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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킹가위 Jun 16. 2024

최악의 이별 선물은?

안녕 나의 사랑

이별을 통보받는 이에게 가장 최악의 이별 선물은 무엇일까. 자기 딴에는 마지막까지 좋은 모습을 담아 웃는 얼굴로 보내주는 게 사랑했던 사람을 위한 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전혀 아니다. 이별할 때는 어떤 미련도 남지 않도록 단칼에 보내주는 게 마지막 예의다.


아무리 예쁘게 포장해 봤자 나보다 중요한 게 생겨 떠난다는 말이 아닌가. 마지막까지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서 그런지 심보가 아주 못됐다. 성시경의 <안녕 나의 사랑>은 나쁜 이별 통보의 전형적인 케이스다.


여름냄새 벌써 이 거리에

날 비웃듯 시간은 흐르네

눈부신 햇살 얼굴을 가리면

빨갛게 손끝은 물들어가

몰래 동그라미 그려놨던

달력 위 숫자 어느덧 내일

제일 맘에 드는 옷 펼쳐놓고서

넌 어떤 표정일까 나 생각해

해맑은 아이 같은 그대의 눈동자 그 미소가

자꾸 밟혀서 눈에 선해 한숨만 웃음만

그대 힘겨운 하루의 끝 이젠

누가 지킬까 누가 위로할까

내 턱끝까지 숨이 차올라

내 머리 위로 바람이 불어온다

온 힘을 다해 나는 달려간다

이게 마지막 선물이 될지도 몰라

눈물이 흘러 아니 내 얼굴 가득히 흐르는 땀방울

늘 그랬듯이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안녕 나의 사랑 그대 미안해


성시경, <안녕 나의 사랑> 중에서


1절 매너요.


어느덧 여름이 왔음을 후각적 이미지를 통해 알린다. 여름 냄새는 거리에 가득하고 너와 헤어지기로 마음먹은 날이 다가오고 있다. 햇살이 눈부신 듯했으나 어느새 노을로 손끝은 붉게 물든다. 하루가 눈 깜빡하고 지나간다는 진부한 표현 대신 붉은색 시각적 이미지를 활용해 시간의 매정함을 보여준다.


언제나 그렇듯 하기 싫은 일을 앞두고는 시간은 항상 날 비웃듯 재빨리 흘러가기 마련이다. 추상적 개념인 시간을 구체적인 시각적 이미지로 그려냈다는 점에서는 황진이의 시조와 비견될 만하다.


동짓달 기나긴 밤의 한가운데 허리를 베어 내어

봄바람 이불 밑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고운 임 오신 날 밤이 되면 굽이굽이 펴리라.


<황진이의 시조>, 시조는 원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제목이 없음


동짓날 밤은 너무 긴데 내 곁에는 임이 없다. 차라리 긴 밤의 시간을 끊어서 이불 아래 넣어두고 임이 온 밤에 붙여 그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다. 보다시피 조선 후기의 시조는 생각보다 아름다운 작품이 많다. 물론 작자가 사대부 남성아닌 경우에 말이다.


다시 원래 노래로 돌아와서. 이별 통보하러 가는 주제에 또 예쁘게 보이고 싶기는 한가 보다. 제일 맘에 드는 옷을 골라 입고 너의 표정을 상상하자 한숨과 웃음이 흘러나온다. 한숨이야 그렇다 쳐도 웃음은 웬 말인가. 이별을 알리는 마지막을 앞두고 있지만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 사람이었나 보다. 이별을 말하고 나면 잠들기 전 "오늘 어땠어? 별일 없었어?" 하는 안부도 이젠 묻지 못하게 될 거다.


이제 약속 장소로 출발할 시간이다. 빨리 이별을 고하고 싶어 뛰어가지는 않았을 거다. 달력에 표시까지 하면서 준비한 날인데 약속 시간에 늦었기 때문에 뛸 리도 없다. 아직도 1분 1초라도 빨리 만나고 싶을 정도로 보고 싶은가 보다. 근데 왜 헤어지지?


생각하니 서글픔에 눈물이 흐르지만 여름날 뛰고 있어 흐르는 땀일 뿐이라며 애써 자신을 속인다. 도착해 아무렇지 않게 웃는 얼굴로 우리의 마지막이 왔음을 알린다.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기껏 준비한 마지막 선물이라는 게 웃는 얼굴로 이별하는 거라고? 그럼 이별을 통보받는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아주 이기적이고 지독한 심보다.


헤어질 때는 담담하고 솔직하게 고백하자.


"난 니가 싫어졌어 우리 이만 헤어져." 하면 될 일이다. 그것이 당신을 나쁘게 보이게 할 수는 있겠으나 그게 헤어질 때 마지막으로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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