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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어른의 맛, 누룽지 닭백숙

by 채움



#1.

잿빛 하늘이 계속 됐지만 그날의 공기는 이전과 사뭇 달랐다.

오랜만에 사적인 외출이라 설렜던 걸까, 아니면 만나는 사람들이 너희들이라 기분이 좋았던 걸까.

날짜와 시간, 접선 장소를 정하며 우리는 소풍을 앞둔 유치원생들처럼 들떠있었다.


수능을 마치고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어린 청년들.

중학교 졸업 이후 해마다 봄이 되면 만나던 소모임이, 출산과 입시로 잠시 멈춰있다가 새해의 시작과 함께 다시 열린 것이다.


쉬는 시간만 되면 앞뒤 교실 문을 닫고 목이 터져라 “좋니”를 열창하던 귀엽고 시끄러운 아이들은, 어느새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는 스무 살 열혈청년이 되어 있었다.


고기를 구우며 아이들에게 조심스럽게 술을 마실 것인지 물어보았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나의 선택은 어김없이 사이다행이지만, 이제 막 학생 신분에서 벗어나 주민등록증에 잉크가 묻은 아이들은 어른 대접을 해주고 싶었다.


- 진짜 마셔도 돼요?

- 오오 선생님이랑 이렇게 마시니까 진짜 어른 된 것 같아요!

발그레 웃는 아이들을 보니 영락없는 그때 그 시절 중3 꼬맹이들이구나 싶다가도, 벌써 이렇게 컸구나 싶어 지나간 시간이 아릿하게 느껴졌다.




#2.

안 본 사이 들려주고픈 이야기가 눈처럼 쌓였을 터였다.

정신없던 입시과정과 수능, 실력과 운빨 모두 존재해야 했던 이상한 수시와 정시의 메커니즘, 학교와 전공, 돌고 돌아 중3 시절의 추억까지. 그리고 이야기의 종착지는 #전공, #어른, #현실, #행복.


숨이 넘어갈 정도로 깔깔깔 웃다가도 잠깐의 침묵이 찾아오면 아이들의 눈빛은 흔들리는 술잔처럼 일렁였다.

희망차고 설렘 가득해야 할 스무 살이 잘못된 선택으로 꼬이는 것은 아닌지 내내 불안했을 것이다. 확신 없이 걷는 이 시기를 누군가 확실하게 못이라도 박아줬으면 하는 마음이지 않을까. 그때의 내가 그랬으니까.

선택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난관에 부딪혔을지, 수많은 밤을 잠 못 이루고 뒤척였을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아이들의 이야기에 더 많이 귀 기울이고 싶었다.


- 나도 얼마 살아본 건 아니지만..

말문을 열며 머릿속으로 열심히 단어를 골랐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 중 가장 따뜻한 단어가 무엇이 있을까.

성공과 실패에 상관없이 긴긴 레이스를 완주한 녀석들의 시간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전하고 싶었다.


- 수능 잘 보면 땡큐지.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증거니까. 근데 너희들도 알다시피 만족 못한 친구들이 훨씬 더 많을 거야. 그런데 수능 망쳤다고 해서 내 인생 자체가 빠그라지지는 않아.

뒤집을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고, 나를 보여주고 증명할 수 있는 기회도 꽤 여러 번 찾아오더라고.

중요한 건 그때마다 주저하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냐는 거야. 그러려면 많은 준비와 내공이 필요하지. 원하는 곳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그 선에 있는 사람들과는 출발선이 다를 테니 더 노력해야 될 테고.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순간 앞에서 내공을 꺼내는 일이더라. 오랜 시간 뜸을 들여서 빚어내야 되는 거지.

나도 얼마 살아본 건 아닌데 지나고 보니 그러네.




#3.

다음날 아침,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는 남편을 위해 누룽지 닭백숙을 만들기 시작했다.

백숙(白熟)은 고기나 생선 등을 물에 넣고 끓이는 요리라는데, 비주얼에서부터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지녀 결혼을 하고 나서도 쉽게 도전하지 못했던 요리 중 하나였다. 다행히 영원한 동반자 쿠쿠의 만능찜 기능이면 손쉽게 만들 수 있다고 하여 용기 내어 시도해 보았다. 난생처음 만드는 요리라 실수할까 싶어 레시피를 얼마나 들여다봤는지 모른다.


닭을 씻고, 마늘을 손질하며 어제의 대화를 떠올렸다.

내가 왜 그런 이야기를 했지, 분위기에 취했었나.

괜한 소리만 한 건 아닐까, 꼰대의 지루한 이야기로 남았으면 어쩌나 싶다가도 그나마 가장 가까이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어른이 나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


전기밥솥에 들어가 푹 익기를 기다리는 닭과 노르스름하게 구워지는 찹쌀 누룽지.

여러 재료들을 밥솥에 넣고 '만능찜' 모드로 45분을 기다리면 재료 본연의 맛이 살아있는 누룽지 닭백숙이 완성된다.

사실 말은 삐까번쩍하게 하고 있지만, 고백하자면 버튼을 누르자마자 취소하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다.

늘 20분이면 쾌속으로 완성되는 밥만 만들다 보니, 익숙지 않은 기다림이 영 불편했기 때문이다.


45분이나 기다려야 된다는 말에 이게 맞는 건가 싶어 밥솥 주변을 두리번거렸는데, 어느 순간 퍼져 나온 구수한 닭백숙 냄새에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그 냄새가 마치 "괜찮아. 잘하고 있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백숙 요리는 대성공이었다.

뼈까지 쏙쏙 빠져 먹기 좋게 익은 닭을 보며 나와 남편은 환호성을 질렀다. 오랜 시간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4.

그러고 보니 누룽지 닭백숙을 만드는 과정은 어른이 되어가는 시간과 닮았다.


불을 켜고 재료를 넣는다고 해서 바로 완성되지 않는다. 어색하고 불편한 시간들이 온전히 지나가야 비로소 깊고 담백한 닭의 맛이 우러난다. 오랜 시간 익히고, 뜸을 들이는 작업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그렇게 켜켜이 쌓인 시간들이 나라는 사람을 만든다.


나도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역할은 분명하지 않고,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그 속에서도 자기 무게로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사람.

재료들이 한데 어우러져 조화로운 맛을 내는 백숙처럼, 다양한 경험과 감정들로 깊은 맛을 만들어내는 사람.

이따금 고개를 내미는 권태로움과 일상의 지리멸렬한 순간에도 담백한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는 사람.

이런 어른이 그냥 만들어질 리 없다.

아이들에게 일장연설을 한 것처럼 많은 시간과 내공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 오늘도 열심히 나를 익히고 뜸을 들여본다.



"산중(山中)에 책력(冊曆)도 없이 삼동(三冬)이 하얗건만,

무시로 인동 삼긴 물을 나리며

풍설 소리에 잠착하는 어느 노주인처럼."







<누룽지 닭백숙>
*재료 손질
- 찹쌀: 씻은 후 30~1시간 불려주기.
- 닭: 볶음용 닭 구입. 흐르는 물에 씻음.
- 기타 재료(마늘, 파, 양파 등): 흐르는 물에 씻은 후 손질함.

*누룽지 닭백숙 만들기
- 찹쌀을 불릴 동안 닭, 재료 등을 손질한다.
- 밥솥에 찹쌀>닭>대파, 양파, 마늘 등을 올린다.
- 소금(1~2)을 뿌리고, 물(250~300)을 넣는다.
- 찜기능(쿠쿠 만능찜 기준 45분)을 누르고 기다린다.

*담백하게 먹고 싶어서 약재는 넣지 않았습니다.
**작게 잘린 닭이 빨리 익기도 하고, 찌는 과정에서 채소가 섞여 잡내가 사라져서 이용했어요.




*참고: 정지용 <인동차>에서 영감을 받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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