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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너의 재수와 나의 재수가 합쳐지면

맛있는 카레 완성!

by 채움



#1.

설거지 시작도 전에 유리컵 하나를 깨뜨렸다.


신혼여행으로 간 제주도에서 사 왔던 커플 유리컵이었다. 유리컵 주변에 귤 모양이 그려져 있어, 여기에 오렌지주스를 따라 마시면 더 상큼하고 맛있을 것 같아 남편이 구매한 것이었다.


남은 컵 하나라도 쓸까 하다가 ”부부잔처럼 짝을 이루는 물건은 하나가 깨지면 그 기운이 깨지니, 나머지도 버려야 한다“ 는 말이 떠올라 결국 함께 정리했다.


손은 왜 이리 굼떠서 컵 하나를 제대로 못 잡나 괜스레 짜증이 났다. 출산을 하면 뇌도 같이 낳는다던데, 나는 손까지 어떻게 된 게 아닐까 싶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남편은 청소기를 돌리며 다친 곳은 없는지 살펴봤다. 그리고는 컵 모양이 설거지하는데 적합하지 않았다고, 안 그래도 별로였는데 잘됐다며 태연하게 웃었다.


유리컵 사건이 마무리된 지 2시간이 지났나.

남편이 분유를 타다가 젖병을 제대로 닫지 않은 채 기울여버렸고, 순식간에 내용물이 쏟아져 나왔다. 오늘은 재수에 옴 붙은 날이 틀림없다.


다행히 분유는 아이의 목 뒤로 흘러 방수패드와 역류방지쿠션만 적셨다. 얼굴을 덮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뚜껑을 다시 닫을 새도 없이 쏟아지는 분유 때문에 남편은 허둥대며 아이에게 연신 미안해했다.


나는 잠시 집안일을 멈추고 허둥지둥하는 남편을 진정시켰다.

이럴수록 침착하게.

*아다지오[Adagio], 아다지오[Adagio].


- 얼굴에 쏟아지지 않았으니까 괜찮아. 젖은 옷이랑 쿠션은 바로 빨래하면 돼. 다행히 오늘 날씨도 좋네!

밥 먹을 때 예민하니까 지금은 놔두고, 다 먹으면 트림시키고 목욕하자. 쏟은 분유 양만큼 내가 다시 타 올게.


아침에 유리컵을 깨뜨렸을 때 느꼈던 짜증과 민망함을 남편도 느꼈을까.

유리컵과 분유 사건으로 하루의 반나절이 쏜살같이 지나갔지만, 서로에게 건네는 배려와 다독임 덕분에 우리는 어제보다 조금 더 따뜻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2.

바쁜 와중에 간단하게, 하지만 영양 가득히 끼니를 챙길 수 있는 요리, 카레.

냉장고 속 자투리 채소들을 정리할 수 있고, 곰탕처럼 몇 끼는 너끈히 돌려먹을 수 있다.

심지어 숙성된 카레는 진하고 묵직한 풍미를 내뿜어 종종 해 먹는 음식 중 하나이다.


남편과 나는 카레를 만드는 방식이 다르다.

남편은 모든 재료를 밥솥에 한 번에 넣는다. 솥 안에는 물 대신 양파를 수북이 깔고, 카레 가루와 자연스럽게 섞이게 만든다. 일명 무수분카레.


반면 나는 양파와 고기부터 버터에 달달 볶으며 시작한다. 양파가 노르스름해지고 붉은빛을 띠던 고기가 갈색으로 변할 때 즈음 나머지 채소를 넣고 한 번씩 더 볶은 후, 카레 가루와 물을 넣고 끓인다. 밥보다 국물을 더 좋아해서 항상 카레 국물을 넉넉하게 만드는 편이다.


만드는 방법은 다르지만, 부부가 만든 카레의 맛은 늘 깊고 풍부하다. 다른 방식, 다른 손길이 만나도 결국 잘 어우러진다.




#3.

남편이 방학을 한 뒤로 우리는 거의 24시간 붙어있다.

행동반경이 넓어지고 부쩍 짜증이 는 아이, 반복되는 일상과 허덕이는 체력 속에서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곡소리를 내고 있다.


육아 과정에 쉬운 것이 어디 있겠냐마는 우리를 제일 지치게 하는 것은, '방학이라쉬어야되는데쉬는것같지않은그런느낌적인느낌을받는다는것'이다.

마치 바닷가에서 수영을 하고 돌아오는데, 수영복 사이사이로 빠져나오지 못한 모래알이 버적거리는 기분이다. 늘 어디 한 군데가 사각거리고, 찝찝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이 상황을 무던하고 유연하게 버텨나간다.

말속에는 온도가 담겨있다고 했던가. 맥 빠지는 순간에도, 서로 다른 육아 가치관에 골머리를 앓아도, 우리는 전보다 더 따뜻한 말과 행동으로 서로를 배려한다.


아침부터 재수가 없어 유리컵을 깨 먹고, 분유가 쏟아져 매트가 끈적끈적해졌음에도 모난 말들은 바다 위로 건져 올린다.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는 서로를 위하여.






전날 남편이 만들었던 카레는 다음날 아침이 되자 보기 좋은 황금빛을 띠고 있었다. 하루 숙성이 된 탓인지 카레 속 재료들 또한 조화를 이루어 풍부한 맛을 내고 있었다.


나의 재수와 남편의 재수가 합쳐진 깊은 맛.

그리고 꽤 괜찮다고 자부할 수 있었던 하루.


마치 24시간 붙어서 육아를 하는 우리들처럼 끈끈하고 견고한 맛이었다.






*아다지오: 느리고 침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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