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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형 May 20. 2019

여행자의 마음으로

육아와 사색_ 6 

출산 후 조리원에서의 2주와 산후도우미의 도움을 받는 2주가 훌쩍 지나가버렸다. 이제 본격적으로 혼자 아기를 봐야 한다. 그런데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아기의 ‘등센서’가 심해졌다. 특히 생후 50일 무렵이 되자 아기의 기분이 좋아 보여 잠시만 바닥에 내려놓아도 어찌 그럴 수 있느냐는 듯 구슬프게 울었다. 자장가를 수십 번 부르며 어르고 달랜 끝에 곤히 잠든 것처럼 보여 아기를 슬며시 침대에 눕히고 경련이 일어날 지경의 팔 근육을 주무르고 있으면 2,3분을 넘기지 못하고 틀림없이 응애응애 울음이 터져나온다. 


수십 번의 실패 끝에 결국 아기 내려놓기를 단념했다. 늘 왼쪽 팔에 아기를 안은 채 오른 팔로 빨래 돌리고 청소하고, 휴대폰으로 필요한 육아용품도 주문한다. 아기가 잠들면 아기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아 같이 쪽잠을 자는 게 최선이다. 한두 달쯤은, 소파 한구석을 망부석처럼 지키며 생활한 것 같다.


그런 하루 중에 내 밥상을 차려 세 끼 밥을 챙겨 먹는 시간을 만드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점점 허술하게 끼니를 때우거나 굶는 일이 많아졌다. 허기진 몸은 짜증스러운 마음을 불러왔다. 아기에게 웃는 낯을 보여주려 해도 굳은 표정이 펴지지 않았고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갈라진 마음이 바닥을 쳐 누가 건들면 폭발할 듯한 상태가 되었다. 먹는 양이 부족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상태가 지속되자 젖양이 확연히 줄었고, 아기는 전보다 더 보채는 악순환에 빠졌다.     


젖몸살이 올 만큼 많지는 않았지만 아이가 배불리 먹을 정도 되었던 젖양이 부족해지니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예전에도 과중한 일에 허우적댈 때 끼니를 거르는 경향이 있었다. 거기에는 누군가 나를 챙겨주기를 바라는 무의식적 항거가 숨어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나 자신 말고도 또 다른 한 사람의 생존을 책임지는 ‘엄마’다. 철없는 무의식의 횡포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누구도 나를, 내 아기를 책임져 줄 수 없다. 최종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다. 나는 하루 세 끼 식사를 챙겨 먹는 것을 최우선 순위로 끌어올렸다. 먹는 행위는 나 자신과 소중한 내 아기를 돌보는 행위와 같다고 부단히 되뇌었다.      

 



이렇게 몸부림치다 보면 ‘독박육아’라는 단어와 대면하게 된다. 맘 카페에 '독박육아’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수많은 글들이 쏟아지며, 빅데이터 분석에서 결혼과 출산에 대한 부정적 키워드 1위가 ‘독박육아’라고 한다. 그만큼 흔히 쓰이는 표현이며,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단어인 모양이다. '독박'은 ‘혼자서 모두 뒤집어쓰거나 감당함’이라는 부정적 뉘앙스의 단어다. 남편이나 부모님, 베이비시터나 가사도우미 없이 혼자 육아와 가사의 대부분을 할 때 쓰는 듯하다. 


'독박육아'에 가까운 육아를 경험해보니 왜 ‘독박’이라는 가시 돋친 단어를 쓰게 됐는지 알 것도 같다. 아이를 기른다는 뜻의 '육아'는 어쩐지 신체보다는 정신적인 활동을 필요로 하는, 아이와의 상호작용을 주로 하는 고상한 활동일 것 같지만 실제 육아의 많은 부분은 육체노동과 단순노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점점 무거워지는 아기를 안고 먹이고 재우고 닦이는 일들, 끝나지 않는 설거지와 젖병 삶기, 환기, 빨래, 장난감 소독 등등. 


‘한 아이를 키우려면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듯이 대가족 사회에서는 양육에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물론 시집살이 같은 다른 부담이 따라오겠지만). 반면 혼자서 마을의 몫을 해내야 하는 핵가족 시대의 아기 엄마는 갖가지 육아템과 성능 좋은 가전제품을 무기로 들어보지만 전장에 혼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무력감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면 독박육아의 날카로운 화살촉은 주로 남편을 향하게 된다. 우리 부모님 세대만 해도 남편들은 육아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비난을 받지는 않았다. 사실 30대 정도인 요즘 아기 아빠들도 그런 가정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육아와 가사에 적극적이기는 어렵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한다. 하지만 신생아를 돌보며 못 먹고 못 자는 극한 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를 향한 건지 모를 악에 받치고, 그 악은 가장 가까운 사람인 남편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그렇다해도 나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며 ‘독박육아’라는 표현을 쓰자니 석연찮은 기분이 든다. 아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육아는 생각보다 많은 육체노동을 포함하고, 몸과 마음을 극한 상태로 몰아넣을 만큼 힘든 일이라는데 동의한다. 하지만 육아를 하기 전과 해보고 난 후의 인생이 완전히 다른 인생으로 느껴질 만큼, 나를 성장시키고 행복하게 만드는 강력한 보상도 제공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아기가 자라서 ‘엄마가 나를 독박으로 키웠다’고 생각한다면? 아기는 나에게 일을 뒤집어 씌우려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Photo by veerasak Piyawatanakul from Pexels


독박육아를 대체할 수 있는 더 나은 표현이 없을까 고민해보다, 육아가 여행과 비슷하다는 생각에 닿는다. 패키지 여행, 휴양지 여행 말고 계획 없이 가이드 없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장소에 도전하는 여행 말이다. 그런 여행은 혼자 하는 것도 좋지만, 함께 하면 훨씬 더 재미나고 행복하다


세 쌍둥이를 기르고 있는 친구가 말했다. 육아를 해보고도 남편을 사랑한다는 생각이 들어야 진짜 사랑이라고. 그녀는 자기 남편을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당당히 말했다. 육아를 열심히 하는 남편이어야 사랑받을만하다는 뜻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육아’라는 위대한 여행지를 통과하며 서로의 바닥도 보고, 그 바닥을 치고 올라가는 방법을 깨치며 견고한 유대를 갖는 더 성숙한 차원의 사랑을 알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 아직은 겨우 공항에서 수하물 찾은 여행자 수준의 나로서는 아직 추측에 불과할 뿐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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