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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형 Apr 29. 2019

첫 만남

육아와 사색_ 1

2018년 늦은 겨울, 보석이가 태어났다.


‘보석이를 낳았다’고 쓰지 않고 보석이가 태어났다고 쓴다. 내가 아닌 보석이가 주체다. 자기 목조차 가누지 못해 고개를 픽픽 떨구는, 생존의 모든 면에서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존재지만 나를 엄마로 기능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보석이가 주체가 되어서 하는 일이다. 나는 어디서 이렇게 힘이 펄펄 나는지, 제왕절개 수술한 산모 같지 않게 아기를 위한 하루를 살았다. 신생아 돌보기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어렵지만, 역설적으로 더 할만했다. 보석이가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이다.    

  

정확히 오전 9시 58분이었다. 수많은 밤마다 상상해오던 순간, 내 배를 갈라 보석이를 꺼내는 순간이었다. 현실감이 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수술방의 9시 58분은 무척 사실적으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마비된 하반신에 일어나는 일을 가리기 위한 녹색 수술포만 바라보고 있던 중 갑자기 배가 휑하고 가벼워져 보석이가 내 배를 떠났다는 걸 알 수 있었고, 보석이가 ‘난생’ 처음 내는 목소리가 응애응애 들려왔다. 나는 이 아이와의 첫 만남에 꼭 내 목소리를 들려주고 파서 그동안 연습을 했다. 다른 말은 어렵더라도, “보석아”라고 불러 내 목소리를 알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실제 그 순간이 왔을 때, 붉기도 하고 회색빛이 나기도 하는 작은 아기가 내 얼굴 가까이 다가왔을 때, 나는 목이 메어 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었다. 어차피 들리지 않을 테니 굳이 목소리를 낼 필요 없다고 나를 안심시키는 듯 보석이의 울음은 우렁찼다.     



병실로 돌아와 누운 자리에서 다시 보석이를 만났을 때는 오히려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싸개에 둘둘 말린 채 눈 꼭 감고 잠들어 있는 이 아기가 정말 내 아기인지, 수술실에서 그렇게 우렁차게 울던 보석이가 맞는지, 내가 정말 이 아기의 엄마인 건지. 사실 이런 ‘갓난아기’는 난생처음 본다. 엄마가 되는 게 처음인 건 물론이다. 남편도 갑자기 아빠가 되어 아기를 안고 기저귀를 가는 모습이 어색하기 짝이 없다. 아기를 직접 돌봐야 하는 모자동실이었던 탓에 우리는 이 자그마한 생명이 혹 바스러지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다. 내 아기를 돌본다기보다는 몹시 연약한 한 존재를 보호하기 위한 처절한 노력이었다.      


하루가 지나서야 비로소, 엄마와 아기라는 운명적 만남의 선이 굵어지는 게 느껴졌다. 아직 의식이란 것을 획득하지 못한 듯 기면 상태와 배고픈 상태만을 반복하고 있는 보석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의 미미한 움직임이 내 마음에 커다란 파동을 일으킨다. 입 꼬리의 작은 변화, 가느다랗게 뜨일락 말락 한 눈꺼풀, 심지어 머리카락 한 올의 자리 이동까지. 그는 내 마음에 엄청난 권력을 행사했다. 아기를 낳기 전 다인실 여기저기서 들리던 ‘아기 울음소리’는 뭉뚱그려진 하나의 소리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수십 명의 아기가 함께 울어도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은 내 아기만의 특별한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기의 울음이 꼭 슬픔이나 고통을 말하는 건 아닐 텐데, 갓 엄마 된 연약한 가슴은 아주 작은 울음소리에도 날카롭게 베인 듯 통증을 호소한다. 너의 존재만으로, 나는 가슴이 아린다.      


이 작고 보드라운 생명을 떨어뜨릴까 봐 노심초사하며 조심스레 들어 올려 본다. 신생아는 약 20cm 정도 앞이 간신히 보이고, 흑백의 세상을 본다 했다.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이 엄마를 정확히 바라보지도 못하고 배고픔에 입술만 오물거릴 줄 아는, 사람이라기보다 생명 그 자체를, 나는 목도하고 있다. 먼 훗날에는 이 아기가 수염이 덥수룩하고 땀 냄새 풍기는 성인 남자가 되겠지만, 부서질 듯 연약한 아기로서 내 품에 안겨있는 이 순간은 영원처럼 내 머릿속에 각인될 것이다.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평생 잊지 못할 첫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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