내게도 그랬다. 그 이후 나는 무려 4년 반동안 멘델스존을 '덕질'해왔다. 한국에 나와 있는 포노사의 '멘델스존 그 삶과 음악' 정도로는 만족스럽지 않아 베르너의 멘델스존 전기, 토드의 멘델스존 전기를 뒤졌고 멘델스존이 1829년부터 1847년 죽을 때까지 쓴 편지집을 영어로 독파했으며 멘델스존의 지인들이 멘델스존에 대해 회고한 글을 뜯어봤다. 그러고도 모자라 멘델스존 부부의 신혼일기장을 뒤졌고 파니 멘델스존과 멘델스존 가문에 대해 다룬 글도 뒤졌다. 모셀레예스 부부에게 보낸 멘델스존의 편지도 읽었다. 멘델스존 관련 논문집인 '펠릭스 멘델스존, 전통과 진보의 경계'도 읽었다. 그랬는데도 갈증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택했던 첫 번째 극단적인 수단이 친구와의 유럽여행이었고 두 번째 극단적인 수단이 독일로의 교환학생이었다.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묻는 건 바보 같은 질문이다. 좋아하는 마음에는 본래 이유가 없는 법이다. 좋아하게 된 계기는 있지만 이유는 없다. 어찌 보면 작곡가 가운데 가장 평탄하고 지루한 인생을 산 축인데도 멘델스존은 내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객관적으로 살펴보자면 멘델스존의 인생에는 베토벤의 극복서사도, 리스트의 치정문제도, 베를리오즈의 위트도, 슈만의 낭만적인 러브스토리도 없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멘델스존의 삶을 더 알고 싶다. 여기에 객관성은 이미 의미가 없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듯 내게 더 극적이고 흥미로운 인생을 살았던 작곡가들 이야기를 해 주어도 나는 결국에 멘델스존으로 돌아온다. 만약 내가 아이돌이나 뮤지컬 배우를 이 정도로 좋아했더라면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대신 이미 사생팬이 되어 유치장에 앉아 있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19세기가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서 다행이다.
2022년 6월, 나와 내 친구는 바흐 박물관에서 나와 널찍한 도로를 건너고, '링 카페'가 있는 건물을 지나 골드슈미트슈트라세로 진입했다. 벽면에 희미하게 적힌 '멘델스존하우스'라는 글자와 산들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주황색 깃발이 아니었더라면 그냥 지나쳤을 정도로 평범한 집이었다. 도심 살짝 바깥쪽에 위치한 골드슈미트슈트라세는 라이프치히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대거 건설된 주거단지의 일부였다. 1844년 신고전주의양식으로 건축된 멘델스존의 집에 펠릭스 멘델스존 일가가 입주한 것은 1845년, 멘델스존이 죽기 2년 전이었다. 이때 펠릭스 멘델스존의 가족은 이미 6명, 펠릭스 멘델스존과 아내 세실 멘델스존, 아들 칼 멘델스존과 파울 멘델스존 그리고 펠릭스 멘델스존 주니어, 마리 멘델스존이었다. 멘델스존이 이 집으로 이사 오고 얼마 지나지 않은 1845년 9월에는 부부의 막내딸 릴리 멘델스존이 태어난다. 저런, 펠릭스 멘델스존이 1847년에 죽는다는 것을 알고 아이들의 생년월일을 다시 살펴보면 멘델스존이 죽은 건 첫애가 열 살일 때, 그리고 막내가 두 살일 때다. 심지어 펠릭스 멘델스존이 죽고 6년 만에 아내 세실 멘델스존도 서른여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 버리니 멘델스존 부부의 아이들은 아무리 많아 봐야 열여섯, 심하면 여덟 살에 고아가 되어버린다. 멘델스존 사후 멘델스존의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시댁이 있는 베를린으로 이사하니, 이 집은 멘델스존 가족의 딱 2년 만을 함께한 집이다. 하지만 멘델스존이 살았던 라이프치히의 신혼집, 루르겐슈테인스가르텐이나 멘델스존의 십 대와 이십 대 초중반을 책임져 준 베를린의 라이프치히 거리 3번지는 이미 헐렸고 멘델스존이 살았던 건물 가운데 남아 있는 건물은 이곳밖에 없으니, '멘델스존하우스'라는 명칭은 아마 이후로도 멘델스존하우스가 더 생긴다 하더라도 이곳만 쓸 수 있는 명칭일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펠릭스 멘델스존은 젊어서 노세는 무슨, 젊어서 죽어라 일을 한 덕분에 돈이 많았다는 거다. 골드슈미트슈트라세 12번지의 1층 (한국 기준 2층) 은 멘델스존 가족이 살던 '벨에타주'다. 돈이 없어 엘리베이터가 없던 시대 4층 5층까지 올라가서 살아야 했던 작곡가들 집과 비교해 보면 멘델스존은 넉넉하게 살긴 한 셈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작곡가 박물관을 30곳씩 다녀본 사람이라면 멘델스존 가족이 살던 집이 생각만큼 엄청나게 크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멘델스존 가족이 만약 현재 멘델스존하우스로 사용되고 있는 4층짜리 집을 전부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면 또 모를까, 펠릭스 멘델스존이 사용한 층은 0층부터 3층까지 가운데 1층이 전부였다. 골드슈미트슈트라세 12번지 1층의 방은 총 9개. '넉넉하게 살았네'라는 말은 나와도, '살로메'를 통해 번 돈으로 저택을 한 채 통째로 지어버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나 17편, 바이로이트 바그너 박물관의 반프리트 저택을 떠올려보면 의외로 그리 크지 않은 셈이다. 많은 교양서들에서 멘델스존을 '금수저 음악가'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아버지 아브라함이 은행가라는 점을 봤을 때 '금수저'라고는 해도 평생 돈이 썩어 넘칠 만큼 많았다는 건 오해다. 바그너 등의 저택은 상대적으로 땅값 싼 시골에 위치해 있고 멘델스존의 임대주택은 도시에 있다는 점을 고려해도 말이다. 당시에는 어떻게 사용되었던 곳들인지 모르겠지만, 현재 0층은 보조 전시실과 편의공간으로, 2층은 파니 멘델스존-헨젤과 쿠르트 마주어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낮은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면 박물관은 방명록으로 시작한다. 2022년과 2024년은 다른 방명록을 사용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2024년 2월에 방문했을 때 2022년 6월에 내가 남겨놓은 기록은 볼 수 없었지만, 2024년 6월에 갔을 때는 2024년 2월에 내가 남겨놓은 글을 볼 수 있었다. 파란색에 금색으로 멘델스존 실루엣이 박혀 있는 방명록을 보면 '멘델스존 집에 왔구나!' 하는 실감이 난다. 이 가운데 2024년 6월의 방명록은 예기치 못한 일로 이어지는데, 이건 다음 글에서 이야기하겠다.
티켓 오피스와 박물관 MD샵, 그리고 카페는 모두 입구에서 제일 가까운 방에 함께 있다. 카페는 도로 쪽을 내다보는 뷰라서 뷰가 썩 예쁘지는 않고, 약 12인 정도만 수용할 수 있다. 나와 내 친구가 락커룸에 옷과 짐을 보관해 두고 제일 먼저 향한 방은 자료실이었다. 12개의 의자와 6개의 미디어 테이블로 구성된 자료실의 가장 귀중한 점은 펠릭스와 파니 멘델스존의 모든 곡이 녹음된 태블릿이다. 나는 멘델스존의 음악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멘델스존 피아노 트리오 2번 1악장을 느긋하게 듣고 일어났다. 푸른색 벽지 덕에 차분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나서 앉아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뿐 아니라 태블릿에는 건물의 역사와 멘델스존 남매들의 삶을 압축해서 읽어볼 수 있는 페이지까지 따로 마련되어 있으니 벌써부터 멘델스존에게 진심인 사람들의 향기가 느껴진다.
원래 다음 방은 이펙토리움이지만, 멘델스존하우스에서 가장 유명한 공간이기도 하고 나는 늘 이 공간을 모든 전시를 둘러본 뒤에 방문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른 전시들을 먼저 살펴보자. 세 번째 방에서는 멘델스존 기념비가 어떤 역사를 거쳤는지 설명해 준다. 라이프치히에는 몇 가지 유명한 멘델스존 기념물이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멘델스존 포탈' 근처에 위치한 멘델스존 동상이다. 이 멘델스존 동상에는 복잡한 역사가 얽혀 있다. 1936년 11월 10일, 독일을 방문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토마스 비첨 경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앞 세워진 멘델스존 동상에 헌화할 생각으로 게반트하우스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분명 1892년부터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앞에 세워져 있던 동상이 사라진 것이다! 당연히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비첨 경은 당황했다. 알고 보니 운명의 장난처럼 바로 전날인 11월 9일, 멘델스존 동상은 통째로 헐려버렸던 것이었다. 화강암 기단은 1942년에 석공에게 팔렸고, 청동 부분은 어떻게 됐는지 추적할 수 없지만 아마도 전시 무기를 만드는 데 녹여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 당시 집권당이던 나치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유대인들을 편리한 희생양으로 삼았고, 멘델스존 또한 (일곱 살에 이미 세례를 받아 평생을 독실한 루터교인으로 살았음에도 불구) 유대계 혈통으로 인해 나치에게는 아니꼬운 존재가 되고 말았다. 동상이 헐린 것과 같은 해인 1936년, 멘델스존의 음악은 "음악사의 위험한 사고" 라며 공연을 통째로 금지당하게 된다. 멘델스존의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인 '한여름 밤의 꿈'은 아예 대놓고 이걸 대체할 곡을 만들어올 작곡가를 찾는다며 나치가 작곡가들에게 연락을 넣고 다닐 정도였다. 대부분의 작곡가들은 아무리 나치에 동조적이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며 거절했지만 딱 한 명, 오르프가 '멘델스존'이라는 불온작곡가의 음악을 대체할 만한 '한여름 밤의 꿈'을 시도해 보았다. 지금 '한여름 밤의 꿈' 하면 아무도 오르프를 떠올리지 않고 다들 멘델스존을 떠올리는 걸 보면 나치의 계획은 대실패였던 듯하다.
멘델스존의 외손자 되는 펠릭스 바흐 (Felix Wach)는 목숨을 걸고 가족을 대표해 동상 철거에 반대했다고 한다. 이분 외에도 많은 멘델스존 가의 후손들이 펠릭스 멘델스존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서 말 그대로 목숨을 걸었다. 개인적으로는 멘델스존의 친손자 알브레히트 멘델스존 바르톨디 (1874~1936) 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이분은 1934년 대학 교수직에서 잘리고 나서 스위스를 통해 영국으로 탈출하는 길에 할아버지 펠릭스 멘델스존의 편지집, '그린 북'을 전부 영국으로 가지고 갔다. 특유의 꼼꼼함과 세심함으로 받은 모든 편지를 정갈하게 정리해 놓고 편지에 보낸 사람의 이름이나 날짜가 적혀 있지 않은 경우 따로 다 기록해놓기까지 한 펠릭스 멘델스존의 무려 27권이나 되는 편지집이 없었더라면 내가 몰랐을 멘델스존의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겠는가. 안타깝게도 멘델스존의 후손 중 일부만이 영국, 미국 등으로 탈출에 성공했고 나머지는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렇게 사라졌을 수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이야기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절로 무거워진다.
상처 입은 것은 사람들뿐이 아니었다. 라이프치히라는 도시도 공습으로 인한 피해를 크게 입었다. 전쟁 후 1946년 10월 2일, 멘델스존의 생몰년월일을 적은 비석이 임시로 두 번째 게반트하우스의 잔해 앞에 세워졌다가 1947년 11월 4일, 멘델스존의 100번째 기일을 맞아 발터 아르놀트의 멘델스존 흉상으로 대체되었다. 이 흉상은 지금 라이프치히의 '멘델스존 우퍼'로 옮겨졌는데, 이곳에 가면 이 흉상 말고도 강변 계단 중간중간에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주제선율 모양으로 배치된 사각형 의자들을 구경할 수 있다. 나도 이 사실을 알았다면 좀 시간을 들여서 멘델스존 우퍼도 보고 왔을 텐데, 라이프치히는 갈 때마다 볼 게 너무 많아서 늘 뭔가를 놓치고 온다. 아무튼, 이 흉상은 결국 쿠르트 마주어의 주도 하에 복원된다. 이런 극적인 이야기를 듣고 나면 이 동상을 꼭 방문해보고 싶지 않아지는가? 그래서 2024년 6월, 멘델스존 광팬 둘이서 같이 동상을 방문했다. 그 이야기는 또 다음 글에서 하자.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게반트하우스 이야기가 나왔으니, 멘델스존 하우스 0층의 다섯 번째 전시실이 다루고 있는 게반트하우스에 대해서도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자. 내가 2024년 2월 3일 라이프치히에 방문한 목적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가 멘델스존하우스 2차 방문이었고 다른 하나가 멘델스존의 직장이었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방문이었다. 2024년 2월 3일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의 무료개방일이자 펠릭스 멘델스존의 215번째 생일이었다. 일부러 멘델스존의 생일에 맞춰서 무료개방을 한 것일까? 그 전년도에는 무료개방일이 10월인가 11월인가였는데, 2024년에는 무료개방일이 2월 3일인 덕분에 비싼 공연을 따로 예매하지 않고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내부를 구경할 수 있었다. 왜 라이프치히에 오후 두 시가 다 되어서야 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무튼 내가 게반트하우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세 시였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무료 개방의 날 프로그램은 회랑부터 대공연장과 멘델스존잘까지 게반트하우스의 모든 곳을 꽉꽉 채우고 있었다. 오후 세 시의 프로그램은 대공연장의 모차르트의 '주피터' 교향곡이었다. 무료개방의 날이다 보니 평소에는 티켓을 구하기도 어렵고 부담도 많이 되는 클래식 공연을 가깝게 느끼게 해주고 싶던 건지, 유달리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2022년 6월에도 멘델스존하우스 근처 분수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봤었고 2024년 2월에도 공연장에서 몸을 꼼지락거리고, 더 좋은 자리를 찾아서 인파를 헤치고, 피아노를 신기한 듯 바라보는 아이들이 잔뜩이었다. 라이프치히는 대학도시로 유명해서 대학생 정도 나이의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갈 때는 이상하게 아이들이 많이 보였다. 아이들이 많은 도시는 살기 좋은 도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라이프치히는 살기 좋은 곳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불이 꺼지고 모차르트 교향곡이 울려 퍼졌다. 모차르트 곡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 공연이라니,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재미있게도 이날의 프로그램에는 오펜바흐, 생상, 레오폴트 모차르트,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까지 있었으면서도 정작 멘델스존 곡은 단 한 곡도 없었다. 의도적으로 피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멘델스존 생일에,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가 무료 개방을 한 건데 정작 멘델스존 곡이 없다니... 무척 아쉬웠다.
그렇게까지 아쉬울 일이냐고? 그렇게까지 아쉬울 일이다. 멘델스존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의 다섯 번째 감독이자 가장 중요한 감독이었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1835년 10월 4일, 아직 그리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도 없던 첫 번째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무대 위에 스물여섯의 카펠마이스터가 올라섰다. 로베르트 슈만은 관객석에서 멘델스존의 라이프치히 데뷔를 지켜봤다. 베버와 슈포어가 사용하긴 했지만 여전히 생소하던 바통을 들고, 콘서트마스터가 아닌 지휘자가 무대를 지휘했다. 관객들은 환호했다. 슈만은 "첫 순간부터 수백 명의 마음이 그에게 사로잡혔다 (A hundred hearts flew to him)"라 적었다. 라이프치히는 멘델스존을 사랑했고, 멘델스존은 라이프치히를 사랑했다. 다른 것보다도 아마 6개월만 라이프치히에 있고 나머지 6개월은 작곡과 여행을 위해 비워놓을 수 있다는 것이 여행을 좋아하던 멘델스존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던 것 아닐까. 아무튼 멘델스존은 라이프치히의 너그러운 요구에 응답했다. 멘델스존은 콘서트마스터가 무대를 지휘하던 관행을 깼다. 오케스트라와 직접 소통하고 유대를 맺기 위해서였다. 멘델스존은 본인 말에 따르면 지속적으로 '취미 삼아' 단원들의 형편없는 급료를 올려주기 위해 주기적으로 시에 청원을 넣었고 실제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며,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수준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이전에 비해 선대 작곡가들의 곡을 대폭 늘리기도 했다. 괜히 멘델스존이 최초의 현대적 의미의 지휘자라는 이야기가 있는 것이 아니다. 게반트하우스에서 수많은 초연이 이루어졌고 1842년, 멘델스존이 아직 살아 있을 때 1차 게반트하우스는 확장공사를 거쳐 1000명을 수용 가능한 어엿한 공연장이 되었다. 비록 지금은 1884년 세워진 2차 게반트하우스를 지나 1981년 세워진 3차 게반트하우스 건물이 사용되고 있는 바람에 멘델스존이 서 있던 공간에 그대로 앉아서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멘델스존이 한때 일했던 오케스트라가 이어져오고 있고 내가 그 공연을 들을 수 있다는 감동은 말로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음악 교육 보편화를 주장했고 음악원까지 세우며 음악을 널리 알리려고 하는 멘델스존의 정신이 느껴지는 무료 개방의 날에 듣는 공연이라니... 온몸이 짜릿했다. 척추를 타고 전율이 흘러내릴 정도였다. 멘델스존의 무덤 앞에서는 느낄 수 없던 짜릿함이었다. 누군가가 단순히 살던 집을 방문하거나 그 사람의 시신이 누워 있는 공간을 방문하는 것도 의미가 깊지만, 그 사람의 정신을 이어받는 체험을 한다는 것이야말로 정말로 짜릿한 것이다. 그래서 멘델스존 곡을 게반트하우스 연주로 멘델스존의 생일에 들을 수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으나 멘델스존잘과 멘델스존 조각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었다.
멘델스존 하우스 0층의 마지막 전시실에 전시되고 있는 것은 바로 1차 게반트하우스의 모형이다. 멘델스존이 살았던 시대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대형 모형과 함께 게반트하우스가 라이프치히에서 가진 의미와 1842년 확장공사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뒤를 돌면 멘델스존과 관련이 있는 동시대의 물품이나 멘델스존이 소장하고 있던 물품 등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다. 멘델스존의 수채화 원본부터, 세실 멘델스존의 진주 달린 십자가와 실크 부채, 멘델스존이 주고받은 편지, FMB 이니셜이 박힌 은촛대, 멘델스존과 세실 멘델스존의 초상화, 손 석고, 멘델스존의 조카 제바스티안 헨젤이 출간한 '멘델스존 가족' (Die Familie Mendelssohn) 초판본 등이 다양하게 전시되고 있다. 이 '멘델스존 가족' 책은 내가 멘델스존에게 푹 빠져서 몇 번을 읽었던 책들 가운데 한 권이라서 초판본을 보자 반가운 마음이 반짝 들었다. 비록 나는 무료 구글 도서로 읽었고 내 눈앞에 있는 책들은 가죽 장정이 된 원본이라는 차이가 있었지만 말이다. 멘델스존이 소장하던 호메로스의 오디세이 전집도 볼 수 있었는데, 또 멘델스존이 소장하던 책이라고 하니 한 가지 추억이 떠오른다. 교환학생을 가기 전 멘델스존의 서재에 어떤 책들이 있었는지 멘델스존이 카탈로그를 싹 다 만들어놓았고, 그걸 분석한 논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었다. 그런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국에서 그 논문집을 구할 방법도 없었고, 무슨 50주년 기념 논문집이라서 논문 공유 사이트에 올라와 있지도 않고 저자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싶어도 이메일을 몰랐다. 그 논문집을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이 독일에 있다는 사실을 듣고 독일에 가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가 그 논문집을 가지고 있는 도서관에 가서 대출증을 발급받는 것이었다. 외부반출불가자료라서 그 독일 도서관에 앉아 몇 시간 동안 멘델스존의 서재에 어떤 책이 있었는지 설렘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눈에 하나하나 새겨 넣었던 기억이 났다. 멘델스존을 더 잘 알고 싶은 마음에 한 짓이 워낙에 많다 보니까 전시물 하나하나가 멘델스존에게만 의미 있는 전시물들이 아니라 내게도 의미가 있는 전시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체인에 감겨 돌돌돌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하는 전시물들의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고 전시물들과 연결되는 나의 추억을 되짚고 있으면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간다. 그 수많은 전시물들 가운데서도 내 시선을 확 잡아끈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멘델스존하우스 공사를 하면서 뽑아낸 오래된 원본 못(!)이었다. 일단 각각의 전시품들에 대해서 '단 한 가지도 설명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로 모든 전시품들이 멘델스존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려주고 편지 내용도 전부 번역해 주는 것만 봐도 보통 박물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거기다가 원본 '못'을 전시하는 정신 나간 박물관이라는 것을 보는 순간 이 박물관은 정말 멘델스존을 아끼는 사람들이 만들어가고 있는 공간임을 느낄 수 있었다. 뽑혀 나오는 과정에서 뒤틀리고 꺾인 못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1층으로 올라갈 차례다. 드디어 멘델스존이 살던 공간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전시실을 나가 연결되는 계단으로 올라가기 직전 갑자기 1831년 멘델스존 초상화로 만든 멘델스존 등신대 입간판을 마주치게 된다. 솔직히 그윽한 눈빛이 좀 부담스럽다. 하지만 박물관에서 이렇게 작곡가 등신대 입간판을 세워놓는 경우가 많은 건 아니다 보니까 웃음이 피식 나오긴 한다. 멘델스존 등신대를 뒤로하면 1845년부터 그대로 보존되어 온 나무계단이 우리를 맞이한다. 계단을 한 칸 올라갈 때마다 삐걱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바흐박물관의 계단은 이렇게 보존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2022년 6월 멘델스존하우스를 방문했던 내게는 처음 들어보는 삐걱거림이었다. 한 걸음을 밟을 때마다 나무가 약간, 아래쪽으로 탄력 있게 휘는 느낌이 들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혹시 내가 계단 밟았다가 나무 판이 부러지고 나는 떨어지고 박물관에서는 내게 배상을 청구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까지 느껴졌다. 2022년 6월 같이 간 친구와 나 둘 다 삐걱거림에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라고 중얼거렸고 나보다 먼저 이탈리아에 교환학생을 다녀왔던 친구도 (비발디를 좋아한다) 자기도 멘델스존하우스를 방문했을 때 삐걱거리는 계단에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원본 계단을 보존하는 건 정말 좋지만 그 삐걱거림이 무섭긴 하다. 빈의 다른 박물관 계단들도 꽤 삐걱거리긴 했지만 아직도 멘델스존하우스에서 처음 오래된 계단을 밟으며 느꼈던 충격은 잊히지가 않는다. 하지만 계단이 Y자 형태라서 두 갈래로 내려오거나 올라갈 수 있다는 점은 정말로 마음에 든다. 일자로 내려오는 계단에는 멋이 없다. 1840년 리스트가 라이프치히에 왔을 때 높은 티켓 가격으로 인해 성난 라이프치히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멘델스존 부부가 연회를 열어줬다고 하는데, 그때 참석자 중 한 명은 세실 멘델스존에 대해 "멘델스존 부인께서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천국에서 온 방문객처럼 손님들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라고 남겼다. 이런 Y자형 계단에서는 그렇게 내려오는 효과가 배가되겠지...라고 생각하며 생명의 위협으로 인해 두근거리는 심장을 다스렸던 기억이 난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오고 나면 이번에는 삐걱거리는 바닥과 멘델스존의 집이 우리를 맞이한다.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관람객이 별로 없는 바람에 나 혼자뿐인 공간에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울려 퍼진다. 귀신이 나올 것 같다. 하지만 귀신이 나온다면 아마도 멘델스존 귀신이 나올 테니까 오히려 좋은 일이 아닐까. 처음 우리를 마주하는 작은 방 세 개는 각각 작곡가로서의 멘델스존, 멘델스존의 친구와 동료들, 그리고 멘델스존의 롤모델들을 다루고 있다. 이 작은 방 세 개는 보면대처럼 생긴 설명문들을 가운데에 두고 있다. 멘델스존의 1834년 초상화만이 앞에 걸려 있는 '작곡가로서의 멘델스존 방'에서는 멘델스존의 온화하게 웃는 모습과 시선이 느껴져서인지, 정말로 멘델스존이 방문객이 설명을 다 읽을 때까지 천천히 기다리며 안내해 주는 기분이 든다. 방이 크지 않고 주변 벽 색깔도 어두운 색이 아니라 밝은 색이라 그런지 압도당하는 기분이 아니라 집주인과 대화를 하면서 차 한잔을 마시는 것만 같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벽이 많아 숭고하고 위엄 있는 분위기였던 반프리트 (17화 참고) 와는 대조적인 분위기다. 옆 방, 멘델스존의 친구와 동료들 방에는 22명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데 초상화를 보고 이름과 멘델스존과의 관계를 바로 읊을 수 있는 사람이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무척 자존심이 상했다. 멘델스존 공부를 아직 할 거리가 많이 남았음을 절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예니 린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요제프 요아힘, 로베르트와 클라라 슈만처럼 유명한 사람들도 있지만 정말 멘델스존의 친구들을 모아놓은 자리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얼굴도 너무나 많다. 한 장 한 장을 넘기면 초상화 속 인물들의 이야기가 하나하나 나와 있다. 별 게 아닌데도 초상화 아래에 단순한 설명을 붙여놓는 것이 아니라 페이지를 하나하나 넘기고 있으면 멘델스존의 인생을 들춰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행복해진다. 마지막 멘델스존의 우상 칸에는 너무나 예상 가능한 바흐를 비롯한 다양한 작곡가들에게서 멘델스존이 받은 영향을 정리해 준다.
네 번째 방은 최대한 원본을 그대로 복원한 세실 멘델스존의 방이다. 대부분의 물건들이 멘델스존 가족들의 컬렉션에서 영구대여해 온 것이다. 때문에 보존 문제로 인해 (바이마르 리스트 박물관과는 다르게) 출입을 제한하고 있어 바깥쪽에서 방 안쪽을 살짝 들여다보는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 살짝 뿌옇게 들어오는 햇빛이 방을 어슴푸레하게 방을 밝힌다. 부드러운 파스텔톤 연둣빛의 벽지와 쉬폰 커튼은 방에 섬세하고 부드러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앰파이어 시대의 가구와 비더마이어 시대의 가구가 살짝 혼재되어 있는 방은 비더마이어 양식의 소박함과 깔끔함, 점잖음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특히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쯤 유행했던 '눈이 편안해지는 색조'로 되어 있어서 이 집의 주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가 인테리어만으로도 확실하게 느껴진다. 벽에는 멘델스존이 가장 존경하던 화가 티치아노의 모작 두 점, '성모승천'과 페사로의 성모' 두 점의 성화가 걸려 있다. 티치아노의 '성모승천'은 성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게도 큰 감명을 남겼던 그림이었다. 여행도 할 겸, 멘델스존의 발자취도 좇을 겸 부활절 휴가에 베네치아를 다녀오며 멘델스존이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했던 티치아노의 '성모승천' 원본을 보러 갔다. 그리고 왜 그렇게 칭찬을 했는지 완전히 이해했다. 휘황찬란한 금빛과 복잡한 부조 사이를 헤치며 지나가다 보면 이미 압도되어 있는 상황에서 거대한 성모승천 그림을 마주하게 된다. 위와 옆으로 들어오는 빛이 그림의 금빛 광휘를 덮으며 자연의 빛과 인간이 만들어낸 금빛이 함께 빛나게 된다. 자연스레 나의 시선은 승천하는 성모를 바라보는 저 한참 아래에 위치하게 되고, 고개를 꺾어 그림의 꼭대기 부분을 바라보면 정말 그 광경을 바라보는 한 명의 평범한 신도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 멘델스존이 느꼈던 감정을 나도 체험할 수 있다는 기쁨에 더불어 작품 자체에서 받은 감동으로 인해 성당에서 '성모승천' 마그넷을 사 왔고 그 마그넷은 지금도 우리 집 미술품 자석 컬렉션의 맨 꼭대기에 당당하게 자리 잡은 채 있다.
원래 관람 동선을 따라가면 멘델스존의 서재부터 관람해야 하지만, 나는 멘델스존의 서재라는 아이코닉한 공간은 늘 방문의 마지막으로 미뤄놓기 때문에 다른 방들부터 먼저 탐방하도록 하자. 여섯 번째 방은 네 번째 방과 마찬가지로 마호가니 나무와 체리나무로 만들어진 가벼운 갈색 나무와 부드러운 초록색 벽지가 돋보이는 거실이다. 특기할 만한 점은 루소와 볼테르의 흉상이 있다는 것 정도 아닐까. 아니다. 오히려 부드러운 초록색 벽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멘델스존의 수채화를 몇 번 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겠지만 멘델스존의 수채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색은 종종 초록색과 파란색이다. 특히 이탈리아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을 그린 멘델스존의 그림 같은 경우, 두오모 성당의 특징적인 붉은 지붕에도 불구하고 멘델스존은 붉은색을 아예 날려버렸다. 그래서 나는 멘델스존이 초록색이나 파란색을 좋아하지 않았냐는 합리적인 의심을 오랜 시간 해왔는데, 일부 논문에 의하면 실제로 멘델스존이 가장 좋아하는 색은 초록색이었다고 한다. 멘델스존 집안에서는 책을 새로 장정할 때 초록색 가죽을 썼다고 하는데, 아마 이것이 펠릭스에게도 그대로 습관으로 내려온 것 아닐까. 펠릭스 멘델스존도 보통은 책을 따로 장정하지 않았지만 본인만의 책으로 새로 장정하고 싶을 때는 초록색 가죽으로 장정했다고 한다. (현대에는 책을 새로 장정하는 일이 거의 없어서 나도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커버를 새로 덧씌우는 느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차분하지만 생기가 넘치고 온화한 색감이니 멘델스존과 잘 어울리는 색인 것 같기도 하다. 세실 멘델스존의 기록에 의하면 펠릭스 멘델스존은 어떤 가구를 살지, 어떤 그림을 걸지, 그림을 건다면 어디에 걸지 따위를 전부 세심하게 지시하는 사람이었다. 현대에도 인테리어는 아내에게 전적으로 맡겨두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멘델스존이 얼마나 지독하게 섬세하고 꼼꼼했는지 (조금은 피곤할 정도로) 바로 느껴진다. 그러니 아마 복원 시 남아 있는 벽지를 참고해서 새로이 칠한 이 색감들도 멘델스존이 하나하나 직접 지시한 색감이지 않을까, 싶다.
7번부터 13번 방까지 7개의 방은 대체로 전시공간이다. 7번 방은 멘델스존과 멘델스존의 가족 이야기를 다루는 곳이다. 열려 있는 문을 통해 들어가면 1:1 비율로 만들어진 펠릭스와 세실 멘델스존 석고 마네킹을 마주치게 된다. 대체 멘델스존하우스는 왜 이렇게 등신대나 마네킹 같은 걸 좋아하는 걸까... 정말 잘 모르겠다. 세실 멘델스존 마네킹은 가장 유명한 1840년 초상화 속의 짙은 푸른색 드레스 아래 얇은 하얀색 셔츠를 입고 있고, 펠릭스 멘델스존 마네킹은 아래층에서 봤던 1831년 초상화와 유사하게 까만 크라바트에 하얀 베스트, 하얀 바지와 까만 코트를 입고 있다. 얼굴 조형은 하나도 닮지 않았고 머리카락은 가발 처리를 하는 대신에 석고로 붙여버려서 기분이 좀 이상하다. 멘델스존하우스 프로그램 중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야간에 박물관 탐방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 프로그램을 하다가 아래쪽에서 손전등 잘못 비추면 정말 섬뜩할 것 같다. 문 안쪽에는 펠릭스 멘델스존의 할아버지 모세 멘델스존 (1729~1786, 독일의 철학자. 칸트를 누르고 공모전에서 수상한 것으로 유명하며 계몽과 종교에 대해 많은 저술을 남겼다)으로부터 시작해 아브라함과 레아 멘델스존, 그리고 파니, 펠릭스, 레베카, 파울까지 멘델스존 4남매의 초상화가 달려 있다. 일부 교양서에서 가끔 멘델스존이 누나 한 명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새빨간 거짓말이다. 엄연한 4남매였다. 4남매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해 갔다. 레베카가 펠릭스의 옷을 소파에 꿰어버리는 장난을 치기도 했고, 파울과 펠릭스는 서로 할퀴면서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에 4남매는 끝까지 화목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가족들은 주기적으로 만나고 연락을 주고받았고, 펠릭스와 파니, 레베카까지 요절해 버린 뒤에는 파울이 (형 펠릭스 위주로) 기록을 정리하고 보존하는 일을 맡았다. 또 요절해 버린 이들의 자식들도 파울이 많이 돌봐주었다.
그 끈끈함은 역시 부모님의 교육 덕이었을까? 아버지 아브라함 멘델스존과 어머니 레아 멘델스존은 너무나도 천재였던 아들 펠릭스가 자만하지 않도록 펠릭스에게 칭찬을 아주 드물게만 해 주는 첼터라는 선생님을 붙여주었고, 신동 자녀를 둔 많은 부모님들과는 달리 펠릭스와 파니를 어릴 때부터 대중의 눈앞에 노출시키는 대신 음악 교육을 시키면서도 각종 언어와 교양을 쌓게 해 아이들이 충분히 음악 말고 다른 선택지를 생각할 수 있게 키웠다. 물론,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서 공부를 시작해야 하는 혹독한 스케줄이긴 했지만 말이다. 멘델스존은 나중에 자라 그때 좀 더 놀았으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절대 거두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신동 아들을 대중의 눈앞에 노출시키고 요즘 아이돌들이 그러듯 인생에서 할 줄 아는 것이 한 가지뿐인데 그 한 가지로 성공하지 못하면 퇴로가 없는 인생을 살게 하는 것보다는 아브라함처럼 엄격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방식이 훨씬 교육적이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멘델스존의 음악에는 절실함이 없다, 깊은 감정이 없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하나, 나는 멘델스존의 음악이 얕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으며 둘, 위대한 음악가가 되고 비참한 인생을 사느니 조금 덜 위대한 음악가가 되는 한이 있어도 행복하고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멘델스존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삶에서는 종종 이상주의적인 모습과 현실주의적인 모습이 동시에 나타난다. 언젠가 누군가가 '멘델스존은 다른 업적이 하나도 없었더라도, 누나와 아내 간의 사이가 좋았다는 것만으로도 역사에 기록될 만하다'라고 이야기했는데 나는 그것을 조금 비틀어서 '멘델스존에게 다른 업적이 하나도 없었더라도 그는 이상과 현실의 균형을 잘 잡은 예술가였다는 것만으로도 역사에 기록될 만하다'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거야말로 위대함 아닌가! 나 한 몸을 불살라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물론 위대하지만, 이상을 끝까지 포기하지는 않으면서도 자신을 파괴하지 않는 예술가라니 얼마나 귀한 일인가. 모든 위대한 예술에 비참한 대가가 따라야 한다고 하면 이 세상에 예술가는 없어지는 것이 맞는 직업일지도 모른다. (너무 급진적인 발언인가?) 나는 그 누구도 비참해지지 않아도 되는 예술을 원한다. 그리고 그 '누구도'에는 예술가 본인도 포함된다. 어디에서나 한계와 절제를 아는 것, 그 무모하지 않음이야말로 멘델스존의 위대함을 구성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멘델스존은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다. 멘델스존은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지만,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멘델스존 가족은 멘델스존이 두 살 때 베를린으로 이사한다. 4년제 초등학교를 '단정한 품행과 성실함'으로 월반 끝에 2년 만에 졸업한 멘델스존은 이후 십여 년 동안 어머니의 살롱에 드나드는 명사들과 교류하고 최고의 선생님들로부터 음악을 배우며 빠르게 성장한다. 심지어 이 사이에 신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베를리오즈와 리스트, 슈베르트의 우상 괴테에게마저 찬사를 받는다. 그리고 열일곱 살에 첫 걸작, 현악팔중주와 한여름밤의 꿈 서곡을 써낸다. 후일 멘델스존은 한여름밤의 꿈 서곡에 대해 그건 정말로 운이나 영감의 힘이었다고 회고하며 다시 쓰라고 해도 그런 곡은 못 쓴다고 말했는데, 본인에게도 그만큼 소중한 곡이었던 모양이다. 이후 베를린대학교 입학시험을 치고, 대학교에 입학하지만 멘델스존은 곧 유럽여행을 하러 떠나면서 학교를 중간에 그만둔 듯하다. 하긴, 더 다닐 필요도 없었다. 이미 음악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하며 이십 대 초반에 베를린대학교 교수직을 제의받으니 말이다. 물론 멘델스존은 거절하고 그 자리를 본인의 연륜 있는 친구에게 넘겨주었다. 유럽 여행을 떠난 멘델스존은 (이 유럽 여행, 일명 '그랜드 투어'는 18세기 귀족 자제들이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는 여행이었는데 멘델스존도 견문을 넓히고 일감을 찾고 나중에 어디에 정착하면 좋을지를 찾아보라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그랜드 투어를 떠났다. 자세한 내용은 13번 방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이 여행의 내용은 길게 다루고 싶지 않다) 자신은 독일에 정착하고 싶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독일에서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자신의 영원한 버팀목이자 지도자였던 아버지의 사망이라는 커다란 사건을 겪은 멘델스존은 가족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제는 멘델스존은 어마어마하게 눈이 높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느꼈겠지만 그는 지독한 완벽주의자였다. 누이들도 부모님도 너무 눈이 높아서 평생 결혼을 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걱정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또 여자를 소개받는 것도 싫단다. 신붓감을 찾아 헤매는 건 야만인들이나 하는 거라고, 자기는 못 찾으면 그냥 결혼을 안 할 거라고 하며 외로움과 상실감에 떨면서도 기준을 굽히지 않던 멘델스존은 천만다행으로 1836년, 아픈 친구를 대신해서 합창단을 지휘하러 갔다가 그 높은 기준에 들어맞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무려 8살 연하의 (이거 완전 도둑놈이다) 아름다운 열아홉 살 소녀, 세실 장르노. 만난 지 4개월 만에 청혼을 한 멘델스존은 그로부터 6개월 뒤 결혼식을 올린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결혼을 했지만 놀랍게도 행복한 결혼이었다. 부부는 그림이라는 공통의 취미를 갖고 있었고 남편 쪽이 스케치해 놓은 그림을 아내가 채색으로 완성해 버리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세실은 종종 멘델스존에게 그림을 선물해 주었는데, 전시품 중에서도 세실이 프랑크푸르트 풍경 그림을 그려 장식해 준 방문카드 홀더가 있다. 멘델스존의 그림은 12번 방에서, 세실의 그림은 정원의 새로운 상설전시실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멘델스존의 그림 이야기는 이미지로 대체하고, 세실의 그림 이야기는 나중에 더 자세히 하자. 둘 사이에는 자식이 다섯 있었고, 그 다섯의 초상화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초상화 가운데 첫째와 둘째 카를과 마리는 멘델스존 어린이박물관의 마스코트 캐릭터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첫째 카를이 아기일 때 입던 옷이 카를에게 멘델스존이 보낸 편지와 함께 전시되어 있어 박물관 마스코트 카를은 늘 이 아기옷을 입고 있는 채로 그려진다.
카를의 옷도 옷이지만, 그보다도 나는 멘델스존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더 좋아한다. 어떤 면에서는 멘델스존하우스에 있는 모든 전시품들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전시품이다. 편지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아랫부분은 평범하게 아내에게 보내는 부분이라서, 평소의 글씨체로 유려하고 우아하게 쓰인 반면 윗부분은 여섯 살배기 아들에게 보내는 것이라서 그런지 알파벳 하나하나가 또박또박 끊겨 적혀 있고 무엇보다 전부 대문자로 쓰여 있다. 영어 기준으로 보통 네 살 정도가 되면 아이들이 소문자를 배우기 시작한다는데, 아마 여섯 살 아이에게는 여전히 소문자보다는 대문자가 읽기 편할 테니 그 점을 고려해서 아들이 읽을 수 있는 대문자로 써준 모양이었다. "사랑하는 우리 카를! 편지 고맙구나. 엄마가 하는 말 잘 듣고 있지! 마리랑 파울이랑 아기 펠릭스에게도 안부 전해주렴, 그리고 폰 파젤 남작님에게도. 그분이 누군지 알려나 모르겠네? 그럼 우리 사랑하는 아들, 안녕. 너희 아버지, F.M.B"라고 적혀 있는 아주 간단한 편지다. 내 짧은 독일어 실력으로도 대충 번역이 가능한 정말 쉽고 사랑스러운 내용이다. 그 밑에 쓰인 내용은 전혀 해독할 수가 없었지만 한 장의 편지만으로도 아들을 향한 사랑과 배려가 느껴져서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주위에서 누구나 부러워할 행복한 가정을 두고 서른여덟의 나이에 요절해 버리다니... 정말 나쁜 아버지다.
여덟 번째 방은 멘델스존의 침실이자, 멘델스존이 죽은 방이다. 2022년에 올 때만 해도 다른 테마의 전시실이었는데, 2022년과 2024년 사이 멘델스존 연구가 진척되며 멘델스존이 죽은 방이 정확히 어느 곳인지 밝혀져 2023년 11월부터 멘델스존의 죽음을 테마로 한 전시실이 되었다. 다른 박물관보다 유독 멘델스존하우스에서 느낀 점이 많은 건 멘델스존하우스 이렇게 전시 구성을 바꿀 정도로 멘델스존 연구 업데이트에 진심이라는 점을 보여주어서라고 생각한다. 물론 다른 박물관들도 꾸준히 업데이트를 하고 있으나 내가 여러 차례 가지 않았기 때문에 박물관의 발전을 '모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곳만큼 전시에서 애정이 느껴지는 박물관은 분명 드물다. 원래는 11번 전시실인 곁방에 있던 전시물들을 8번 방으로 옮겨왔는데도 전시 구성이 그렇게 어색하지 않다. 오른쪽 왼쪽으로는 두 개의 전시 캐비닛이 있다. 하나는 멘델스존이 과로하게 한 원인이었던 베를린과 라이프치히에서의 이중생활을, 다른 하나는 최말년을 다룬다. 내가 멘델스존 전기를 읽을 때면 늘 지루함에 읽다가 졸거나 건너뛰어버린 시기의 이야기다. 1841년부터 1845년까지, 멘델스존 인생이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다. 한편으로는 베를린에서 궁정 교회음악 작곡가로 임명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라이프치히에서 여전히 멘델스존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멘델스존은 베를린에서 일을 해보지만 답답한 행정처리와 유명무실한 본인의 직책으로 인해 불만을 느낀다. 한동안은 베를린과 라이프치히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던 멘델스존은 1845년 베를린을 완전히 포기하고 라이프치히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귀환과 함께 구입한 집이 바로 이 글의 주인공인 골드슈미트슈트라세 12번지다. 문제는 이때쯤이면 멘델스존은 베를린과 라이프치히 왔다 갔다 하랴, 늘 그렇듯 영국도 다녀오랴 작곡도 하랴 라이프치히에서 감독직도 하면서 베를린에서 한여름밤의 꿈 공연도 올리랴 가족도 챙기랴 하며 이미 건강이 망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가족들이 대부분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가족력인 뇌졸중으로 죽는 것을 본 멘델스존이 본인도 그렇게 될 것을 예감하고 아이들을 키울 돈을 미리 벌어놓기 위해 더 과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찌 됐건 멘델스존은 강박적일 정도로 열심히 일했고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40살 생일에 정말 은퇴할 거다' '이것만 다 하고 쉰다' 며 스스로를 혹사시켰다. 본인도 본인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점은 인지하고 있던 것 같다. 하긴 5월에 누나가 뇌졸중으로 급사한 것을 들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으리라. 이미 쌓인 육체적 피로에 누나의 죽음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겹쳐 은퇴하면 프랑크푸르트 어디에 집을 짓고 살지까지 계획해 놓았던 멘델스존은 결국 은퇴도 하기 전 쓰러지고 만다. 9월 무렵에는 갑작스러운 두통과 통증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려 몇백 미터를 걸어오고, 결국 10월부터 한 달간은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며 죽음의 기로에서 왔다 갔다 한다. 8번 전시실의 하이라이트는 방 한가운데 놓인 멘델스존의 데스마스크와 멘델스존 사후 잘라둔 멘델스존의 머리카락, 그리고 남편의 병환과 죽음을 상세하게 기록해 둔 세실의 노트다. 대부분의 설명은 펜형 오디오가이드로 듣는 것과 달리, 세실의 노트 내용은 캐비닛에 붙어 있는 스피커를 마치 전화를 받듯 귀에 대고 들어야 한다. 담담한 목소리로 읽어주는 기록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먹먹해진다. 멘델스존의 유언은 '지쳤어, 너무 지쳤어'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멘델스존이 잠깐 정신을 차렸을 때 세실이 그에게 기분은 좀 어떻냐, 몸은 괜찮냐고 물어본 것에 대한 대답이었다. 멘델스존은 가족친지들이 보는 앞에서 1847년 11월 4일 오후 9시 30분경 숨을 거둔다. 친구 에두아르트 벤데만이 그린 그림과 데스마스크에서도 멘델스존은 미소를 짓고 있다. 짧지만 걸작을 써내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오케스트라 하나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학교를 세우고, 역사의 저편에 묻혀 있던 작곡가를 위대한 작곡가의 반열에 올려도 본 풍성한 삶이었다.
멘델스존의 제자였고, 멘델스존의 바통을 유품으로 받을 정도로 멘델스존 가족과 각별한 사이였던 16세의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은 멘델스존이 사라지자 라이프치히는 그 마법을 잃었다고 적었다. 로베르트 슈만은 11월 6일, "죽은 그의 모습. 마치 교황 같은 모습, 정복에 성공한 신의 전사와도 같은 얼굴."이라고 적었다. 세계 각지로부터 위로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라이프치히는 상실에 잠겼고 멘델스존의 음악을 그 어디보다 사랑했던 영국의 음악계는 "태양이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듯" 했다. 전시실에는 멘델스존의 죽음에 관한 기사들을 스크랩해 붙여놓은 책자가 있다. 몇 개의 독일 기사와 몇 개의 영국 기사가 슬픔을 억누르듯 건조하고 담담하게 멘델스존의 사망 소식을 전한다. 세실은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위로의 편지를 전해받았으며 남편이 죽은 뒤 출판사로부터 100 기니를 위로금으로 전해받는다. 10년간의 행복했던 결혼생활, 그 가운데 마지막 2년을 함께했던 골드슈미트슈트라세를 뒤로하고 세실과 아이들은 베를린으로 향했다. 남편의 편지를 너무 자주 읽으면 슬퍼지기 때문에 최대한 읽지 않으려고 한다 적어 보냈던 세실은 죽기 얼마 전 남편과 주고받은 편지를 거의 전부 소각한다. 그러나 살아남은 두 통의 편지만 봐도 멘델스존이 얼마나 다정한 사람이었는지와, 세실의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지가 느껴진다.
24년 2월 3일, 여기까지 전시를 관람하고 스피커를 다시 원래 자리에 돌려놓은 내 귀에 희미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한 차례 멘델스존하우스에 방문했던 나는 그 소리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10번 방, 살롱에서 오는 것임이 분명했다. 게반트하우스에서는 연주해주지 않았던 멘델스존의 음악이 닫힌 문 너머로 공기를 타고 들어왔다. 2022년 6월에 왔을 때도 누군가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그때는 누군가의 개인 연주회였고, 2월 3일에는 돈을 낸 사람만이 감상할 수 있는 멘델스존 생일축하 연주회였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 진실이 눈앞에 보이지 않아서 마음껏 상상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건반 소리를 들으며 아까 일부러 마지막까지 남겨 놓았던 멘델스존의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멘델스존하우스에는 늘 늦은 오후에 방문했는데, 그 때문에 맑은 날이면 언제나 서재 창문을 통해 햇볕이 따뜻하게 쏟아져 들어왔다. 2022년 6월과 2024년 6월이 그랬다. 여름이면 때로 살짝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바람이 불어온다. 그럴 때면 세실의 거실에서 썼던 것과 똑같은 하얀색 쉬폰 커튼이 약한 바람에 마치 발레 '지젤' 속 로맨틱 튜튜처럼 산들거린다. 4번 방과 마찬가지로 서재에도 출입금지 줄이 쳐져 있다. 펠릭스 모셀레예스가 그린 멘델스존의 서재 스케치를 바탕으로 재구현된 서재는 산뜻하고 대담한 밝은 노란색 벽과 시선을 잡아끄는 줄무늬 카펫, 붉은 천이 덮인 업라이트 피아노, 책장과 책상 등, 하나하나 뜯어보면 전혀 특별할 것 없는 곳이다. 피아노 위에는 악보가, 책상 위에는 쓰지 않은 종이가 살짝 비뚤게, 서서 쓰는 책상 위에는 좀 더 두꺼운 악보가 놓여 있다. 뒤로 빼놓은 의자와 흐트러진 피아노 커버를 보면 이상하게 그리운 기분이 든다. 나는 멘델스존이라는 사람을 만난 적도 없는데, 묘한 생활감이 느껴지는 방에 자꾸만 착각을 하게 된다. 저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피아노 소리가 멘델스존이 직접 치는 피아노 소리처럼 느껴지고 방이 비어 있는 것은 단지 그 방의 주인이 십분 정도 피아노를 치거나 친구를 만나러 갔기 때문으로 느껴진다. 방 전체가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잠시 잠들어 있는 것만 같다. 잠깐 기다리면 주인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염없이 그 앞에 서 있게 된다. 이미 그 방의 주인은 백오십년도 넘게 죽어 있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방의 소박하고 따뜻한 분위기에 말려든 나는 오 분, 십 분, 십오 분을 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공간 때문에 눈물이 날 뻔했던 적이 있던가? 아마도 없던 것 같다. 사랑하는 이의 방을 치우지 못하는 이유를 완전히 알 것 같았다.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가 있었을 듯한, 아직도 온기가 느껴지는 듯한 따뜻한 방을 비울 수가 없다. 그가 손수 그린 수채화가 걸려 있고, 그가 존경했던 괴테와 바흐의 흉상이 있고, 정말 잠깐 나갔다 올 것을 표시하는 듯 밀어 넣지도 않은 의자가 눈에 들어오는데 그 자리를 어떻게 떠날 수 있겠는가. 22년 6월, 남들은 오 분이면 볼 것을 십오 분 동안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향한 그리움에 젖어 나는 한참을 서재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래서 길어야 한 시간이면 다 보는 박물관을 두 시간 가까이 보게 되었던 나의 친구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
피아노 소리가 잦아들고 난 뒤 문을 열면 텅 빈 뮤직살롱이 보인다. 내가 갔을 때 정기 연주를 하고 있던 적은 없으나, 멘델스존하우스의 아이덴티티 중 하나는 일요일마다 하는 일요음악회다. 멘델스존이 열 살 언저리일 때부터 시작됐던 가족의 일요음악회에서 그는 음악을 지휘하거나 남들은 연주할 수 없는 악기를 연주했고, 누나 파니는 피아노를 쳤으며 동생 레베카는 노래를 불렀고 동생 파울은 첼로를 켰다. 음악회에서는 많은 피드백과 인정의 경험이 오고 갔고, 후일 이 음악회 전통은 누나 파니의 일요음악회로 이어진다. 파니에게 이 살롱이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는지는 또 다음 글에서 따로 이야기하자. 현재에는 전통이 끊겼다고 봐야 하는 이 살롱들은 각종 예술계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멘델스존의 독주곡들과 실내악은 종종 공연장이 아니라 이런 환경에서 공연될 것을 상정하고 만들어졌음을 고려해 보면 여러 사람이 모였으면서도 단란한 분위기를 잃지 않는 작은 공연장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예를 들어 멘델스존의 첼로 소나타 2번은 아마추어 첼리스트인 그의 동생 파울 멘델스존을 위한 곡으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분위기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처럼 거대한 공연장에서 들을 때와 작고 따뜻한 음악 살롱에서 들었을 때는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또 멘델스존의 가장 유명한 곡 가운데 하나인 교향곡 4번 '이탈리아'는 교향곡 가운데 굉장히 작은 편성에 속하는데, 덕분에 코로나 시대 말러 같은 초대형 교향곡들을 자주 대체하곤 했었다. 멘델스존의 세속 음악은 때때로 공연장만큼이나 개인적이고, 무척이나 사적인 이런 살롱에도 적절한 음악이다. 종종 이 살롱에서 멘델스존, 슈만, 파니 멘델스존, 브람스 등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데, 아직까지 나는 한 번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멘델스존하우스에 네 번째로 방문할 유인이 생겨 버렸다. 그때는 티켓팅에 실패하지 말고 멘델스존 생일날에 멘델스존 생일 콘서트를 제대로 들어 보고 싶다.
그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해소해 주는 곳이 멘델스존하우스의 이펙토리움이다. 이펙토리움은 2014년 설치된 체험형 전시로, 멘델스존의 합창곡과 멘델스존의 기악 음악 두 가지 종류를 직접 지휘해 볼 수 있다. 각각의 악기나 성부의 소리가 나오는 스피커들 십수 개가 놓여 있고, 체험자는 보면대 앞에 서서 지휘봉을 들고 속도나 볼륨을 조절할 수 있다. 보면대에 센서가 있기 때문에 보면대의 센서를 중심으로 해서 동작을 수행해야 가장 원하는 효과를 잘 누릴 수 있다. 2024년 6월 같이 갔던 친구는 지휘를 공부한 친구였는데, (이 친구가 글 맨 위에서 언급한, 나보다 심각한 멘델스존 오타쿠인 친구이다. 휴대폰을 도둑맞은 나를 대신해 멘델스존하우스의 사진을 꼼꼼히 찍어줬다. 이 포스트에서 쓴 대부분의 사진은 이 친구가 찍어준 것이다) 아무래도 센서가 보면대의 한정적인 공간 안에서만 작동하다 보니 정작 배운 대로 온몸을 써서 지휘하면 센서가 조금도 작동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말러처럼 온몸을 써서 지휘하지 말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처럼 팔만 까딱까딱해야 오히려 이펙토리움의 효과를 제대로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좀 웃긴 점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 서곡'을 지휘해 봤었다. 내가 지휘를 하면 한 가지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워서 나중에는 그냥 바통을 옆에 내려놓고 전체 곡을 1.2배속으로 재생하기 버튼을 눌러둔 뒤 그냥 이펙토리움 한구석에 앉아서 음악을 감상했던 기억이 난다. 이펙토리움은 오히려 지휘 전공자들보다는 일반인들이나 아이들이 좋아하는 곳인 것 같았다. 2022년 6월에 같이 갔던, 음악보다는 미술을 훨씬 좋아하는 친구는 오히려 이펙토리움에서 꽤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며 2024년 2월에 갔을 때는 삼십 분이 넘게 열 살 언저리의 남자아이가 이펙토리움을 점령하고 있었다. 내게는 멘델스존 음악 몇 곡을 파트별로 따로 틀 수 있는 스테레오 룸에 불과했지만 체험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가거나 동행자 가운데 어린아이가 있다면 이펙토리움에서 분명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어린아이들과 멘델스존하우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많은 박물관들이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만 멘델스존하우스만큼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박물관도 드물어 보인다. 박물관에는 4~10세 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과 10세~18세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이 따로 마련되어 있으며, 야밤에 손전등을 들고 박물관을 돌아다니면서 멘델스존에 대해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다. 멘델스존하우스를 밤에 다녀올 수 있다니! 나도 어려지고 싶었다. 게다가 일 년에 한 번, 멘델스존하우스는 아이들의 날을 한 번씩 만들어 축제를 연다. 멘델스존하우스의 초록 잔디 위 수십 명의 아이들이 모여 앉고 작은 콘서트를 관람한다. 박물관이 운영하는 인스타그램에는 꾸준히 아이들 사진이 올라온다. 아예 건물 하나를 어린이박물관으로 따로 사용하고 있으니 멘델스존이 어린아이들을 사랑했던 것만큼이나 아이들을 사랑하는 박물관이다.
멘델스존하우스에 오면 박물관에 온 느낌보다도 멘델스존의 집에 잠깐 초대받아 방문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그래서가 아닐까 싶다. 멘델스존이 바흐를 진심 어린 애정을 가지고 접근했듯, 멘델스존하우스는 그것과 똑같은 애정을 가지고 멘델스존에 대한 전시를 구성해 놓았다. 위에 내가 설명해 놓은 이야기 가운데 대부분이 멘델스존하우스의 전시만 봐도 알 수 있는 내용일 정도로 이 박물관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걸 모든 방문객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느껴진다.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마음도, 쉬는 요일이 없이 어느 날에 가도 성실하게 일하고 있는 것도 모두 멘델스존의 정신이 그대로 느껴지는 박물관이다. 사랑은 서로를 보는 것이 아닌 같은 곳을 보는 것이라 말하곤 하지 않던가. 멘델스존하우스는 멘델스존을 바라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멘델스존이 바라보던 곳을 함께 바라보며 걸어가 주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 길에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펠릭스는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Felix Macht Glucklich), 멘델스존하우스의 캐치프레이즈는 정말이었다. 좋은 작곡가 박물관을 다녀오고 나면 행복해진다. 좋은 작곡가 박물관에서는 사랑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장소라니 어떻게 행복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멘델스존하우스 또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멘델스존하우스는 펠릭스 멘델스존만큼이나 펠릭스 멘델스존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전시공간을 할애해주고 있는데, 이 전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고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이 포스트에서 파니 멘델스존과 세실 멘델스존, 쿠르트 마주어의 이야기까지 하자니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다. 또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빼놓고서 최종평가를 하는 것도 있어서는 안 될 일이기 때문에, 최종평가 또한 다음 주로 미루겠다. 다음 주 화요일, 멘델스존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함께 돌아오겠다. 이런 말을 이 브런치 시리즈에 써 보는 것은 처음인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써 보겠다.
다음 화에 계속.
30화 예고: 파니 멘델스존, 세실 멘델스존, 쿠르트 마주어, 그리고 다시 펠릭스 멘델스존. 펠릭스 멘델스존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멘델스존하우스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브런치북의 최대 연재 가능 목차를 넘긴 관계로, 여기에 30화 링크를 달아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