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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라이프치히 그리그 기념관에 가다

by 채굴꾼 Jan 21. 2025
딱히 별명이 떠오르지 않는다. 음... '노르웨이 국민 작곡가' 에드바르 그리그.

에드바르 그리그. 노르웨이의 국민작곡가이자, 노르웨이 국가를 작곡한 노르드라크의 친구. 그리그 하면 우리가 보통 떠올리는 곡은 '페르 귄트' 모음곡 (특히 산속 마왕의 궁전)과 피아노 협주곡 A단조. 피아노 협주곡 1악장이 정말 많이 들려오는 클리셰나 다름없는 곡임에도 불구하고 무척 좋아했는데, 요즘에는 3악장도 들으면 들을수록 매력이 있는 것 같다. 틈만 나면 다른 여자한테 푹 빠져서 헤롱헤롱거리고 불륜을 할 듯 말 듯하며 아내 니나를 괴롭히는 데다가 결혼 문제로 부모님께 불효스택까지 쌓았지만, 언제나 민주주의를 수호하려 했고 국수주의를 경계하는 민주시민이었던 작곡가. 152cm의 작은 키와, 드뷔시가 그의 곡에 대해 '솜사탕' 같다 고 했듯 아인슈타인과 솜사탕을 반반 섞어놓은 듯한 귀여운 외모, 거기다가 긴장이 될 때면 주머니에 넣어뒀던 돌개구리를 만지작거리며 심신을 안정시켰다는 사실로 호감을 샀는데 그의 인생을 알아보고 나니까 예상하던 것과는 많이 달라서 나를 놀라게 했던 작곡가였다. 그리그가 살던 집의 인테리어까지 그대로 보존해 놓은 노르웨이의 그리그 박물관은 사실 내가 가장 가고 싶던 작곡가 박물관 가운데 하나였으나, 노르웨이에 그리그 말고 볼 것이라고는 없었을뿐더러 노르웨이에 간다손 쳐도 그리그 박물관은 도심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갈 용기를 낼 수가 없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라이프치히에서나마 그리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을 찾아가 보았다.


라이프치히 음악원은 독일 최고(最古)의 고등예술교육기관이었다. 1841년부터 베를린에서 왕에게 우리나라도 파리처럼 음악원을 만들자 이야기하던 멘델스존은, 미적지근한 왕의 태도와 어머니의 사망 등 여러 가지 일이 겹쳐 베를린에서 좌절을 맛본 뒤 다시 한번 라이프치히로 돌아간다. 다행히 이번에는 어떤 변호사가 죽으며 작센 궁정에 과학 또는 예술교육기관에 이 돈을 써 달라며 20,000 탈러를 남긴 덕분에 멘델스존의 꿈은 실현될 수 있었다. 그 음악원이 지금 라이프치히에 있는 멘델스존 공연예술대학교의 전신이고, 그리그가 다녔던 음악원이기도 하다. 라이프치히의 모든 박물관에서 멘델스존 이야기가 한 번씩 나오는 것 같다면 아마도 착각이 아닐 것이다. 슈만의 친구, 클라라의 우상, 그리그가 다니던 음악원 설립자, 바흐의 발견자이자 바그너의 적수니까 말이다. (내가 가지는 않았지만 라이프치히에는 바그너 박물관이 있다. 놀랍게도 라이프치히는 바그너의 고향이자 바그너를 청소년기까지 키운 도시다)

라이프치히에 있는 바그너 조형물! (출처:위키백과)

아무튼, 라이프치히 음악원은 무려 펠릭스 멘델스존과 로베르트 슈만, 멘델스존의 스승이었던 모셀레예스와 멘델스존의 친구 바이올리니스트 페르디난트 다비드라는 당대 최고의 교수진을 자랑하는 학교였다. 어째 인선이 죄다 멘델스존 라인으로 채워진 것 같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 아니다. 멘델스존 본인도 비판을 의식하고 있어서 나름대로 '라인'을 만들지 않으려고 했고 본인도 학교 설립자지만 결코 교장이나 총장 역할을 할 생각은 없는 일개 일반 교수라고 말하고 다녔으며 리스트 등의 사람들과 같은 관점의 '진보파'도 기용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참 미묘해서 팔이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다. 멘델스존이 세운 음악원답게 라이프치히 음악원은 세워진 뒤부터 꾸준히 '꼰대' 소리를 들었다. 강한 보수적인 경향성, 아카데믹함 등으로 비판을 받았으며, 그 경직된 성향으로 인해 리스트나 바그너를 비롯한 '진보파들'에게 라이프치히 음악원은 적의 본거지 수준이었던 것 같다. 리스트는 본인의 마스터클래스에서 제자들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비판의 뜻으로 사용했다. 예를 들어 학생이 형편없게 연주할 때 '라이프치히에서는 그런 식으로 치라고 가르치겠지.'라 하거나, '라이프치히에서였더라면 아주 박수갈채를 받았을 연주겠어.'라고 하기도 했고, 가장 심하게는 누군가가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배웠다는 소리를 듣고 '그게 뭐 실력을 보장해 주기라도 하나? 그 음악원이 고만고만한 연주자들을 꽤나 여럿 배출했을 텐데.'라고 하기도 했다. 다만 생각을 해 보면 당연한 것이, 멘델스존은 천재의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고, 진정한 예술은 그런 재능을 타고난 사람만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면서도 음악을 비롯한 보편 예술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랬으니 평균은 높아도 특출 난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현재 라이프치히 음악연극대학교. (출처: Leipzig Travel)

그런 '고만고만한' 피아니스트들이나 배출해 내는 음악원이라는 평판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많은 유명 작곡가들이 이 음악원을 거쳐갔다. 이삭 알베니즈, 에셀 스미스, 레오시 야나체크, 페루치오 부조니 등. 그 영광스럽게 빛나는 졸업생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북구의 쇼팽'이라고도 불리는 에드바르 그리그이다. 그리그는 1843년생으로, 라이프치히 음악원과 정확히 동갑이었다. 음악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으며 그리그의 아버지가 그리그를 보낸 곳이 바로 라이프치히, 독일 문화생활의 중심지 가운데 한 곳이자 최고의 음악학교가 있는 곳이었다. (참고로 그리그가 십 대 중반을 보내던 시절에는 아직 베를린이나 바이마르에도 음악학교가 없었다.) 그리그는 처음 라이프치히로 와서 사무치는 외로움과 향수병에 시달리며 펑펑 울었고, 베르겐 (노르웨이의 도시, 그리그의 고향이다)에서 유행하던 셔츠를 입고 오자 놀림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금의환향해서 가끔씩 연주여행을 할 때 라이프치히를 찾게 된다. 특히 그리그와 라이프치히는 C.F Peters라는, 라이프치히의 출판사로 인해서 관련이 더욱 깊어지게 된다. 그 출판사가 있던 곳이 바로 지금의 그리그 기념관이 있는 자리다.


멘델스존 하우스에서 나와 한 블록을 더 가고, 오른쪽으로 꺾어서 총 오 분 정도를 더 걸으면 실용적이고 기능주의적인 독일 건물들 가운데 그나마 좀 화려하게 생긴 건물이 하나 있다. 물론 고만고만한 건물들 사이에서 생김새로 그리그 기념관을 구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구글 지도라도 있었으면 좀 더 빨리 찾았겠지만, 24편에서 말했듯 나는 이때 휴대폰을 도난당한 상태였다-그리그에 관련된 표지들로 알아보는 편이 가장 좋다. 일단 벽에 그리그 얼굴이 그려져 있는 현판이 하나 붙어 있고, 거기서 몇 발짝 옆에 가면 철문 앞 파란색 판이 붙어 있다. 이 파란색 판은 2008년 만들어진 '라이프치히 음악길'로, 음악과 관련된 라이프치히의 주요 장소 20곳을 따라갈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그리그 기념관은 그 20곳 가운데 3번째다. 이 사업을 진행한 곳에서는 여러 가지 '길'을 만들어 놓았는데, 붉은색, 노란색, 초록색의 길도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이라면, 라이프치히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파란 판들과 그 판에 적혀 있는 글자를 꼭 멈춰 서서 읽어보도록 하자. 도시 곳곳을 걷다 보면 '음악 길' 가운데 퀴즈가 있는 안내판도 있다. 그 퀴즈 안내판에는 라이프치히 음악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방문하게 되는 20곳의 명소에 관련된 퀴즈들이 적혀 있는데, '바흐는 라이프치히에서 40년간 '이 교회'에서 근무했는데요, 이 교회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나 '다음 중 멘델스존이 무척 즐겼고 잘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취미는 무엇일까요? 1) 시 짓기 2) 수영하기 3) 그림 그리기' 같은 간단한 질문들이 적혀 있다. (참고로,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공식적으로는 3번이지만 사실 세 가지 모두 멘델스존의 취미였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나름대로 클래식 음악사에 관한 본인의 잡학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일 테다.

이런 파란색 판이 도시 곳곳에 있는데, 꼼꼼히 읽어보면 재미있다. (출처: Leipzig Music Trail)

본론으로 돌아가, '라이프치히 음악 길' 안내판으로 그리그 기념관을 마침내 알아차린 나는-빈에서 여러 번 해 봤지만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철문을 열고, 정원에 있는 그리그 흉상...이라고 하기에는 어깨도 없고 목만 뎅겅 잘려서 놓여 있는 듯한 두상을 잠깐 바라보다가 안쪽으로 향했다. 언제나처럼 건물 안쪽 공동현관에 들어가면 남의 사생활을 침해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 지금도 공동현관에 들어서는 게 왜 그렇게 무서웠는지는 모르겠다. 한국에서는 상업건물과 주거건물이 확실하게 분리되어 있는 데 비해 독일에서는 그 경계가 훨씬 느슨했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 건물 안의 모든 곳이 사무실이고 주거 공간은 없는데 한국이라면 '홍길동 내과'라고 적혀 있을 초인종에 'Dr.Hong' 이렇게 적혀 있어서 주거공간으로 착각한 것일까.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슈베르트 박물관에 갔을 때 느꼈던 그 익숙한 불편감이 다시 찾아왔다. 수많은 작곡가 박물관에 단련되어 있던 나는 그리그 기념관이 그리 큰 곳은 아닐 것임을 바로 예상할 수 있었다.


건물 1층 공동현관에서 바로 눈에 들어온 것은 벽에 걸려 있는 흉상 세 개였다. 기억이 살짝 희미하지만 아마도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 셋이 있던 것 같다. 그리그가 바흐와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좋아했던가... 그건 잘 모르겠다. 민족주의 열풍이 불고 있던 시절 노르웨이의 국민 작곡가로 등극한 그리그와 이성과 계몽의 시대, '보편'을 상징하는 독일-오스트리아 전통의 베토벤과 모차르트, 바흐라... 흠. 조금 의아한 초이스였지만 그러려니 하고 1층 (우리나라 기준 2층)으로 올라갔다. 


올라가자 작은 문이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방명록. 여기다가도 작은 작곡가 그림과 함께 왔다 갔다고 방명록에 내 이름을 남겼던 것 같지만 역시 아쉽게도 사진이 없다. 박물관이라기에는 너무 작은 방 한 개를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옆에 있는 공짜 책자를 챙겼다. 박물관이든 기념관이든 원래 이런 곳에는 사람이 상주하고 있는 법인데,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가운데 창문으로 햇살만이 들어왔다. 그리그가 쓰던 물품은 물론이고 달리 전시물이라 할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내가 남의 사무실에 잘못 찾아들어온 게 아닐까 고민할 때쯤, 안쪽에서 드디어 직원 분이 나타나셨다. 직원 분은 내 기억이 맞다면 회색 눈에, 한쪽 눈이 찌그러져 있어 비대칭적인 얼굴을 지닌 분이셨다. 평소라면 직원 얼굴도 기억을 못 할 사람이 왜 이런 걸 기억하고 있냐고... 그분 얼굴이 특이해서가 아니다. 1:1 가이드를 받아봤던 것은 이곳이 유일해서였다. 직원 분은 친절하셨고, 바로 내게 '음악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냐'라고 물어봤다. 하긴... 물어볼 만도 하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보통 이런 작은 기념관까지 찾아올 생각은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아니라고 하자 '그럼 취미로 악기를 다루거나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이냐'라고 물어보셨다. 그것도 아니라고 했다. 쇼팽 박물관 편에서 언급했듯이 내가 피아노를 손에서 놓은 지 벌써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사실 이 질문들은 꽤나 내게 아픈 질문이기도 했다. 일종의 자격지심이랄까, 다른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전공생이거나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오케스트라에 들어가는 악기를 수준급으로 연주할 줄 아는데 나는 그런 것도 아니면서, 화성학이나 뭐, 대위법 같은 것도 제대로 모르는데 이렇게 클래식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니고 클래식 작곡가들에 대해서 글을 써도 되는지 고민을 늘 많이 하기 때문이다. 브런치에 처음 지원을 할 때도 '그런데, 나 정도로 전문성이 없는 사람도 글을 막 써도 되는 건가? 이거야말로 전문성의 결여, 정보 오염 아닐까?' 하는 걱정을 정말 많이 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직원 분의 그 질문은 마치 내게 '이곳에 올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검사하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나는 내가 자격 미달이라고 느꼈다. (물론, 절대 친절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아니다. 이 대화를 하는 내내 직원 분은 미소를 짓고 계셨으며 무척 친절하게 응대해 주셨다) 직원 분은 잠시 '그럼 대체 뭐지' 하는 표정이 되시더니, '혹시 할 줄 아는 악기가 하나라도 있냐'라고 물어봤다. '옛날에 피아노를 조금 쳤었다'라고 답하자 그제야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이 되셨는데, 아니, 악기를 공부해서 그리그에게 관심이 생긴 게 아니라고요.


그런 나의 미묘한 불편함을 뒤로하고, 그리그 기념관 (이라고 해봐야 방은 한 개뿐이었다) 투어가 시작됐다. 큰 방 하나가 두 개의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는 형국이었는데, 오른쪽에는 그리그의 인생을 간략하게 요약해 놓은 몇 개의 큰 액자가 있었고 왼쪽에는 피아노 한 대와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사람은 당연히, 나와 직원 분, 합해서 두 명이 전부였다. 직원 분께서 설명해 주신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그리그 기념관 내부. 이 방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된다. 오른쪽에 그리그 초상화가 있다. (출처: Musikermuseen in Deutschland)

그리그는 라이프치히의 출판사, C.F Peters와 계약을 맺었다. 그리그가 아직 전 세계적 작곡가로서의 명성은 떨치지 못하고 있던 시절 그리그의 재능을 알아본 출판업자, 막스 아브라함이 바로 그리그 기념관 건물에 있던 출판사의 주인이었다. 그리그와 니나가 라이프치히에 올 때마다 이 사람에게 의지할 수 있던 것은 물론이고, 막스 아브라함은 그리그에게 아예 건물 2층을 내주기까지 했다. 그 건물 2층이 현재 기념관 자리다. 그리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피아노 소품 가운데 (아마도) 가장 유명한 서정소곡집을 써냈다. 서정소곡집은 개인적으로 내게도 추억이 있는 곡인데, 옛날에 혼자서 게임을 만들기 위해 끙끙거리고 있을 때 BGM으로 추천받은 덕분에 버그를 잡으려고 내가 만든 게임을 플레이하고 또 플레이해 보면서 몇십 몇백 번은 들었던 음악이기 때문이다. 그 첫 곡을 들으면 약간 속이 울렁이기까지 한다. 물론 곡 자체는 정말 담담하고 좋고 서정적이니까 멍하니 틀어놓을 피아노 소품을 찾고 있다면 강력히 추천한다.


흠, 그렇군. 이제 건물의 역사를 설명해 주셨으니 그리그의 인생이나, 그리그와 라이프치히의 관계에 대해서 더 설명해 주시려나? 하던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출판사 건물이라고는 하지만... 정말 출판사 이야기가 쭉 이어졌다. 의자에 놓여 있는 그리그 인생을 전시해 놓은 액자는 뒷전. '어차피 여기 올 정도 사람들이면 그리그 인생은 대충 알고 있죠?'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이 시점까지는 그리그의 인생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어차피 전부 독일어라서 읽으려고 해도 읽을 수도 없었지만, 이거 그리그 기념관이 아니라 C.F Peters 출판사 기념관으로 이름 바꿔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가이드였다. 불만은 없긴 하다. 그 내용이 꽤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그리그의 친구였던 막스 아브라함 씨께서는 1900년 자살하시며 회사를 조카 헨리 힌릭센에게 넘긴다. 그리그의 '서정소곡집'이 이곳에서 쓰였다는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막스 아브라함 씨께서는 대개 출판사들이 그렇듯 대규모 교향곡보다는 확실히 잘 팔리고 대중적인 피아노 소품을 선호하셨던 듯하다. 그래도 헨리 힌릭센은 그보다는 좀 더 레퍼토리가 넓었는지, 바그너나 브루흐, 막스 레거 등의 곡을 추가로 출판했다. 나중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곡까지도 출판했으며, 오스트리아의 가곡 작곡가인 후고 볼프의 곡도 출판했다고 한다. 차이콥스키, 브람스 등의 상대적으로 대중적이고 유명한 작곡가들도 물론 출판했다. 1911년에는 라이프치히 여성 음악학교를 세우는 데 도움도 주고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명예박사까지 받으며 활발히 활동하고 계시던 헨리 힌릭센 씨의 인생에 불운이 드리웠다. 그러니까... 이건... 그분의 사망 연도를 보면 누구나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인데, 음, 이분이 1942년 돌아가셨다.

왼쪽부터 파울 올렌도르프, 그리그 부부, 그리고 힌릭센 부부. (출처: The Wiener Holocaust Library)

막스 아브라함과 헨리 힌릭센은 둘 다 유대계였다. 당연히 1933년 회사를 빼앗겼고 회사는 '아리안화'되었다. 다른 회사에게 매각되거나 그냥 공중분해됐다는 소리다. 참고로 이 시기에 비슷한 일을 당한 또 다른 회사 가운데 펠릭스 멘델스존의 아버지와 삼촌이 세웠던 멘델스존 은행도 있는데, 이 이야기는 나중에 아예 독자적인 글로 발행해도 될 듯하니 여기서는 C.F Peters에 집중하겠다. 회사를 빼앗긴 데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인데, 우리 모두 알다시피 그렇게 끝나지를 않았다. 뉘른베르크에서 제정된 법 이전부터 정말 치사하고 치졸한 차별들이 크고 작게 시행되고 있었다. 그 차별의 자세한 내용은 베를린의 '유대인 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내가 기억나는 법령 중 가장 치졸했던 것은 '유대인은 케이크를 살 수 없다'와 '유대인은 극장에 갈 수 없다'였다. 나는 법령이 그렇게까지 쪼잔하고 세세할 수 있는 줄 처음 알았다. '모든 오락시설에 갈 자유를 박탈한다' 이런 식으로 포괄적이었으면 놀라지라도 않는데 '극장에 못 간다' '영화는 못 본다' 이런 구체적이고 치사한 차별이라니... 포괄적인 차별보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한 가지 행위를 막아두는 것이 더 치사하다고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 치사한 법령 가운데 하나가 '인슐린을 구입할 수 없다' 였던 모양이다. 당뇨를 앓던 헨리 힌릭센의 아내는 인슐린을 구입하지 못해 1941년 사망한다. 헨리 힌릭센은 런던으로 가는 비자를 구하려고 1940년부터 애썼지만, 탈출할 기회는 이미 지나가버린 뒤였다. 이미 그때는 비자 신청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고,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오히려 이런 대규모 이민을 반기지 않으며 문을 더 걸어 잠갔다. 이민을 갈 수 있던 것은 1933~1938년 정도까지. 헨리 힌릭센의 두 아들은 이 아비규환을 탈출해서 각각 런던과 뉴욕으로 갔고 각각 다른 C.F Peters 회사를 계승했다 주장하는 출판사들을 세웠다. 반면 힌센은 1942년 아우슈비츠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한 출판사의 드라마틱한 인생이었다. 출판사 건물은 독일이 동독 서독으로 갈라져 있던 시절 방치되었다가, 1998년부터 건물을 새로 짓기 시작해 2005년 무렵 그리그 기념관으로 개관한 듯했다. 직원 분은 커튼이나 벽지도 가능한 한 옛날의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말하며 편하게 둘러보라, 그리고 질문 있는지를 물으셨다. 사실 그렇게까지 궁금한 것은 없었지만... 뭔가 두 사람만 있는데 '질문이 없다'라고 하면 혼자 둘러보기 더 눈치 보일 것 같아 머리를 굴리던 나는 1층의 흉상들을 떠올렸다. 그리그와 그 세 명의 작곡가들이 각별한 관계가 있었던 것인가? 답변을 들은 나는 그 질문을 짜내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일단 이곳은 그리그 기념관이긴 하지만, 그보다도 출판사 건물이라는 게 우선이었다. 즉 1층의 세 거장들은 출판사에서 우상으로 생각하는 작곡가였다는 뜻이다. 음, 그렇지. 지금도 제일 잘 팔리는 작곡가 셋이지 않겠는가. (바흐를 빼고 쇼팽을 넣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출판사는 예술가에 비해 보수적인 경향성이 있다고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직원분께서 말씀하셨다. "원래는 멘델스존 흉상도 같이 있었는데, 2차 대전을 지나면서 그건 소실됐다더라고요." 뭐라고?!? 내가 그리그 기념관에서 새로 알게 된 사실 가운데 가장 가치 있는 사실이었다! 직원 분의 어깨를 잡고 진짜냐고 추궁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그냥 정중하게 추가 질문만 했다.


그리그 기념관의 입구에 있는 바흐와 모차르트 흉상. (출처: Bildlexikon Leipzig)

그리그 기념관인데 그리그 이야기가 별로 없는 것 같긴 하지만, '그리그' 이야기가 아닌 '그리그 기념관' 이야기니까 주제를 마음껏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해보겠다. 아니 어째 건물에 이렇게 많은 2차 대전의 암흑기가 숨겨져 있는지. 일단 몇 번 설명했듯이, 멘델스존은 라이프치히 음악계의 우상이었다. 생전에도 그랬고 사후에도 아주 오랜 시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나 같아도 내 도시에 음악원 지어놓고 내 도시에 있는 국제적 콘서트홀의 전설적 지휘자였으면 우상으로 받들 것 같다. 거기다가 멘델스존이 바흐를 발굴해 낸 인물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우리 동네 최고 유명인을 '만들어 준'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아무튼, 그래서 꽤 오랜 시간 동안 라이프치히는 음악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성을 보였고 바그너나 리스트 등이 학을 떼는 도시였다. 그리그 또한 명시적인 진보파는 아니었으나, 리스트에게서 '쫄지 말게'라는 조언을 듣고 감명받았고, 동료 작곡가들의 '멘델스존틱함'을 비난했던 것을 보아 아마 그리그는 출판사 입구의 멘델스존 흉상을 보고 질색팔색했을 것 같다. 그런 점을 생각해 보면, 멘델스존 흉상이 있었다는 것이 어색한 일은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라이프치히래도 그렇지, 멘델스존이 바흐-베토벤-모차르트랑 같이 놓여 있었다니, 그 존경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만했다. 1840년대에는 라이프치히 음악계에 제왕적으로 군림했고 사후에도 그 영향력이 계속되던 멘델스존도 그로부터 100년 뒤 일어날 일들은 피할 수 없었다. 제3 제국은 집권하며 일명 '퇴폐 음악'을 금지했는데, '퇴폐'라는 단어랑은 억만 광년쯤 떨어져 있을 것 같은 비더마이어 신사와 독실한 개신교도의 상징인 멘델스존도 이 딱지를 피해 갈 수 없었다. 유대계 혈통이라서. 말러 등도 마찬가지로, 이 시기 멘델스존이나 말러는 자동 금지곡이었다. 나치가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을 대체하기 위해 작곡가들에게 다른 '한여름 밤의 꿈' 작곡을 맡겼으나 대부분이 거절하고 오르프만이 받아들였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곳, 그리그 기념관에서 그의 흉상이 제거된 것도 바로 그 일환이었던 것이다! 이런 걸 질문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알았겠냐고! 그 직전까지는 이런 방 하나짜리 볼 것도 없는 기념관 왜 왔을까, 하고 후회를 했었는데 멘델스존 이야기 한 단락만으로 그 후회는 사라졌다.


30분 정도가 지났다. 이제 정말 그리그 초상화 붓질 횟수까지 셀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곳을 꼼꼼히 둘러보았다. 직원 분께서는 계속 질문을 기다리고 계시는 듯 그 자리에 서 계셨다. (살짝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슬슬 가기로 마음을 먹고, 나는 일부러 짓궂은 질문을 하나 던지기로 했다. "그런데, 그리그는 라이프치히를 좋아했나요?" 아니, 싫어했다. 나도 답을 안다. 직원 분께서는 당황하는 눈치셨다.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도시에 기념관을 만들긴 했지만, 사실 우리가 기념하는 대상이 이 도시에 별로 애정이 없었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 않은가. 직원 분께서는 머뭇거리시다가 '좋아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자주 왔고... 출판사랑 좋은 관계를 유지했죠...' 하고 답하셨다. 너무 짓궂은 질문을 드렸던 것 같아서 지금 돌이켜 보니 살짝 죄송하다. 그 질문을 하고 나는 조용히 문을 닫고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거리는 여전히 밝았다. 오후 두 시도 채 안 된 시점이었다. 멘델스존 박물관을 같이 가기로 했던 친구와 만나기까지 시간이 비었다. 태양이 쨍쨍 내리쬐는 여름날, 휴대폰도 없이 헤매고 싶지는 않아 나는 내게 익숙한 오페라 극장과 게반트하우스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뭐? 왜 라이프치히 펠릭스 멘델스존 음악대학을 가지 않았냐고? 가고 싶지 않았을 리가 있나! 다만 음악대학은 내가 둘러보고 싶었던 곳 중에 중심지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고, 따라서 지도 없이는 갈 수가 없을 것 같았기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을 뿐이었다. 라이프치히를 세 번을 갔는데, 아직까지도 멘델스존이 세우고 그리그가 다녔던 음악원은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니. 정말 클래식 애호가로서 부끄러운 일이었다! 아마 또다시 유럽에 가게 된다면, 나는 라이프치히를 한 번 더 갈 것 같다. 음악의 도시가 내게 꽤 많은 한을 남겨준 것 같다. 그리고 음악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리그 박물관처럼 숨겨진 역사가 나올 것 같은 공간들이 많을 것 같은 도시라서 알면 알수록 궁금해지는 곳이다. 대로와 대로 사이 있는 몇 블록 사이 그리그 기념관, 멘델스존 박물관, 그리고 막스 레거가 죽은 곳까지 있다니... 라이프치히는 정말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도시 같다.

라이프치히의 또 다른 서프라이즈.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교수로 일했던 레거가 죽은 곳을 기념한다. 보물찾기 하는 기분으로 자꾸 찾아다니게 된다. (출처: 위키백과)

아직도 라이프치히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한참 남았지만, 나머지는 또 다음 기회에 다루도록 하자. 한 도시에 너무 오래 머무르면 지긋지긋한 법이다. 몇 주 뒤 라이프치히 이야기가 다시 나오기 전, 클래식 애호가라면 라이프치히의 음악길을 직접 온라인으로 따라가 보는 것도 좋겠다. 

Leipzig Music Trail


최종 평가

명칭: 그리그 기념관 (Grieg-Gedenk- und Begegnunsstätte)
운영시간: 화~금: 14:00~18:00, 토:10:00~18:00
입장료: 무료
사이트 링크: Startseite - Grieg-Begegnungsstätte Leipzig e. V. (영어 홈페이지가 찾아지지 않는다!) 

1. 도시 접근성: 

라이프치히의 접근성은 맨 처음 바흐박물관에서 다루었으니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2. 도시 내 접근성: ★

멘델스존하우스와 5분 거리라고 적어놓았지만 사실상 3분 거리다. 문제는 거리가 아니라... 박물관이 아니라 작은 기념관이라서 표시가 안 되어 있는 바람에 눈에 잘 안 들어온다. 그래서 별점을 0.5개 정도 깎았다. 


3. 소장품: 

슈베르트 박물관은 안경이라도 있었지... 원본이라고는 없는데 뭘 별점을 줄 수 있겠는가. 하다못해 건물도 공산권 시절 황폐화됐던 건물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것인데 어떻게 점수를 주겠는가!


4. 언어 지원: ★

텍스트는 전부 독일어다. 다만 내가 1점이 아니라 2점을 준 것은 순전히 가이드 분 때문이셨는데, 나의 다소 교과서적이거나 사파적인 영어 구사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영어 실력으로 내가 위의 아주 복잡한 출판사 역사를 모두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주셨다. 진심으로 이 자리를 빌려 그리그 기념관 직원분께 감사드린다. 아마 그분은 누군가가 찾아올 거라 생각도 안 하고 계셨을 텐데. 물론 여러분들이 갔을 때의 직원이 영어를 잘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5. 가성비: ★★☆

무료... 이까 이론적으로 가성비가 좋아야 하는데, 나는 그리그 기념관이 그렇게 작을 줄 모르고 들어간 바람에... 시간 대비 효율이 좋지 않았다는 기분이 든다. 왜 무료인데 가성비가 나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6. 규모: ☆

음... 그리그 기념관에는 미안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정말 방 한 개짜리 기념관에 별을 한 개 이상 줘야 할까? 농담 아니고 10분 둘러보면 오래 보는 것 같은 공간에 말이다. 직원 분의 설명이 없었더라면 난 5분 훑어보고 바로 나왔을 것이다. 그리그 기념관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사진이 전부다. 눈에 보이는 게 정말 전부다.


7. 상호작용: ★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8. 굿즈: ★

아무것도 없다... 공짜 연주 일정계획표나 가져갈 수 있으면 다행이다. 뭔가를 파는 것 같지도 않다... 이곳에서 파는 것은 연주회 티켓이 전부인 듯하다. 


9. 큐레이팅: 

아무것도 없어서 큐레이팅 점수를 줄 수가 없다... 그리그 생애를 담은 액자는 내가 초등학교 때 만들던 가족신문과 비슷한 퀄리티로 보였다.


10. 총평: 

굳이 여기에 걸음 하는 것보다는 텍스트로 읽는 게 좋다. 다만 이곳에서 열리는 연주회에 참석한다면 또 다른 이야기다.

최대 장점:... 음... 독일에서 노르웨이 작곡가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직원 분이 열심히 설명해 주셔서 1:1 가이드 경험을 할 수 있다.

최대 단점: 박물관이 아니다. 기념관이다. 박물관을 기대하고 오면 실망한다. 작곡가보다 출판사 이야기가 많다.

추천 여부: X. 라이프치히의 음악과 관련된 모든 장소 도장 깨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갈 이유를 느끼지 못하겠다. 


26화 예고: 유로 2024로 인해 라이프치히의 모든 호텔은 객실 매진! 아니, 대체 어디에서 묵어야 하는 거야 고민하던 채굴꾼의 선택은 바로 할레잘레! 라이프치히 근처의 알찬 할레잘레 호텔에서 과하게 난방이 잘 되는 밤을 보낸 뒤 이번에는 조지 프레데릭 헨델이 아니라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의 이름을 찾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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