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 저번에 할 이야기를 다 써버려서 여기에다가는 뭘 넣으면 좋을지 모르겠다. 일단 내 머릿속 슈만에 대한 인식은 '고전이 추구미지만 영혼이 고전을 거부하는 낭만주의자' 정도 되겠다. 주변 전공생들은 이상하게 슈만을 좋아하는데 어째서일까? 쇼팽의 음악에서 혼이 울리는 경험은 나도 가끔 해보기 때문에 납득할 수 있지만, 아직 슈만의 감성은 잘 모르겠다. 젊은 시절 좀 더 방황을 해 봐야 하는 걸까? 좀 더 우울과 사색에 잠겨야 하는 걸까? 슈만 곡을 가장 듣기 좋은 나이는 몇 살일까? 왜 슈만 곡은 이상하게 들어도 귀에 안 감길까?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는 전공생 슈만 팬이 분명 한 명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아, 그리고 저번 글에서도 거의 언급되지 않았고 이번 글에서도 거의 나오지 않지만, 슈만은 굉장히 중요한 평론가였다는 거. 여기서 적어둬야겠다. 평론은 밥 벌어먹으려고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 투덜거렸던 베를리오즈랑은 다르게, 어릴 적 작가의 꿈을 꿨던 슈만은 확실히 음악 신보를 꽤 즐겁게 편집했던 것 같다. 라로선생이라든가, 오이제비우스라든가, 플로레스탄이라든가, 그런 캐릭터들을 만들어서 평론을 하면 확실히 읽는 사람도 집중이 잘 되지 않았을까... 음악잡지의 역사에 음악신보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나중에 찾아봐야겠다.
S반, 우리나라로 치자면 비둘기호쯤 되는 경전철은 그리 먼 거리를 운행하지는 않지만 대신 다른 열차들은 서지 않는 역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지나는 기차다. 가장 싼 대신 가장 느리고, 가장 많은 역에 정차하는 대신 가장 기점과 종착역 사이의 거리가 짧다. 내 숙소가 위치했던 할레잘레와 슈만박물관이 있는 츠비카우는 151km 정도 떨어져 있었으니, ICE 기차를 탔더라면 5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하지만 츠비카우는 ICE 기차가 서지 않는 작은 역이다. 가기 위해서는 그 두 배의 시간이 걸리는 S반을 타야 했다.
돌아오는 길에 먹을 샌드위치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열차에 오르면 아직 햇빛이 공기를 익히지 못해 선선한 감이 있던 바깥공기가 들어오지 못하고 햇빛만이 창 너머로 들어와 눈꺼풀을 간질인다. 출발한 지 5분 만에 졸음이 노곤노곤하게 쏟아지지만 검표원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원래는 휴대폰 화면으로 보여주면 되는 일인데, 휴대폰이 없어 미리 노트북 화면을 준비해 둬야 하니 무척 귀찮은 일이었다. 함께 교환학생을 간 언니오빠들은 검표를 나만큼 자주 당하지 않은 것 같은데, 나는 십몇 분 이렇게 기차를 짧게 탈 때가 아니면 언제나 검표를 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표원이 표를 검사하고 '감사합니다'라고 의례적으로 말한 뒤 뒷자리의 사람에게로 향한다. 티켓을 구입해서 정당하게 사용했으니 긴장할 필요도 없지만, 타국에서 신분증이나 티켓을 검사당할 때면 늘 긴장이 됐었다. 검표원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가면 그제야 긴장이 풀린다. 6월의 S반에는 종종 냉방이 되지 않아 열차를 타고 있으면 점점 기차가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른다. 처음에는 아침공기에 시원하던 유리창이 오전 열 시만 되어도 이미 냉기를 잃고 익는다. 그 후끈한 열기는 때로 찜질방에 온 기분을 들게 한다. 유리창에 고개를 기대고, 라이프치히에서부터 시작된 강행군으로 인해 피곤에 젖은 정신을 쉬게 해 주며 잠에 들었다가 깨면 플랫폼 여덟 개짜리의 츠비카우 역에 도착한다.
츠비카우 역에서 내리고 내가 느낀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독일의 많은 동네를 돌아다닌 덕분에 중앙역 근처가 어떻게 생겨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지론이 있었다. 보통 중앙역 주변은 치안이 좋지 않고, 이민자들이 운영하는 되너 케밥가게나 이민자들을 위한 결혼식 의상 가게 등이 있는 동시에 3~4성급의 비즈니스호텔이 있어야 하며, 중앙역을 나오자마자 트램 라인이 3~4개 정도는 깔려 있어야 한다. 대도시들은 그렇고, 소도시들의 경우에도 버스 일고 여덟 대 정도가 다니는 역이 바로 앞에 있어야 하고, 신문가판대 정도가 하나 있으며, 잘 조경된 길을 5분 정도 따라 걷다가 보면 큰 마을 광장이 하나쯤 나와야 되는데 츠비카우 역을 나오자 우거진 풀과 아무도 없고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모르는 자갈길이 있었다. 뭐야 이게? 버스 정류장이 있었지만 네트워크가 연결되지 않는 도로 한복판에서는 어떤 버스를 타야 슈만박물관에 갈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나의 형편없는 방향감각과 지도 스크린숏에 의지해 중앙광장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츠비카우는 한참 동안 도로와 허허벌판만 나오다가 커다란 마트가 하나 나오고 다시 도로가 나오고, 곳곳에 공사를 하고, 누런 벽돌들이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듯한 낡은 거리로 나를 안내했다. 얼마나 더 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걸었다. 거짓말 안 하고 20분은 넘게 걸은 것 같았다. 그제야 트램과 분수와 학교가 보였고 내게 익숙한 모습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아니, 오히려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 펼쳐지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까. 프라하와 비엔나에서 봤던 익숙한 건물 양식들이 보였다. 건물 끝부분에 마치 탑이나 돔과 비슷하게 생긴 둥근 뚜껑을 달아놓고, 건물 외벽에는 우아하고 화려한 곡선미의 장식들이 붙었다. 라이프치히보다 동쪽에 있는 곳이니까 동유럽 영향이 더 짙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한데도, 국경을 지난다고 건축 양식이 바로바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라이프치히에서 츠비카우, 츠비카우에서 프라하 이런 식으로 서서히 변해간다는 것이 삼면이 바다요 다른 한 면은 철조망인 국가에서 살던 내게는 매번 신기했다.
슈만 박물관은, 이상하게 쉽게 찾아지지가 않았다. 원래 그렇게까지 찾기 어려운 곳은 아니었을 텐데 하필 슈만 박물관을 찾는 이정표가 되어주었어야 했을 교회 주변이 공사 중이라서 슈만 박물관으로 가는 가장 짧은 길이 막혀 있었던 바람에 한참을 빙빙 돌았다. 사실은 마을 광장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생긴 건물인 인형극장/게반트하우스를 정면에 둔다고 가정했을 때 오른쪽으로 꺾어 한 블록만 걸어가면 블록 끝에 있는 노란 건물이 슈만하우스인데 나는 뭘 그렇게 오래 헤맸는지 모르겠다.
햇빛과 어두운 조명, 그리고 거의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인해 슈만하우스는 슈만 본인만큼이나 과묵하고 고요한 곳이었다. 입장료를 내고 전시가 시작되는 1층 (한국 기준 2층)으로 올라가면 미디어믹스에서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슈만과 슈만 조각상이 있는 현관이 우리를 맞아준다. 개인적으로는 슈만 조각상과 흉상이 몇 개씩이나 나를 바라보고 있으니 무척 부담스러웠다. 한쪽에는 슈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인지 슈만 관련한 내용을 읽을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컴퓨터와 헤드셋이 놓여 있었다. 벽에는 'Kennen Sie Robert Schumann?' (로베르트 슈만을 아시나요?)이라 적힌 글귀가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는데, 프랑수아즈 사강의 유명한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떠올랐다. 어디선가 읽은 그 소설의 해석에서는 아무리 봐도 매력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권태롭고 바람이나 피우고 다니는 로제를 로베르트 슈만이라 해석하던데... 내가 슈만을 썩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건 슈만을 너무 폄하하는 짓 같다.
전시는 슈만의 유년기로 시작한다. 어린 슈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내성적인 사색가 슈만과는 거리가 있었다. 어린 슈만은 많은 청년들이 그러듯이, 동창 플레히치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유명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라고 한다. 슈만은 본인보다 한 살 많은 멘델스존의 성공을 동경하며 그의 기사를 모았다고도 한다. 그는 머리도 좋았고, 이때까지만 해도 어딜 가나 대장이었고 멘토 역할을 도맡았다. 슈만은 자신이 '부지런한 학생은 아니었다. 그러나 능력은 부족하지 않았다'라고 후일 다소 오만하게 회고하기도 했다. 대체 어디서 이런 비대한 자아를 얻은 것일까? 아마 낭만주의에 경도된 청년들의 감수성에 슈만도 휩쓸린 것이 아닐까. 게다가 슈만은 또 책방 주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문학소년이지 않았던가. 슈만의 아버지 아우구스투스가 가지고 있던 책이 전시장 아래쪽에 전시되어 있는데, 어디선가 들은 바에 의하면 창작물을 많이 소비하는 사람들은 창작물을 통해 '세상은 정의롭다'는 믿음을 남들에 비해서 더 강하게 가지고 있고 그 믿음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노력도 창작물을 적게 읽은 사람에 비해 훨씬 많이 한다고 한다. 슈만은 그런 책들을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을 믿게 되었고 그 아름다움이라는 본질을 보여주는 영웅으로서의 자신을 상상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쪽 벽에는 학생 시절 슈만이 여행을 다니며 자신의 감상을 기록해 놓은 노트 가죽 껍데기, 일기장 등이 모두 전시되어 있다. 이건 내 가설이지만, 슈만은 자아가 상당히 비대했던 것 같다. 위에서 이미 의심은 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감정이나 행동을 하나하나 기록하고 보존하는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자의식이 강한 편인 것 같다. 작곡가들 가운데 평론을 하거나 자서전을 남긴 사람들을 떠올려 보자. 바그너, 베를리오즈, 스트라빈스키... 확실히 기행과 하늘을 치솟는 자신감으로 무장한 작곡가들 아니던가! 그렇게 보면 슈만이 평상시 대중을 보며 '속물'이라 욕하고 그들을 계도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음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아 진다. 내향적인데, 자아가 크니까 하고 싶은 건 또 확실한 것이다.
그렇다고 슈만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아가 크니 꿈도 크고 이상도 높다. 나는 꽤 오랜 시간 작곡가 가운데 슈만을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전에도 언급했듯이,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에 대해 슈만보다는 베를리오즈를 더 닮았다고 말한다. 슈만의 뜨거운 이상주의보다는 베를리오즈의 다소 차가운 현실주의와 시니컬함을 닮았다는 뜻이지 않을까?) 어떤 이상도 가지지 않은 사람보다는 허무맹랑한 이상이라도 가진 사람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내게 슈만을 닮았다는 말은 욕이 아니었다. 나와 같은 나이의 스무 살 슈만은 라이프치히로 향했다. 그곳에서 슈만은 말 그대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낸다. 이 여자랑도 만나 보고, 저 여자랑도 만나 보고, 알코올 중독 근처까지 갔다가, 돈을 전부 탕진하는 바람에게 엄마한테 '자살하고 싶은데 자살할 권총 총알 살 돈도 없다'는 편지를 보내며 돈을 구걸하고 정말 '청춘'이라면 해볼 만한 짓은 다 해본다. (이 방황에는 어쩌면 어린 나이 아버지와 누나를 연이어 잃은 것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다.) 누가 괴테의 파우스트 배출국 국민 아니랄까 봐, 방황하면서 열심히 노력한다. 곡도 써 보고,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 프리드리히 비크한테서 교습도 받고 그 김에 어린 클라라랑 이불 뒤집어쓰고 귀신놀이도 해 주고 클라라에게 작은 꽃이 그려진 노트도 선물해 준다. 슈만의 학창 시절을 다루는 이 두 번째 방은 슈만의 높은 이상을 담은 악보들과 함께 슈만의 낡은 책가방이 있다. '말죽거리 잔혹사' 같은 영화에 나와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광택은 없지만 똑같이 가죽으로 만들어진 가방에는 걸쇠가 달려 있고 사용감이 느껴진다. 슈만이 대체 왜 어린 시절 쓰던 책가방을 버리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라이프치히와 하이델베르크에서 음악과 법학 사이 끊임없이 고민하고 방황하던 슈만은 아마 리스트 정도를 제외한다면 '파우스트'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작곡가일 것이다.
방황하던 파우스트는 자신의 마르가리테를 찾았고 (이 파우스트는 원작과 다르게, 비록 완벽한 행복은 아니었지만 마르가리테와의 사랑을 통해 정신을 차린다) 결혼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아뿔싸, 결혼을 하려고 하니까 우리의 가스라이팅 도사 프리드리히 비크가 클라라를 협박하더니 슈만 같은 망나니, 고주망태, 한량에게는 결혼 허가를 내줄 수 없다며 명예훼손을 동반한 소송을 건다. 당연히 슈만은 이 내용을 극구부인했다. 비크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클라라에게 가해진 가스라이팅은 '24화 라이프치히 슈만 박물관에 가다'편을 참고해 주시기를 바란다. 거기에 한 가지를 추가하자면, 비크는 이 소송에서 슈만이 결혼을 해서는 안 되는 부적격자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 클라라가 잠가 놓은 편지함을 따고 그 편지들의 사본을 뜨고 지극히 사적인 내용이 담긴 편지들을 꺼내 슈만을 모욕하는 데 사용했다. 얼마나 모욕이 심했으면 나중에 슈만이 비크를 명예훼손으로 맞고소했을 때 패소한 것은 물론이고 법정난동죄로 18일 동안 감옥에 다녀왔겠는가.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괴담만 나오는 사람은 프리드리히 비크가 처음이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비크가 아무리 악한이라고 하더라도 이번에는 한 번 재고해 볼 여지가 있는 것이, 프리드리히 비크가 슈만이 예쁜 여자만 보면 침을 흘리고 다닌다고 했던 것도, 슈만이 열여덟 살일 때부터 봤던 비크가 한 말이라고 생각하면 질풍노도의 슈만과 아주 안 어울리는 모욕은 아니다. 게다가 슈만이 담배를 좋아한다는 것도 거짓말이 아니다. 슈만은 1841년 시가에 51 탈러를 썼는데, 이 무렵 멘델스존의 연봉이 1000 탈러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51 탈러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총감독의 연봉 20분의 1에 해당한다. 무시무시하다. 진지하게 슈만은 포기할까 생각했지만 식겁한 페르디난트 다비드 (바이올리니스트. 1838년부터 1844년까지 멘델스존이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은 원래 이 사람을 위해 쓰던 곡이었다)와 멘델스존이 증언대에 서 주기로 하며 슈만의 주장은 힘을 얻었다. 다비드와 멘델스존이 정확히 뭐라 증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슈만이 술을 좋아하긴 해도 고주망태는 아니라 증언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그 증언들 덕분이었는지 슈만과 클라라는 결혼 허가를 받아, 클라라가 부모의 허가 없이도 결혼할 수 있게 되는 클라라의 21번째 생일 (9월 13일) 전날인 9월 12일에 결혼한다. 로베르트는 클라라의 생일과 결혼기념일을 묶어서 퉁쳐버렸을까 가끔 궁금해진다. 일단 생일은 확실히 챙겼다. 박물관에서도 로베르트가 클라라에게 선물해 준 작은 동전지갑이 남아 있다. 연애시절 주고받은 편지와 주고받은 머리카락, 로베르트가 클라라에게 선물로 준 회중시계까지 모두 전시되어 있는 것을 구경하고 있으면 내가 지금 프리드리히 비크가 클라라에게서 압수해 온 것들을 전부 전시해 놓은 걸 보고 있나 하는 생각까지 머리를 스친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방에서는 로베르트와 클라라의 순수한 신혼시절과 연애시절을 다루고 있다는 증거가 구석의 캐비닛에 있기 때문이다. 로베르트의 맥주잔, 로베르트가 클라라에게 선물해 준 요리책, 브람스가 부부의 딸에게 준 요리책, 생선칼과 찻잔 등 생활감 넘치는 따뜻하고 가정적인 소장품들이 아늑한 불빛 아래 빛을 발한다.
이제 우리가 앞서 이미 봤던 라이프치히 시절의 신혼생활이 시작된다. 로베르트는 6년째 '음악신보' 편집장으로 일했고 여전히 꾸준히 작곡을 했지만 세계적인 명성을 얻지까지는 못했다. 물론 음악적으로는 가곡의 해, 관현악의 해, 실내악의 해가 연달아 찾아오면서 우리에게 귀중한 유산을 많이 남겨주었다. 이 1840년대 초반 슈만의 삶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는데, 이쯤 되면 여러분들 모두가 예상했듯이 그 사람은 바로 야코프 루트비히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다. 슈만과 클라라가 결혼하던 1840년, 멘델스존은 이미 두 아이의 아버지였고 곧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될 예정이었다. 멘델스존의 셋째 아이와 동갑이던 것이 바로 마리 슈만, 슈만 집안의 첫째다. 슈만은 멘델스존에게 마리의 대부가 되어달라고 부탁했고 아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멘델스존은 승낙했다. 흠, 그러고 보니 멘델스존의 첫째 딸 이름도 마리인데. 우연일까?
1843년, 멘델스존은 라이프치히에 독일 최고의 음악원을 세운다. 25화로 돌아가 기억을 되살려 보자. 그리그가 다녔던 그 꼰대 음악원 말이다. 멘델스존은 슈만을 교수로 들였다. 슈만이 교수직을 잘 수행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지만, 어쨌든 고정 수입과 명예가 있는 일이긴 했다. 한편으로 멘델스존과 슈만은 둘 다 약간의 '덕후' 기질이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1839년 슈베르트의 교향곡을 부활시킨 것으로는 모자라 이제 둘은 바흐 부흥운동에 힘쓰기 시작했다. 아, 클라라도 바흐를 좋아했으니 역시 빼놓으면 안 될 것 같다. 1843년, 멘델스존은 베를린과 라이프치히를 오가면서 지내고 슈만은 여전히 라이프치히에 살고 있었다. 멘델스존은 바흐의 도시에 바흐를 기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고 바흐 기념비를 만들자고 결심해 바흐 기념비 건립을 위해 필요한 돈을 모으려는 취지로 연주회를 연다. 슈만은 이 연주회를 열심히 홍보하고 다녔고 그렇게 모인 돈으로 멘델스존은 라이프치히 최초의 바흐 기념물을 만든다. 비록 우리가 아는 성 토마스 교회 앞의 위풍당당한 바흐 동상과는 거리가 있는... 석등에 봉인당한 듯한 바흐지만, 나는... 그 다소 떨어지는 미감도 멘델스존이 했다는 것만으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므로 봐줄 수 있다.
지금까지 내 글을 쭉 봐 오면서 내가 군데군데 흩뿌린 정보를 조합해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멘델스존은 정말 신조어로 '탈인간'급 작곡가다. 리스트랑 견주어도 연주여행을 안 다녔다 뿐이지 한 일만으로는 모자람이 없다. 슈만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슈만은 멘델스존을 '19세기의 모차르트' '천상에서 내려준 다이아몬드' 등의 거창한 수식어를 붙여 가며 경외했고 어떤 면에서는 질투하기도 했던 것 같다. 처음 봤을 때는 '슈만 너무 지질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슈만은 참으로 지고한 이상을 지녔고 멘델스존이 자신이 꿈꾸는 이상 그 자체거나 아니면 이상을 본인보다 더 닮았다면 그걸 슈만처럼 섬세한 영혼이 어찌 견딜 수 있겠는가. 그게 인간적이다. 슈만은 멘델스존을 닮으려고 했다. 인간으로서는 모르겠고, 곡으로는 확실히 그랬다. (그래서 그럴까? 슈만은 확실히 후기 곡이 내게 더 편하다) 오히려 그 때문에 슈만 팬들이 슈만 후기곡에는 멘델스존 냄새가 너무 많이 묻었다는 한탄을 하는 것도 들은 적이 있다. 슈만을 '바보 같다' 여겼지만 결국 나도 슈만과 비슷하게 이상 자체는 한없이 높게 잡아서인지, 나보다 내 이상에 더 가까운 사람을 만났을 때의 질투심과 동경, 그리고 자괴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베를리오즈는 편지에서 "바흐는 신이고 멘델스존은 그의 예언자다."라고 일축한 바 있다. 그렇다면 슈만은 무엇일까-슈만은 본인의 집에 둔 멘델스존 흉상을 볼 때마다 자신이 무엇인지 고민하곤 했을까?
클라라와 로베르트의 러시아 투어 이야기(24화와 15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를 확인하고, 의 사촌이 만들어 준 피아노를 지나가,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 사이 설치된 철도 미니어처 모형까지 뒤로하면 우리의 무대가 라이프치히에서 엘베 강의 피렌체라고 불리는 드레스덴으로 옮겨간다. 슈만 가족은 드레스덴에 여러 가지 이유로 이사를 갔는데, 시끄럽고 복작거리는 라이프치히를 떠나 드레스덴으로 가고 싶다는 슈만의 소망이 반, 아버지랑 가까이 살고 싶다는 클라라의 마음이 반이었던 것 같다. 클라라와 프리드리히 비크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몇 번 설명했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프리드리히 비크가 딸을 성공적으로 가스라이팅한 덕분에 딸이 평생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아버지에게 감사해했다고 정리해 두자. 자세한 사항을 알고 싶다면 24화 참고. 슈만은 클라라가 아버지와 연락을 재개하는 것을 막 반기지는 않았던 듯하지만, 슈만이 뭘 어쩔 수 있었겠는가.
그런 복잡한 가정사를 가진 슈만 집안과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던 물건이 캐비닛에 보였다. 그건 슈만이 아이들과 놀아줄 때 썼다고 적혀 있는 도미노와 체스판, 그리고 슈만 가족 아이들의 소꿉놀이 키트였다. 시인의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을 보는 순간 어쩌면, 슈만이 꿈꿨던 이상은 단순히 '숭고한 예술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슈만이 아이들과 놀아준다, 왜 그 가능성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걸까? 정작 대표곡은 '어린이 정경'에서 나온 사람인데. 슈만은 시끄러운 것을 무척 싫어하지 않던가?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라면 당연히 시끄러울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다지 도덕적이지 못한 클래식 작곡가를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만약 소리를 싫어하는 다른 작곡가가 있었더라면 그는 아이들에게 소리를 질러서 내쫓거나 아이와 아내를 놔두고 야반도주했을 것도 같기 때문이다. 그러니 슈만의 이상에는, 자기 자신보다는 크지만 세상보다는 작은 그 무엇... 아마도 가족과 연결된 이상이 하나 더 있었을 것 같다. 사람과 말도 거의 섞지 않고 방에 칩거하고, 소리가 나는 것이 싫어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슈만이 아이들과 함께 놀아줬다는 건 굉장히 대단한 일이다. 가끔 만나는 초등학생들하고 한 시간만 해도 극내향인인 나는 기가 다 빨리는데, 하물며 나보다도 심한 내향인인 슈만이면 어땠겠는가. 그 낡고 따뜻한 전시품들을 보자 가슴이 욱신했다. 그리고 슈만이 자신의 아이들과 놀기 위해 만들어 준 도미노나 사온 체스판을 그 아이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중히 간직하고 있어서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왔다는 점이 더 가슴 찡해졌다.
48년 혁명에 고무되었던 슈만이었지만, 드레스덴에서 마땅한 직책을 찾지 못했던 슈만은 뒤셀도르프의 지휘자 겸 음악감독으로 부임해 뒤셀도르프로 떠난다. (여기서부터는 15화에서 더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러나 지휘를 하려면 외향적이어야 한다는 말이 있는 데는 이유가 다 있었다. 증언에 의하면 슈만은 형편없는 지휘자였다. 그에게는 지휘자로서의 카리스마도 없었고 소통능력도 부족했다. 게다가 정신질환도 전혀 나아지지 않아 슈만은 결국 지휘자 직을 그만두고, 엔데니히로 향해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슈만이 라인 강에 뛰어들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이 카니발 행사의 일환인 줄 알고 감탄했었다. 정말 실감 난다고. 다리 관리인이 아니었더라면 슈만은 그대로 죽었을 것이고 덕분에 관리인은 인명구조로 훈장을 받았다. 그 훈장도 전시되어 있다. 슈만의 지팡이와 클라라의 파라솔은 아마 둘에게 모든 것이 엉망이 되기 전, 아직 괜찮던 시절의 흔적으로 남았을 것이다.
듣기로는, 슈만은 다리에서 뛰어내리기 전 이미 클라라에게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빨리 자기를 버리고 떠나라고 했었다고 한다. 하루는 큰딸 마리에게 로베르트를 맡겨두고 클라라가 외출을 했다가 돌아오자 슈만은 사라져 있었다. "사랑하는 클라라, 내 결혼반지를 라인강에 던질 것이오. 당신도 그렇게 하구려. 그러면 두 반지가 하나가 될 게 아니오."라는 메모만 남겨두고 말이다. 슈만이 무엇이 두려웠던 것인지도 이제는 알 것 같다. 만일 내가 치매가 온다면, 정신이 없을 때는 차라리 괴롭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신이 생겼을 때, 내가 더 이상 자기를 통제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들거나 그 통제감이 조금씩 조금씩 사라지면서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어가는 병이 느껴질 때, 그리고 그것을 절대 막을 수 없을 때 느껴지는 무력감이 너무도 싫은 것이다. 그때가 되면 자살이 하나의 선택지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방법만 조금 더 과격하지,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안락사인 셈이다. 아내가 벌어온 돈으로 생활하는 것에도 자존심 상해했던 슈만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맨 정신으로 힘겹게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가고 있던 자신의 꿈으로부터 한순간에 병으로 인해 끌려나가는 기분이었을 테다.
어쩌면 슈만은 몰랐을지도 모르겠다. 이상이라는 건 원래 이상이기 때문에 닿을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끝없이 하늘을 향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날아오르려 했던 것 아닐까. 망가진 몸과 망가진 마음의 구속에서 벗어나 혼이 자유로워졌을 때 슈만은 진정으로 행복해졌을 것이라 믿는다. 아, 물론 나중에 본인의 아내와 자식들과 재회하고 난 뒤 말이다... 문제는 슈만은 행복해졌을 테지만 남겨진 사람도 그렇냐는 것이다. 마지막 방은 오직 클라라를 위한 방이다. 56년부터 96년까지, 그녀가 과부로 지낸 세월은 결혼생활 16년의 2.5배에 달한다. 클라라가 없었더라면 츠비카우의 로베르트 슈만 박물관도 없었을지 모른다. 클라라는 여전히 피아노를 쳤고, 남편의 곡을 편집했으며, 브람스와 함께 아이들을 키웠다. 일상은 그대로 흘러갔지만, 클라라는 남편이 죽은 뒤 검지 않은 옷은 입지 않았으니 어느새 일상이 아니었던 것을 일상이 될 정도로 입고 다닌 셈이었다. 작은 향수병과 남편이 쓰던 나무 편지함, 접시 등에는 변화가 없다. 그러나 그 '가족 보물 장롱' 반대편에는 작은 파우치가 하나 있다. 천으로 된, 붉은 벨벳 파우치다. 그 파우치는 클라라가 브람스에게서 온 쪽지와 편지를 담아두는 데 썼던 파우치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나름대로 견디기 위해 새롭게 만들어낸 일상의 흔적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시는 로베르트 슈만이 태어난 방에서 화려하게 마무리된다. 클라라도, 로베르트도 이제는 없고 나만이 있다. 방은 널찍하지만 뭐가 너무 많아서 전혀 넓게 느껴지지 않는다. 1910년, 츠비카우는 로베르트 슈만 탄생 100주년을 맞아 슈만을 기념하기로 했고 1914년 생가 건물을 샀다. 1956년에는 대대적 보수공사와 리모델링을 통해 지금의 모습으로 재탄생시켰고 그 이후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1910년이라! 빈의 베토벤 박물관이 1940년대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다시 떠올려 보자. 로베르트 슈만 박물관은 대단히 뼈대 있는 작곡가 박물관인 것이다. 슈만이 죽은 것이 56년인데, 1910년에 박물관이 생겼으니 사망하고 54년 만에 박물관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 유품이 많은 것도 당연하다. 아직 살아 있는 슈만의 자식들이 있었으니까! 슈만이 태어난 방 안의 모든 전시품은 슈만이나 클라라가 실제로 사용했던 것들이다. 동시대 가구도, 레플리카도 아닌 실제 그들이 사용했던 것. 부다페스트 리스트 박물관에서 느꼈던 충격과 비슷한 정도의 충격이었다. 1926년쯤, 인터라켄에서 살고 있던 마리 슈만에게 접근한 박물관은 (마리는 이로부터 3년 뒤 사망한다)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슈만의 유품을 싹쓸이해 왔다. 덕분에 츠비카우 슈만 박물관의 전시품은 리스트 박물관을 제외하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다.
접근금지 줄이 쳐진 안쪽,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나무 그랜드 피아노 한 대다. 클라라가 1828년 아홉 살의 나이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 데뷔하던 당시 연주한 악기다. 뒤쪽에 있는 바흐와 헨델 흉상도 슈만이 1843년 손에 넣은 것이고,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초상화도 마찬가지다. 슈베르트의 초상화 뒤쪽에는 클라라가 로베르트에게 주는 것이라고 1846년에 적어 넣은 글자까지 있다. 한구석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여행가방은 부부가 러시아에 갔을 때 썼던 여행가방이며, 테이블 위에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필통 같은 것은 이동식 필기 책상이다. 글 쓰는 책상은 로베르트의 것이고, 안쪽에는 클라라의 검은 망토까지 전시되어 있다. 이건... 그냥 슈만 부부가 잠깐 외출한 방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방 하나에 피아노 두 대와 책상 몇 개가 있어 어수선했지만, 슈만 부부의 집은 어수선해야 할 것 같았다. 오히려 그 편이 더 생활감 있게 느껴졌다.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나직이 '와, 진짜 화려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츠비카우가 자랑할 만한 곳이었다. 완벽한 피날레였다. 슈만은 아주 조금 늦게 알려졌을 뿐, 자식들에게도, 마을에게도, 음악계에도, 세계에도, 음악 애호가들에게도 사랑받고 있는 존재가 순식간에 되었고, 이런 시샘이 날 정도로 훌륭한 박물관을 갖게 된 것이다.
다시 바깥으로 나가면, 2010년 로베르트 슈만 탄생 200주년을 맞아 추가된 상설전시들이 있다. 딱히 새로운 물품이 추가되는 것은 아니고, 한쪽은 슈만의 인생을 간략하게 요약해 주고 다른 한쪽에서는 슈만의 삶 (주로 손가락 부러뜨리는 것을 좋아하는 듯하다)을 주제로 현대예술을 설치했고 또 그 가운데에는 세상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슈만 기념물들이 들어 있었다. 지폐부터 시작해서 책이나 앨범은 물론, 만화, 책받침, 컵, 접시 등등 살림을 꾸릴 수 있는 수준의 굿즈들이 진열장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슈만이 얼마나 사랑받는 작곡가인지 느낄 수 있었다. 과연 가장 많은 전공생 팬들을 거느린 작곡가다운 위풍당당함이었다.
전시를 다 관람하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왔지만 여전히 박물관은 조용했다. 믿기지가 않았다. 이렇게 좋은 박물관이 이렇게 조용하다고?! 내가 평일에만 여행을 다녔기 때문일까? 아니, 하지만 슈만 박물관은 정말 괜찮은 곳이었는데! 나는 그렇게 씩씩거리며 다시 멋지게 생긴 직물회관 맞은편의 슈만 동상을 지나 중앙역으로 향했다.
설날을 쇠며 알게 된 사실이지만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촌 언니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가 슈만이었고 덕분에 나는 음질 좋은 스피커로 슈만의 '시인의 사랑' 전곡을 오랜만에 들을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 슈만 가곡을 꺼리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좋은 음악이었다. 슈만도 쇼팽처럼 한 번에 감성이 탁 맞아야 좋아할 수 있는 작곡가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앞으로 슈만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가 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슈만을 조금은 더 좋아하려는 노력을 들이려 한다. 그게 멋진 박물관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답례가 아닐까?
명칭: 뒤셀도르프 슈만하우스 (Robert-Schumann-Haus)
운영시간: 화-금 10:00~17:00/토,일 13:00~17:00
입장료: 성인 6유로, 할인가 4유로
사이트 링크: Schumann in Zwickau - Welcome to Zwickau, the city of Robert Schumann!
할레잘레보다 가는 기차가 적고 배차간격이 넓어 삐끗해서 10분 역에 늦게 도착했다가는 두 시간 집에 늦게 가는 마법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심까지 가는 버스를 타기만 하면 되는데, 걸음으로는 25~30분이 걸리므로 꼭 버스 노선을 미리 확인해보고 갈 것. 그리고 설명 표지판이 은근 불친절하다!
이곳은 5점을 줘야 한다. 피아노도 있어, 악보도 있어, 편지도 있어, 쓰던 물건도 다 갖다놓았어... 뭘 어떻게 흠을 잡으란 말인가? 심지어 이 박물관, 정말 방대해서 클라라와 로베르트의 편지들은 전부 아카이빙되어 있을 정도다. 악보도 마찬가지. 여러분,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세발의 피에 불과하다고요.
Archive & research centre - Welcome to Zwickau, the city of Robert Schumann!
주요 전시물들은 영어가 지원되지만, 개별 전시품에는 독일어 설명만 적혀있다. 소장품이 화려해 개별 설명이 필요한 슈만 박물관 특성상 아쉬운 부분이다. 다만 독어와 영어 오디오 가이드를 제공하고 있으니 (가이드의 설명은 여기에 추가로 프랑스어, 중국어, 러시아어가 지원된다) 큰 문제는 아니다.
5. 가성비: ★★★★☆
할인시 4유로, 정가 6유로! 역시나 전혀 아깝지 않은 금액이다. 나는 이런 박물관이라면 10유로도 줄 수 있다. 거저먹은 기분이었다.
이게 4성급이다. 2층, 방 8개 + 복도 2개. 딱 1시간 30분 정도 둘러보기 적당한 크기다. 체험 다 하고, 독일어 설명문까지 다 읽는다면 2시간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낼지도 모른다.
막 인터리액티브한 편은 아니지만 정적이기만 한 것 또한 아니다. 미디어를 상대적으로 많이 사용하지 않아서 인터랙티비티가 떨어지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데, 실제로는 '피아노 소리는 어떻게 날까요?' 하고 피아노 안쪽 건반 모양을 해체->확대해서 서로 다른 건반 연주 매커니즘을 설명해주는 체험기구나, 구슬을 굴려 슈만 노래를 연주하는 기구나, 슈만의 오페라를 3D착시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소소한 컨텐츠들이 있다.
오르골을 저렴하게 판다는 것 말고는 딱히 메리트가 없다. 다만, 그래도 뒤셀도르프보다는 나았다. 전체적으로 굿즈값이 저렴했으므로, 나는 슈만이 좋아서 미칠 것 같다! 하는 사람들은 구매해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무척 무난한 큐레이팅이었다. 전체적으로 시대를 쭉 따라갔는데, 아쉬운 점이라면 '그 후' 그러니까 클라라까지 죽은 뒤의 이야기가 없었다는 점 정도다. 그리고 이건 별개의 문제지만, 360도 버츄얼 투어를 만들어 둘 거라면 적어도 몇 개의 전시물들은 확대가 가능한 홈페이지를 만들어 줬으면 한다.
10. 총평: ★★★★
이것 하나를 보기 위해 츠비카우까지 간 나 자신이 정말 자랑스럽다.
최대 장점: 소장품, 무조건 소장품, 그리고 준수한 규모
최대 단점: 빈약한 굿즈
추천 여부: O
28화 예고: 트램은 없지만 괴테랑 실러는 있는 동네. ATM은 안 보이지만 리스트는 보이는 동네, 작지만 위대한 문화의 중심지 바이마르로 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