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에 대해
접촉사고.
휴대폰 화면에 뜻밖의 이름이 뜬다. 낯익은 이름이긴 하지만 통화할 일이 어림잡아지지 않아 순간 당황한다. 오랜 기간 지역에서 명성 있는 어른으로, 나로서는 스스럼없이 대하기 쉽지 않은 사람이다. 네, 도 아니고 안녕하세요? 도 아닌 어정쩡한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 얘기인즉, 지하주차장에서 주차하다가 당신 차를 건드렸으니 근처에 있으면 내려와 보라는 얘기이다. 이건 뭔 일인가, 이상하게 쿵쿵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급하게 내려갔다. 얼굴을 알아보며 내 차냐고 묻는 말을 귀로 듣고 대답하며 시선으로는 차를 살핀다. 당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평소의 습관이다. 검은색 내 ‘아침’ 차를 보니 운전석 앞 범퍼에 흰 칠이 뭉개져있다. 운전이 서툴러 자주 이런 경우가 있다며 가까운 곳에 말해 놓을 테니 칠을 다시 하라는 말도 건성으로 듣는다. 예상치 못한 일에 좀비 때처럼 달려드는 생각을 정리 중일 뿐이지만 상대방에게는 성의 없어 보일 수 있는 행동 습관이다.
사무실로 올라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보았다. 도색을 다시 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아 하루정도 차를 맡겨야 할 거란다. 그러면서 상태가 어떤지 가보자고 일어서자 옆자리 직원도 따라나선다.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이 정도면 닦아질 거 같다고 한다. 직원이 본인 차에서 자동차용 파우더를 가져와서는 물티슈로 먼지 등 이물질 먼저 닦아내고 나서 파우더로 힘주어 문지른다. 쉽게 지워지지 않는가 싶었으나 좀 지나니 없어지기 시작한다. 범퍼 모서리 부분의 칠이 조금 벗겨지긴 했으나 처음보다 흉해 보이진 않는다. 앞 범퍼가 우레탄이라는 것도 알았다. 녹슬 염려가 없는 것이다. 이 정도면 그냥 다녀도 될 듯싶다.
파우더로 닦아보니 괜찮아서 도색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고맙다는 답장을 받고서 오늘의 해프닝을 일단락 짓기로 하는데, 직원이 자꾸 다만 얼마라도 받아 스프레이페인트라도 사지 그러냐고 한다. “아니야, 나 못해.” 이런 말이 나왔다. 다른 이도 부치기며 거든다. “아니요, 저 못해요.” 거의 반사적으로 같은 대답이 나온다. 난 뭘, 왜 못하겠다는 걸까? 잠깐 앞뒤를 재보다가 이내 생각을 지운다. 그런데, 열심히 차를 닦아준 직원이 마음에 걸린다. 신세를 진 기분이다. 점심을 샀다. 이로서 마음 가볍다.
휴대폰 환승.
오래되고 용량 적은 휴대폰을 고집스레 쓰고 있는 것이 답답했는지 딸아이가 새 기계를 사 들고 왔다. 두 기계를 놓고 기존 휴대폰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새 기계에 복사하고 유심 칩을 바꿔 끼면 바로 사용가능하다며 열심히 만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유심 칩을 갈아 끼우면 되는데, 크기가 맞지 않았다. 새 유심 칩이 필요하다. 다음 날 고객센터에 전화해 칩을 주문하고 이틀 후 받았다. 하루 만에 받을 수 있다고 해서 기다렸으나, 사무실 인근에 같은 이름의 건물을 착각한 배달원이 그다음 날에야 가져다주었다.
고객센터로 유심등록신청을 하고, 작은 크기의 나노유심을 조심스레 다루며 끼웠는데 반응이 없다. 물어볼 대상이 눈앞에 없으니 고객센터와의 소통 실랑이가 시작된다. 헬로모바일 알뜰폰을 쓰고 있고 그 안의 세 개 통신사마다 고객센터번호가 다르다. 기존 통신사와 알뜰폰에서 끌어 쓰는 통신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몇 번 혼동하며 통화를 이어갔다. 새 기계가 나노유심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며 숫자와 특수문자 조합해하라는 대로 했는데 여전히 무반응이다. 같은 통신사를 쓰고 있는 다른 휴대폰의 칩을 끼운 후 통화해 보라고 한다. 마침 직원의 통신사가 같아 해 보니 새 기계에서 직원 전화번호로 통화가 된다. 기계 이상은 아닌 것이다. 확인을 위해 새 유심을 직원 휴대폰에 끼워보니 역시 무반응이다. 유심불량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내용으로 수차례 고객센터와 통화했다. 기계는 이상이 없고, 유심불량도 아니라던 상담자가 이제 자기들 입장에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며 기술팀으로 넘겼으니 기술팀 전화를 기다리라고 한다.
유심 칩 등록이 변경되어 기존 휴대폰 통화가 정지되었다. 딱히 급한 용무가 있지 않으나 전화가 안 된다는 사실이 너무 갑갑하다. 그나마 와이파이, 무선데이터전송시스템이 되는 곳에서는 일부 SNS가 작동하여 가까운 이들에게 이런 사정을 알리고 느긋하고자 애써보았다. 그것도 잠시, 언제라고 정한 기약도 없이 마냥 기다리기가 안 되어 다시 전화하니 여전히 일반 업무팀에서는 모르겠다는 대답이다. 전화번호를 물으니 기술팀은 전화번호가 없다면서 이렇게 통화 중에 기술팀 전화가 올지도 모른다며 은근 조롱하는 투다. 어떤 한계에 도달한 느낌, 다른 시도를 해봐야겠다는 감정의 변화가 일어난다. 모르는 분야의 불안함이 가져온 추측과 짐작으로 지치고 막막하다. 이래서 다들 매장을 이용하겠구나 하는 데까지 와 버렸다.
주말에 이어 임시휴일까지 겹쳐 있으니 마냥 기다리는 마음을 유지하기 어렵다. 기존 휴대폰을 가입했던 가게에 가서 점검받아보니 대리점으로 가면 바로 해결될 거라고 한다. 알뜰폰이라 관내에는 대리점이 없다. 주소검색으로 인근 시 대리점을 확인하고, 영업 중인지 통화하고 전철을 이용했다. 역 앞에서 습관처럼 휴대폰 지도를 보며 찾아가야지 했는데 안 되고, 전화 역시 불통인 것이다. 공중전화를 찾으며 순간 미아가 된 심정으로 정신마저 아찔하다. 난 무엇에, 어디에 길들여진 것인가라는 생각과 함께 자포자기 심정이 된다. 지도를 기억하며 일단 걸어가 보기로 하고 못 찾으면 그냥 되돌아가자 마음을 진정한다.
요행처럼 신작로 옆 대리점이 나타나고 안으로 들어갔다. 찾아온 과정을 말하니 여기서도 그 상황은 해결해 줄 수 없다고 한다. 같은 문제를 두고 각기 다른 말을 하는 이 상황이 어지러웠다. 전화기를 빌려 대리점에 가면 해결된다고 한 가게와 일단 통화했다. 또 누군가에게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주지 말라는 뜻을 포함하여. 2년 계약 만료 후 재계약하면 요금의 30%를 할인해 준다고 해서 재계약한 지 1년 반이 되었다. 해약하면 그동안 할인받은 금액이 위약금으로 나온다. 그래서 반년 기다리자는 심정이었다. 상담해 보니 기존 약정보다 나쁘지 않으면서 요금이 더 저렴한 통신사가 있었다. 여기까지 오니 위약금이 문제 되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다른 통신사로 번호이동을 마치니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가 걸려온다. 과정은 어려웠지만 한방에 휴대폰 환승을 해결하고 날아갈 듯 가볍게 돌아왔다.
모든 경험은 개별적이다. 하나의 일이 잘 맞아떨어지는 톱니바퀴처럼 아귀가 맞으면 간단하고 손쉽다. 같은 일도 어긋나기 시작하면 세상 어려운 일로 기억에 남는다. 요즘 같은 시대에 휴대폰 바꾸는 일로 일주일가량을 매달리는 건 어떤가. 옆자리 직원이 며칠 지켜보며 참을성도 많다며 한마디 한다. 나는 수없이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 인내심은, 내 다그침은, 내 조바심은 과연 마땅한가.
이제 딸아이에게 고마운 마음 더불어, 온라인서비스에 대해 일면 공부하는 재미를 맛본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정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