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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형 May 02. 2019

위대한 시작

육아와 사색_ 2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엄마인 내게 아기의 생존 전권이 주어졌다. 갑자기 한 사람의 생존을 책임져야 하는 ‘엄마’라는 이름을 획득한 여자의 심리적 변화는 가히 압도적이다. 먹고, 자고, 싸고, 때로는 숨 쉬는 것마저 버거워 보이는 이 작은 생명이 얼마나 연약한지 꿈결에라도 떠오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그 작은 형체가 여전히 내 옆에 잘 있는지 확인해야 안심이 된다. 아기의 안위에 온 신경을 쏟느라 나 자신의 욕구, 허기나 요의 같은 신호도 잘 인지하지 못한다. 아기 외의 외부 세계에 극히 무관심해지는 ‘모성 몰두(maternal preoccupation)’의 상태다.      


양수에 젖어 쪼글쪼글하던 신생아를 말끔히 목욕시킨 후 부지런히 젖을 먹이니 하루가 다르게 살이 오른다. 주먹보다 작은 얼굴 안에 조물주의 설계가 조밀히 들어차 있는 게 어찌나 아름답고 경이로운지 눈을 뗄 수 없다. 포장지를 막 뜯은 새 물건 같아, 얼굴에 손 대기도 조심스럽다. 아니나 다를까 눈곱을 떼어내려 손가락 끝으로 눈가를 살짝 문질렀을 뿐인데 피부가 빨갛게 붓는다. 찰박거리는 양수의 파동 외에 자극이라고는 경험해본 적 없는 게다. 


이 순수의 결정체가 투박한 내 손에 자신의 나약함을 고스란히 내어 맡긴 채 작게 숨 쉬고 있다. 자신의 제 일 책임자가 된 엄마라는 상대가 얼마나 잘났는지, 충분히 믿음직스러운지 타산해볼 생각도 없어 보인다. 아무 심려 없이 눈앞의 인연에 자신의 벌거벗은 몸뚱이를 드러내며 당신이 나를 돌보지 않는다면 나는 생존 자체가 불가하다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말하고 있다. 


문득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떠올랐다. 자유분방한 사생활을 하던 토마시는 자신을 운명의 상대로 여기고 덜컥 찾아온 테레사를 일단 집으로 들이는데, 밤새 끙끙 앓는 테레사가 ‘바구니에 담겨 흘러내려온 아기’ 같다고 느끼며 사랑에 빠진다. 자신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약하디 약한 테레사와 함께 하기 위해 토마스는 결국 자유분방한 가치관을 버리고 직업과 근거지까지 포기한다. 우리는 강하고, 완전한 존재를 사랑할 때가 아니라 너무도 연약하여 내가 아니면 살 수 없다 여겨지는 존재를 사랑할 때 망설임 없이 자신을 희생한다.      


  

보석이에게 온 마음을 빼앗긴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남편은 물론이며, 양가 부모님의 머릿속도 보석이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보석이와 늘 함께 있는 나도 보석이가 잠시 신생아실에 갔다가 돌아오면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며칠 사이로 얼굴을 보러 오는 보석이의 할머니, 할아버지 가슴은 설렘으로 터져버릴 지경인 모양이다. 보석이의 증조할머니는 보석이가 돌아가신 남편을 닮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지인들은 진심이 담긴 축전을 보내왔다. 나는 이 위대한 사건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온 우주가 보석이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기억은 없지만 내가 태어난 순간에도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눈물지었을 것이다. 나의 엄마도 나처럼 처음 엄마가 되어 눈도 잘 못 뜨는 신생아인 내 얼굴을 보고 또 보고 했을 것이다. 아빠는 지금의 내 남편처럼 반쯤은 환희에 차고 반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을 것이다. 친지와 엄마, 아빠의 지인들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기념하는 크고 작은 축하를 보내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을 잊은 나는 정작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심드렁한 태도를 취하며 살고 있었다.      


저기 길을 걸어가고 있는 여드름쟁이 중학생이 태어난 순간에도, 쓸쓸한 어깨로 빗질을 하고 있는 경비 아저씨가 태어난 순간에도 그의 가족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내가 탐탁지 않아하거나 심지어 혐오하는 어떤 사람이 태어난 순간에도, 그의 어머니는 24시간 촉각을 세워 그 아기를 보호하고 소중히 돌보았을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환호와 축복을 받지 못하고 태어나는 사람도 분명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부재하던 그가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세상에 존재하게 된 이 특별한 사건의 가치가 훼손될 수는 없다. 


사람이 태어나는 건 이렇듯 굉장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위대한 생명의 시작을 곧 망각하고 삶을 하찮게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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